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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1)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의 지혜는 ‘연약함’에서 기인
③ 삼위일체와 연약함의 지혜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한다. “하늘에 계신 지극히 높으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가브리엘 천사를 시켜 아버지의 이토록 합당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이 말씀이 거룩하고 영화로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계심을 알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말씀은 마리아의 태중으로부터 우리의 인간성과 연약성의 실제 육(肉)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도 부유하시면서도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몸소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4-5). 프란치스코는 구체적인 모양으로 말한다. 곧 단순히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말씀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태중에 들어가시는 것이다. 그분은 여성인 이 거룩한 사람 안에서 육체를 취하셔야 했다.
여자의 몸이 악마라고 믿는 카타리파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이다. 이단 중 하나인 카타리파에 의하면 여성의 육체에 의해 아담이 꾐에 넘어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여성의 몸이 모든 인간의 육신을 낳기에 육신 자체가 모두 악이라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항상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대해서 말한다. 그 태중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육체와 우리의 연약함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육신을 취한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조건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분은 모든 사람(죄인들, 성인들, 가톨릭 신자들, 이교인들, 모든 민족, 모든 남녀)이 지닌 이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인간 조건을 취하신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어떻든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위해 취하신 그릇이다. 모든 민족과 문화, 심지어는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민족도, 병자도, 무식한 사람도, 죄인도 같은 그릇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도 이런 우리의 약함을 취하셨다. 그분은 성장하셔야 했고, 음식을 받아드셔야 했으며, 말하고 걷는 법까지도 배우셔야 했다. 그분은 단 한 번에 이 모든 것을 습득하신 것이 아니라, 여느 인간들처럼 실패와 넘어짐을 반복하면서 이 모든 것을 점진적으로 배우셔야 했다. 모든 것을 가지셨던 분이 죄 외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이 되기를 원하셨다. 그리고 십자가가 당신의 것인 양 십자가를 지셨고 거기에 매달려 혹독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셨다.
모든 것의 창조주께서 우리와 같이 살기를 택하신 것이다. 약하게 되어야 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필연적인 것이다.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완전한 사랑의 지혜는 연약함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각 위의 연약함으로 인해 서로에게로 흘러들어가고 흘러들어오는 사랑의 영원한 흐름을 통한 완전한 일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고, 이 연약함이 역설적으로 지고의 완전한 사랑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자율권과 자기 충족을 원하며 자신이 자기가 만들어낸 존재이길 원한다. 하지만 하느님의 참된 존재성은 세 위의 관계성 안에서 서로를 나누고 보충하는 가운데 드러나며, 이것이 바로 하느님 존재의 본질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약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기 충족을 지니신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이 기인하는 것이 세 위의 상호 관계성이라는 점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암이라 불리는 형제’에 나오는 밥 스튜어트 신부의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어 보겠다. 암 형제는 동정심(compassion)을 배우도록 나를 초대하였다.
“나는 번호가 적혀있는 병원 카드를 받았다. 나와 다른 환자들은 매일 아침 각기 자기들에게 맞는 과에 들어가기에 앞서 접수창구에 이 카드를 제시했다. 전에도 나는 자주 병원을 드나들었었다. 그러나 전에는 환자 방문을 위해, 사목적 봉사를 위해, 환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주기 위해 들어갔었지만, 이제는 수백 명의 암 환자들 가운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들어갔다.
어쨌든 우리의 공통점은 우리 모두 치유가 필요해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암 환자이고 우리 육체를 강탈하는 질병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는지에 대해서 놀랐다. 우리가 비록 서로 모르는 사람이었어도 우리는 우리의 암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암의 확산 정도, 치료법, 예후, 그리고 고통뿐만 아니라, 어려움, 두려움과 희망 등을 나누었다. 여기서 나는 전에는 알지 못했던 고통과의 일치를 체험했다. 매일 아침 암연구소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나환우가 되었다. 치유자나 사목자로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의 과거나 체험은 다양했지만 우리는 뭔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을 암 형제가 나에게 자매와 형제로 소개해 주었던 것이다. 아마 난생처음으로, 나는 나환우로서 프란치스코가 그의 유언에서 회고하는 체험을 제대로 식별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나를 그들 가운데 데려가셨고 … 나에게 있어 쓰고 역겨웠던 바로 그것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2) 작음과 약함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 체험
④ 삼위일체 신비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연약함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관계성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깊숙이 이 관계성 안에서 사랑의 흐름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필자는 밥 스튜어트 형제의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영어에 ‘interface’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접점’이라는 말로 해석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본디 의미는 ‘얼굴을 서로 교환하는 것’, 혹은 ‘두 개체나 두 사람이 공통의 얼굴을 지니는 곳(혹은 지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이 삼위일체의 진정한 사랑의 힘이 나오는 곳이고,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 모든 피조물은 이러한 본질을 천부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삼위일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은 모두 이것을 살아내야 할 소명을 부여받고 창조된 것이다.
밥 스튜어트 형제가 필자에게 말했던 ‘너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라고 했을 때, 그는 암 투병 중 겪은 연약함의 체험 안에서 은연중에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질을 직감하고 그것을 필자에게 말해주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말한 것이 바로 이 ‘interface’였고,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영원한 관계성의 춤에서 나오는 온전한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것을 감히 짐작해 본다.
이런 ‘interface’를 프란치스코 역시도 나환우와의 만남 체험에서, 그리고 그 이후 다른 모든 사람, 특히 병자들과 약한 이들, 걸인들, 심지어는 모든 피조물과의 만남 체험에서 체험했었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프란치스코가 다음과 말할 때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런 삼위일체적 체험에서 기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천한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또한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 병자들과 나병 환자들, 그리고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살 때 기뻐해야 합니다.”(1221년 「수도 규칙」 9,2)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구걸하는 삶으로 초대할 때 그는 은연중에 형제들이 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하는, 조금은 억측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작음’과 ‘약함’의 신비와 지혜는 프란치스코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서 체험한 것이고,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자연스럽게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적 체험에도 참여했을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신의 첫 번째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서두에서 이 인격적 만남에 대해 상당한 강조점을 두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디에 있든 바로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도록,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분과 만나려는 마음, 날마다 끊임없이 그분을 찾으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도록 권고합니다. 그 누구도 이러한 초대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기쁨에서 배제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 3항)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은 프란치스코의 삶과 영성에 있어 그 근본적 토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유언에서 단순히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아무도 나에게 보여 주지 않았지만,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한 복음의 양식(樣式)에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유언 14절)
여기서 ‘복음의 양식’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면 어떤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대한 이해를 위해 먼저 마르코 복음의 첫 문장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그 첫 문장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은 동격의 관계로 볼 수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복음, ‘기쁜 소식’, 혹은 ‘기쁜 말씀’ 자체라는 말이다.
프란치스코가 ‘복음의 양식’이라고 말할 때, 의도했던 바는 어떤 규정이나 규칙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여기서 ‘양식(forma)’이 뜻하는 것은 규정이나 규칙이 아닌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이 유언 내용을 다른 말로 바꾸어보면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친히 나에게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그리고 그분과의 지속적인 만남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3) 나환우 통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닫다
‘인격(personhood)’의 의미를 살펴보자. 사전적 의미로 ‘인격’은 ‘개인의 특질 혹은 특성, 개인의 인간성’이다. 하지만 본래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가면극에서 사용하던 말로, 가면을 쓴 배우들이 소리로써 통교하던 것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이런 연유로 이 단어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성삼위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데 실제로 오랫동안(적어도 18세기까지는) 사용됐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이 단어는 개인의 특성을 드러내는 말로 탈바꿈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이것이 관계성을 그 핵심 안에 내포하고 있는 단어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 리처드 로어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격체는 정지 상태의 개념이 아니라 완전히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개념이다.(per sonare-가면을 쓰고 소리를 통해 정체성을 나누는 것) 이는 -이성과 창조의 선물에 의해- 신적 위격들과 모든 인간 인격들 사이에 서로 공유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나눔은 나중에 포함되고 실현되는 것이거나 성사나 어떤 확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본래 정체성을 찾게끔 도와주는 것이기는 하다.”
로어 신부는 본래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되던 이 ‘인격’이라는 말이 전혀 엉뚱한, 아니 정반대의 의미로 바뀌게 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감을 표현한다. “우리를 현대의 개인주의로 내몰아온 많은 이론적 조합들을 볼 때,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여전히 인간 인격에 대해 ‘이교도적’ 이해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본래 삼위일체적으로 사용해온 이 인격-역동적인 인격체(sounding-through)-라는 단어를 결국에 가서 본래의 의미와는 전혀 가깝지도 않은 ‘자율적 자기’라는 의미로 완전히 뒤집어 놓아버렸다.”
인간의 완전한 인격을 삼위일체적 형이상학을 기반으로 하여 새롭게 이해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해 로어 신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인격이 하느님에 의해 고유하고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인식하는 것이 그 이해의 시작이다.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인격에다 하느님의 신적 모상을 심어주시어 관계성 안에서 당신과 통교를 하도록 해주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의 인격은 다른 피조물과도 그렇게 통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격적 만남’이라는 것은 상호 통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다른 모든 존재와의 통교와 일치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된다는 말이다. 토마스 머튼은 어떤 사람이 하느님 안에서 진정 ‘홀로 있음(관상)’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 그 사람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모든 존재와도 연결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은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영성 전체의 핵심이어야 한다. 이것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강조하고 계시고, 또한 우리가 실현해 나가고자 하는 ‘생태적 회개’의 핵심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창조적 관계성 안에 들어서는 것! 이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모든 것의 근간이 들어 있다.
노르위치의 성 율리안나는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을 삼위일체 위격들 간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혹은 주고받음)에 참여하는 환희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가 갑자기 내 가슴을 최상의 기쁨으로 채웠다. 그리고 나는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기쁨이 영원히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삼위일체가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은 삼위일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보호자이시며, 삼위일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원한 친구이시고 우리의 끝없는 기쁨과 환희이시다. 그리고 이것이 첫 번째 계시에서 나에게 보였는데, 그 후 다른 모든 계시에서 마찬가지였다. 계시를 통해 하느님께서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다 나는 거룩한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노르위치의 율리안나는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인격이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처럼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지속적이고 집중적이고 지속적인 관상을 통해 자신의 인격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합치되는 체험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은총의 일치는 결국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존재와의 일치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깨달은 것과 맥이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역시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임을 자신의 유언에서 확신 있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프란치스코가 이런 만남과 깨달음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것이 그에게 그리 엄청난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약한 자로서,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이에게 형제가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4) 삼위일체 관계성 안에서 삶과 현존의 의미 깨닫다
노르위치의 율리안나 성인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의 체험을 삼위일체 위격 간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혹은 주고받음)에 참여하는 환희요 기쁨이라고 말한다. 율리안나 성인은 이와 같은 체험을 통해 인격이 삼위일체의 관계성 안에서처럼 하느님과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 안에서 완성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는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관상을 통해 자신의 인격이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합치되는 체험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치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삼위로 일체를 이루시는 하느님의 전적인 은총에 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은총의 일치는 결국 그로 하여금 다른 모든 존재와의 일치로 이끌어 주었던 것이다.
이는 프란치스코가 나환우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깨달은 것과 맥이 일치한다. 프란치스코 역시도 그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이끄심에 의한 것임을 자신의 유언에서 확신 있게 고백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프란치스코가 이런 만남과 깨달음이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 그에게 그리 엄청난 체험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는 이런 깨달음을 통해 약한 자로서, 가난하고 작은 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의탁하는 법을 배운 후에야 비로소 다른 모든 이에게 형제가 되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을 것이다.
어떤 프란치스칸 영성가가 말하기를 프란치스코는 세상을 위해서나 세상을 향해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세상과 더불어 존재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세상의 필요에 응하여 회개의 삶을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세상 안에서 자기 삶과 현존의 의미를 깨달아 세상 가운데서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의 흐름처럼 다른 이들과 같은 인격체로서 서로 간의 나눔의 춤을 춘 사람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육화라는 엄청난 사건을 통해 세상에 오신 이유와 같은 것이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결핍된 세상에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기 위해 오신 갑부 아버지의 아들로 보고자 했지만,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파견되어 육을 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풍요가 이미 세상 창조와 더불어 모든 피조물에, 특히 그 모든 피조물의 관계성 안에 들어 있음을 분명하게 밝혀주시기 위해 온 밝은 빛이었던 것이다. 사실 세상은 이미 하느님 사랑과 그 배려로 풍요로운데도 이 세상과 그 안의 사람들은 그 풍요로움을 깨닫지 못했다. 이는 요한복음 서문에서 잘 증언해준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요한 복음 서문에 나오는 이 말씀은 세상 창조와 완성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데 참으로 중요한 진실이다. 성 보나벤투라가 말하듯이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이 세상에는 이미 삼위일체의 발자취가 각인되어 있을 만큼 풍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살아내는 데 필연적인 진리이고, 또한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 안에서 완성(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데 꼭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 한다.
이 풍요를 우리가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가진 삼위일체 하느님 자녀로서의 관계성 안에서의 품위를 개인주의와 소비주의 물질주의 등으로 스스로 손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말하는 ‘나-너(당신)’ 관계성의 단절이 빚어낸 결과가 오늘의 현실이 아닐까 한다.
바오로 사도는 이미 오래전에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8,19-23).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자본주의와 소비주의, 군사주의 등이 관계성의 단절을 심각하게 손상하고 있는 현시대의 상황을 내다보고 한 예언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을 겪는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이 참으로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시듯 ‘생태적 회개’, 곧 우리 서로는 물론이고, 우리 주변의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성의 회복’이기 때문이다. 이 ‘생태적 회개’, 혹은 ‘회복’이라는 말을 사도 바오로의 말씀으로 대신하자면,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5)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⑤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과 삼위일체적 삶
프란치스코는 「수도 규칙」 10장에서 ‘글 모르는 형제들’에게 글을 배우지 말라고 권고한다.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이런 권고를 한 근본적인 이유는 형제들이 공부를 통해 자신을 높이려는 유혹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자신을 높인다는 것은 관계성 안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참 자아와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이들(존재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런 권고를 한 프란치스코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안토니오 성인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기꺼이 허락해 주는 내용이 나온다. 단순하게 보면 ‘이거 모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란치스코는 안토니오에게 한 가지 매우 소중하고 의미심장한 조건을 내건다. 다음이 편지 내용이다. “나의 주교(주-안토니오는 주교가 아니었지만, 프란치스코는 신학자들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주교’라고 부르고 있다) 안토니오 형제에게 프란치스코 형제가 인사합니다. 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신학 연구로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으면, 그대가 형제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일은 나의 마음에 듭니다.”‘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사실 글자 그대로 ‘기도의 마음과 온전히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만 한다면’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에서 ‘헌신’ 혹은 ‘신심’이라는 말의 라틴어는 ‘devotio’이다. 이 단어는 ‘우리의 마음과 혼과 얼을 온전히 하느님께 집중하는 것’인데, 수도승적 전통에서는 이것이 기도에 있어 매우 중요한 마음 자세였다.
그런데 프란치스코에게는 이 말이 더 깊고 넓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지된 상태의 기도 혹은 일반적 의미의 염경 기도나 전례 기도, 묵상 기도 등과 관련한 우리의 자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안토니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짤막하게 언급하고 있듯이(“「수도 규칙」에 담겨 있는 대로”), 이 ‘기도와 헌신의 영’이라는 말을 자신의 「수도 규칙」 5장에서도 쓰고 있고, 클라라 역시도 자신의 「수도 규칙」 7장에서 같은 내용의 권고를 자매들에게 주고 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의 「수도 규칙」 5장과 클라라의 「수도 규칙」 7장의 주제는 ‘일하는 자세’라는 점에 주목해 보아야 한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형제들에게 권고한다. “주님께서 일하는 은총을 주신 형제들은 충실하고 헌신적으로 일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혼의 원수인 한가함을 쫓아내는 동시에 거룩한 기도와 헌신의 영을 끄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현세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영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이처럼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과 ‘기도와 헌신의 영’을 지니는 것은 같은 마음의 상태에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앞서 언급한 토마스 머튼의 말대로 하느님과 더불어 ‘홀로 있음(관상)’의 상태에 이르게 될 때, 우리가 하느님 관심의 대상인 세상 모든 존재와 더불어 연결된 상태에서 현존하게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를 이해야 한다는 말이다.
곧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을 지닌다는 말은 존재의 실질적 의미인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혹은 ‘나-너’의 관계성을 살아가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베트남의 위대한 영적 지도자인 틱낫한 스님이나 가톨릭의 여러 영성가는 이제 존재에 대해서 말할 때 그저 존재(being)가 아닌, 연결된 존재(inter-being)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본질을 담고 있는 모든 피조물의 핵심적 존재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존재의 이 본질적 핵심을 깨어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화두이다.
프란치스칸 신비주의자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1499~1562)는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신심(헌신-devotio)은 성 토마스가 말하듯이, 덕을 행함에 있어 기민함이요 맞갖은 능력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덕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모든 어려움과 버거움을 날려 보내고 선한 모든 것을 재빠르게 실행할 준비를 갖추게 된다. 이는 영적 자양분이고, 신선함이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슬이요, 성령으로부터 우리 안에 훅 불어넣어진 숨결이며, 초자연적인 정감이다.”(알칸타라의 성 베드로, 호명환 역, 「기도와 묵상 안내서」, 프란치스코출판사)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6) “삼위일체 하느님의 역동적 사랑은 영원히 계속된다”
프란치스칸 신비주의자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는 ‘헌신의 영’이 악 혹은 죄의 보편적 원인을 이겨내는 데 필요한 것이라 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로마서 말씀을 인용한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22-23)
알칸타라의 성 베드로도 이 ‘헌신(신심)의 영’을 덕을 행하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핵심으로 간주했다. 덕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그분 사랑의 힘을 깨어 인식하며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덕’은 그 자체로 다 하느님 당신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에게서도 이런 이해가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두 편의 그의 글에 나타난다.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이고, 다른 하나는 ‘덕들에 바치는 인사’이다.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을 찬미하며 드리는 영예(덕)들이 거의 고스란히 덕들에 바치는 인사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도와 헌신(신심)의 영’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에게 다른 무엇보다도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며 사는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모든 존재와 연결된 우리 존재의 엄연한 현실을 항상 마음에 새기는 가운데 이를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통교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만남, 혹은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에 들어서는 것이고, 이러한 삶의 자리로의 초대가 매일 매 순간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려는 우리의 의지를 꺾는 장애물이 늘 우리 주변에 산재해 있다. 나는 물론이고 가까이 있는 이들의 약점과 결점, 이로 인한 서로 간 상처를 주고받음, 우리 정신 안에 뿌리 깊게 고정된 인과응보적 사고방식과 상거래식 계산적 사고방식 등으로 인한 개인들과 집단들, 국가들의 갈등과 전쟁 등등의 어둠이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도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다.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삼위일체 하느님의 창조하고 구원하며 역사를 완성해가는 ‘역동적 사랑의 흐름’은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내 존재성’이 아니라 ‘하느님 존재성’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우리 자신에게 시시각각 의식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적 약함과 현실의 어려움을 넘어서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것은 이런 하느님 섭리에 ‘내어 맡김’과 ‘확신’을 마음 한가운데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인준 받지 않은 「수도 규칙」 21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전능하신 주 하느님께 집과 거처를 항상 마련해 드립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악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그리고 우리는 우리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그분께’ 달려갑시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먹인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들 가운데 나도 함께 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역설이겠지만, 어찌 보면, 우리의 약함과 한계적 상황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일치하여 덕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자극제요 촉매제가 될 수 있고, 또 그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성경 전통의 증거다.
사제가 미사 집전 전에 드리는 기도 중에는 “하느님의 사제여, 지금 드리는 이 미사를 당신의 첫 번째 미사처럼, 당신의 마지막 미사처럼, 당신의 유일한 미사처럼 드리십시오!”라는 기도가 있다. 이 기도에 드러나는 염원에는 하느님 사랑과 그 섭리에 대한 확신과 내어 맡김의 영이 깃들어 있다. 사실 지금 드리는 미사는 어떤 미사이건 사제 자신이 드리는 미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친히 드리시는 미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신자와 사제는 미사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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