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시 시기3동에 사는 김판례(73세) 할머니. 스물 일곱살 꽃다운 나이에 혼자 되어 남의 자식 키워주며 평생을 보낸 그이에게 요즘 새 친구가 생겼다. 바로 같은 동네에 사는 이복순(82세) 할머니다. 사귄 지 두 달밖에 안 되었지만 오래 사귀어온 친구보다 더 의지가 된다. 그들은 날마다 11시 40분이 되면 시기3동 동사무소 앞에서 만난다. 팍팍한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정읍 초대교회에서 보낸 차가 그들 앞에 멈춘다. 차 안에는 같은 또래의 노인들로 가득 차 있다. 45인승 버스에 앉을 자리가 부족해 서 있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친구와 함께 있으니 다리 아픈 것도 잊는다. 버스 안은 이제 막 사춘기를 맞는 소녀들마냥 웃고 떠드는 노인들로 시끌벅적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정읍시 시기동에 있는 초대교회 무료 급식실. 김판례 할머니는 벌써 세 달째 그곳에서 점심을 해결한다. 먹을 밥이 없어서가 아니다. 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별별 생각이 다 드는데, 이곳에 나와 같은 또래의 노인들과 어울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즐겁고 신이 난다. 그곳에 모인 노인들은 모두 형편이 비슷하다. 그러니 눈치 볼 일도 없고 자존심 상할 일도 없다. 정읍시는 올 4월부터 2500명이 넘는 독거 노인과 결식 아동을 위해 무료 급식과 도시락 배달을 시작했다.
독거 노인들은 말 그대로 피붙이 하나 없는 노인들이거나, 자식들이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혼자 사는 노인들이다. 거기에 여러가지 사정으로 밥을 굶는 아이들과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포함된다. 정읍시에서 도시락 배달을 받는 사람은 노인 223명, 결식 아동 150명이다. 무료 경로 식당은 읍·면·동까지 합해 모두 11군데에서 실시한다. 경로 식당은 주로 시내 식당, 분식집, 부녀회, 교회에서 운영하는데 초대교회도 그 가운데 하나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60명 넘는 노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한다. 오늘 메뉴는 돼지고기 볶음에 상추쌈이다. 누렇게 익은 된장과 풋고추, 콩나물 무침에 알맞게 익은 김치도 상에 올랐다. 김판례 할머니는 돼지고기를 먹으면 두드러기가 난다며 밥에 물 말아 풋고추를 아작아작 씹는다.
뇌졸중으로 한쪽 몸이 불편한 최서운(70세) 할머니는 서툰 젓가락질이지만 남 도움 받지 않고 혼자서 밥을 먹어 보려고 힘을 꽁꽁 쓴다. 서울로 올라간 아들 대신 손자를 키워주는 이복순 할머니는 군대 갔다 온 손자가 삼만 원을 벌어다 주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이다. 같은 식탁에 앉은 할머니들은 “워매. 인자 고생 다 끝났소.”하며 자기 일처럼 기뻐한다. 여기저기서 밥을 더 달란다. 오늘 따라 입맛이 당기는지 접시 가득 담긴 상추가 순식간에 없어진다.
급식을 맡은 교회 간사가 “아, 상추 좀 쪼금씩 먹어요. 뭔 상추를 그리 많이 먹는다냐.”한다. “긍께 말이여. 오늘 따라 벨라도 상추가 맛있네이.” 할아버지 한 분이 응수를 한다.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타박을 하면서도 상추를 더 갖다 주는 간사는 얼굴 가득 희색이 돈다. 어르신들이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오지단다. 정읍 초대교회는 급식실 외에 경로 대학과 무료 미용실, 체육 단련실을 운영한다. 경로 대학에는 정읍에 사는 노인이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 매주 목요일 10시부터 3시까지 한글, 서예, 영어, 컴퓨터, 성경 다섯 과목을 공부한다. 할머니 팬이 가장 많은 레크리에이션 강사는 올 때마다 몸살 나게 웃겨준다. 노래를 하고 박수를 치다보면 그동안 쌓인 세상 시름이 뚝 달아나 버린다.
작년에 처음 시작한 경로 대학은 호응이 대단해서 올해 154명이나 입학했다. 맞춤법이 새로 바뀌는 바람에 받침이 자주 틀린다며 한글과에 입학한 황윤순(64세) 할머니는 “이 나이에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내 자신이 너무 자랑스럽다.”며 매주 목요일을 목 빠지게 기다린다. 내년에는 영어를 배워 볼 참이다. 밥을 먹고 차에 오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주춤거린다. 할머니 한 분이 남자 친구를 소개해 주지 않는다
며 호령을 하신 모양이다. 늙어서 주책이라느니, 난 어떠냐느니 모두들 한마디씩 거든다. 연이어 터져나오는 웃음 소리가 마당 가득 흐드러진다. 피붙이 하나 없는 김판례 할머니는 아무도 없는 빈 방으로 돌아가기 싫은 눈치다. 이복순 할머니 집에 놀러가고 싶단다. 이복순 할머니는 흔쾌히 그러자고 한다. 김판례 할머니는 가는 길에 막걸리를 사자고 했다. 그 말에 옆에 있던 노인 몇 분이 자기들도 끼워주라며 넌지시 말을 건넨다. 그 분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차에 올랐다. 다시 버스가 소란스러워진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던 해님이 들썩들썩 흔들리는 차 꽁무니를 쫓아 둥실둥실 부지런히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