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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27
말씀을 묵상하면서 기도하십시오.
저는 요즘 여호수아서를 본문으로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을 건넌 후 만난 첫 번째 성인 여리고 성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절감하고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했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 후 작은 성인 아이성 전투에서는 여리고성을 취할 때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범죄한 것으로 인하여 크게 패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그 죄를 제거하고 아이성을 정복합니다. 아이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들은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모여서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겠노라고 결단하는 언약을 체결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직후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과 아이성을 잇따라 점령하자 가나안 지역에 있는 족속들에게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족속의 왕들이 연합군을 편성하여 싸울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기브온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소식을 듣고 화친을 맺으려고 계략을 세웁니다. 사신을 선발하여 이스라엘 진영에 보내면서 아주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꾸밉니다.
본문 3-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3]기브온 거민들이 여호수아의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4]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그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6]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이 말씀에 보면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보이기 위해 낡아서 헤어진 전대와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낡은 신과 낡은 옷을 입고 곰팡이 난 떡을 준비해서 왔습니다. 그리고는 "우리는 멀리서 왔으니 우리와 약조합시다." 하고 말합니다. 멀리서 왔으니 화친을 하자는 말은 신명기 20:10-15에 있는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물론 멀리 있는 나라와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으니 화친을 맺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기브온 백성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멀리 있는 백성들과는 평화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신명기 20:10-15에서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10]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11]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지니라 [15]네가 네게서 멀리 떠난 성읍들 곧 이 민족들에게 속하지 아니한 성읍들에게는 이같이 행하려니와
하나님은 가까이 있는 성읍들은 진멸하고 멀리 있는 성읍들과는 화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것은 가까이 있는 성읍의 사람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있을 때에 그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우상숭배에 전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진멸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에는 그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7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희는 우리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약조할 수 있겠느냐?" 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때 그들이 "우리는 당신들의 종입니다." 하고 아부를 시작합니다.
9-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9]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명성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또 그가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이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하나님이 과거에 하신 일을 열거합니다. 애굽에서 탈출하게 하신 일과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모세를 통하여 한 일등 최근의 일이 아닌 과거의 일만 열거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최근의 일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서입니다.
11절에 보면 그들은 계속하여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이 될 것을 강조합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1]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거민이 우리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맞아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이니 청컨대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하라 하였나이다
그래서 결국 1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들과 화친을 맺게 됩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5]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결국 여호수아마저도 깜빡 속았습니다. 불과 사흘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름한 옷차림으로 자신들을 찾아와서 계약을 맺은 사람들이 가까이에 있는 기브온 백성이라는 것을 알게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약속을 했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제거하지 못하고 함께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있는 사건의 개요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건을 차근차근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곧 잘못된 결정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우리도 종종 이와 유사한 일을 만납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내 앞에 주어진 이 길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혼동될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두 갈래 갈림길이 있는데 그 속에서 어떤 길이 옳은 길인지 혼동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갈등상황에서 우리도 종종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3일 후에 알았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일정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결정이 잘못된 것이었다고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그런 결단의 순간에 어떻게 잘못된 판단을 내리지 않을 수 있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사건은 8장에서 율법을 지키겠다고 결단한 사건 직후에 발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전투에서 완벽한 승리도 겪고 완벽한 실패도 겪었습니다. 그 후 다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아이성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여러 과정을 겪은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모여서 이제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말씀들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합니다. 자신들이 바로 직전에 성공과 실패를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그들은 깊이 각인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짐한 직후에 이 일이 발생합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기 좋게 실패합니다. 바로 얼마 전에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고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 뜻대로 살겠다고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모여서 언약을 맺었지만 바로 그 직후에 이 첫 번째 시험에서 보기 좋게 무너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다짐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른 말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이 우리의 다짐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귀한 교훈을 얻기를 바랍니다.
1.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못된 결정을 내렸는가?
우리가 이 문제를 알면 잘못된 결정을 피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1]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거민이 우리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맞아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이니 청컨대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 하라 하였나이다
본문의 상황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기브온 백성들의 대표자들은 자신들이 화친을 맺고 이스라엘의 종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12-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2]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오히려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취하였더니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 났으며 [13]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더니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심히 길므로 인하여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본문을 통해서 당시의 정황을 보면 이들은 분명히 멀리서 온 사람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떡은 곰팡이가 났고 그들의 포도주 부대는 해어지게 되었습니다.
14절에 있는 말씀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14]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여기서 그들의 양식을 취했다는 것은 취해서 조사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몰랐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있는 백성과만 화친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따라 이들이 어디에서 온 백성들인가를 조사했습니다. 열심히 묻고 그들의 떡을 취해서 날짜를 계산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해 보이는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인 여호수아 9장의 핵심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이 짧은 구절 속에 핵심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묻지 않았을까요? 그들은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아이성에서 실패한 후에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건에서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왜 묻지 않았을까요? 혹시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서 묻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스스로 찾아와서 종이 된다고 하니 전쟁할 필요도 없이 수 많은 종들을 거느릴 수가 있는 그렇게 좋은 기회가 왔으니 혹시나 너무 좋은 기회라서 묻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또한 눈으로 보기에도 분명히 멀리서 온 것으로 보이니 주님 앞에 물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덧 사라져 버리고 자신들의 상식적인 판단을 믿게 된 것은 아닐까요?
뜻밖에도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 믿음이 더 뜨거워집니다. 삶의 고난이 닥쳤을 때 그 고난 속에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깊이 묵상하며 자신을 돌아봅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생각하며 자신을 깊이 성찰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이 잘 풀릴 때, 우리의 인생에 화려한 날이 왔을 때 놀랍게도 그 때는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쉽게 단정하고 섣불리 결정합니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쉽게 단정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좋은 기회일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화려한 색으로 포장된 것일수록 함부로 삼켜서는 안됩니다. 그럴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럴수록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면을 보는 눈을 잃게 됩니다. 외형적인 것만 보고 마음을 빼앗겨 버립니다. 한 번 마음을 빼앗기면 더 이상 사람들의 충고도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기회처럼 보일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인정하고 엎드려야 합니다. 상식이라는 것이 좋은 것이고 적절한 것이지만 때로는 그 상식이 없는 것만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은 늘 정확하다는 망상을 버려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임을 고백하면서 넓은 길일수록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 때 그들은 속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은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신들의 눈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상식적인 판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물질 세계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 세계의 가치관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눈으로 보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사실인 것이 아닙니다. 마술사들이 마술을 부리는 것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봐도 그 속임수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보았다는 것 때문에 자신의 판단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이런 실수를 매일의 삶에서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브온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였기 때문입니다.
9절에 보면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지방에서 왔사오니"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입버릇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입으로 떠벌린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내면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형식에 빠져 내용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눈으로 볼 때 옳게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면 우리도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어리석은 범죄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 자신의 판단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2. 잘못된 결정을 내린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 부분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다시는 기회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무자비한 분입니까? 한 번 기회를 주시고 그 시험에서 탈락하면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는 그런 분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된 결정을 내렸을 때도 그 속에서 새로운 회복의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6]그들과 언약을 맺은 후 삼 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근린에 있어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라 함을 들으니라
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어떻게 합니까?
18-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18]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한 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19]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20]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비록 자신들이 속임을 당해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 결정이 하나님 앞에 언약한 것이므로 그들은 그 결정을 지킵니다. 이것은 물론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결정의 경우는 최대한 빨리 돌이켜서 원상 복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불신자와의 결혼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불신자와의 결혼이 옳지 않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만약 불신자와 이미 결혼한 상태라면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혼한 후에 이 결혼은 잘못된 결혼이라고 선언하고 헤어지는 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비록 잘못된 결정이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조를 맺은 것이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조를 지킵니다. 훗날 사울이 많은 기브온 거민을 죽임으로써 이 약조를 깼을 때 하나님은 기브온의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있고 그런 경우는 그 약조를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불신자와 결혼한 경우, 그 사람은 자신의 결정에 따라 평생을 그 배우자와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본인의 결정이므로 그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은 자신이 감당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 결정 속에서 그 사람에게 새로운 사명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배우자를 그리스도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불신자와 이미 결혼한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배우자를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배우자를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은 경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그 결정을 존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맺은 약조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 거민을 사용하여 다른 족속들을 정복하게 만드십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기브온 거민의 배반 때문에 분노하여 기브온을 치려고 침략했던 가나안의 연합군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 이깁니다. 이것은 결국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키시고 새로운 사명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후에 깨달았다면 섣불리 그 결정을 파기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 앞에 다시 물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그런 잘못된 결정을 회개하고 다시 그 속에서 회복케 하시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서둘러 약속이나 결정을 파기하여 더 큰 어려움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3. 진로나 어떤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중요한 일이 있고 좋은 일이 있을수록 내 판단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과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는데,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는데, 두 갈림길을 두고 기도할 때 과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뜻을 보여주시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들것입니다. 왜냐하면 실제 상황에서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알려주시는 방법에 있어서 구약시대와 오늘날은 차이가 있습니다.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을 입고 직접 강림하셔서 "이것이 내 뜻이니라" 하고 말씀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날 그런 방법으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뜻, 다른 말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 묻는다는 것은 사실상 성경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가장 완전하고 최종적인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성경을 묵상하는 것이라는 사실도 아멘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고민하는 일이 성경에 직접 나올 수도 있지만 사실 나오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럴 때는 말씀 속에 담긴 원리를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모든 삶에 적용될 수 있는 원리, 혹은 정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서 주님 앞에 엎드려 묻는다는 것은 오늘날의 상황으로 말하면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원리를 가지고 자신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입니다.
4. 오늘 말씀에서 주는 원리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제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생각해야 할 중요한 원리를 찾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통해서 아주 중요한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원리는 눈으로 본 것으로만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으로 보고 판단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양식과 자루가 다 썩고 낡은 것임을 보고 쉽게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이것은 종종 실패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은 단지 물질세계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눈은 사실 아주 간사한 것입니다. 자신의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서 보는 안목도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알고자 할 때 눈으로 보는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것을 하나의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직장을 정할 때 단지 월급이 많다는 이유로 정했다가 자신의 소명과도 관계가 없고 일에 기쁨도 없는 일을 직장으로 삼아야 하는 낭패를 겪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린다고 해서 모두 영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거민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인하여 왔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실수를 종종 저지릅니다. 진로를 결정할 때 진정으로 영적인 일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단지 그 일이 교회와 관련이 있다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이라는 것만을 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디에서 일을 하느냐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무조건 성전이라는 장소에서 하는 일만 좋아했다던가 한다면 그런 생각이 옳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자주 타락한 제사장들을 향해서 분노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다윗과 같은 정치인이자 군인인 사람을 보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일을 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는가가 하나님의 뜻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마음과 어떤 목적으로 하는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이것은 결국 형식과 내용의 문제가 됩니다. 형식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이런 중요한 두 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앞에 있는 문제가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이런 원리를 가지고 비추어 보고 깊이 묵상을 하면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내 삶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지 않으셔도 성경의 원리를 찾아서 자신의 삶을 그 원리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시간에 제 간증을 하겠습니다.
저는 설교시간에 간증을 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 중에 간증을 하다보면 종종 그 설교자의 이미지가 실제보다 좋게 포장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저 자신도 말씀을 따르지 못하고 실수할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 간증을 드립니다. 다만 제가 어떻게 진로의 문제를 두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했는가를 말씀드리는 것이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 간증을 드립니다.
제가 새누리 교회에 오게 된 과정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했는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1999년도 여름쯤에, 저는 공부하던 것을 한 학기쯤 남겨두고 있었습니다. 논문을 마무리 지어가고 있었고, 한 학기 정도만 논문을 쓰면 이제 곧 마치고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한 학기 남았는데, 아무 곳에서도 일하러 오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국에서 어떤 분이 제게 새누리 교회를 추천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새누리 교회가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제가 대전에 오랫동안 살았지만, 제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는 새누리 교회는 개척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름의 교회를 처음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실 깊은 생각 없이 지원서류를 보냈습니다. 아무 데도 오라는 곳이 없으니까 어디든 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서류를 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은 서류를 새누리에 보내고 얼마 지난 후였습니다. 그때까지 아무런 연락도 없었는데, 서류를 보내자마자 한 두달 사이에 세 곳에서 와 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한 가지는 제가 그 당시에 학교에 있는 작은 연구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연구소의 소장님께서 연구소 부 소장직을 맡아 달라고 제안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가지는 미국에 있는 어떤 교회들에서 목사로 와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갑자기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길이 없었기 때문에 고민하지 않고 깊은 생각 없이 서류를 보내게 되었는데 그 후에 네 개의 진로가 나타나자 제 마음에 혼동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저는 미국에 몇 년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공부만 마치면 내 조국을 위해서 섬기겠다는 마음을 늘 품고 있었는데, 막상 마칠 때가 되고 미국에서 몇 년 있을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자 조금씩 조금씩 제 마음이 미국에 더 머물러 있고 싶다는 생각 쪽으로 기울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핑계를 대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당시에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세 가지 핑계를 대었던 기억이 납니다. 첫 번째는, 제가 연구소에서 일을 더 하면서 공부한 분야에서 조금 더 실력을 쌓고 싶었던 것이고, 두 번째는 그 당시에 제 아내가 한 학기를 남겨두고 있었는데, 제 아내도 공부를 함께 마치게 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남들은 일부러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미국에 오는데, 이제 교육받을 만한 때가 되었으므로, 미국에서 조금 더 학교에 다니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놓고 주님 앞에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 앞에 일종에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9월경이 되었습니다. 9월 달에 제가 켄터키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교 신학교에 학교 일로 출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갈 때에는 8일 예정이었는데, 도착해서 바로 그 다음날 일을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일주일간의 여유가 생겼습니다. 혼자 갔기 때문에 학교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묵으면서 일주일동안 아무런 할 일이 없이 지낼 기회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기도할 시간을 주시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그때부터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면서 묵상했던 말씀이 디모데 전서와 디모데 후서입니다. 디모데 전서와 후서를 묵상하게 된 것은 그것이 목회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로 목사 사도 바울이 젊은 목사 디모데에게 주는 목회적인 권고이므로 젊은 목회자로서 평생을 아름답게 목회한 사도 바울의 권고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을 계속해서 주로 방안에 머물면서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 이 세 권의 목회서신을 계속해서 묵상했습니다.
그러다가 디모데 후서 2장 4절의 말씀이 마음속에 강하게 부딪혀오기 시작했습니다.
[4]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그 말씀이 제 마음속에 계속 남았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제 마음을 파고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이 한 구절을 가지고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뜻일까? 계속 주님 앞에 묵상하면서, 제 삶을 돌아보면서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그 세 가지, 저로 하여금 미국에 좀 더 머물고 싶도록 만들었던 그 세 가지 이유를 한 가지씩 이 원리에 비추어보았습니다. 과연 그것들이 자기 생활인가, 아닌가? 내가 분명히 하나님의 군사로 모집되었다면, 자기 생활에 얽매일 수 없는데 그것이 과연 자기 생활인가, 아닌가? 하나씩 되짚어 보니, 전부 다 '자기 생활'이었습니다. 연구 더 하겠다는 것도 제 생각이고, 아내가 공부하겠다는 것도 저희들의 사생활이며, 아이들 공부 역시 자기 생활이었습니다. 그렇게 비추어 보니 그 세 가지가 전부 자기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있구나. 네 개의 진로 가운데서 세 가지가 자기 생활이라면 남은 진로가 주님의 뜻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이미 마음으로는 거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한국으로 가라고 하시는구나, 미국에 있는 여러 가지 일 들 다 제쳐놓고 한국으로 가라고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저는 결정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결정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제가 왜 미루고 있었냐 하면 새누리 교회에서 결정을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결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안 갈 곳에는 안 가겠다고 말을 해 주어야 다른 목회자를 구하든지 연구원을 구하든지 할텐데, 제가 대답할 시간을 위해 기도해보겠다고 해 놓고 계속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이 마음에 편치가 않았습니다. 또 새누리 교회를 생각해보니 그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만약 나중에 교회에서 결정을 했는데 다른 곳에 가겠다고 하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굉장히 답답했습니다. 주님의 응답을 따라서 그냥 나머지 세 개를 다 던져 버리면 되는데, 왠지 그것이 쉽게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인간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했다가 새누리 교회에서 다른 사람을 결정하면 전 뭐 하나요?' 결정만 되면 다른 건 무조건 포기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는데, 주님 앞에 대답을 미루고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러다가 10월달이 되었습니다. 10월에 갑자기 아내가 급성 A형 간염 판정을 받고 쓰러졌습니다.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정신없이 논문을 마무리하고, 한 두달만 더 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는데, 굉장히 당혹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환경적인 사건, 아내가 지병으로 쓰러진 것을 보면서 저는 주님으로부터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내가 공부를 마치는 것을 도와주고 싶습니다'하고 기도했던 것,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환자가 되었으니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의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라고 주님께서 말씀해주시는 것으로 제게 해석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결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찾아가 소장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교회들에 연락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국으로 가야겠습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응답해주신 것으로 확신하고 다른 것을 다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새누리 교회로 가려고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하나님은 제게 한국으로 가라고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새누리 교회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제게 주신 말씀 가운데서 저는 그 분의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순종하고 새누리 교회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그것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생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고민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 앞에 엎드리십시오. 내 생각으로 하지 않겠노라고 결단하시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게 주님의 뜻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성경의 원리를 붙드십시오. 그 성경의 원리를 붙들고 그것을 묵상하면서 씨름하면 하나님께서 그 원리를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로와 자신의 상황을 하나 하나 그 원리에 대입해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바로 하나님께 묻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완전하신 계시인 성경에서 주는 원리가 어떻게 내 삶에서 적용될 수 있는지 그 원리를 붙들고 씨름하고 매달리는 것을 하나님께 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말씀의 원리를 붙들면 하나님께서 말씀가운데 우리에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말씀의 원리에 부합하는 진로가 여러 가지라면 그 때는 너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느 길을 택하든지 그것은 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게 그 길에서 다만 충성을 다할 것을 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 경우처럼 다른 모든 것이 다 말씀의 원리에 벗어나고 한 가지만 말씀의 원리에 부합한다면 그 때는 아무리 눈으로 보기에 좋고 아무리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처럼 보인다해도 말씀의 원리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과감하게 결단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마다 중요한 지침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귀한 새누리 가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