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엔 오늘도 비가 내렸다
1960년대 말까지도 부산엔 외국어학원이 둘밖에 없었다. 원도심 광복로의 ESS와 서면로타리를 물고 있는 SWS. SWS란 미혼으로서 중년을 넘고 있던 심소원 원장 이름의 이니셜이었다. 당시 나라 경제는 모진 가난을 막 벗어나기 시작했고 군데군데 서광이 비쳐드는 곳도 눈에 띄었다. 20대 중반인 내가 SWS 일어반에 등록한 것도 일본과의 교류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일본어 붐이 일었던 현상과 무관치 않았을 터이다.
SWS에서 50대 일본어 강사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반세기가 넘도록 그 강사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가 '長崎は 今日も 雨だった'란 엔카를 10여 명 수강생들에게 가르쳐준 때문이다. 육성으로 한 줄씩 강사가 선창을 하면 수강생들이 그대로 따라 부르는 식이었다. 강사는 LG에서 정년퇴임한 말수가 적고 점잖은 중년신사였다 그의 매력에 이끌려 난 이 노래를 마스트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그것도 부산으로 돌풍을 일으키며 수입된 1980년대의 노래방 문화가 있어서 이 노래가 지금껏 잊히지 않고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일본어 강사 이름을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지만 그땐 그에게 그 흔한 포장마차에서 참새구이 안주에 쓴 소주 한 잔도 대접하지 못하고 헤어졌기에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그를 잊지 못하고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나가사키를 직접 만난 것은 세계화 바람을 타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였다. 근대사엔 ‘죽음의 비가 내린 1945년 8월 9일’로 기록된 도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이었던 그해 8월 6일, 1차로 히로시마에 먼저 원폭이 떨어졌다. 종전을 앞당기기 위한 미국이 신무기 핵폭탄을 투하했던 것이다. 히로시마에서 7만, 나가사키에서 3만의 사망자를 낸 두 발의 폭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리틀 보이’와 ‘팻 맨’이란 우스꽝스런 이름이 붙었다.
리틀 보이는 우라늄으로, 팻 맨은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함께 사용해서 만들었다. 항간에선 미국이 신무기인 두 핵폭탄 위력을 확인하고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모두 터뜨릴 필요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일본이 히로시마 투하 후 즉각 항복했다면 나가사키는 무사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일본은 자국의 도시와 국민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서 우물쭈물한데 대한 책임까지 져야한다.
그해 7월 말 워싱턴 고위군사 당국이 원자폭탄 투하예정지로 정한 곳은 교토와 니가타 히로시마 고쿠라 등 4개 도시였는데 뒤에 옛 도읍지로 문화재가 많아 보존가치가 있다는 이유로 교토가 빠지고 조선소와 어뢰제조공장까지 있는 나가사키가 추가되었다. 그래도 2차 목표는 고쿠라였다. 8월 6일 오전 9시 55분, 폭격대는 고쿠라 상공에 들어섰지만 공습으로 생긴 연기가 구름에 섞여 고쿠라 시가지를 뒤덮고 있었다.
고쿠라에서 조병창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조병창은 22만 평 부지에 세워진 거대한 공장지대로 시야가 나빠도 유효반경이 2300m나 되는 플루토늄 폭탄이 빗나갈 염려는 없었기 때문에 레이더에 의한 조준폭격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작전명령은 눈으로 직접 확인해서 폭격하라는 것이었다. 폭격대는 고쿠라시 상공을 세 바퀴나 빙글빙글 돌았지만 끝내 조병창을 찾지 못했다.
기장은 고쿠라를 포기하고 2차 목표인 나가사키로 향했다. 고쿠라와 나가사키의 운명이 갈리는 순간이었다. 폭격대는 나가사키 상공에 도착했지만 나가사키도 두꺼운 구름에 덮여 있어 육안으로 폭격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에겐 더 이상 꾸물거릴 여유가 없었다. 11시 2분, 우라카미 천주당 상공에서 팻 맨이 빛을 발했다. 엄청난 섬광이 하늘을 뒤덮고 흰 연기가 거대한 기둥을 만들었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돌풍이 우라카미 언덕을 넘어 나가사키시 전체를 강타했고 시뻘건 불덩어리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태웠다. 일순간에 나가사키는 잿더미로 변했다. 폭심지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들은 3000℃ 고열에 모두 사라졌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이들은 석쇠 위 생선처럼 타버렸고 목숨을 건진 사람들도 화상으로 피부가 벗겨졌다. 많은 이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어렵사리 목숨을 구한 사람들도 평생 치료 방법을 알 수 없는 방사능 후유증에 시달렸다.
피폭 후 하시마 탄광에 있던 조선인 광부들에게 원폭으로 파괴된 나가사키 시내를 청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섬을 벗어난 광부들은 방사능으로 오염된 죽음의 도시에서 부서진 것들 잔해를 제거하고 시신을 수습했다. 숯검정이 된 시체는 손을 대는 순간 먼지로 변했고 청소에 동원된 이들도 방사능 오염으로 피를 토했으며 괴이한 후유증으로 고통을 당했다.
중국 음식에다 나가사키를 붙인 건 왜일까. 그것도 고급요리가 아닌 짬뽕에다 중국 도시도 아닌 일본 도시를. 나가사키란 이름이 부르기 쉬워서인지 나름대론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가 없다. 채소와 해산물 육류 등을 볶아 육수로 끓여낸 얼큰한 국물에 국수를 넣어 만든 한국식 중국음식이 아니던가. 나가사키 짬뽕은 이름은 몇 가지 설을 지녔다.
전북 군산에서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식당에서 팔던 산동식 초마면이 기원이란 설도 있고 중국 푸젠성 탕육사면에서 기원하여 일본을 거쳐 한국에 정착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동북아 3국을 아우르는 음식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짬뽕은 원래 광복 이후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한 음식으로 그조차 1960년대까진 오늘날 백짬뽕과 유사한 음식이었다.
백짬뽕에다 가느다란 실고추를 올린 형태로 붉은 짬뽕과는 거리가 멀었고 짬뽕이 아닌 초마면이란 이름으로 오랫동안 굳어져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매운 음식이 인기를 끌자 몇몇 식당이 아예 고춧가루에 고추기름까지 넣어 붉은 짬뽕을 만들어 팔게 되었고 이게 인기를 끌면서 1980년대부터 전국으로 퍼진 나가사키 짬뽕이었다.
長崎は 今日も 雨だった
永田貴子 作詞
彩木雅夫 作曲
內山田洋 唄
あなた ひとりに かけた 戀
愛の 言葉を 信じたの
さがし さがし 求めて
ひとり ひとり さまよえば
行けど 切ない 石だたみ
ああ 長崎は 今日も 雨だった
夜の 丸山 たずねても
冷たい 風が 身に 泌みる
愛し 愛しの ひとは
とこに とこに いるのか
敎えて 欲しい 街の 燈よ
ああ 長崎は 今日も 雨だった
類に こぼれる なみたの 雨に
命も 戀も 捨てたのに
こころ こころ 亂れて
飮んで 飮んで 醉いしれる
酒に 恨みは ないものを
ああ 長崎は 今日も 雨だった
당신 한 사람에 걸었던 사랑
그 사랑의 말을 믿었었지
찾고 또 찾으며 혼자, 혼자 헤매면
가도 가도 안타까운 돌 보도뿐
아아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렸네
밤의 마루야마 찾아와 봐도
차가운 바람이 몸에 스며드네
사랑스런 사랑스런 사람은
어디에 어디에 있는 걸까
가르쳐다오 거리의 등불아
아아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렸네
볼에 흐르는 눈물의 비에
목숨도 사랑도 다 버렸는데
마음이 마음이 심란하여
마시고 또 마셔 취하네
술에야 원한은 없는 것을
아아 나가사키는 오늘도 비가 내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