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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9편 4절: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표면적으로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게 뭐냐? 성경책을 들고 다니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서 안 믿는 사람은 무엇으로 죽이느냐? 무기를 가지고 자연생명, 육신생명을 죽인다.
안 믿는 사람들은 자연생명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이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이 생명이 죽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그러면 성도는 어떠냐? 영이 중생된 성도는 육신의 생명과 함께 영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성도는 이 영의 생명을 자기의 주격적인 생명으로 삼고 이 생명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거다.
영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위주로 살면서 육신의 생명은 자기의 주격적 생명으로 삼고 살게 되면 자기의 육신의 생명은 아예 하나님께 맡겨놓고 사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주님을 위해 얼마든지 순교를 할 수 있는 거지만 육신생명 위주로 살게 되면 자기의 육신생명에 위협이 오면 주님을 배반하게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위험에 처했을 때 날 좀 살려달라고 하는 것은 무슨 생명을 살려달라는 거냐? 육신생명이다. 이건 신앙정신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어느 생명을 자기의 주격적 생명으로 삼고 사느냐에 따라 욕을 먹기도 하고, 무시를 당하기도 하고, 귀히 여김을 받기도 하는 거다.
그렇다면 성도를 넘어뜨리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성도가 힘 있게 잡고 있는 게 뭐냐? 진리말씀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 주님이다. 교훈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이걸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거다. 반대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말씀을 버리는 거다. 자기 아버지를 무시하면 아버지 말씀을 안 듣는 것과 같다.
악한 자들이 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쓰는데, 그 방편 중에 어떤 방법이 가장 쉽게 성도를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 진리성도를 넘어뜨리기 위해서는 진리를 놓치게 하는 거다. 진리를 놓치면 그 성도는 나가떨어진다. 힘이 없다. 진리를 놓치게 하기 위해서 성도의 마음 속에 세상을 자랑하고 세상바람을 넣는데, 그 중에 하나가 신비주의적 정신이 들어가게 한다. ‘무엇을 보았다’ 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다. 이 외에도 성도를 넘어지게 하는 여러 가지 기독교의 함정이 많다. 구복주의, 극기 극복주의, 일반 도덕성 주의, 사회주의 등등 많다. 이렇게 하는 배후의 주동자는 마귀고, 또 그 배후의 주권을 가진 분은 하나님이다. 즉 하나님의 허용으로 그런 일이 되어지는 거다.
마귀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여긴다면 이 사람은 은연중에 신이 둘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다. 하나님은 선신이고 마귀는 악신으로 생각을 하는 거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속에 이런 정신이 너무 많다. ‘하나님은 한 분이다’ 라는 것은 주권자도 한 분이요, 참 신도 한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참 길도 하나밖에 없는 것인데, 앞에서 말한 기독교 안의 여러 가지 함정들은 선악과 따먹고 나온 차원에서 인간들이 제 멋대로 길을 만들어 놓은 거다.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은 사람을 해코자 하는 마음을 가졌고, 성도를 해코자 하는 악한 자들은 성도들에게 비진리를 퍼뜨린다. 진리로 가는 마음을 세상 쪽을 보게 해서 세상 길, 넓은 길, 사망 길로 가게 하는 게 악한 자들이다. 거짓 종들이 이런 짓을 한다. 불타지고 없어질 종교적인 업적자랑, 물질자랑의 개념으로 예수 믿게 하고, 이런 것을 이루라고 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성경을 이런 사고방식으로 푸는 것은 성경이 아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선한 것을 받지 못하면 질적으로 하나님의 성질 성격과 같은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가끔 가는 칼국수 집이 있는데, 이 식당 메뉴 아래에 성경구절을 써놓고 ‘OO교회’ 라고 붙여 놨다. 그런데 이 식당은 주일에도 장사를 한다. 이 식당주인이 나가는 교회가 주일예배를 4부로 나눠서 드린다고 하는데, 왜 주일예배를 몇 부로 나눠서 드리는 거냐? 물론 교인은 많고 예배당은 좁고 해서 나눠서 드린다고 하겠지만 정말 그러냐? 이 식당주인처럼 주일에 편한 시간에 얼른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장사를 해서 돈을 벌라고 나눠서 예배를 드리는 건 아니냐? 듣기로는 그 교회에서는 주일에 장사를 해도 괜찮고, 물건을 사러 다녀도 괜찮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이게 다 뭐냐? 이건 누가 뭐라고 해도 신앙이라고 볼 수 없는 거다. 믿음은 없더라도 뭔가 교인의 냄새라도 나는 규모는 있어야 할 텐데 이것마저도 없다면 이 사람 속에는 돈만 든 거다. 식당 메뉴판 아래에 왜 성경구절을 써 놓은 거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오라고 한 게 아니냐? 성경구절을 팔아서 주일에 장사하고, 예수이름을 팔아서 믿는 사람이 오게 해서 돈 벌고, 그래서 십일조 내고, 감사헌금 많이 내면 이게 믿음이 좋은 거고, 하나님은 이런 돈을 기쁘게 받으시는 가냐?
오늘날 교회 안에 가룟유다 천지다. 돈을 좋아하는 정신이 가룟유다의 속성이다. 이런 사람들이 가룟유다는 돈을 좋아해서 돈 받고 예수를 팔아먹었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말할 거다. 그러면 가룟유다가 지금 살아난다면 이런 교인들에게 뭐라고 하겠느냐? ‘나는 한 번만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팔아먹었지만 너는 돈 때문에 얼마나 여러 번 예수를 팔아먹었느냐?’ 라고 말할 것 같다. 그러니 가룟유다보다 벌이 몇 배나 더 되겠느냐?
성경에 악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칠 배라고 했는데 만일 의인을 죽인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일반적으로 악한 자들은 일반인들도 죽이고 교인들도 해코자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수를 믿는 사람인데도 악한 자가 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뭐가 악한 거냐? 기독교 안에서 악한 사람을 보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보는 거다. 일반사람들의 차원에서 보려고 하면 기독교 안에서의 악한 사람을 못 본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의 악인이 엄청나게 훌륭하고 선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일반사람들은 표면만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속 중심을 보신다. 일반사람들은 속 중심을 못 본다. 하나님께서 속 중심을 보시듯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속 중심을 보는 영의 눈으로, 진리이치의 눈으로 봐야 틀림이 없다. 이 눈으로 보는 기독교 안에서의 악한 자들은 성도들을 넓은 길로 끌고 간다. 그러면 넓은 길이 뭐냐? 성도들 속에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집어넣어서 세상소원 목적으로 살게 하는 거다. 이게 넓은 길이다.
예수를 믿어도 넓은 길로 가면 제 멋대로다. 주일에 장사도 하고 쇼핑도 하고 그런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이 성경을 보느냐? 안 본다.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느라고 성경을 볼 새가 있겠느냐? 성경은 안 봐도 맛있는 것은 잘 찾아먹는다. 이런 사고방식이 어찌 돌아가겠느냐? 사고방식이 항상 세상으로 나가 있다. 하나님의 것은 없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가면 좋은 소리 하겠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일종의 수양 식으로 하나의 종교인으로 교회에 다니는 거다. 하나님을 불교인이나 이방종교인과 같은 차원으로 믿는 거다.
예수님의 사고방식, 이해타산, 소원 목적의 차원이 로마시민들의 차원의 질과 같으냐? 분명히 다르다.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세상사람들의 사고방식, 소원 목적과 똑같다면 예수를 안 믿는 사람으로 취급이 되는 거다. 예수님 속에 든 정신, 사상, 이해타산, 평가성, 모든 소원 목적이 당시의 바리새교인들과 같았느냐? 예수님의 것은 하늘의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땅의 것이다. 성경구절을 이용해서 사람의 눈에 보이는 덩어리 큰 것, 외모, 모양을 자랑하고 가지라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에게 화를 선언 받았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내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아라’ 라고 하셨다. 그러면 당시에 세계 최고인 율법사, 서기관, 대제사장,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이 도둑질을 했느냐? 안 했다. 강도짓도 안 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떤 눈으로 보시고 이 말씀을 하신 거냐? 성령의 일곱 눈을 가지고 보니 그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경의 뜻을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성경구절을 잘 외우는 것을 사람들 앞에 자랑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악한 자라고 하셨는데, 마귀가 능력 면에서 하나님과 일대 일로 대항을 할 수 있는 존재냐? ‘내가 저 마귀 놈만 없으면 구원역사를 잘 할 텐데 구원역사를 펼치려고만 하면 꼭 방해를 놓으니 저 놈을 어떻게 할 수 없나?’ 하는 식으로 마귀가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냐? 아니다. 마귀는 성도를 위한 심부름꾼이다. 감옥의 간수가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게 아니라 법이 가두라고 하면 가두듯이 마귀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마귀를, 원수를 보내는 것은 성도의 이룰구원을 방해하라고 보내는 거냐, 신앙실력을 닦게 하려는 거냐? 원수를 동원시켜서 성도를 완전히 죽여서 지옥에 끌고 가게 하려는 게 아니라 본뜻은 영능의 실력을 닦게 하려는 거다.
기독교 안의 악한 자들은 칼을 들고 성도를 죽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말을 가지고 성도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게 아니라, 좁은 길로 가는 하는 게 아니라, 생명 길로 가게 하는 게 아니라 넓은 길로 쉽게 가자고 하는 가르침이다. 이것이 거짓 종들의 수법이고 마귀의 수법이다. ‘그리로 가면 네가 하나님처럼 된다. 영광스럽게 된다. 성공을 한다’ 이렇게 들어가 있다. 이렇게 해서 교인들을 생명 길로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기독교 안에서 악한 자다.
이런 자들은 교인들에게 예수이름으로 불타지고 썩어질 세상 것을 가지라고 한다. 이런 교훈을 받은 교인들은 병자나 가난한 집에 찾아가서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병 낫는다고 한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부자에게 찾아가서는 뭐라고 할 거냐? 예수 믿으면 가난해진다고 할 거냐? 건강한 사람을 찾아가서는 뭐라고 할 거냐? 예수 믿으면 병이 든다고 하느냐? 물질이 많은 사람에게 가서는 충성봉사를 많이 하면 상급이 많다고 할 거다. 성경으로 보면,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런 자들이 악한 자들이다.
좁은 길 생명 길을 가는 성도들이 이런 자들에게 꾀임을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무조건 ‘주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라고 말만 하면 되느냐? 주님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진리를 붙들고 늘 깨달음으로 나가야 도움을 받는 거다. 진리의 인격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보호하신다.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평소에는 아무렇게나 살았는데 풀무불 앞에서 ‘하나님, 우리를 도와주소서’ 라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불속에 들어가서도 타지지 않게 해 주신 거냐? 이들을 불속에 집어넣기 전에 나팔 불고 피리 불고 했는데, 이것은 우상 앞에 절을 하라는 분위기를 잡는 거다. 세 친구들이 여기에 넘어가서 절을 했느냐? 마음이 빼앗겼느냐? 안 빼앗겼다. 그걸 안 하니까 목숨의 위협까지 온 거다.
다니엘도 그렇고, 신실한 종들도 그렇고 평소에 늘 하나님 앞에 바로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시험이 있는 거다. 이런 시험은 처음부터 큰 게 오지 않는다. 평소에 알게 모르게 시험이 온다. 노골적으로 ‘너를 죽인다’ 라고 하면 금방 알아서 ‘아이고, 살려주십시오’ 라고 하겠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시험이 아닌 것처럼 오기 때문에 눈치를 채지 못한 채 시험에 넘어갈 수 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도 맡긴다고 했듯이 작은 시험을 하나하나 이겨나가면서 이것이 누적이 되고 이기는 것이 자기에게 익혀져서 큰 것까지 능히 이길 수 있는 실력화로 된다.
내가 진리인격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성도를 보호하신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을 향해서 자기를 살려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도움을 구한다. ‘나의 구원은 오직 주께만 있나이다’ 이런 기도를 안 하더라도 말씀을 붙든 상태는 하나님을 붙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을 도우신다.
영이 중생된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사신 당신의 몸이다. 그러니 나는 누구의 것이냐? 주님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죽고 사는 문제는 당신의 손에 있는 거고, 나는 목숨에 위협이 오더라도 오로지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나가야 한다. 이게 충성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가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이 있는데, 환난과 고통 가운데서도 진리를 붙잡고 순교를 당했다면 이 사람은 이룰구원 면에서 구원이 된 거냐, 안 된 거냐? 구원이 된 거다. 그러면 안 믿는 사람에게 물으면 뭐라고 말을 하겠느냐? 구원을 못 얻었다고 한다. 그러면 세상 속화된 교인에게 물으면? 역시 구원을 못 얻었다고 한다. 왜 못 얻었다고 하는 거냐? 기도를 안 했기 때문이라고 할 거다.
속화된 교인이 ‘기도를 해 봐라. 그러면 구원을 얻는다’ 라고 말한다면 이 구원은 어느 면의 구원이냐? 육신의 생명이 살아난다는 말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라고 하는 의미는 어떤 거냐? 이룰구원 면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입어진 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지옥에서 천국에 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매인 거니까 내가 논할 필요가 없는 거고, 예수 믿는 내가 어느 사건에서 목숨이 달아나더라도 내 속의 신앙절개를 안 굽혔다면 구원이 된 거고, 굽혔다면 구원이 안 된 거다.
우리 기독자들의 육신이 죽는 것은 누구 마음대로 되는 거냐? 하나님의 허락도 없는데 사람들 마음대로 죽이는 거냐, 하나님의 허락 하에 되는 거냐? 하나님의 허락 하에 되는 거다. 그런데 이게 믿어지느냐가 문제다. 이게 안 믿어진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은 한 분이다’ 라는 것을 안 믿는 거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내가 불속에 들어가서 죽을지언정 절대로 절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 신앙정신은 불속에 들어가도 구원이고, 불속에서 살아 나와도 구원이 되는 거다. 불속에서 살아 나왔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설령 안 살아 나올지라도 불속에 들어가기 전에 가지고 있는 신앙 믿음은 불에 안 탄다. 이 신앙 믿음은 불속에 들어가도 안 타졌고 안 죽었다. 단순히 사람이 안 타진 껍데기만 보지 말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속에 들어갔어도 죽지 않은 그 신앙 믿음을 봐라.
풀무불 속에 들어갔지만 살아나온 이들이 아직도 살아 있느냐? 육신은 죽었다. 불속에서도 안 탔던 그 육신은 죽었다. 불에 태우지 않았는데도 그 육신은 죽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우리는 뭘 봐야 하느냐? 그들의 신앙정신 사상을 봐야 한다. 그 신앙정신이 불을 삼킬 수 있는 거고, 그 신앙정신에 예수님이 같이 하신다. 얼마나 고상하냐? 이 믿음을 누가 알아주겠느냐?
진리인격의 사람으로 만들어지면 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자들에게 당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악한 자들이냐? 깡패들이냐? 물론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어기며 사는 성도에게 깡패들을 보내서 두들겨 패라고 하면 맞는 거다. 그런데 이걸 말하는 게 아니라 넓은 길 사망 길로 나가는 거짓 종들이나 교인들에게 당하고 만다. 넘어져 버린다. 끌려가 버린다. 롯처럼 잡혀가 버린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허물이 없으나 저희가 달려와서 스스로 준비하오니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주여, 나를 도우시기 위하여 깨사 감찰하소서.’ 하나님이 주무시느냐? 갈릴리 바다의 배 안에 예수님도 타셨고 제자들도 탔다. 그런데 예수님이 뭘 하고 계시느냐? 주무시고 계신다. 이 장면이 우리들에게 신앙의 이치를 보여준다. 이 배를 교회로도 볼 수 있고, 또 좁히면 자기로도 볼 수 있는데, 배 안에 계신,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을 잠재우지 말아라. 자기 신앙을 깨우라 그 말이다. 주님을 깨우면 자기 속에서 신앙의 깨우침을 받는 거다.
자기 속에서 주님이 잠자도록 내버려두지 말아라. 주님을 잠재우면 풍랑 파도가 너에게 덮친다. 너의 가정에, 너의 교회에 주님을 잠재우지 말아라. 잠을 안 재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같이 배를 타고 계신 주님께 ‘천국이 어떻습니까? 말씀의 뜻은 어떻습니까?’ 하며 항상 대화를 하면 된다. 그 사고방식의 그 대화, 그 깨달음, 그 묵상, 이런 게 들어있다.
무엇을 하던 깨어있으면 사람이 밝다. 분별이 된다. 적지적소에서 신앙 믿음의 사람으로 바로 서 나갈 수 있다. 이게 구원이다. 이런 사람으로 살아갈수록 자기의 활동의 범위, 능력의 범위가 자꾸 커지는 거다. 반대로 잡아먹히면 끌려가고 노에가 돼버린다. 우리가 허물이 없어도 악한 자들이 넘어뜨리려고 하는데 만일 허물이 있게 되면 ‘옳다. 잘 됐다’ 라고 하면서 얼마나 더 잡아 뜯겠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