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오전에 약수를 뜨기 위해 자전거를 타려고 했다. 하지만 또 자전거 바퀴 바람이 빠져 있었다. 한 달 전 누군가 공기주입구 밸브를 빼가 바람이 빠졌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지난번엔 사고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엔 고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 점에 갔더니, 공기주입구 밸브만 그런 게 아니라, 칼로 타이어 바퀴 옆을 찢은 흔적이 있다고 한다. 덕분에 천원에서 오천원으로 다시 이만원으로 비용이 더 들었다.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내 자전거가 거리적거렸을까? 벌써 8년을 탄 싸구려 자전거인데 모르겠다. 특별히 내 자전거만 타켓이 된 것일까? 결국 나는 자전거 주차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어른이 했든, 아이가 했든 누군가가 자전거 바퀴에 칼을 대고 고의적으로 망가뜨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게 아이였으면 차라리 좋겠다. 사춘기 때는 화가 나 이렇게 화풀이하고 싶을 때도 있으니 더러 그런 실수를 할 수도 있다.
내 자전거를 고치던 청년은 우스개로 ‘안 좋아요, 안 좋아요’ 한다. 자전거가 영 고물이라는 거다. 그래도 전주에서, 타던 자전거가 부러지고 십만 원 주고 사서 타던, 모악산이나 전주대나 전북대 등 많이 쏘다니고, 서울 와서도 중랑천과 주말농장, 창동, 방학동, 우이동을 타고 다니던 정이 많이 든 친구다.
내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을 다시 느꼈다.
바탕이 그립다
바탕이 그립다. 형체에 너무 집중하며 살았다. 그러다보면 정말 바탕을 잃는다. 하지만 모든 것음 바탕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나는 동양화를 좋아한다. 그림도 있지만 여전히 바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바탕이 있어야 그림이 가능하다는 걸, 바탕 속에서 그림을 바라보는 법을 동양화는 가르쳐준다. 마당이 있던 시절, 시골 마당에서는 자치기를 하고, 곡식을 말리고, 돼지를 잡고, 잔치를 하고, 화초를 가꾸었다. 공터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멋진 놀이터인가? 도시에 살면서 나는 자주 바탕을 잊는다. 간혹 산이나 들, 혹은 바다를 가면 바탕에 대한 느낌을 다시 떠올린다. 바탕은 내게 무이며 도이며 자연이기도 하다. 사람도 바탕이 있는 t 사람이 있다. 남을 받아 줄 여백이 있고, 배경이 있다. 공연히 폼을 잡는 것일까? 나는 닥나무로 만든 한지의 섬유질 자국도 거칠게 남아 있는 바탕이 좋다. 바람이 통하고 그림자가 비치는 그런 한지가 좋다. 그곳에 그림을 그리면 정말 산과 구름과 내와 나무, 그리고 사람은 작게 그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게 서양화보다 더 사실적이고 객관적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서양화는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이어서 자연에 놓인 인간의 위치도 인간중심적으로 왜곡된 것 같다. 오늘은 바탕을 생각했다.
첫댓글 ...시절이 힘들다는 것을 알아본는 징표의 하나.... 자전거 바퀴의 고무밸브가 없어지는 일.... 우리 아파트에서도 한참을.....--; (댓글을 달고 보니 어두워 수정을 ^^;;...)
예전엔 종교와 신에 대하여 많은 외면을 하였습니다. 무신론마저도... 지금은 어느 종교나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음이 보이는데 그 까닭은 한 바탕에 두고 있음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외면을 하신게 아니군요. ^^ 모든 종교가 하나로 이어짐을 보실 정도면, 도사입니다. ^^ 저도 종파를 뛰어넘어 하나로 소통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라고 봅니다. 들품님의 말씀처럼 '한 바탕'임을 자각하는 것이 그 문일 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