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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기념관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의 포수 출신으로 23세에 재무를 담당하는 서기(書記) 직에 오른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은 1653년 여름에 바타비아를 출발하여 타이완을 거쳐 나가사키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스페르베르(Sperwer)는 반 토막이 난 채 제주도 해변에 난파된다. 선원 64중 36명만이 생존한 그들은 제주관찰사의 요청으로 이들보다 25년 전에 제주에 잠시 내렸다가 억류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조선 이름 박연)가 제주로 내려와서야 그들이 네덜란드의 표류민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10개월간 제주에 억류되다가 조정의 명령으로 한성으로 압송되어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되어 박연의 수하로 근무한다.
그러나 일행 중 2명이 당시 한성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에게 고향으로 보내달라고 난동을 부리다 죽임을 당했고, 당시 북벌을 계획 중이던 조정은 이들의 존재가 청국에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청국사신에게는 뇌물을 주어 비밀을 지키게 한 뒤 1655년 조정은 이들을 전라도로 보내 남원, 여수 순천과 해남 등에 분산하여 귀향을 보내 살게 하였다. 17세기는 대기근이 발생한 해로 조선도 흉작으로 국민들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을 지경이었으니 외국인들의 고생도 막심했을 것이었겠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생존자는 16명으로 줄어들었다.
좌초지에 재현된 하멜 무역선
전라좌수영에 근무하며 점차 바다의 흐름 등을 인지하게 된 이들은 탈출비밀이 탄로날까봐 우선 8명이 소형어선을 구해 일본으로 탈출한 것은 이들이 제주에 발을 내린지 13년 28일 만이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이들로부터 상황을 전해들은 일본의 요구로 나머지 8명도 2년 후에 일본으로 인도되어 고국으로 돌아갔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인 거주지인 데지마 섬에 도착한 하멜은 나가사키에서 1년간 머물면서 13년 간 밀린 봉급을 받기위해 ‘난선제주도난파기’를 작성하여 인도 총독과 평의원에 보낸 것을 다소 각색하여 ‘하멜 표류기’로 유럽 각국에서 동시에 번역되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한다. 이런 목적으로 써진 표류기라 당연히 살기 힘든 나라에서 고생을 한 것을 강조하기 위해 조선은 미개한 나라로 표현되고 그들이 고생을 한 이야기는 과장되었겠 고, 그들을 대한 조선과 국민의 호의는 축소되었 을 수도 있었겠다. 그러 나 13년 동안 감금, 군 역, 태형 유형 등 풍상 을 거치면서 접촉한 사 람들과 풍속에 대한 기술은 조선을 최초로 서양에 알린 저서로 사료적 가치를 갖는다.
그들이 조선에 살면서 조선여자와 결혼을 하였는지는 표류기에 나와 있지 않으며, 그들이 본 것도 전라도의 생활 상 뿐이니 표류기에서 언급한 조선인은 전라도 인을 말하며 ‘남을 속여 넘기면 훌륭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들 사이에서는 하등의 불명예로 여기지 않는다.’는 등, 부분적으로 전라도 인을 혹평하며 풍전세류(風前細柳)라 비하한 것 등의 잘못된 품평은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그들은 악의로 대하지 않은 조선으로서는 억울한 부분이다.
이들의 일부가 강진에서 7년을 보낸 인연으로,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호르큼시와 강진군은 자매결연을 맺고 2007 강진에 하멜기념관을 세웠고, 1980년에는 서귀포시 안덕면 산방산 의 용머리해안에 하멜기념비를 세우고 난파선을 실물대로 복원하여 개방하였다.
표류기에 나와 있는 난파당시의 옛 그림과 현재의 산 모양을 비교해보면 난파지역이 용머리해안이 아니라 신도2리의 해변 가라는 것이 맞아도 보이나 별 의미가 없다. 작지 않은 배위에 올라 하늘을 찌르는 3개의 돛대 아래의 선실로 들어가 밀랍인형으로 된 선원들의 생활상도 보고 당시의 진취적인 네덜란드의 문명을 받아들일 호기회를 놓쳐버린 조선을 생각한다.
당시 일본의 막부는 데지마의 상관의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조선술을 배워 무역선을 건조하여 맥시코로 보낸 무역선이 구해온 은괴를 중국에 비싼 값으로 팔아 국부를 채운 반면, 조선은 선박과 대포 제작 등의 기술을 양도하겠다는 하멜의 제안을 묵살하고 그저 양반노름을 하느라 세월을 다 보내 개화의 길로 나서지 못했으니, 앞선 기술을 가졌던 그들을 의미 없이 억류하다 보냈으니 얻은 것이 없었다. ‘배우려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불쌍한 조선이여.’라는 하멜의 소리가 들리는 뱃전을 내려선다. 참고로 하멜 이후 네덜란드에서는 코레아호를 건조하여 조선과의 교역을 계획했으나 조선과의 통상을 맡아하던 대마도주의 건의를 받아들인 막부의 결정으로 무산되었다 한다.
저녁에는 5년 전에 생선회를 먹고 후식으로 나오는 꽃게 죽을 너무 맛있게 먹은 기억이 생생한 C집에 들렸다. 예전의 후졌던 장소에서 대로변으로 옮김 음식점에 좀 이른 시간에 들어가니 손님이 별로 없다. 주문을 하고 기다리니 쓰끼다시가 잔뜩 먼저 나온다. 이것 먹으려 온 게 아니데 하면서 기다리니 새끼 전복과 소라가 나오고 메인요리인 방어회가 나오는데 맛있는 부분은 빠졌다. 맛있게 잘한다고 벼루다 온 집인데 일행에게 체면이 서지 않는다.
맛있는 채 하면서 젓가락을 놀렸지만 량도 부족하고 중국인 종업원은 우리말을 잘 알아듣지도 못해 이것을 가져오라하면 저것을 갖다 준다. 참게 죽이 나우는데 따뜻하지가 않다. 죽이란 훌훌 불어가면서 입에 넣어야 먹는 맛이 나는데.. 입맛만 다신다. 8시 반경에 나오는데도 손님이 별로 들지 않는다. 음식 장사 망하는 것이야말로 한 순간인데, 손님의 입맛은 세월 따라 변하는데 잠시 서비스를 소홀히 하고 방심하면 단골들도 머리를 획 돌리는 것이 인심이다. 이 집은 장사가 안 되겠군!
이중섭 미술관
1916년 평양 평원군의 부농의 아버지와 걸 맞는, 개화기 평양을 주름잡던
경제계 거물의 막내딸 사이에 태어난 중섭은 위로 형과 누이를 두었으나 결
혼 13년 만에 아버지는 700석이 넘는 농지의 가사를 아내에게 맡기고 우울
증으로 사망함으로서 중섭은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유복자 신세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후 평양의 외가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중섭에게 12살 차이가 나는
형은 아버지처럼 엄격했으나, 방학 때 본가로 내려가면 강하나 자애로운 어
머니의 품에 파묻혀 지내는 시간이 많았으며, ‘초등학교 3학년까지 젖을 먹
었다,‘는 그는 평생을 모성 콤플렉스로 일관하였다. 외가에서 사과를 주면 먹
지 않고 사과 그림을 그렸다는 그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오산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5년 동안 중학 과정을 이수하면서 미적 개안(開
眼)이 이룬 중섭이 예일 대학 미술학부를 1등상으로 졸업한 임용련이 오산
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것은 1943년. 그는 조숙한 중섭에게 후기 인상파의
화법과 야수파의 붓 터치를 알려주었으며 끝없는 습작만이 하나의 예술을
완성한다는 천재의 고언을 천재가 소화했으며 일생의 화두가 된 소는 오산
!학교 시절부터 일관한 것이다.
1936년 그의 제2의 고향이 된 원산으로 이사하여 거부로 성장한 호방한 성
격의 형 도움으로 1937년 동경제국미술학교에 입학했으나, 1년 후 비관료적
이며 귀족적이나 교육을 지향하는 동경 문화학원으로 전학하여, 여학생들의
선망 받는 대학생이 되었다. 주로 한국의 토속적인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며
소도 뼈대만을 그리며 작업에 몰두한 그의 아파트에는 ‘면회 사절’이라는 푯
말이 자주 걸렸다.
일본 화단의 추상그릅인 미술창작협회 4회전에서 ‘소’를 출품하여 협회상을
받기도 했으며, 그의 은지화(銀紙畵)는 한국동란 후의 가난 때문에 재료를
구하기 힘들어 시작 한 것이 아니라 이미 동경시대에 시험된 것이며, 오산시
대부터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닌 예술가로서의 낭만은 동경시대에 충전된
것이다. 후일 한국 화단의 거목이 된 김환기, 유영국은 그의 1년 선배였고,
평생 친구인 시인(詩人) 구상을 만난 것도, 마사코를 만난 것도 문화학원 시
절이었다.
일본 제 1의 재벌인 미츠이의 방계회사 중역의 딸인 마사코와 건장한 체격의 호남인 중섭이 만난다
는 소문이 켄버스에 퍼졌고, 1943년 동경 생활을 끝내고 원산으로 귀환하기 전에 조선인 사위가 마
땅치 않았지만 마사코 집안은 비공식 결혼식을 마련했었고, 1945년 4월에 중섭을 찾아 현해탄을 건
너온 마사코는, 사모관대와 족두리를 쓰고 부부가 되었고 이남덕(李南德)으로 개명하였다. 당시 귀
국한 중섭에게는 여러 군데서 중매가 들어오고 실지로 만나는 신여성도 있었으나, 남덕이 바다를 건
너로 옴으로서 그녀 이외의 가능성은 모두 사라졌다.
해방이 되자 형 중석은 친일파로 규탄 받아 처형되었고, 첫 아들은 디프테리아로 병사하자 남덕은 죽은 아들을 그림으로 그렸고, 중섭은 그날 밤에 그린 천도봉숭아와 동자상이 있는 도자기를 아들과 함께 묻었다. 공산당 치하에서 사물을 사실대로 그려야한다는 명제에 반발한 그는 주량만 늘어가다가, 동란이 터지자 1.4후퇴 시 그는 노모에게 그때까지의 그림을 맡겨두고 처자만 데리고 해군후생선박을 타고 월남하여 부산에 팽개쳐져 다음해인 1951년 4월까지 피난민으로 떠돌다가 제주로 가는 해군경비정에 올라 제주를 거쳐 서귀포 서귀리의 농가 한쪽을 빌러 7개월간의 서귀포 시대를 열었다.
비록 남덕은 일본서 올 때 걸쳤던 헤어진 바지와 브라우스를 입었고 중섭도 원산시대부터 입고 있던 낡은 개털 오버를 여름에도 덮을 것으로 쓰고 있었고 남덕은 이삭을 줍고 중섭은 게를 잡아먹는 굶주림과 험한 생활의 피난민 생활이었지만, 사랑하는 남덕과 이아들과 함께 있어 월남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복한 시절을 보내며 게와 물고기와 아이를 소재로 20여점이라는 작품을 그렸으며, 가끔 제주로 나가 동료화가 최영림과도 해후하였다.
기약 없는 피난민 생활에 지친 남덕이 자식과 함께 먼저 일본인 수용소를 거쳐 일본으로 가고 중섭이 따라 일본으로 갈 요량으로 3차 일본인 송환선으로 떠나는 가족을 환송했다. 이후 비애와 자유로움에 부산과 대구를 오가며 지내다가 국방부 정훈국의 종군 화가단에 가입하기도 했고, 기조전(基潮展)에 출품한 그의 작품이 대게 팔린 반면, 함께 참석한 손응성의 작품은 팔리지 않자, 자신의 작품 값에서 술값을 뺀 돈으로 타인의 명의로 사주면서 ‘네 그림도 팔렸다.’며 동료 작가를 기쁘게 해주었다.
한편 일본으로 돌아간 아내집안도 이미 기울었으나 푼푼이 모은 돈으로 당시에 한국에서는 인기가 있어 잘 팔리는 책을 구입하여 인편에 한국으로 보냈으나 부탁을 받았던 사람은 책값인 거금 3천만 원을 중섭에게 전하지 않고 착복하는 바람에 그의 도일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 사이 그의 그림은 인기가 있어 전후의 열악한 경제 사정에도 팔리기 시작했으나 그는 그림을 관리하고 그림 값을 제대로 챙기는 재주가 없는 사람에다 친구들에게 헤프고 돈이 생기면 퍼 마시는 습관에 항상 가난했다.
중섭의 그림은 대게 작은 작품에 유화가 별로 없다. 그런 재료를 구하기 힘든기도 했지만 이미 베니아 판에 장판을 붙여 그리는 일에 숙련된 것도 한 이유다. 친구의 권유로 간 통영에서는 박생광과 교유했고 어디를 가도 사람을 끄는 조용한 매력이 있는 그에게 통영의 갑부가 사위 삼으려 했으나 웃음으로 거절한 그는 구상의 도움으로 구한 선원증으로 도일하여 2년 만에 재회한 처자와 5일을 보내고 통영으로 돌아가면서 다시 도일할 것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중섭은 1955년 처음이자 마지막인 본격적인 개인전을 인 ‘이중섭 작품전’을 미도파에서 개최하여 전시한 45점은 찬사를 받으며 26점에 빨간 딱지가 붙자 계약자에게 아직도 공부가 안 된 것으로 나중에 좋은 작품을 그리면 교환해주겠다고 말하며, 3개월 동안 개인전을 위해 급하게 그리고, 물감도 제대로 사용치 않은 사실을 미안해 했다.
1996년 제주도는 서귀포시의 이중섭 피난지 집을 복원해 기념관을 건립하고 1998년 제1회 이중섭예술제를 개최하여 그의 족적을 기린다. 미술관에서 ‘이사 가는 날’ 복제품을 사들고 미술관 밖의 이중섭 거리로 간다. 겨울 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기념품을 파는 가게를 기웃거리다가, 그 중에서 중섭의 이미지가 강한 복제품을 취급하는 장애인이 하는 가게에서 고재에 그의 작품을 동으로 만든 몇 점을 골랐다.
저녁에 처제의 친구가 주인인 제주에서 음식점으로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춘심00 란 은갈치 전문점에 초대를 받았다. 작년 말에 우리 집 저녁초대에 꽃을 사들고 늦게 온 부부는 제주에만 4개의 분점을 갖고 있는 청년 사업가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인데도 실 평수만도 200평이 넘어 뵈는 실내에는 손님들이 반쯤 차 있는데 음식을 주문하니 금방 통구이와 뼈를 발린 찌개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