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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시간
성경본문: 시편 65: 1-13
1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3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6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7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8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9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10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11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12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3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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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의 우화 ‘개미와 베짱이’에서 개미는 근면하고 부지런히 일하는 성실한 사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고, 베짱이는 놀기만 좋아하는 게으르기가 짝이 없는... 우리가 만약 베짱이를 닮는다면 굶어 죽을 것이 너무나 분명한 부정적인 표본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아닌 것이...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를 빗댄 패러디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들이지요.
여름내 개미들은 열심히 일을 하여서 많은 곡식을 거두어 들였기에... 찬바람이 불어도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짱이는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여름 내내 놀기만 하였으니... 개미를 찾아가서 먹을 것을 구하였지만... 개미들은 냉정하게 거절하였습니다.
날은 추워지고.. 양식은 다 떨어지고... 그들은 정말 절박해졌습니다.
이왕 죽을 바에야 여름에 연습한 바이올린이라도 한 번 근사하게 연주하고 죽자... 비장한 마음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하는데... 생전 그런 소리를 들어보지 못산 개미가 곁에 몰려들어서는 베짱이의 연주를 경청하는 것입니다.
연주를 멈춘 베짱이는 'Ticket please!' 하고 외쳤습니다. ‘내 연주를 듣고 싶다면... 돈을 내고 들으시오...’ 베짱이가 따스하고 배부르게 겨울을 나게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지요.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겨울이 되어서 양식이 떨어진 베짱이가 개미네 집을 찾아 갔습니다.
가보니 창고에는 거두어들인 곡식이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양식을 좀 얻어 가려고 개미를 불렀지만...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를 않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서 들어가 보았더니... 개미들이 다 죽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과로사라는 것입니다.
여름내 열심히 일만하다 보니... 곡식은 많이 거두어 들였지만... 진을 다 빼고 말아서 그냥 죽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베짱이들은 본의 아니게 개미의 집을 차지하고서는 그 겨울을 배불리 먹으며 아무런 걱정도 없이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개미와 베짱이를 패러디한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여 주는 바가 있습니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겠지만... 우리들에게는 쉼과 즐거운 놀이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생각하게 하는 바가 큽니다. 얼마 전에도 그런 발표가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망 이유 중에서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지금도 40분마다 한 사람씩... 하루에 약 41명이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고 있다고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든 말이지요. 나이가 들면 암이라든지 심장질환 같은 것이 가장 커다란 죽음의 이유이지만, 2,30대의 경우에는 자살이 첫 번째입니다.
최근의 자살에 대한 통계를 보면 지난 1990년에는 하루에 7.6명이었습니다.
그것이 십년 뒤인 2001년에는 14.4명으로 배로 늘어났고, 지난 2009년에는 31명이더니 올해 들어서는 거기에다가 열 명 정도가 더 늘어난 셈입니다.
일지기 자살의 통계를 가지고 그 원인에 접근하려 하였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껭은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는 이유를 공동체성과 연관 지어서 해석을 하였습니다.
공동체성이 강한 사회... 다시 말하면 사람들 사이의 유대 관계가 끈끈한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에 비해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영국의 자살률은 이탈리아보다 두 배나 높고, 덴마크는 영국보다 네 배나 높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오늘의 통계가 아니라 뒤르껭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의 상황입니다.
그는 이러한 국가별로 차이를 그들의 종교와 연관 지어서 해석을 하였습니다. 자살률이 가장 높은 덴마크는 개신교 국가이고, 그 중간인 영국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중간인 성공회가 국교입니다. 자살률이 가장 낮은 이탈리아는 가톨릭국가이지요.
뒤르껭은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이 사회 통합적인 성격이 강하다고 보았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데, 가톨릭은 사제를 중심으로 해서 성도들 상호간의 연대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본 것이지요.
따라서 자살은 서로간의 연대성이 강한 사람들 보다는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들 속에서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그는 자살의 원인을 규정합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그는 결혼한 사람이 미혼인 사람보다, 대가족의 구성원이 핵가족, 편부·편모 가족의 구성원보다 자살률이 낮다는 사실을 들고 있습니다.
이런 뒤르껭의 견해를 빌자면... 우리나라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점점 더 늘어 나는 까닭을 우리는 공동체의 붕괴 속에서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좀 힘이 들고 어려워도 누군가가 나를 강하게 붙잡아 주고 있고... 너를 바라보면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다시금 추스르고 일어날 수가 있겠지만... 만일 이 세상에서 오로지 나 혼자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도 다른 사람과 연대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려 할 때에... 쉽사리 생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 왔다는 것... 마치 제로섬과 같은 게임에서 살아남아야만 생존할 수 있기에... 남북이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물리쳐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절박한 상황부터 시작하여서... 우리는 그동안 경쟁에 익숙하여 있습니다.
아마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처럼 그 짧은 시간에 달라진 나라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그동안 우리는 너를 적으로 생각하고 경쟁을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운전을 하고 도로를 다니다가 덤프트럭 같은 큰 차들이 돌진해 오면 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툭하면 불을 번쩍거리는데... 불쾌하다고 해서 맞부딪힌다면... 나는 남아나는 게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사정을 보면 그 차들이 왜 그렇게 난폭하게 다니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하루에 몇 번을 왕복하는가... 이를 테면 흙을 퍼서 나르는 차가 현장에서부터 흙을 버리는 곳까지 몇 번을 왕복하는가?
여기에 따라서 그가 받는 몫이 달라진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니 군대에서는 그런 식으로 일하는 것을 ‘돈내기’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자연히 급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지요. 일도 내기처럼 하니까요.
곁에 있는 누구를 배려한다든지... 생각한다든지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겠지요.
우리나라의 특징 중의 하나인 빨리 빨리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터널 공사를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완공하는 시간을 예정보다 1년 앞당기겠다고 하는 글이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가득이나 빠르게 공사를 하는 게 우리나라인데... 거기서 1년을 더 빨리 완공한다고 하면... 그것이 어떤 살벌한 과정을 거쳐야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이렇게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를 우리는 이런 것에서 찾을 수가 있지 않을까요?
참혹한 전쟁의 폐허로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그것도 남북이 서로 으르렁 거리는 현실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경쟁에 익숙해졌고... 살아남으려면 이겨야만 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보다 빨리 이기는 법을 알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참으로 남보다 많이 앞섰지만... 그러는 동안에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너는 없어져 버렸습니다.
공동체는 붕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를 살아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제 아침 신문을 보니 한 심리학자가 우리나라가 자살률만 높은 것이 아니라 출생률도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는데... 그것은 아이를 낳으면 키우는데 힘이 들거나 돈이 많이 들어서 그런 걱정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살아 보니 나도 답답하고 희망이나 살아가는 이유를 찾지 못하고 살고 있는데... 그런 삶은 나 하나로 충분한 것이지... 자녀들에게까지 그런 삶을 물려 줄 수는 없다고 하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좀 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이 거기에는 있다는 것이지요.
혹시... 누군가에게...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게 사는 사람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
이렇게 물어 볼 때에 혹시 우리나라가 거기에서 일등으로 꼽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살률은 가장 높은 축에 속하고 출산율은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더 잘 살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시급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가 보내는 1년의 시간 중에서 가장 좋은 시절인 팔월 한가위를 눈앞에 둔 오늘... 이런 무거운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은 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이기에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할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일만 하느라고... 삶을 즐길 수 없었던 개미... 일을 하다가 너무 지쳐 버려서 정작 자기가 거두어들인 것을 먹어 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린 불쌍한 개미...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 것인지... 그런 면에서 팔월 한가위 명절이야 말로... 우리가 삶을 즐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삶이 살맛도 나고... 즐거움과 감동으로 채워지는 그러한 삶이 될 수가 있을까? 너를 항상 적으로만 상대해야하는 치열한 경쟁의 삶이 상생의 삶으로 바뀔 수는 없는 것인가?
팔월 한가위 명절이야말로 그동안 우리에게 주어진 목적의 성취와 결과 중심으로 치우쳤던 우리의 삶의 패러다임을 나눔과 배려와 함께 즐기는 삶으로 바꿀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가지면서 뜻 깊은 명절을 맞이 해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65편의 말씀은 하나의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 우리에게 주어진 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을 마치 축제처럼 그렇게 즐기면서 살 수가 있을까?
우리가 맞이하는 날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들은 경이감과 감동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을까?
우리가 이제껏 그렇게 살아 왔던 것처럼... 남보다 더 많이 성취하지 않고서도... 남보다 더 앞서지 않고서도... 오늘 자기에게 주어진 모습... 오늘 자기가 서 있는 자리... 그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며... 경이감을 잃지 않고서 살 수는 없는 것인지...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하려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자면... 이러한... 정말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의 비결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깨달으며 살 때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들하고 크게 다를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그에게는 삶에 대한 즐거움이 있고, 감동이 있고... 오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 대한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자기가 서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시인은 세 가지 차원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끼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의 비결이라고 그렇게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자기가 이렇게 거룩한 성전을 찾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이 된 것... 그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자기 자신은 도저히 거룩한 자리를 찾을 수가 없는 사람인데... 그러한 나의 죄를 다 용서하시고 이렇게 거룩하고 소중한 자리로 나를 초대하신 하나님! 그는 자기가 지금 하나님의 전에 서 있다는 것으로 인해 흥분하고 있고, 깊은 감동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지요.
‘저마다 지은 죄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울 때에, 오직 주님만이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v.3) 저마다에게는 잊어버리기 힘든 죄와 부끄러움이 있는데... 그리고 그것 때문에 우리들 모두는 많이 힘들어 할 수밖에는 없는데...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들을 다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오늘도 하나님의 전을 찾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이미 용서하여 주신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들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게 하시어 주님의 뜰에 머물게 하신 그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집, 주님의 거룩한 성전에서 온갖 좋은 복으로 만족하렵니다...’(v.4)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 세상에서 그것처럼 행복한 곳이 없는 곳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인정해 주시고 초청하여 주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들과 하나님을 갈라 놓을 수 있는 것은 세상 아무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 때문인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얼마나 행복한 곳인지... 그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나 올 수가 없는 자리인 것이지요.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초대를 받은 사람들...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 연결된 사람들... 그들만이 오늘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에 올 때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나는 하나님께 특별히 초대를 받은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마음만 가진다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은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우리의 삶은 무미건조하고 메마른 일의 끝없는 반복이 아니라 기쁘고 즐겁기 짝이 없는 축제의 시간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지요.
이 시간... 혹시 의무감이나 억지로 이 자리에 나오신 분이 있다면... 내가 그렇게 해서라도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여러분 마음에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성전 안에서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은 우리의 삶을 전혀 새롭게 변하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힘입어서 사는 사람들은 단지 성전 안에서만 그것을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몸담고 살고 있는 자연... 여기서부터 시작하여 땅 끝에 이르기까지...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그에게는 예사롭지 않게 느껴집니다.
온 세상의 구석구석 어디에도 하나님의 흔적...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있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하게 산이 서 있다면... 그 산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바다에서 큰 파도가 일어나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눈에는 끈임 없이... 그리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되풀이 되는 것 같지만... 그렇게 하시는 분도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가운데서 일어나는 아주 평범하고 반복되는 자연의 현상들... 그러한 일들의 구석구석에도 하나님의 손길이 닿아 있음을 그는 믿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아주 작은 것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것... 그것은 사람들에게는 깊은 감동의 이유가 되고 커다란 기쁨의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작은 숨결은 커다란 사람들의 감사와 기쁨의 찬양으로 메아리칩니다. 이렇게 노래를 하지요.
‘땅 끝에 사는 사람들까지, 주님께서 보이신 징조를 보고, 해 뜨는 곳과 해 지는 곳까지도, 주님께서는 즐거운 노래를 부르게 하십니다.’(v.8)
‘주님께서 보이신 징조를 보고...’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찬양하고 즐거운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깨달아 지는 징조는 어떤 것인가요?
어떤 때 우리는 이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야...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야... 이런 것을 느끼면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들에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그것을 그토록 아름답게 꾸미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이름 없는 새를 보면서도 그것을 먹이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행복하고 풍성한 마음인 것이지요.
어떻게 그 마음이 즐거워지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마음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좀 마음을 더 열고 주변의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수가 있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살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시인은 자기의 일터에서... 자기가 하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는 직업이 농부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짓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인데... 그의 마음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항상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경이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를 들면 그런 것이지요.
봄이 되어서 밭을 일구고 곡식을 뿌릴 때가 되면... 적절한 때에 비가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비를 내리는 일이라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늘만 쳐다 볼 수밖에는 없는데... 적절한 시간이 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그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그럴까? 어쩌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기가 막히게 내 사정을 아실까? 비가 내려야 하는 때를 아시고 그렇게 적절한 시간에 비를 내려주시는 걸까?’
세상에 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 한 사람 뿐인가요?
아마도 같은 비를 맞으면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든지... 그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이 비를 내려 주셨어...’ 이렇게 봄비를 맞으며 남다르게 기뻐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것이지요.
새싹이 돋는 것 가운데서도 그런 신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씨앗을 심는 일은 자신이 하겠지만... 싹이 나게 하는 것은 그도 기다려야하는 일입니다.
그런 조바심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혹시 싹이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나...’ 조금 기다리면 올해도 여지없이 싹이 고개를 내밉니다.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단비를 맞으며 말이지요.
그러면 그는 여기서도 여지없이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고백합니다.
다른 모든 밭에도 새싹이 돋았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가 농사를 짓는 일은 마치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듯합니다.
소나 양들이 새끼를 낳고 자라나는 일... 그러한 모든 일들도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외양간에서 우는 양이나 소들의 소리들조차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처럼 그의 귀에는 들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는 1년 내내 자신이 수고한 일터를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큰 복을 내리시어, 한 해를 이렇듯 영광스럽게 꾸미시니, 주님께서 지나시는 자취마다, 기름이 뚝뚝 떨어집니다.’(v.11)
얼마나 생동감 있고, 경건하게 와 닿는 고백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터와 성전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지요. 그는 물론 성전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지만, 그의 일터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감사하게 되는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의 성소로 우리를 초대하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의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일터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이시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일터가 이렇게 될 수 있다면... 비록 우리가 하는 일이 힘이 들고.. 그 소득이 참으로 보잘 것 없어도... 우리는 오늘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무한한 자부심과 경이감으로 그런 일을 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깨달음... 오늘 내가 일하는 일터에 비를 내리시거나, 새싹이 움돋게 하시거나, 우리에 있는 소나 양들이 새끼를 낳고 그것이 자라게 하시는 분!
그것은 이곳에도 계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비록 내가 일하는 현장이 아무리 살벌하더라도 이런 믿음을 잃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도달한 곳은 정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한 참으로 좋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웬지 우리들은 여기가 좋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합니다.
다른 이들과 더불어서 잘 지내려 하기 보다는 여전히 경쟁하고 남을 물리쳐야만 살아남는다는 절박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여 이룬 것은 참 많은데... 자살하는 사람은 더 늘어나고... 아이는 낳지 않으려 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또 다른 모습입니다.
지금이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삶... 이제는 더 이상 너를 물리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노고를 인정하고 삶을 경축하는 진정한 축제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즐기는 진정한 축제의 시간... 그것은 우리가 문득 하나님을 느낄 때... 나 자신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거룩하고 전능하신 손길 안에 있음을 경험할 때...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번 팔월 한가위 명절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진정한 축제에 참여하는... 그리고 이미 나의 내면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축제의 자리에 나의 소중한 가족들과 이웃을 초청하여 함께 즐기고 축하하는 기쁨의 날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