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잊었다가도 불현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사라지는 저쪽과 잊어 가는 이쪽의 경계선 어디쯤에서 남은 길을 가늠한다. 문득 기억해 낸 한 문장처럼, 햇살 화사한 날에 초록빛 찬란한 나뭇잎을 바라보다 왠지 눈물 나게 그리운 한 시절처럼. 새삼스레 부르고픈 이름도 있다.
낯선 번호를 확인하다가 옛 문우의 이름을 찾아낸다. 우연히도 여류 문인 두 사람이 십여 년 만에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한때 글공부를 함께 했거나 문학 단체에서 더불어 활동하다 소식이 끊겼던, 내 수첩에서도 오래전에 지워진 이름들이 아닌가. 괜스레 먹먹하던 12월이 가고 새해 1월도 어영부영 중순을 넘어가는 시점에서다. 인간의 뼛속 외로움이 더욱 아려와서인지 비슷한 연배의 두 사람이 그리 멀지 않은 타 도시에서, 그리고 내가 사는 이 도시에서, 거의 동시에 안부를 물어 온 게다. 마치 보이지 않던 길이 언덕에 올랐을 때 불시에 눈앞에 다시 생겨나듯이.
외출에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는데 깨어 보니 3시간을 자고 난 후였다. 저녁 8시, 감기 기운을 다독일까 하여 계속 켜 놓은 보일러는 실내 온도를 27도까지 올려놓았다. 열어 본 스마트폰에는 단체 카톡방 댓글들이 와글와글하고 읽지 못한 메시지들과 받지 못한 전화의 흔적이 시무룩하다.
“〇〇문학지에 실린 글을 봤다.”
“엘범을 정리하는데 어느 꽃 정원에서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있더라.”
희한하게도 두 문우의 메시지 내용 또한 비슷하다. 세월이 가니 오래된 사람이 그립다는 속뜻이 담겼다. 쌓아 둔 책 정리나 앨범 정리에 부지런을 떨지 못하는 나로서는 얼떨결에 받아 든 옛 사진을 들여다보며 지나간 한 장면을 회상한다. 아. 그땐 이랬지. 이런 적도 있었네. 이제는 아득하고 고요한 기운을 머금고 있을 뿐. 세상 어떤 강자가 세월을 당해 낼 수 있겠냐고, 시간의 뒤편이 짠하게 닿는다.
치열하게 살아도 때론 엄청난 공허가 뒤따르는 것이 인생 현역들의 숙명이다. 정점을 찍었던 색깔들이 퇴색하고 반짝거리며 들떴던 생의 물기마저 급속히 빠져나가는 시간 속에 잠겨 있다. 마른 잎은 바람이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순식간에 구도가 흔들리는 터, 외로워서건 그리워서건 깜짝 반가운 두 친구들의 소식에 회답을 보냈더니 곧바로 답신이 날아들었다. 통화가 이어지고 나는 각각 똑같은 약속을 했다.
“밤 한번 먹자.”
그런데? 이상하게도 반가워 허둥거렸던 마음과는 달리 날짜가 조금 애매한 예약을 하고 있었다. 강산도 변한 세월을 건너온 나이다. 변모한 서로의 겉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선뜻 마주할 자신이 없었나 보다. 하지만 정말 이상한 건 약속의 말을 하고 난 순간부터다. 아직도 잠재우지 못한 허기 같은 바람이 가슴 한쪽에서 술렁술렁 일어나 어딘가로 다시금 흐르기 시작하다니….
새로운 만남, 그것은 미묘한 기분을 생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여곡절이 허다할지언정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만남’에서 비롯한다. 인생이 아름다운 것도 만남이 있어서다. 덤던하던 가슴이 두근거리고 기대와 흥분이 재생된다. 지리멸렬하려는 일상에 의욕을 안겨 주는 신묘한 마력을 뿜어낸다.
어느 방송의 〈속풀이 쇼〉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출연자의 일화가 흥미로웠다. 출연자들 중 얼굴이 꽤 알려진 남자 의사의 이야기에 폭소를 터뜨렸다. 방송을 타며 유명해진 그가 여자 연예인과 만날 약속을 한 날이었다고 한다. 물론 일을 위한 만남이었지만 마음은 솔직히 설렜다고 털어놓는다. 샤워를 하고 막 외출하려는 등 뒤에서 아내의 한마디가 날아들었다.
“기분 좋은 약속인가 봐?”
“…?”
“샤워하면서 콧노래를 불렀어.”
가슴이 뜨끔하더란다. 기분 좋은 건 사실이었으므로 덧붙여 남자는 예쁘고 친절한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여자를 좋아한다는 농담 겸 진담에 모두 들 박장대소했다. 맥락이야 좀 다른 이야기지만 약간은 수긍이 간다. 힘든 삶의 노정에서 설렘을 동반한 만남에는 긴 겨울을 걷어 내며 사뿐 다가오는 봄의 기척이 들어있으니까. 그게 새로운 사람과의 상면이든 헤어진 사람과의 해후이든 뜻깊은 장소나 사물과는 조우이든, 만남을 앞둔 마음은 보다, 높은 에너지로 달뜬다.
의외로 오늘 따뜻한 길 하나가 생겼다. 언덕 너머로 천천히 걸아갈 발소리들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인생이라는 길 위에 있는 한 우리는 길을 가야 한다. ‘웃을 수 있고 슬퍼할 수 있고 놀라워할 수 있도록’. 그러니 내 오랜 동무들이여, 부디 기운 잃지 말고 삶이 냉랭하게 얼어붙지 않기를….
먼 곳에서 달려온 길들이 숨을 고르는 도시의 겨울밤, 베란다 창밖 어둠을 읽다가 건너편 동 옆의 가로등을 발견한다. 그쪽 아파트의 창에서도 군데군데 불빛이 새어 나온다. 하늘로 솟은 높이와 그만큼의 무게를 건사하느라 몸통에 철심을 박은 아파트는 아마 한 번도 온전히 어둠에 잠겨 본 적이 없을 테다. 꼭대기엔 피뢰침을 꽂고 잠들지 못하는 아파트와 이 밤에 홀로 깨어 뒤척일 사람을 생각하며 뜻밖의 동류의식을 느낀다. 닮은 그림자가 있다는 그 자체가 분명 위로가 된다. 이쪽과 저쪽, 여기와 저기, 부르지 않더라도 서로를 감지할 수 있지 않으리.
새벽 3시, 불을 밝힌 가로등도 추위와 외로움을 잘 견뎌 내고 있다.
첫댓글 염 작가님의 글은 언제 읽고 또 읽어도 질리지가 않습니다. 아름다운 얘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