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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牧隱 李穡의 對句
★ 旬五志에.
高麗末, 牧隱 李穡이 中國에 들어가 科擧에 及第를 하였다. 이때, 中國의 學士 歐陽玄이 그를 邊方 사람이라 하여 輕率히 여기고 글 한 짝을 지어서 嘲弄하는 것이다.
"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中國에 와서 往來하느냐?) 하자. 牧隱은 卽席에서 對答하기를,
"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四方에 들려오고 있다)하여 歐陽玄을 놀라게 했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中國에 와서 다니느냐? 한 것은 우리를 極度로 蔑視하여, 너희들 새나 짐승 같은 것들이 어찌 敢히 우리 中國 땅을 더럽히느냐 하는 글이다. 그러나 여기에 和答한 牧隱의 詩가 더욱 妙하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四方에 들려옵니다.
卽 이것은 우리 朝鮮을 새나 짐승으로 取扱한다면, 當身네 中國은 亦是 개나 닭이지 뭐냐는 氣막힌 諷刺였다. 歐陽玄은 奇異하게 여기고 또 글 한 짝을 지었다. "持盃入海 知多海" (盞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가 큰 줄 알겠더라)하자. 牧隱은 또 卽席에서,
"坐井觀天 曰小天"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을 작다고 하는도다) 하고 回答하니, 歐陽玄은 크게 驚歎하여 降伏하고 말았다. 이때 牧隱과 姓名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比喩해서 中國의 어느 學士가 牧隱을 嘲弄하는 말로,
"藺相如 司馬相如 名相如 姓不相如" (藺相如와 司馬相如는 이름은 서로 같으나 姓은 서로 같지 않네) 하자. 牧隱은 卽席에서 對答하기를,
"魏無忌 長孫無忌 古無忌 今亦無忌" (魏無忌와 長孫無忌는 옛날에도 꺼릴 것이 없고 只今에도 꺼릴 것이 없네) 하였더니, 그 學士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하면서,
"東方에는 이런 글재주가 있으니 우리가 恭敬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고 牧隱을 自己들의 스승으로 待遇했다는 이야기다.
牧隱의 이 세 차례의 回答한 글은 다만 對句로서만 용할 뿐이 아니라, 實로 文章과 理致가 모두 具備해서 하늘의 造化로 自然을 이루어놓은 것과 같으니 實로 그는 東坡나 그 밖의 이와 對等한 여러 사람에게 못지 않다 하겠다.
🍎 巫女 傳說
漢陽地方 巫女의 基本的인 굿은 열두거리 節次로 이루어져 있고, 各 거리마다 한 무리의 同類神을 불러 進行한다.
이러한 열두거리 中에 열한 番째 말명거리가 있는데, 祖上을 뜻하는 거리에 該當한다.
거리의 內容을 살펴보면 '만신몸주 대신말명'을 비롯하여 여러 말명神을 爲하는 노래가락을 唱하는 대목이 있다.
이곳에서 말하는 만신은 곧 巫女의 敬稱語이며, 몸주 대신이란 巫女에게 내린 守護神을 뜻하는 것이다.
말명은 女性의 神 또는 女性의 魂靈을 말함인데, 열두거리 中 세 番째 거리에 該當되며, 이 때 巫女는 노랑색 夢頭里를 입고 부채와 방울을 들고 進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女性의 靈魂인 巫女의 守護神 말명은 新羅의 名將 金庾信 어머니를 말명이라고 하는 傳承이 있는데, 只今도 一部에서는 巫女의 祖神이라 稱하면서 볼록한 面의 穹圓鏡을 걸어 놓고 모시는 弟子들도 있다.
이러한 거울을 말명신의 얼굴로 삼기도 한다. 神鏡이라고도 하는 이 거울은 그 貌樣을 보면 지름이 略 30Cm ~ 50Cm의 圓型에 念珠와 베등이 묶여있기도 하고, 日月星辰.범.日月 大明斗.천하등 各各 多樣한 巫子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또한 咸興地方의 巫女들 사이에서도 '咸興 말명'또는 '咸夫人','咸興 마누라'等의 號稱으로 불려지는 女性 巫祖의 이야기들이 傳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것이 歷史에 記錄 되어 그들은 곧 大官 夫人들을 指稱하느 것이라고 傳해지고 있다.
濟州道에 傳해지는 鬼女의 傳說로, 옛날 朝鮮의
大臣 유씨가 앞을 보지 못하는 딸의 運數를 博士에게 묻자, 博士 曰
"딸의 運數가 몹시 좋지 않으니 占卜과 같이 賤한 職業을 가져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當하며 괴롭고 어려운 일을 겪고 나면 좋아진다."고 하였다. 이 말에 따라 어린 아기는 일곱 살 때부터 占을 치기 始作했는데, 열일곱 살이 되자 눈이 저절로 밝아지기 始作했다. 이 때부터 占을 치지 않고 兩班집 閨秀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니 스물 일곱 살 때 다시 옛날처럼 눈이 나빠졌다. 하는 수 없이 占치는 일을 다시하게 되었고 서른 일곱 살이 되자 다시 눈이 밝아졌지만 繼續하여 占치는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暫時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 占장이 할머니가 나타나서 하는 말이 "只今 곧 極樂世界로 가서 명진국(命이 긴 나라)에 사는 불법할망의 도움을 받으면 좋아질 것이다."하여 그곳을 가보니 이番에는 임정국으로 가보라 하므로 어쩔줄 몰라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異常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때 마침 中國에서 國師가 왔으므로 꿈 이야기를 하고 答辯을 기다렸으나 大師는 默默히 있었다.
繼續하여 그 女가 궁금하고 沓沓한 心情을 이야기 하자, 結局 그 女의 熱誠스러운 마음에 感動했던지 大師는 임정국에 關한 것을 가르쳐 주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女는 머나먼 그 곳을 수월하게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 불법 할망의 집이 있으므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그곳의 門지기가 沮止하며 막아서 들여 보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初 七日.二 七日을 울고 있자니 마침내 그 女의 熱誠에 感動하여 들여 보내 주었다.
불법 할망을 만나 이제까지 살아온 過程을 모두 이야기하였고, 巫具를 付與 받고 行事의 順序도 배워 朝鮮으로 돌아왔다. 는 內容의 傳說이다.
이것이 朝鮮 巫의 始作이라고 傳해지는 이야기다.
🍎 무당호랑이 說話
★ 朝鮮民譚集(孫晉泰, 鄕土硏究社, 1930), 忠南의 口碑傳承 上(韓相壽, 韓國藝術團體總聯合會 忠淸南道支會, 1987).
호랑이떼에게 잡혀먹히게 된 사람이 피리소리로 호랑이떼를 물리치고 富者가 되었다는 內容의 說話. 笑譚에 屬하는 說話 類型의 하나로 ‘춤추는 호랑이’·‘巫女虎’·‘舞童 탄 호랑이’ 等으로도 불린다.
獨立類型으로서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遺物과 3兄弟 說話의 揷話로서도 口演되며, 서울을 비롯하여 忠청6南道 洪城·瑞山·牙山, 平安北道 鐵山·定州·宣川 等地로부터의 資料報告가 있었다. 어떤 나무꾼이 山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다. 어쩔 수가 없어 나무 위로 올라갔더니 호랑이가 제 牌거리를 모아 木말을 타고 쫓아왔다.
죽음을 覺悟한 나무꾼은 平素 좋아하던 피리(퉁소)를 불었다(아버지의 遺物과 3兄弟 類型에서는 大體로 類物로 받은 장구를 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맨 밑에 있는 호랑이가 춤을 추는 바람에 木말이 무너져내려 호랑이들은 모두 떨어져 죽어버렸다. 나무 위에서 내려온 나무꾼은 많은 호랑이 껍질을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外國에서도 널리 口演되고 있으니, AT 121 <무동을 타고 나무 위로 오르는 이리 Wolves climb on top of one another to tree〉는 핀란드·발틱 3國·스페인·프랑스·獨逸·헝가리·러시아·印度 等地에 分布되어 있다. 日本의 天匹狼도 그 앞部分의 揷話는 우리의 무당호랑이와 같다.
🍎 無等山과 義兵將 金德齡
(出處 : 無等山 가는 길, 無等山과 金德齡)
無等山(1,187m)과 關聯된 人物 中에 金德齡(1567~1596) 만큼 無等山에 數많은 遺蹟과 傳說을 가진 이도 드물다. 無等山을 말할 때 金德齡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고 할 만큼 無等山의 돌, 봉우리, 나무, 곳곳에 그와 關聯된 傳說과 痕跡이 숨어있다. 胎生地가 光州廣域市 北區 忠孝洞이다보니 태어나서부터 자란 곳이 無等山 속이다. 無等山은 그에게 놀이터요 삶의 滋養分을 附與해주는 어머니와 같았다.
光州市는 無等山에 뻗어있는 金德齡 將軍의 遺蹟들을 이어 ‘ 無等山 義兵길’이라 命名하고 그의 義로운 氣像을 21世紀 젊은이들이 걸으며 배우기를 勸하고 있다. ‘ 無等山 義兵길’은 光州市 金谷洞에서 元曉溪谷을 따라 製鐵遺蹟地까지 連結된 3.5㎞ 區間이다. 義兵活動 當時 先祖들이 다녔던 風巖제에서 製鐵遺蹟地까지의 옛 길을 文化探訪코스로 再現한 것이다.
義兵길 곳곳에는 風巖亭, 치마바위, 瀉塘沼, 無等山莊, 製鐵遺蹟地 等 歷史的 事實과 傳說이 있는 文化資源들이 豊富하다. 特히 光州市 記念物 第21號로 指定管理되고 있는 製鐵遺蹟地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 鐵이 生産됐던 곳으로 記錄돼 있을 程度로 由緖 깊은 곳이다. 또 金德齡 將軍 生家터와 忠壯祠 等도 歷史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無等山 義兵길은 崇高한 義兵精神과 元曉溪谷의 시원한 물소리가 어우러진 無等山의 代表的 探訪코스가 되고 있다. 無等山 안에 있는 金德齡 將軍의 遺蹟 中에 가장 規模가 큰 것은 亦是 忠壯祠다. 無等山 中턱에 忠壯公 金德齡 將軍의 忠節을 기리기 爲해 세워진 이 祠堂은 1975年에 造成됐다. 境內에는 將軍의 影幀과 敎旨가 封安되어 있는 祠宇 忠壯祠, 遺物館, 東齋와 西齋, 翼虎門 等이 세워져 있다. 忠壯祠의 翼虎門을 지나면 祠堂領域. 正面에 忠壯祠라는 扁額을 달고 있는 祠堂이 莊重하게 서 있고, 場內 풀밭사이에는 將軍의 精神처럼 푸른 側柏나무와 盤松이 자라고 있다. 祠堂內의 金德齡 將軍 影幀은 칼을 들고 있긴 하지만 典型的인 선비의 모습이다.
忠壯祠에는 遺物館이 마련돼 있다. 將軍의 墓에서 出土된 棺槨과 親筆 等이 展示되어 있고, 重要民俗資料 第111號로 指定된 金德齡 將軍 衣服은 옛 服飾文化를 엿볼 수 있는 所重한 硏究資料로 評價되고 있다. 祠堂 뒤편으로는 陽地바른 언덕에 將軍의 墓와 墓碑가 있으며 家族墓도 造成되어 함께 둘러볼 수 있다.
忠壯祠 다음으로 金德齡 將軍과 關聯된 重要한 遺蹟地 하나가 ‘ 無等山 製鐵遺蹟地’다. 大部分 光州市民도 山莊 溪谷을 여러 番 다녀가지만 이곳에 製鐵遺蹟地가 있는 줄 모른다. 元曉寺 溪谷 上流에 있는 製鐵遺蹟地는 金德齡이 壬辰倭亂 當時 ‘칼과 槍을 만들었다’는 뜻의 鑄劍으로 불렸다. 現在 光州市記念物 21號로 指定되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鑄劍에 對한 記錄이 있는데 이곳 製鐵遺蹟地 內에는 俗稱 쇠똥이라 불리는 鐵 찌꺼기들이 散在해 있다. 이곳에서 300m假量 올라가면 鑄劍洞 이란 글句가 새겨져있다.
光州邑誌를 보면 鑄劍洞에 對해 이렇게 적고 있다. ‘鑄劍洞은 無等山 瑞石 및 溪谷에 있는데 金德齡 將軍이 擧事할 때 여기서 칼을 치니 雷聲과 같은 소리가 山에 울리고 흰 氣運이 溪谷에서 하늘에 솟아올라 사람들이 모두 異常하게 여기었다’
金德齡 將軍은 壬辰倭亂이 勃發하기 前 23歲때 將次 國亂이 있을 것을 豫見하고 鑄劍洞에 대장장이를 모아 칼과 槍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金德齡은 이곳에 세 個의 대장間을 세우고 칼과 槍, 화살과 투구, 甲옷 等 武器를 만들기 始作했다. 그리고 20如名의 壯丁들을 모아 칼쓰기와 槍쓰기 활쏘기를 가르쳤다. 四方에서 쇠붙이를 모아다가 풀무질을 하여 벌겋게 달아오른 쇠덩어리를 壯丁들이 番갈아 내리치는 모습이 눈에 鮮하다. 壯丁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고 불꽃이 四方에 튀면서 벌겋게 달아오른 쇠붙이가 식어가면서 漸漸 칼과 槍 貌樣으로 變해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壬辰倭亂 當時 이곳에서 만들어진 칼과 槍을 義兵들은 戰爭터로 運送했을 것이다. 터는 그리 넓지 않았지만 그 옛날 나라를 救하겠다는 一念 하나로 칼과 槍을 만들었던 先祖들의 땀이 느껴진다. 元曉 溪谷을 따라 걸으며 義兵들은 戰略戰術을 얘기했을 것이다. 이 길 周邊에는 또 하나의 遺蹟이 있다. 金德齡 將軍의 누나가 치마로 감싸 안았다는 ‘치마바위’가 있다. 溪谷을 내려오는 길에 위치한 치마바위는 貌樣이 치마처럼 펼쳐졌다하여 치마바위라 한다. 이 바위가 神靈하다고 촛불을 켜고 祈禱하던 痕跡도 있다.
이 치마바위에는 金德齡 將軍의 傳說이 있다. 金德齡 將軍의 누님이 女 壯士였는데 金德齡 將軍과 씨름을 하여 이겨서 氣를 꺾었다고 傳해 온단다. 忠壯公의 누님인 金應會 夫人도 힘이 天下壯士로서 元曉溪谷에 있는 치마바위는 金夫人이 치마幅에 싸아서 갖다 놓은 바위라서 치마바위라 일컬어지고 있다.
金德齡은 어려서부터 武術을 익힌 德分에 씨름판에서 每番 이겼다. 그러나 金德齡의 바깥活動을 慇懃히 걱정한 누나는 德齡의 氣를 꺾어주고 씨름에 미친 버릇을 고쳐줄 決心을 했다. 昌平 場터에 씨름판이 서고 여기에 金德齡이 出戰한다는 消息을 들은 누나는 男裝을 하고 씨름판에 나왔다. 金德齡이 모든 사람을 물리치고 氣高萬丈할 때 누나가 나섰다. 힘이 壯士였던 누나는 쉽게 金德齡을 이겼다. 그러나 金德齡의 牌거리들은 敗北를 認定하지 않았다. 누나는 金德齡의 姿勢를 지켜보았다. 意外로 金德齡은 謙遜하게 敗北를 率直히 認定했다. 그 뒤부터 金德齡은 씨름판을 찾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름도 모르는 無名靑年에게 無慘하게 진 衝擊을 받아 反省의 機會로 삼았다. 그 뒤부터 그는 크게 깨우쳐 學問과 武術 익히기에 專念했다.
無等山 東南쪽에 指空너덜 쪽에도 金德齡 將軍과 關聯된 場所가 있다. 指空너덜에는 크고 작은 바위사이에 天然의 石室이 있는데 普照國師 (知訥, 1158~1210)가 여기에서 修道하기도 했다.
石窟 왼쪽에는 ‘文바위’라는 높은 돌기둥이 서 있다. 金德齡은 이곳에서 自身의 말에게 ‘내가 큰 일을 하려면 너부터 잘 달려야 할 것인즉 이제 내가 활을 쏠 터인데 화살이 건너便 마살리에 이르기 前에 네가 먼저 거기에 當到해야지 그렇지 못하면 네목을 치겠노라’고 하였다. 白馬도 主人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살리는 文바위에서 三十里假量 되는 和順땅이다. 이윽고 화살이 金德齡 將軍의 활시위를 떠나자마자 白馬도 金 將軍을 태운채 쏜살같이 달렸다. 目的地에 到着한 金 將軍은 화살이 보이지 않자 화살이 말보다 먼저 날아와 어딘가에 박혀있는 줄 알고 칼을 뽑아 愛馬의 목을 치려고 하였다.
瞬間 虛空에서 ‘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마터면 愛馬를 죽일뻔했던 金 將軍은 말을 쓰다듬어 주었다. 金 將軍의 愛馬는 그만큼 所聞난 駿馬였다. 또 어떤 땐 光州市 南山 第一水源池 近處에 한 500米突 떨어진 景陽防죽쪽으로 활을 쏘았는데 화살이 안보이자 金 將軍이 칼을 뽑아 말의 목을 쳤다. 그때서야 화살이 날아온 것을 본 金 將軍은 깜짝놀라 ‘내잘못’을 깨닫고 後悔하였는데 이 광3景을 目擊한 사람들이 말의 죽음을 哀惜히 여겨 防죽언덕에 말을 묻고 龍馬碑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이 龍馬碑는 略 20年前까지 있었는데 景陽防죽을 매울 때 어디론가 撤去해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가 하면 無等山 頂上의 三峰인 天王峰, 地王峰, 人王峰과도 因緣이 깊다. 無等山 頂上의 삼대는 어느 것이나 선돌이 櫛比하게 솟아있어 奇異하고도 莊嚴한 景觀을 이루고 있다. 그 가운데 地王峰은 一名 毘盧峰이라고도 하는데 여기 頂上에 ‘뜀바위’가 있다. 金德齡은 어렸을 때 地王峰 頂上의 이쪽 바위에서 저쪽 바위로 뛰어다니면서 武術을 硏磨하고 膽力을 기르던 訓練場이었다는데서 이곳을 ‘뜀바위’라 傳해오고 있다. 日帝强占期 때 이 傳說을 들은 日本軍 將校 하나가 나도 뛸 수 있다고 뛰어 내리다가 떨어져 죽은 일이 있다.
이렇게 無數한 金德齡 關聯 場所는 스토리텔링을 通한 觀光資源으로서의 價値가 높다.
🍎 無愁翁 說話
(근심 걱정 없는 四柱八字를 타고난 老人에 關한 說話)
★ 旬五志에.
神異譚에 屬하는 說話 類型의 하나로 資料集에 따라 ‘근심 없는 老人’, ‘天子보다 八字 좋은 老人’, ‘임금님과 四柱八字 같은 사람’, ‘며느리 열둘 가진 사람’ 等으로도 採錄되어 있다. 이 說話는 全國에 걸쳐 널리 퍼져 있으며, 內容은 角其 細部的인 差異가 있기는 하지만, 全體的인 줄거리는 거의 같게 나타난다.
한 시골 老人이 많은 子女(아들 열둘, 딸 하나)를 두어 모두 成禮시켰다. 子女들이 매우 孝誠스러워 每月 番갈아 아버지를 極盡하게 모셨으므로 老人은 걱정거리가 없어 ‘無愁翁’이라 하였다. 이 所聞을 傳하여 들은 임금은 老人이 正말 그러한가를 試驗해 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老人을 불러 구슬을 주며 “언제든지 가져오라 하면 가져오라.”고 하였다. 老人이 배를 타고 漢江을 건너려는데, 미리 임금의 密命을 받은 沙工이 老人에게 구슬을 보여 주기를 懇請하였다. 구슬을 구경하던 沙工은 일부러 물속에 빠뜨려 버렸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간 老人은 걱정 때문에 食飮을 全廢하고 누웠다. 子女들이 아무리 그 까닭을 물어도 老人은 對答을 하지 않았다. 子女(또는 며느리)가 市場에서 잉어를 사다 料理를 하여 드리려고 보니 잉어의 뱃속에서 구슬이 나왔다. 다시 임금의 부름을 받은 老人은 泰然히 구슬을 바쳤다. 깜짝 놀란 임금은 事實 이야기를 다 듣고는 感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基本的 骨格의 序頭 部分에 다른 揷話가 添加되어 若間의 變異 樣相을 보이는 境遇도 있다. 假令, 어떤 임금이 ‘한날한時에 태어났는데 나만 임금이 되고 다른 사람은 왜 그렇지 못한가?’ 하는 疑心을 품던 中, 시골에서 四柱八字가 같은 사람을 찾아내어 生活形便을 물어보니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어 임금님 부럽지 않습니다.”라고 對答하였다. 그 다음 이야기는 앞의 것처럼 이어진다.
어떤 資料에 依하면 그 시골 사람은 꿀벌을 많이 치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百姓을 다스리는 임금이 꿀벌을 다스리는 百姓과 運命이 같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同四柱八字의 임금과 벌치기' 揷話가 일찍이 洪萬宗의 '旬五志'에 '皇明小說'을 引用한 곳에서도 나타나는 것을 보면, 兩者는 傳派上의 聯關이 있을 듯하다.
無愁翁 說話의 또 다른 異型 中에는 어떤 高官(또는 御史)이 民情을 視察하던 途中 ‘無愁堂家’라는 懸板을 단 村家를 發見하고 그 事實을 임금에게 報告하여, 임금이 그 懸板의 主人을 試驗해 보려는 데서부터 이야기가 始作된다.
이와 같은 說話 類型에 나타나는 窮極的인 意味에는 富貴가 곧 幸福일 수는 없다는 價値觀 및 人間의 運命은 豫定되어 있다는 宿命論, 그리고 至極한 孝行에 對하여는 하늘도 感動한다는 應報論 等이 反映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無影塔
★ 玄鎭健이 지은 長篇小說.
1938. 7. 20 ~ 1939. 2. 7 '東亞日報'에 總 164回로 連載되었고, 1939年 9月 博文書館에서 初版이 刊行되었다. 1930年代 當時 日本 君國主義體制가 極烈해지면서 文學이 現實에 對한 直接的인 表現을 하기 어렵게 되자, 過去의 事實을 素材로 한 歷史小說이 流行하게 되었다. 이에 便乘하여 玄鎭健도 歷史와 傳說을 變形시키면서 現實的 意味를 담기 爲하여 '無影塔'을 쓰게 된 것이다. 이 作品은 그의 紀行文인 '古都巡禮慶州'에서 이미 깊은 關心을 보인 바 있는, 慶州 佛國寺 釋迦塔의 造營을 둘러싼 百濟 石工 阿斯達과 그의 아내 阿斯女의 口碑傳承에서 素材를 擇한 것이다. 新羅 景德王 時節, 佛國寺의 多寶塔과 釋迦塔을 세우기 爲하여 徐羅伐로 뽑혀온 扶餘의 匠人 阿斯達에게 徐羅伐 貴族 伊飧 唯宗의 딸 珠曼(一名 구슬아기)은 마음을 빼앗긴다.
扶餘의 아내 阿斯女 때문에 괴로워하던 阿斯達도 마침내 珠曼의 熱情을 받아들이지만, 이들에게는 險難한 障碍가 가로막는다. 珠曼을 짝사랑하던 唐學派 金旨(금지)의 아들 金城의 毁妨이 그것이다. 더구나, 珠曼의 아버지 唯宗은 金城을 避하기 爲해 敬信과 婚約을 定한다. 한便, 3年이나 阿斯達을 기다리던 阿斯女는 아버지의 죽음과 더불어 달려드는 彭介 무리의 劫奪 危機로부터 벗어나고자 無數한 苦痛을 겪으며 徐羅伐로 달려온다.
드디어 阿斯達의 釋迦塔은 完成되었으나 珠曼은 敬信의 도움에도 不拘하고 아버지에게 失行의 罪가 綻露 나서 火刑當하게 된다. 또한, 阿斯女는 塔이 完成된 것도 모르고, 중과 뚜쟁이의 行悖 때문에 男便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影池에 빠져 죽는다. 이에 阿斯達은 두 女人을 合하여 願佛의 彫刻을 새기고는 亦是 물에 빠져 죽는다.
이 作品은 他 歷史小說과 달리, 貴族的 人物이나 英雄이 아닌 一般 庶民 阿斯達을 主人公으로 阿斯達과 阿斯女의 悲劇이 社會的 矛盾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國仙道派의 貴族 唯宗과 敬信을 肯定的으로 形象化함으로써 主體的인 民族意識을 吐露하고 있다.
따라서, 1930年代 君國主義의 抑壓 속에서 現實 認識의 方向을 過去의 歷史로 돌린 一連의 歷史小說들과 그 軌를 같이하면서도, 이 小說은 新聞 連載의 表面的 通俗性 너머로 民族의 解放이라는 理想을 念願한 作家의 民族意識이 담겨져 있다. 또 作品에서 現實과 悠離된 單純한 匠人에 지나지 않던 阿斯達이 두 女人의 悲劇을 通하여 어떻게 眞正한 藝術家로 轉換되는가를 그려 보인다. 複雜한 現實 속에서 藝術家의 社會的 運命과 藝術의 窮極的 意義도 提示하고 있다.
🍎 무우 아버지와 毒이 든 과일
(原製 : 菁父毒果)
忠淸道에 있는 어떤 山寺를 지키는 僧이 있었는데, 무척이나 慾心이 많고 吝嗇한 者로써, 시중을 드는 어린 沙彌가 하나 있었으나, 恒時 배가 고플 程度로 먹을 것을 적게 주었다.
그리고 깊은 山中에 時間을 알아야겠다며 닭 몇 마리를 기르면서 달걀을 삶아 놓고는 沙彌가 잠이 깊이 든 뒤에 혼자서 먹었다. 沙彌는 짐짓 모르는 듯이 "스님께서 잡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무우 뿌리지 뭐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住持가 잠을 깨어 沙彌를 부르면서, "때가 언제쯤 되었느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때마침 새벽닭이 홰를 치면서 울기에,
"이 밤이 벌써 깊어서 무우 뿌리 아버지가 울었답니다." 하고 對答하였다.
가을 어느 날. 절 마당에 있는 감나무에 감이 붉게 익었다. 그러자 住持는 감을 따서 광주리에 담아 들보 위에 숨겨 두고 목이 마르면 가만히 빨아먹곤 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본 沙彌는 또 그게 무슨 物件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住持는 "이건 毒한 果實인데, 아이들이 먹으면 혀가 타서 죽는 것이야." 하고 마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나들이 할 일이 생긴 중은 밖으로 나가며, 沙彌에게 집을 잘 지키라는 當付를 하였다. 그러자, 沙彌는 댓가지를 利用하여 들보 위의 감 광주리를 낚아 내려서 몽땅 먹어치우고 말았다. 그리고는 茶를 가는 맷돌인 茶硏으로써 꿀단지를 두들겨 깨버린 뒤에 높은 나뭇가지 위에 올라앉아서 住持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及其也, 住持가 돌아와 보니, 꿀물이 房에 흥건하고 감 광주리는 땅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住持는 크게 怒하여 長대를 들고 나무 밑에 이르러서, 큰 소리로 "빨리 내려와라." 하고 거듭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沙彌는 "小子 不敏하여 마침 茶硏을 옮기다가 잘못하여 꿀단지를 깨뜨려 너무나 큰 罪를 지어 죽기를 決心하여 목을 매달려니 줄이 보이지 않고, 목을 찔러 죽으려 했으나 칼이 없으므로, 광주리 속의 獨果를 다 삼키고 죽으려 하였으나, 頑惡한 이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 이 나무 위로 올라와 떨어져 죽으려 하는 것입니다." 하고 눈물을 흘린 척하며 말을 하자. 住持는 豪宕하게 웃으며, 또 한便으로는 自己의 잘못을 뉘우치며 容恕해 주었다.
🍎 無學大師 說話
★ 無學大師 自超(1327∼1405)는
朝鮮初期의 高僧. 姓은 朴氏. 號는 無學, 堂號는 溪月軒. 三岐 (慶尙南道 陜川郡 三嘉面) 出身. 仁一의 아들이다. 1344年(高麗28代 忠惠王 5) 出家하여 小止의 弟子가 되었으며, 慧明國師로부터 佛法을 배우며 浮屠庵에 머물렀다. 1346年(高麗29代 忠穆王 2) '楞嚴經'을 通해 깨우친 바가 있었다.
그때부터 鎭州 吉祥寺, 妙香山 金剛窟 等에 머무르면서 佛道를 닦았다. 1353年(高麗31代 恭愍王 2) 元나라 燕都로 가서 印度僧 志空을 만나 道를 認定받았다. 이듬해 法泉寺에서 懶翁和尙을 만났는데, 懶翁은 그가 큰그릇임을 看破하였다.
그 뒤 霧靈·五臺山(1565.4m)等을 거쳐 西山의 靈巖寺로 懶翁을 찾아가 몇 해를 머무르면서 修道하였다. 1356年 懶翁을 下直하고 歸國하였으며, 懶翁 亦是 歸國하여 千聖山 元曉庵에 머물렀다. 1359年 다시 懶翁을 찾아가자 懶翁은 法을 傳하는 標示로 拂子를 주었다.
그 뒤 懶翁이 神光寺로 자리를 옮기자 찾아갔다가, 그곳 大衆 속에 그를 꺼리는 사람이 있음을 보고 高達山에 들어가 庵子를 짓고 살았다. 1376年 檜巖寺(輦輹躬)를 크게 重創한 懶翁은 그를 불러 首座로 삼고자 하였으나 굳이 辭讓하였다. 그해 懶翁이 入寂하자 全國의 名山을 遊歷하면서 자취를 감추었으며, 高麗 34代 恭讓王이 王師로 삼고자 하였으나 끝내 應하지 않았다.
1392年(朝鮮 太祖 1) 겨울, 太祖는 그를 王師로 冊封하고 大曹溪宗師 禪敎都摠攝 傳佛心印 辯智無碍 扶宗樹敎 弘利普濟 都大禪師 妙嚴尊者라는 號를 내렸다. 이때 太祖에게, 儒敎는 仁을 말하고 佛敎는 慈悲를 가르치지만 그 作用이 하나라는 것과, 百姓을 子息처럼 보살필 때 百姓의 어버이가 되고 나라는 저절로 잘될 수 있음을 說法하였다. 그리고 罪를 지어 獄에 갇힌 사람들을 容恕하여 새로운 삶을 열어줄 것을 請願하였다. 太祖는 그 請에 따라 罪囚를 放免하였고, 그를 檜巖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1393年 王都를 옮기려는 太祖를 따라 鷄龍山과 漢陽 等을 돌아다니며 地相을 보고, 마침내 漢陽을 都邑으로 定하는데 贊成하였다.
1397年 太祖의 命으로 檜巖寺 北쪽에 壽塔을 세웠으며, 1398年 龍門寺로 들어가서 살았다.
1402年(太宗 2) 王命을 받아 檜巖寺로 옮겼으나, 이듬해 다시 辭退하고 金剛山 眞佛庵으로 들어갔다.
1405年 金剛庵으로 옮겨 그곳에서 나이 78歲, 法臘 62歲로 入寂하였다.
🍎 高麗 末에서 朝鮮 初期의 道僧인 無學大師에 關한 說話.
'旬五志' · '芝峯類說' · '燃藜室記述'에 李成桂의 꿈 解夢에 關聯된 斷片的인 逸話가 傳해지며, 口傳說話는 全國的으로 傳乘되고 있다. 說話의 內容은 ① 出生談, ② 出家談, ③ 李成桂와의 關聯談으로 分類할 수 있다.
出生 說話는 無學의 어머니가 빨래를 하러 갔다가 물에 떠내려오는 오이를 먹고 處女로서 아이를 孕胎하여 낳게 되자, 그 父母가 아비 없는 아이라고 내다 버렸다. 그런데 鶴이 날개로 保護하여 아이가 救出되었다는 것이다.
出家 理由에 對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이지만 出家 以後 童子僧 時節에 있었다는 海印寺 火災鎭壓 逸話는 共通的으로 나타난다. 無學이 상추를 씻으러 냇가에 갔다가 海印寺에 불이 난 것을 알고 물을 뿌려 불을 껐는데, 그 事實을 疑心한 스님이 直接 海印寺에 가서 그것을 確認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民間에 가장 잘 알려진 無學大師說話는 李成桂를 만나 朝鮮王朝의 創業에 關與하게 된 李成桂 關聯 說話이다. 여기에는 '釋王寺由來談'과 '無學을 꾸짖어 깨우쳐 준 農夫'가 大表的인 類型으로 꼽힌다.
釋王寺由來談은 旬五志 · 芝峯類說 · 燃藜室記述에 실려 있으며 口傳說話로도 傳해지는데, 李成桂가 登極하기 前에 꾸었다는 꿈을 王이 될 것이라고 解夢하였다 하여 지어진 절에 關한 이야기이다.
이에 못지 않게 잘 알려진 것이 無學을 꾸짖어 깨우쳐 준 農夫 이야기이다. 太祖가 서울을 옮기기 爲하여 無學에게 都邑地를 求해 달라고 付託하였다. 無學이 漢陽 땅을 都邑 터로 定한 뒤 大闕을 지으려고 여러 番 試圖하였으나 番番이 허물어지고 말았다.
傷心한 無學이 어느 곳을 지나는데, 어떤 老人이 논을 갈면서 소를 나무라기를, “이랴, 이 無學이보다 미련한 놈의 소!”라고 하였다.
놀란 無學이 老人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漢陽 땅이 鶴터인데 등에 무거운 짐을 실었으니 鶴이 날개를 칠 것 아니냐. 그러니까 宮闕이 무너진다. 城부터 쌓으면 鶴의 날개가 눌려져 꼼짝 못하므로 大闕이 무너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無學이 그 말대로 하니 大闕이 完工되었다. 그 老人은 三角山 山神靈이었다고도 한다.
이 類型은 無學이 都邑 터를 定하기 爲하여 彷徨하고 있는데 어떤 老人이 “十 里만 더 들어가라.”고 해서 가 보았더니 좋은 터를 發見하였다고 하는, 往十里由來談으로 變異되어 있기도 하다.
無學大師의 出生談은 英雄의 一代記에서 普遍的으로 나타나는 非正常的인 孕胎와 棄兒 및 援助者에 依한 救出 動機와 一致한다. 이러한 要所는 道詵과 梵日의 出生談과 類似한 것으로, 海印寺 火災鎭壓 說話와 함께 그의 非凡性을 드러내기 爲한 것이다.
無學大師說話 中 가장 重要한 比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李成桂와 關聯된 說話이다. 이러한 說話는 朝鮮朝 創業을 天命에 依해 이룩한 正當한 것으로 浮刻시키려는 朝鮮王朝 支配層의 意圖를 보여주는 것으로, 事會的 意味를 지닌 것이다.
🍎 漢陽都邑 說話
(朝鮮時代 漢陽을 都邑으로 定하는 過程과 宮闕 建築 過程의 說話)
漢陽都邑說話는 無學大師 (自超 1327~1405) 와 關聯된 것이 많다. 無學大師는 高麗 末葉에서 朝鮮 初의 僧侶로 俗姓은 朴 氏이며, 慶尙南道 陜川郡에서 出生하였다. 18歲(1344)에 出家하였으며, 恭讓王이 王師로 모시려 하였으나 辭讓하였고, 後에 李成桂 (1335~1408)의 부름에 應해 王師가 되어 朝鮮 建國을 도운 人物이다. 太祖實錄에 李成桂가 새 都邑地를 漢陽으로 定하는데 無學大師가 決定的인 구실을 하였다는 記錄이 있으며, 李成桂 꿈 解夢과 關聯된 이야기가 旬五志, 芝峰類說, 燃藜室記述에 傳한다. 아울러 宮闕을 세울 때의 逸話나 鄭道傳 (1342~1398)과의 論爭 等의 이야기들이 口傳되는 것을 볼 때 이 說話는 적어도 朝鮮 建國 初期에 만들어져 現在에 이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漢陽都邑說話는 無學大師와 關聯된 것이 많다. 李成桂가 無學大師를 키웠다는 이야기나 李成桂가 王이 될 것이라는 解夢으로 建立하였다는 江原道 雪峯山의 釋王寺 由來談이 있다. 아울러 宮闕을 지을 때 鄭道傳과 對立한 것에 關한 이야기도 傳한다. 無學大師와 關聯되어 口傳하는 說話 中에서는 宮闕 建築과 關聯된 이야기가 많은데, 大綱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李成桂는 卽位 後 都邑을 定하기 爲해 無學을 데리고 八道江山을 돌아다닌다. 江原道는 金剛山이 있어 景致는 좋으나, 山골이라 都邑을 앉힐 만한 자리가 없었다. 京畿道에 들어서니 漢江이 흐르고 앞에는 南山이, 뒤에는 三角山이 있어서 山水가 좋았다. 三角山 命脈이 仁王山을 이루고 仁王山 命脈이 떨어져 鳳凰山이 되고 있기에, 이곳에 都邑을 定하기로 하고 樓閣을 세우기 始作하였다. 그런데 樓閣을 세우기만 하면 繼續 넘어져 세울 수가 없었다. 이에 忠淸道로 나가 都邑을 定해 보자며 忠淸道로 向하였는데, 가는 途中 한 農夫가 “이놈의 소 無學같이 愚鈍하구나.”라며 밭 가는 소를 꾸짖었다. 이에 놀란 無學이 老人에게 까닭을 물었더니, “京畿道에 들어가 都邑地를 찾았는데 그것을 버리고 떠나니 無學보다 더 미련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고 되묻는다. 이에 無學이 “자리는 좋으나 樓閣이 서지 않는다.” 하자, “鶴의 허리에 집을 세우니 무너진다.”라며, “鶴의 두 날개를 누른 後 집을 세우라.”라고 한다. 農夫에게 절을 하고 돌아와 城을 쌓아 날개를 누른 後 樓閣을 세우니 아무 無頉했다. 結局 農夫의 助言으로 京畿道 三角山 앞에 都邑을 定하게 된 것이다.
🍎 文武王 說話
(新羅 第30代 文武王에 關한 說話)
* 三國史記. 三國遺事에.
人物傳說로, 文武王이 죽어서 護國龍이 되고자 하였으므로 ‘護國龍說話’라고도 한다.
文武王의 水中陵으로 알려진 大王巖과 神文王이 先王의 遺言이 成就되길 祈願한 感恩寺, 그리고 先王의 得天을 지켜본 利見臺가 있는 慶尙北道 慶州市 陽北面 奉吉里 및 甘浦邑 坮本里를 中心으로, 慶州 一帶에 널리 傳承되고 있는 說話이다.
說話의 主題는 龍神信仰을 바탕으로 한 護國思想이며, 口傳 資料는 變異型에 따라서 그 主題가 一定하지 않다.
文武王說話와 여기서 變異된 龍說話를 包括해서 ‘護國龍說話’라 일컫기도 하는데, 이는 王이 스스로 龍으로 變身하고자 하여 나라와 百姓들을 爲한 偉大한 業積을 남긴다는 類型的 次元의 共通性을 지닌다.
이 때 護國龍으로 變身한 王은 恒常 文武王으로 固定되어 있지 않고 金傅大王이나 다른 王으로 바뀌어서 口傳되는 資料도 많다. 그러나 文武王이 登場하는 資料가 가장 原形에 가까운 것이므로, 文武王을 中心으로 資料의 內容을 整理하면 다음과 같다.
三國 統一을 이룩한 文武王은 平素부터 護國龍이 되어서 倭賊을 막고자 念願하여, 마침내 東海岸의 大王巖에 묻어 줄 것을 遺言하고 죽었다. 先王의 遺言에 따라 東海岸의 大王巖에 水中 葬事를 지낸 神文王은 感恩寺를 只今의 陽北面 龍堂里에 짓고 先王인 文武王이 平素에 바라던 바와 같이 護國龍이 될 것을 祈願하였다.
그러던 中 어느날 文武王이 꿈에 나타나서 龍이 되어 得天한다는 事實을 알려 주었다. 神文王은 先王의 現夢(죽은 사람이나 神靈이 꿈에 나타남)에 따라 只今의 甘浦邑 坮本里 언덕에 利見臺를 쌓고 護國龍의 得天을 지켜보았다.
果然 文武王이 龍으로 變身하여 得天하면서 倭賊의 侵入 經路가 되는 東海의 열두 섬을 차례로 쳐 버렸다. 東海의 마지막 섬인 鬱陵島를 치려고 하였더니 하늘의 玉皇上帝가 鬱陵島는 朝鮮의 水口脈이라고 하므로 치지 않았다. 只今도 바닷물 밑으로 護國龍이 쳐버린 열두 섬의 痕跡이 보인다.
口傳 資料에는 護國龍으로의 變身 過程과 王이 龍으로 變身하여 倭賊을 물리치고 나라를 守護한 具體的인 行跡이 나타난다. 大王巖이 있는 坮本里 一帶에서는 文武王과 神文王이 함께 登場하고, 利見臺와 感恩寺도 아울러 이야기된다.
그러나 盈德郡 寧海面 大津里에서 口傳되는 資料는 文武王이 金傅大王으로 바뀌어 登場하며, 王이 自力으로 得天하는 것이 아니라 有琴이라는 어린아이가 龍이라고 함으로써 得天하게 되고, 有琴에게 그 報答으로 큰 들을 물려준다는 것이다.
한便, 慶州市 安康邑 一帶에서 口傳되는 것은 金傅大王이 龍이 되어 得天하긴 하지만, 東海의 열두 섬을 치고 倭賊을 막았다는 內容은 없다. 처음부터 兄山江을 막고 있는 山을 쳐서 물길을 트고 넓은 들을 만드는 것이 所願이었던 것이다.
有琴의 도움으로 得天하고 들을 만들어 有琴의 所有로 한 것은 大晉里의 資料와 같다. 資料가 이렇게 세 갈래로 傳承되는 理由는 傳承 地域의 自然環境 및 傳承者들의 意識, 그리고 歷史的 變貌가 反映되었기 때문이다.
說話에 따라서 護國의 主體가 王家 中心에서 漸次 百姓 中心으로 變貌되는가 하면, 地域에 따라 護國神 또는 農業神으로서 龍이 認識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文武王說話는 武烈王系의 王家說話에서 農業을 生業으로 하는 民衆의 說話로 發展되는 過程에 있으며, 主權에 對한 百姓들의 覺醒된 意識과 護國龍이 되고자 하는 王의 意志를 通해서 倭賊과 自然에 對決하는 自力的神靈觀이 두드러져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文字才談 說話
(文字를 利用하여 才致 있는 問答을주고받음으로써 興味를 誘發하는 說話) 笑話 中 風月譚으로 分類된다. 才談하는 人物은 多樣하게 設定되는데 임금과 臣下, 丈人과 사위, 媤아버지와 며느리, 妓女와 선비, 訓長과 學童 等이 많이 나타난다. 才談의 種類도 多樣하여 한글과 漢文의 意味와 音을 利用한 語戱才談, 對句를 맞추는 것, 기타 재미있는 漢詩를 짓는 才談 等이 있다.
첫째, 語戱에 關한 漢文才談은 主로 漢字의 音만으로 構成되는 우리말과 그 漢字의 뜻이 各各의 意味를 形成할 때 나타나는 興味를 本位로 한 것이다. 問答으로 展開되는 方式과, 한 사람은 우리말로 다른 사람은 그 말에 該當하는 漢字音으로 意味가 通하는 漢詩 句를 만드는 方式 等이 있다. 問答으로 展開되는 境遇는 임금과 臣下의 才談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例가 있다.
實學의 大家로 일컬어지는 茶山 丁若鏞이 뛰어난 才能을 가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事實이다.
그의 才能에 關한 野譚이나 逸話는 많다. 特히, 그를 매우 寵愛하였던 正祖와의 사이에 있었던 재미있는 說話이다.
正祖 : 말니 마치(馬齒) 하나 둘 이리(一二)
茶山 : 닭의 깃이 계우(鷄羽) 열 다섯 이오(一五)
正祖 : 보리 뿌리 麥根麥根
茶山 : 梧桐 열매 桐實桐實
正祖 : 아침 까치 朝鵲朝鵲
茶山 : 낮 송아지 午犢午犢
여기서 梧桐열매는 漢文으로 ‘桐實’이면서 또한 물 위에 떠 있을 때의 擬態語인 우리말 ‘동실동실’과 連結되어 才談의 效果를 나타낸다.
다음은 글 모르는 新郞을 글 잘하는 웃손 (上客 : 婚姻 때에 新郞이나 新婦를 데리고 가는 사람. 主로 손윗사람이 이 일을 맡는다)이 庇護해서 글 잘하는 新郞처럼 行勢하도록 해 준 이야기이다. 詩句의 音은 新郞이 한 말이고 括弧 안의 漢文은 웃손이 이 말에 맞추어 지은 漢文 詩句이다.
天長去未出 ~ 하늘은 길어 가도 벗어날 수 없고
花老蝶不來 ~ 꽃이 늙으니 나비도 오지 않는다.
菊樹寒沙發 ~ 菊花나무는 찬 모래 위에 피었고
地影半亭止 ~ 땅 그림자는 亭子의 半에 멈추었다.
이러한 例는 金삿갓 逸話(無題 詩)로도 이야기된다.
둘째, 對句를 맞추는 才談은 作詩問答으로, 對句를 채워 漢詩의 妙味를 살리는 이야기이다. 中國 使臣과 뱃沙工의 問答 等이 여기에 屬한다.
中國 使臣이 온다고 하여 글 잘하는 사람을 뽑아 鴨綠江에서 뱃沙工 노릇을 하도록 하였는데, 뱃沙工은 눈이 한쪽 멀었고 使臣은 코가 삐뚤어져 있었다.
使臣 : 烏琢停長目 ~ 까마귀가 沙工의 눈을 쪼았도다.
沙工 : 風吹上使鼻 ~ 바람이 上使의 코를 불었도다.
使臣 : 吹笛枯竹歌 ~ 피리를 부니 마른 대나무가 노래를 한다.
沙工 : 擊鼓牛皮鳴 ~ 북을 치니 소의 가죽이 울음을 운다.
이러한 이야기는 中國 使臣을 魂내 주는 우리 民族의 슬기를 자랑한 이야기이나, 興味의 焦點은 對句 自體에 있는 것이다.
임금과 臣下의 對句問答으로는 다음과 같은 例가 있다.
임금 : 琵琶琴瑟八大王
臣下 : 魑魅魍魎四小鬼
임금 : 周宣王齊宣王文宣王은 一卽君一卽臣一卽非君非臣이요,
臣下 : 鄒孟子魯孟子舍人孟子는 一卽男一卽女一卽非男非女)이니다.
이와 같은 漢文 才談은 漢文에 能熟한 士大夫層에서 形成되어 傳播된 이야기이며, 우리 民族의 知識과 슬기가 담겨진 說話로서 知識層의 興味의 對相이 되었다.
漢文을 驅使하는 能力의 誇示와 狀況에 따른 臨機應變의 智慧가 함께 담겨 있어 漢文 知識層의 才談으로 널리 享有된 資料이다.
🍎 門前本풀이 (門前神本풀이)
(濟州道의 무당굿에서 口演되는 門神의 神話, 또는 그 神話를 노래하고 門神에게 祈願하는 祭次).
濟州道의 굿은 크게 집안에서 하는 굿과 堂에서 하는 굿으로 나눌 수 있는데, 집안에서 하는 굿에는 반드시 이 門前本풀이가 들어간다.
집안에서 굿을 하는 理由는 그 집안의 여러 곳을 차지하고 있는 神을 待接하고 祈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床위의 여러 神들에 對한 必要한 祭次를 끝내고, 굿의 끝 무렵에 집안의 여러 곳을 차지한 神을 待接하고 祈願하는 각도비념祭次에서 맨 먼저 이 門前本풀이를 行한다.
門前本풀이 祭次는 다른 本풀이 祭次와 마찬가지로 門神의 來歷譚인 神話, 곧 門前本풀이를 노래하고 이어서 祈願하는 形式으로 構成되어 있다. 門前本풀이란 本來 門神인 門前의 來歷譚 神話를 뜻하는데, 그 祭次가 門神神話의 唱이 中心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祭次 이름도 門前本풀이라고 한 것이다.
門神神話인 門前本풀이는 門神·竈王·厠間神·柱木之神·五方土神 等 住宅의 各處를 차지하여 지켜 주는 神들의 形成 由來譚이다. 따라서, 門前本풀이는 門神의 來歷譚 뿐만 아니라 竈王·厠間神·柱木之神·五方土神 等 여러 神의 來歷譚이기도 하다. 이들 神 中에서 門神이 第一 上位의 神이기 때문에 그 名稱이 門前本풀이라 붙여진 것이다. 그 本풀이 이야기의 葛藤은 繼母譚으로, 內容은 다음과 같다.
먼 옛날 남선고을의 남선비와 여산고을의 여산부인이 夫婦가 되어 살았다. 집안은 가난하여 살림이 窮한데, 아들이 일곱이나 태어났다. 여산부인은 살아갈 窮理를 하다가 男便에게 貿穀장사를 하도록 勸誘하였다. 남선비는 婦人의 말대로 배 한 隻을 마련하여 남선고을을 떠났다.
배는 오동나라에 닿았는데, 오동나라 오동고을에는 奸惡하기로 所聞난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있었다. 귀일의 딸은 남선비의 消息을 듣고 船艙가로 달려와 남선비를 誘惑하였다.
그 홀림에 빠진 남선비는 귀일의 딸과 둘이서 將棋板을 벌여 놓고 내기를 始作하였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남선비는 타고 간 배도 팔고, 쌀을 살 돈도 모조리 빼앗겼다. 갈 수도 올 수도 없는 身世가 된 그는 귀일의 딸을 妾으로 삼아 끼니를 얻어먹었다.
새살림이 始作되었는데, 집이라고는 나무 돌쩌귀에 거적門을 단, 수수깡 외기둥의 움幕이 全部였다. 이 집에서 남선비가 하는 일이란 妾이 끓여준 겨粥 단지를 옆에 끼고 앉아 개를 쫓다가 꾸벅꾸벅 조는 것이었다. 이런 生活을 이어가니 몇 해 안 가서 눈까지 어두워져 버렸다.
한便, 여산부인은 男便이 돈을 벌어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消息이 없자, 아들들을 불러 배를 한 隻 지어 주면 아버지를 찾아오겠다고 하였다. 아들들이 배를 지어 내놓으니, 여산부인은 男便을 찾아 오동나라로 떠났다. 배가 오동나라에 닿자, 여산부인은 오동나라의 이곳 저곳을 찾아 헤매다가 기장 밭에서 새 쫓는 아이의 도움으로 男便을 찾았다. 男便은 果然 나무 돌쩌귀에 거적門을 단 움幕에 앉아 겨粥을 먹으며 살고 있었다. 婦人이 하루 저녁 재워 달라고 事情하며 움幕으로 들어갔으나, 눈이 어두운 남선비는 婦人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하루 저녁 묵을 許諾을 받고 움幕에 들어간 여산부인은 겨粥이 눌어붙은 솥을 씻고 쌀밥을 지었다. 말끔히 床을 차려 남선비에게 들여가니, 남선비는 첫 술을 뜨고는 自身도 여산부인과 살 때는 이런 쌀밥도 먹어 보았다고 歎息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여산부인이 身元을 밝히자 남선비는 婦人의 손목을 잡고 萬端情懷
를 나누었다.
이윽고 귀일의 딸이 들어와서 야단을 치다가 本妻가 찾아온 것을 알고는 어리광을 부려가며 큰婦人 待接을 하였다. 날이 더우니 沐浴이나 하고 와서 놀자며 여산부인을 꾄 귀일의 딸은 沐浴을 하러 가서 등을 밀어 주는 척하다가 여산부인을 물 속으로 밀어 넣어 죽였다. 그리고는 큰婦人인 체하여 남선비에게 돌아와서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의 行實이 괘씸하여 죽였다”고 하였다.
이 말을 곧이들은 男便은 故鄕으로 돌아가자고 하였다. 남선비와 귀일의 딸은 남선고을로 向하였다. 마중 나온 일곱 兄弟가 보니, 어머니가 아무래도 本어머니 같지가 않았다. 앞장서서 집으로 가는 어머니가 길을 몰라 이리저리 헤매고, 집으로 들어가서도 살림이 前과 같지 않았다. 아들들의 疑心은 날로 깊어갔다.
아들들의 疑心을 눈치 챈 귀일의 딸은 일곱 兄弟를 죽일 計略을 꾸몄다. 배가 아파 죽어 가는 시늉을 하면서, 唐慌해하는 男便에게 占을 치라고 하였다. 占을 치러 男便이 나가니, 귀일의 딸은 지름길로 달려가 기다리다가 占쟁이인 척하면서, 일곱 兄弟의 肝을 내어 먹어야 낫는다고 하였다.
婦人을 사랑하는 男便은 “아들이야 다시 낳으면 된다.”는 婦人의 말을 듣고 칼을 갈았다. 이것을 알아차린 똑똑한 막내 아들이 아버지 代身 兄들의 肝을 내어 오겠다 하고는 칼을 가지고 兄들과 함께 山으로 올라갔다.
途中에 지쳐 잠을 자는데, 어머니의 靈魂이 꿈에 나타나 노루의 肝을 내어가라고 가르쳐 주었다.
잠을 깨니 果然 새끼 노루 일곱 마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여섯 마리를 잡아 肝을 내고 繼母에게 가져갔다. 繼母는 먹는 체하며 肝을 자리 밑으로 숨겼다. 門틈으로 엿보던 막내 아들이 들어가 자리를 걷어치우자, 兄들도 왈칵 집으로 달려들었다.
凶計가 드러나자, 노일제대귀일의 딸은 厠間으로 逃亡가 목을 매고 죽어 厠間神 厠道婦人이 되었고, 남선비는 달아나다 정낭(집의 出入口에 大門 代神 걸쳐 놓는 굵은 막대기)에 목이 걸려 죽어, 柱木之神이 되었다. 일곱 兄弟는 西天꽃밭에 가서 還生꽃을 얻어다가 물에 빠져 죽은 어머니를 살려 竈王神으로 앉혔다.
일곱 兄弟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의 屍體를 쪼개서 이것저것 萬物을 만들었다. 그것은 노일제대귀일의 딸이 萬物의 源泉인 偉大한 어머니의 性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神話學的 解釋에 依하면, 일곱 兄弟의 行爲는 노일제대귀일의 딸에 對한 殘忍한 復讐라기보다는 宇宙萬物을 創造하기 爲한 活動이라 볼 수 있다.
以後, 일곱 兄弟는 各各 自己의 職分을 차지하여 神이 되었다. 첫째는 東方靑大將軍, 둘째는 西方白大將軍, 셋째는 南方赤大將軍, 넷째는 北方黑大將軍, 다섯째는 中央黃大將軍, 여섯째는 뒷門前(뒷門의 神), 怜悧한 막내는 일門前(앞쪽 門神)이 各各 되었다.
🍎 文嬉買夢 說話
(新羅時代 金庾信의 누이 金文姬가 언니인 金寶姬로부터 꿈을 사서 金春秋, 卽 太宗武烈王의 妃가된 說話)
★ 三國史記, 三國遺事 卷1 太宗春秋公條에.
처음 金寶姬가 꿈에 西岳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長安에 가득 찼다. 이튿날 아침 아우인 金文姬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金文姬는 그 꿈을 사기를 所願하여 緋緞 치마 한 벌을 주고 옷자락을 벌려 꿈을 사들이게 되었다. 그 뒤 金庾信이 金春秋와 같이 正月 午忌日에 自己 집 앞에서 蹴鞠을 하다가 일부러 金春秋의 옷을 밟아 옷끈을 떨어뜨리고 제 집에 들어가 달자고 하였다.
이에 金庾信이 맏누이 金寶姬에게 꿰매게 했으나 金寶姬가 이를 拒絶하였다. 金文姬에게 다시 付託하니 金文姬는 그 뜻을 알고 相關해 그 뒤부터 金春秋가 자주 來往해 姙娠하게 되었다. 金庾信이 不淨하게 關係하여 姙娠한 金文姬를 꾸짖고, 善德女王이 行次하는 것을 기다려 마당에 長斫더미를 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려 하였다. 王이 이를 보고 側近에게 누구의 所行인가를 다그쳤다. 金春秋의 顔色이 突變한 것을 보고는 金文姬를 救하고 婚禮를 行하게 하였다.
金文姬가 新羅 第29代 太宗武烈王의 妃인 文明王后이다. 王室 社會에 보기 드문 이 說話는 ‘西岳捨溺夢’이라고도 하고 ‘旋流夢’이라고도 한다. 卽, 높은 山에 올라가 오줌을 누면 그 오줌이 長安에 가득 차게 되고, 그 꿈을 꾼 사람보다 산 사람이 國母가 된다는 說話이다.
高麗 建國 說話 가운데 寶育이 鵠嶺에 올라가 오줌을 누니 三韓의 山川이 銀海로 變하는 꿈을 꾸었다는 內容 亦是 이 說話의 影響이다. 文嬉買夢 說話가 王權과 關係되기 때문에 心理的·神話的 側面에서 보다 깊은 檢討가 要求된다.
🍎 米囊能言說話 (말하는 쌀자루)
韓國의 古代 說話. 이웃집 女子와 姦通하던 男子가 本男便을 避하여 쌀자루에 들어가 숨었으나 말을 하여 들켰다는 內容의 說話. 笑話에 屬하며, 널리 口傳되고 있지만, 文獻說話로는 發見되지 않는다.
이 說話는 姦通하러 온 男子가 갑자기 나타난 本男便을 避하여 숨었다가 亡身當한 點에서 쌀뒤주설화와 密接한 關係를 가지고 있다. 이 說話는 非倫理的 行爲를 한 人物을 懲治한다는 點에서 敎訓的인 內容을 主題로 하고 있지만, 多少의 諧謔도 담고 있다. 이에 反하여 쌀뒤주說話는 倫理的 行爲에 對한 敎訓보다는 規範的 思考를 가진 人物에 對한 諧謔과 諷刺를 하고 있다는 點에서 差異가 있다.
옛날 어떤 곳에 이웃집에 사는 예쁜 女子를 貪하던 男子가 그 女人의 男便이 出他한 틈을 타서 집에 들어가 女子와 잠자리를 같이 하려는데, 뜻밖에 男便이 돌아왔다. 避할 곳을 찾던 男子는 다른 方道가 없어 房에 있던 쌀자루 속에 들어가서 숨었다. 房안에 들어온 男便은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쌀자루를 보고 툭 차면서,
“이것이 무엇인가?”하고 물었다.
女子는 말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데 쌀자루 속에 든 男子가,
“나는 쌀자루요.”하고 對答하여 모든 일이 드러났다. 男便은 쌀자루에 든 男子를 죽이고 女子도 罰을 주었다.
🍎 彌勒仙花 說話
★ 三國遺事 卷 3 彌勒仙花 未尸郎眞慈師,
新羅佛敎說話硏究(黃浿江, 一志社, 1975), 新羅佛敎文學硏究(金雲學, 玄岩社, 1976), 花郎道創設에 對한 小考(金光永, 東國思想 1, 1958), 彌勒仙花攷(金煐泰, 佛敎學報 3·4, 1966) 新羅 眞智王 때 國仙인 彌勒仙花에 關한 說話다.
靈異說話에 屬하며, 新羅 眞智王 때 興輪寺의 眞慈스님께서 늘 彌勒像 앞에서 彌勒佛이 花郎으로 化現 (佛菩薩이 衆生을 敎化하고 救濟하려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變하여 世上에 나타남)해 주기를 빌고, 또 自身이 彌勒 化現의 花郞을 늘 가까이 모시고 至誠으로 시중들 것을 發願하고 盟誓하였는데 그 생각이 날로 더욱 懇切해졌다.
어떤 날 꿈에 스님이 나타나 熊川 (只今의 公州)의 水源寺에 가면 彌勒仙花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 眞慈스님은 그 절을 찾아가는 열흘 동안 내내 한 걸음 뗄 때마다 절을 하였다. 절에 이르자 門밖에 있던 곱게 생긴 少年이 眞慈스님을 맞아 客室로 案內하였다.
眞慈스님은 少年에게 “그대는 나를 모르는 터에 어찌 이렇듯 慇懃하게 待接하는가?” 하고 물었다. 少年은 “나도 또한 서울 사람이라 스님이 멀리 오심을 보고 慰勞하고자 왔을 뿐입니다.”라 말하고 門밖으로 나가 자취가 杳然하였다.
眞慈스님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절의 스님에게 꿈 이야기와 여기에 오게 된 뜻을 말하였다. 그리고 暫時 아랫자리에 머무르면서 彌勒仙花를 기다리겠노라 하니 절의 스님들이 冥感 (드러나지 않고 隱密하게 感應함)이 많은 千山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眞慈스님이 山 밑에 이르렀을 때 山神靈이 老人의 모습으로 나타나 이곳에 오게 된 까닭을 물었다. 眞慈스님이 彌勒仙花를 보러 왔음을 말하니, 老人은 “앞서 水源寺 門밖에서 이미 彌勒仙花를 보았는데 다시 또 무엇을 보겠다고 하는가?”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眞慈스님은 急히 本寺로 돌아왔다. 眞智王이 眞慈를 불러 “少年이 스스로 서울 사람이라고 하였다면 成人의 말에 거짓이 없을 터인즉 서울 城안을 찾아보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말하였다.
眞慈스님은 무리를 모아 民家를 두루 찾았다. 靈妙寺 東北쪽 길가에서 얼굴이 예쁜 少年을 보고, 眞慈는 놀라며 “이 분이 彌勒仙花이다.”라고 말하였다. 少年의 이름은 ‘未尸’로, 어려서 父母를 여의어 姓은 모른다고 하였다. 少年을 가마에 태워 大闕로 들어가 王에게 보이니 王이 그를 恭敬하고 사랑하여 花郞으로 삼았다. 少年은 花郞의 무리와 和睦하게 지내고 禮義와 風敎(敎育이나 政治의 힘으로 風習을 잘 敎化하는 일)가 飛翔하여 風流로 世上을 빛내다가 7年 뒤 行方이 杳然해졌다. 眞紫는 少年 잃고 나서 슬퍼하고 그리워하였다. 한便, 그는 未尸의 慈悲로운 惠澤을 한 몸에 입고 그의 德化를 繼承하여 道를 닦더니 滿年에 어디에서 一生을 마쳤는지 알 수 없다.
‘未尸’와 ‘彌力’은 서로 비슷한 말로서, 서로 바꾸어 불렀다고 傳한다. 高麗 때까지도 神仙을 ‘彌勒仙花’라 하고, 仲媒하는 사람을 ‘未尸’라고 불러 온 것은 바로 眞慈의 遺風이다. 眞慈가 未尸를 처음으로 본 길가에 있던 나무를 見郎樹라 하였는데, 우리말로 似如樹 (또는 印如樹)라고 불렀다. 이 說話는 彌勒에 關한 最初의 우리 記錄으로서 新羅 彌勒思想의 獨特한 面貌를 보여 주고 있다. 彌勒이 花郞(國仙)으로 化現한다는 생각은 花郞 곧 彌勒이라는 意識을 밑에 깔고 있다. 이러한 意識을 바탕으로 新羅의 花郞徒가 크게 떨친 것이다.
🍎 美川王 說話
★ 高句麗 美川王 說話는 三國史記 高句麗 本紀 美川王朝에 傳한다.
烽上王의 同生 咄固의 아들 乙弗이
王의 火를 避해 放浪의 길에 올라 온갖 苦生을 하다가 後에 國相 創造利 等의 迎接을 받아 王位에 오르게 된다는 說話이다.
高句麗 美川王은 15代 王(在位 300~331年) 으로 好讓王이라고도 한다. 諱는 乙弗 또는 優弗이다.
13代 西川王의 둘째 아들이 古鄒加
(咄固)인데 그의 아들이다.
14代 烽上王, (咄固의 兄)이 咄固를 疑心하여 죽였는데 乙弗은 艱辛이 避身하여 어렵게 목숨을 扶支하다가 國相 倉助利에 依해 烽上王을 廢하고 王으로 卽位하였다.
優弗이라고도 하는데 王位에 오른 後, 領土를 넓히는 일에 熱心이었다.
當時 高句麗의 相對는 晉나라였다.
晉나라는 司馬炎이 세운 나라로 魏나라를 무너뜨리고, 280年 吳나라마저 滅亡시켜 中國의 三國時代를 統一한 나라다.
하지만, 不過 20年이 지나지 않아 8王子들의 叛亂을 始作으로 混亂에 빠져들고 있었다.
美川王을 이를 놓치지 않고 302年 直接 軍士 3萬 名을 이끌고 晉나라의 玄菟郡을 侵略하여 8千人을 잡아서 平壤으로 데려왔다.
또 313年과 314年에 各各 晉나라의 樂浪郡과 帶方郡을 쫓아버렸다.
樂浪郡과 帶方郡이 차지했던 晉나라와 東方의 여러 國家와의 中繼貿易의 利益을 뺏을 수 있었다.
아울러 平壤周邊과 黃海道 一帶의 넓은 平野地帶를 차지할 수 있었다.
當時 高句麗에는 鐵製 農器具와 소를 利用한 農事方法이 널리 퍼지고 있었다. 따라서 農民들은 새로운 農耕地에서 보다 豊盛한 收穫을 얻을 수 있었다.
高句麗는 美川王 時期에 經濟的으로 큰 發展을 이룰 수 있었다.
美川王은 더욱 領土를 넓히고자 했지만, 이때 妨害者가 登場했다.
그것은 遼西地域에서 成長한 慕容鮮卑였다. 이들은 烽上王 時期에도 여러 차례 高句麗를 攻擊해 온 적이 있고, 甚至於 몰래 兵士를 보내
西川王의 무덤 속에 있는 寶物을 훔치려다가 失敗하고 逃亡간 적도 있었다. 美川王은 慕容鮮卑를 미워하여 機會를 엿보고 있었다.
慕容鮮卑는 317年 晉나라(西晉)가 首都를 南쪽으로 옮겨는(東晉) 過程에서 混亂에 빠진 漢族들을 끌어들여 勢力을 크게 키우고 있었다.
새로 晉나라에서 任命된 平州刺史 崔毖는 慕容鮮卑의 勢力이 커지는 것에 不滿을 갖고 319年 美川王에게 使臣을 보내왔다.
崔毖는 高句麗가 宇文鮮卑, 檀鮮卑와 함께 慕容鮮卑를 攻擊해줄 것을 要請했다. 慕容鮮卑를 滅亡시킨 後 그 땅을 나누어 가지자고 提案을 한 것이다. 美川王은 崔毖의 提案을 받아들였다.
美川王은 이 機會에 遼河를 건너 領土를 넓힐 수 있고, 西쪽 國境을 安定시킬 수 있다고 判斷하여 곧 軍隊를 보냈다.
高句麗軍은 遼河를 건너 大凌河 周邊에 位置한 慕容鮮卑의 首都인 극성을 攻擊했다.
檀鮮卑와 宇文鮮卑도 軍隊를 보내어 聯合攻擊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聯合攻擊은 失敗로 돌아갔다.
慕容鮮卑의 計略에 빠져 高句麗와 檀鮮卑는 宇文鮮卑가 慕容鮮卑와 秘密裏에 協助하는 것이라고 疑心하고 軍隊를 撤收하고 말았던 것이다.
慕容鮮卑는 홀로 남은 宇文鮮卑를 攻擊해 물리치고, 이 作戰을 計劃한 當事者인 平州刺史 崔毖를 붙잡기 爲해 軍隊를 動員해서 攻擊했다.
崔毖는 두려워서 數千의 騎兵을 이끌고 高句麗로 逃亡쳐왔다. 그 結果 晉나라의 平州地域은 慕容鮮卑가 차지하고 말았다.
한 番의 잘못된 判斷으로 聯合作戰이 失敗하는 바람에 慕容鮮卑를 擊破하지 못했고, 遼河를 건너 西方으로 進出할 수 있는 좋은 機會를 놓치고 말았다.
高句麗 歷史에서 아쉬운 瞬間이었다. 當時 北中國 地域에는 五胡十六國 時代가 막 開幕되고 있었다.
晉나라는 江南으로 쫓겨난 狀態라 어떤 勢力이라도 이 地域으로 進出할 수 있는 機會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慕容鮮卑가 가로막아 西方으로 進出할 수 있는 機會를 놓쳐버렸다. 美川王은 以後 자주 慕容鮮卑를 攻擊했지만, 이미 힘이 커진 이들을 壓倒할 수가 없었다.
美川王은 거지처럼 살 때에도 王室의 子孫이라는 堂堂한 姿勢를 잃지 않고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숙우와 祖弗이 그가 襤褸한 옷차림을 했어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美川王의 이러한 堂堂함은 그가 王이 되었을 때 高句麗를 더욱 强한 나라로 만들기 爲한 行動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또 百姓들의 生活을 直接 經驗한 王이었기에 百姓들에게 삶이 豊饒로워질 수 있도록 努力했다.
그 結果 高句麗는 農業과 商業이 앞선 時期보다 發展하고 領土도 커져 將次 高句麗가 크게 成長할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妨害者를 만나 그의 遠大한 計劃은 未完成에 그쳤지만, 그는 4世紀 初 高句麗를 크게 發展시킨 뛰어난 임금이었다. 어려서 갖은 苦生을 겪은 뒤 자라서 榮光스러운 자리를 차지한다는 內容의 이야기는 百濟 武王의 어린時節 이야기인 薯童謠나 高句麗의 將軍 溫達 이야기와 軌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高句麗 第15代 王인 美川王이 卽位하기 前에 王孫의 身分을 감추고 살았던 避身時節의 行跡을 傳하는 이야기로서, 3世紀 後半의 高句麗
社會相을 傳하는 事實的인 資料로서 價値가 높게 評價되어 當時 時代相의 分析에 重要한 意味를 가지고 있다.
🍎 味鄒王竹葉軍 說話
(新羅 第13代 王인 味鄒王의 무덤에서댓잎으로 된 軍士들이 나타나 敵兵을 물리치기도 하고 나라의 잘못을 바로잡기도하는 異蹟을 보야주었다는 說話)
第14代 儒禮王 때 伊西國이 쳐들어 왔는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軍士들이 나타나 敵을 물리쳤다. 싸움이 끝난 뒤 味鄒王陵 앞을 보니 댓잎이 잔뜩 쌓여 있었다. 죽은 先王이 몰래 도왔음을 깨닫고 그뒤로는 味鄒王陵을 竹現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第37代 惠恭王 때는 金庾信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나 竹現陵 쪽으로 가더니, 金庾信의 魂靈이 나타나 自身의 後孫이 罪없이 죽었다며 이제 다시는 나라를 爲해 애쓰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味鄒王이 大義가 더욱 重要하다고 說得하자 魂靈은 다시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 이 말을 들은 惠恭王은 金敬臣을 金庾信의 무덤에 보내 代身 謝過하고 鷲仙寺에 功德寶田을 내려 金庾信의 冥福을 빌게 했다. 그뒤로는 味鄒王을 三山과 함께 祭祀 지내고 味鄒王陵의 序列을 五陵 위에 두고 大墓라 불렀다고 한다.
이 說話는 味鄒王이나 金庾信의 後孫이 自身들의 家門을 通해 傳承시킨 家門神話로 볼 수 있다. 金氏 王族이 여러 親族 集團으로 나뉘고 서로 다투게 되자, 各 金氏는 共同의 始祖 閼智가 아닌 自己 家門의 直系 先祖를 따로 내세울 必要가 있었을 것이다. 金庾信의 後孫은 武烈王系와 同盟을 맺었다가 함께 沒落했다. 惠恭王 때 金庾信系는 不利한 處地에 있었으나 武烈王係는 아직 王位에 있었다. 그런 狀況에서 金庾信系는 武烈王系의 힘을 빌어 다시 勢力을 찾고자 했는데, 그때 金庾信이 武烈王系의 先祖인 味鄒王을 찾아가서 寃痛함을 하소연했다는 神話를 만들어 냈을 것으로 본다.
🍎 密本摧邪說話
(新羅 時代의 道僧인 密本의 鬼神 退治 能力과 道術에 關한 說話. 主로 密本法師가 늙은 여우나 많은 鬼神을 물리치는 內容을 담고 있다)
★ 三國遺事에.
첫番째 揷話는 密本이 늙은 여우를 退治한 이야기이다. 善德女王이 病席에 오래 누워 있어서 法惕을 密本으로 바꾸어 病席을 돌보게 하였다. 密本이 藥師經을 읽어서 지팡이로 늙은 여우와 法惕을 處置하여 善德女王을 完快시켰다는 것이다.
두番째 揷話도 亦是 事鬼退治譚으로, 丞相 金良圖 집에 머무르고 있는 많은 鬼神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이다. 放恣한 鬼神의 行悖를 四方大力神을 시켜 逐出하였다.
세番째 揷話는 密本과 因惠의 道術試合을 다룬 것이다. 金庾信의 親戚인 秀天이 惡疾을 앓자, 金庾信이 居士를 推薦하였다. 그런데 秀天의 親口인 因惠가 와서 居士의 추레한 모습을 보고, 神通力을 試驗하게 되었다. 居士가 因惠를 거꾸로 땅에 박아놓은 것이 좀처럼 풀리지 않자, 秀天이 金庾信에게 請하여 居士로 하여금 道術을 풀게 했다는 內容이다.
🍎 밉다가 곱다가 하는 妻 (아내 버리려던 마음 돌린 男便, 才致있는 아내. 아내가 못생겼다고 버리려던 男便이 마음을돌려 다시 잘 살았다는 內容의 說話)
一般譚에 屬하며, ‘아내 버리려던 마음 돌린 男便’, ‘才致있는 아내’ 等으로도 불린다. 國內 여러 地域에 分布되어 있다.
放蕩한 男便이 일만 하는 自己 아내를 丹粧만 하는 술집 女子들보다 못생겼다고 생각하여 집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아내는 丹粧을 하고 집을 나서려고 하였다. 아내의 새 모습에 놀란 男便은 아내가 밉다가 곱다가 한다고 하면서 아내를 못나가게 막고 같이 잘 살았다.
日本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變異型에 따라, 아내의 才致나 超越者의 啓示로 男便이 改心하기도 한다. 前者가 不利한 狀況을 逆轉시킬 수 있는 女子의 內的 能力을 高揚하는 것이라면, 後者는 男女 사이에 지켜야 할 마땅한 道理를 强調하는 것이다. 이런 줄거리를 든 이야기에는 男子의 愚鈍함이 浮刻되고 있다. 이 說話는 女子의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만 보고 속에 감추어진 아름다움은 보지 못하는 男子의 어리석음을 批判한 것이다. 이를 通해 男女 사이의 眞正한 사랑은 容貌보다는 內面에 갖추고 있는 人間性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는 敎訓을 素朴하고 興味있게 提示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