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3부 일통 천하 (152)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17장 범수(范睢)의 복수극 (4)
이제 방안에는 오로지 진소양왕과 범수 두 사람만이 남았다.
파격이었다.
범수(范睢)의 계책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그러나 진짜 파격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사기(史記)>에 기록된 문구를 인용해보자.
진왕(秦王), 무릎을 꿇고 요청하다.
천하 제일의 강대국 임금인 진소양왕(秦昭襄王)이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이다.
하지만 당시의 진(秦)나라 조정과 왕실 사정을 살펴보면 그다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그랬다.
그 무렵, 진나라는 선태후(宣太后)와 위염(魏冉)을 중심으로한 외척 세력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권마저 위협을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것이 진소양왕에게는 커다란 고민거리요, 숙제였다.
아무도 이것을 간파하지 못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한 선비가 그것을 꿰뚫어 보고 흔연히 외쳐댄 것이다.
- 진(秦)나라에는 선태후와 승상 위염만 있을 뿐 왕은 없다!
이 말은 곧 무엇인가.
- 내가 외척 세력을 몰아내고 왕권을 되찾아 주겠소.
수수께끼와 같은 이 말을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대뜸 알아들었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을 것이다.
무릎 꿇고 청한다 해도 모자랄 정도였으니 그 무렵의 진소양왕의 사정은 그만큼 절박해 있었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무릎을 꿇은 후 간절히 말했다.
"좀더 일찍 가르침을 청했어야 하는데 과인이 어리석고 부족하여 이제야 선생에게 청하게 되었음을 사죄드립니다.
선생께서는 무엇으로써 과인에게 가르침을 주시렵니까?"
기선을 잡은 범수(范睢)는 느긋했다.
아니 노련했다.
고개만 끄덕거리며 희미하게 대답했다.
"예..............."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초조하여 다시 한번 청했다.
"부족한 과인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예...............“
"어찌하여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오? 과인은 선생만 믿겠습니다."
그래도 범수(范睢)는 입술만 달싹였다.
"예...............“
진소양왕(秦昭襄王)은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세 번을 청해도 아무 말을 듣지 못하자 절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네 번째로 청했다.
"정녕 선생은 과인에게 가르침을 내려주지 않을 작정이시오? 그러하시다면 과인은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소."
그제야 범수(范睢)는 옷깃을 여미고 손을 앞으로 모은 후 대답했다.
"신이 어찌 감히 그럴 리 있겠습니까?
옛날 태공망 여상(呂尙)은 어부의 신분으로 위수가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주문왕(周文王)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주문왕은 여상의 단 한마디 말을 믿고 그를 상보(尙父)로 삼아 스승으로 모시었습니다.
그 덕분에 주문왕(周文王)은 은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얻었습니다.
만일 주문왕이 여상을 멀리하고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면 과연 그가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겠습니까?“
"...........................?“
"지금 저는 타향에서 온 천한 신분의 나그네에 불과합니다. 그런 만큼 대왕과의 관계는 멉니다.
만일 제가 대왕의 깊숙한 것까지 얘기하면 왕께서는 제 말을 믿으시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며, 이것이 방금전 대왕께서 세 번이나 청하셨음에도 답을 드리지 못한 이유입니다."
범수(范睢)의 이 같은 말에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선생은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오?
과인은 오로지 선생만을 믿고 좌우 사람을 모두 내보냈습니다. 선생의 가르침만 받을 수 있다면 과인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청하건대, 위로는 선태후(宣太后)에 관한 일이든 아래로 신하들에 관한 일이든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맹세하건대 나는 절대로 선생을 의심하지 않겠소.“
- 위로는 선태후, 아래로는 신하.
마침내 진소양왕의 입에서 가장 민감한 사안인 외척 문제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이는 범수(范睢)가 이궁 밖에서 내관과 다툴 때 외친,
- 진(秦)나라에 무슨 왕이 있다고 그러느냐? 이 나라에는 오직 선태후(宣太后)와 승상 위염(魏冉)이 있을 뿐이거늘!
이라고 한 말에 대한 첫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범수(范睢)는 확신을 가졌다.
'역시 왕께서도 그 일로 고민하고 계셨구나.‘
그러나 범수는 참으로 조심스런 사람이었다.
그는 진작에 궁실문 밖에서 여러 내관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중에는 선태후(宣太后)나 승상 위염(魏冉)의 심복도 끼여 있으리라.
그는 일단 화제를 조정의 일에만 국한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로서는 하늘이 내린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와 치밀함이었다.
"지금 천하 대세를 보면 진(秦)나라만큼 강한 나라가 없습니다.
지세는 험하고, 군사는 날랩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중원의 제후들을 평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로(韓盧)가 절뚝거리는 토끼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한로란 한나라의 이름난 사냥개다.
"..........................?"
"그럼에도 대왕께서 천하를 하나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진(秦)나라 신하들의 잘못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울러 대왕의 계획에도 잘못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과인은 그 잘못된 부분에 대해 듣고 싶소."
이때부터 범수(范睢)의 말은 청산을 가로지르는 대하(大河)처럼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신이 알기로 승상 위염(魏冉)께서는 지금 한나라와 위나라 땅을 지나 멀리 제(齊)나라 땅을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거리가 멉니다.
소규모 부대를 출동시키면 제(齊)나라를 제압할 수 없고, 대병력을 내보내면 진(秦)나라로서는 큰 부담을 갖게 됩니다.
설사 제(齊)나라를 쳐서 이긴다 해도 얻는 것은 적습니다. 반면, 지게 되면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됩니다.
이제 타국을 떠돌아다니는 나그네가 대왕을 위해 한 가지 계책을 아뢰고자 합니다.“
".................................!"
"만일 대왕께서 패왕(覇王)의 뜻을 품으셨다면,
반드시 진(秦)나라와 멀리 떨어진 중원 나라들과는 우호관계를 맺으시고 근접한 나라들은 무력으로써 제압하십시오.
그래야만 1촌(寸)의 땅을 얻어도 그것이 대왕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하나 점령해 들어가 먼 곳까지 이른다면 어찌 천하 패왕의 지위에 오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멀리 떨어진 나라와는 우호를 맺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한다.
40여 년 후 천하 통일을 이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진나라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아!"
진소양왕(秦昭襄王)의 얼굴은 단번에 경탄의 빛으로 가득했다.
이제야 자신이 갈 길을 찾았다는 기쁨과 희열에 몸을 떨었다.
얼핏 미간으로 너무 늦게 눈앞에 있는 사내를 만났다는 아쉬움의 빛도 스쳐갔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먼저 어느 나라와 친교하고, 어느 나라를 치면 선생이 말씀하신 바대로 이루어지겠소?"
범수(范睢)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제(齊)나라와 초(楚)나라와는 친하게 지내십시오.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는 힘으로 눌러 억압하십시오. 한나라와 위나라를 장악한 후에는 조(趙)나라를 치십시오."
조(趙)나라를 점령하면 연(燕)나라 또한 이웃이 됩니다. 역시 군사를 휘몰아 공격하십시오.
그런 후에 초(楚)를 치고, 제(齊)나라를 몰아붙이면 이 넓은 중원에는 오직 진(秦)나라만이 남게 됩니다.
이것을 일러 일통천하(一統天下)라고 합니다."
- 일통천하(一統天下).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다라는 뜻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천하를 통일하기라도 한 듯한 대감동이었다.
이제 진소양왕(秦昭襄王)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장록 선생!“
두 손을 움켜잡았다.
"어째서 이제야 내 앞에 나타나셨소?"
한때 죽음 직전에까지 처해 오줌통에 처박힌 바 있던 천하 기재 범수(范睢)가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BC 268년(진소양왕 39년) 무렵의 일이다.
그 날로 진소양왕(秦昭襄王)은 범수를 객경(客卿)에 임명했다.
그러고는 모든 군사 일을 그에게 일임했다.
다음날 조정으로 나간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승상 위염과 장군 백기에게 명했다.
"제(齊)나라 정벌을 중지하라!"
승상 위염(魏冉)은 제나라를 치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이런 명령을 받자 몹시 당황했다.
"장록(張祿)이라는 자가 대체 어디서 굴러들어온 말뼈다귀인가?“
그는 분노했으나 진소양왕의 마음은 이미 범수에게로 기울어진 뒤였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