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눈 뜬 뿌리들이 바위를 껴안으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참을 수 없는 울음까지 잘 참는 나를 붙박아 버리니까
나는 대체 어디로 가다가 뒤돌아보는 새하고 눈이 마주친 거야?
댓잎 자국마다 서북풍 팽팽한 내 쌍화점 솥뚜껑 같은 이마를 이슥토록 쪼는 새 부리를 배가 불러 손금이 터질 지경인 손을 들었다 놓기도 하지
아무 것도 아닌,
생을 견디다 못해 내 딸이 찾아와 말 물으면 내가 준 마음 반 잔 묵혔다가 내주는 , 모서리가 들떠 뼛속까지 비 내리는 구천 숨기지 못하는 어제 사람이던 습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위의 시에서 조정 시인은 수목장(樹木葬)이라는 장례 방식과 죽음 이후에 대해 노래한다. 수목장은 나무에 의탁하여 육신의 자연회귀를 바라는 장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정 시인은 수목장을 행함으로써 망자가 자연으로 돌아가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를 철저히 깨뜨린다. 그는 나무의 고착과 직립의 성질을 빌려 수목장이 살아서의 고착과 직립의 형벌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것으로 인식한다.
시의 화자는 2연과 3연에서처럼 눕지도 못하고 오로지 직립만 허락되는 생, 한 곳에서만 고착되는 것만이 허용되는 생을 산다. 그는 형벌 같은 생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형벌 같은' 존재 조건을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상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좋아해' 혹은 '좋지'라고 감정을 표현할 때도 그 표현은 반어적이다. 이처럼 형벌 같은 생을 사는 화자에게 죽은 후의 장례 방식은 고착과 직립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목장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화자가 자신의 장례를 수목장으로 치러질 것으로 상상하는 것은 그의 현재적 조건이 그에게 주는 압박감의 정도를 드러내 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어제는 사람의 형상이었으나 오늘은 나무에 내려앉은 습기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고 은폐시킨다. 우리는 인간이 지닌 한계와 누추함을 숨기느라 평생을 소진시킨다. 우리의 위장된 생을 벗어 던지는 것이 죽음이며, 습기에 불과한 본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수목장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죽은 후에도 직립하여 형벌 같은 생각에 빠져 살면 좋지"라고 발화하는 것은 어쩌면 반어적 표현이 아닐 것이다. "모서리가 들떠 뼛속까지 비 내리는 구천 숨기지 못하는/ 어제 사람이던/ 습기"는 인간의 본질적 존재의 형상일 것이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08년 11-12월호, 「시사사 리뷰」에서 ====================== [ '수목장'에서 특이한 쉼표의 쓰임에 대하여 ] 강인한 :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그리고 전에 물어본 내 질문에 대한 답 등 많이 궁금합니다. 그게 무슨 질문이었느냐면,
생을 견디다 못해 내 딸이 찾아와 말 물으면 내가 준 마음 반 잔 묵혔다가 내주는 , 모서리가 들떠 뼛속까지 비 내리는 구천 숨기지 못하는 어제 사람이던 습기
에서 '모서리' 앞에 쓰인, 시행 첫머리의 쉼표를 쓴 시인의 의도가 무얼까 하는 것이었지요. ----------------------------------- 조 정 : 문장 앞 쉼표에 대해 이제야 말씀드립니다. 술술 읽다가 고삐를 탁 잡는 불편함을 의도했습니다. 이생을 견디는 딸과 저 생에 선 화자를 차별화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습니다. 쉼표로 시작하는 것이 저승인 듯해서요.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버들 귀. ㅡ조 정 0
님이여 건너지 마라
시끄러운 꿈 한 켤레 건지며 밤새 신기료장수처럼 우는 귀
강은 귓속으로 흘러든다
흰 머리카락 오천 丈 엉킨 목젖이 아, 흐, 백 촉 더 붓도록 부르지 못해
산발한 버들가지 들어 물낯을 친다 오라 오라
―조 정 「버들 귀」전문
조정의 「버들 귀」라는 시에는 감춰진 재미가 쏠쏠하다. 이 시를 이해하기에 앞서 고조선 시대의 노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무도하(公無渡河) 공경도하(公竟渡河) 타하이사(墮河而死) 장내공하(將奈公何)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임은 기어이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으시니 장차 저 임을 어이하리."
강물을 건너가다가 물에 빠져 죽은 이는 백발을 새벽바람에 휘날리는 미친 듯한 한 사내[白首狂夫]였고, 이렇게 애절하게 만류하는 노래를 부른 여인은 그 사내의 아내였다. 사내가 물에 빠져 죽자 뒤따르던 그 아내도 슬피 울며 노래부르고 그 물에 빠져 죽었다.
님이여 (강을) 건너지 마라. 이 노래가 귀에 들린다. 시끄럽게, 밤새도록. 켤레라는 말은 신발의 단위이다. 강에서 물에 빠져 죽은 이의 신발 한 켤레를 건지며 운다. 그 강에서의 울음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든다. 백발 오천 장의 사내, 사내의 죽음을 애통해하여 울음으로 부은 목젖. 백수광부를 향한 애절한 사랑. 그 이름을 부르며 부르며, 아흐(옛말의 감탄사) 산발한 버들가지로 수면(물낯)을 친다, (돌아)오라, (돌아)오라고. 이러한 사연과 비가(悲歌)를 듣는 이는 시의 제목으로 제시된 버들 귀(버드나무의 귀)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시인은 아마도 강가에 늘어진 버들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며 수면(水面, 물낯)을 치는 것을 보고 버드나무가 그와 같이 슬피 탄식하는 광경으로 그려낸 것 같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풍경이 된 '나', 우울한 생의 저편 ― 조정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실천문학사, 2007) ㅡ최성실
시의 언어가 기록하는 것은 시간의 어느 한 '순간'이다. 우주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점 같은 한순간 말이다. 순간을 영원한 내면의 공간으로 환원하는 기제는 주어진 시간의 타성을 부정하며, 혼돈과 모순 속에서 더 깊은 늪으로 침잠한다. 마음 속에 신화를 품고 사는 시인에게 이 순간이야말로 온전하게 우주를 체험하는 시간이며, 혼탁한 세상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안식의 공간일 것이다. 어둡고 침울하며, 명멸하는 빛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텅 빈 내면이 더없이 안락한 휴식처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 시는, 서정은 그렇게 미완결 상태의 우울을 즐기며 사물에 대한 연민을 키워간다. 조정의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은 우울한 생을 견디는 평범한 일상에 바치는 헌사다. 우울한 생을 견딘다는 것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생에 대한 연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연민을 밖의 '너'로 치환하는 서정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삶의 뒤편, 불교적 색채가 느껴지는 어휘들, 세상 저편에 대한 동경을 위안으로 삼고 살아가는 듯한 시인의 표정에 속아서는 안 된다. 적어도 이 시편들의 핵심은 단순한 낭만성과 나르시시즘을 넘어서는 서정적 자아 '너'에 있다는 것이다. '너'란 어떤 존재인가. 일인칭 대상인 '나'의 껍질이며, 동시에 옹기 관에 누워 있는 죽음 바로 그것이다. 내면을 가득 메우고는 우울한 내면을 비워가면서, 서서히 차 오르는 빛과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인의 언어는 달이고 달인 간장 맛이 난다. ―「버들 귀」전문 조정 시에서 '귀'는 세상 밖의 이야기를 안으로 수렴하여 내면을 채우는 감각의 도구가 아니다. 귀를 통해 수렴되고 있는 것은 나의 밖에 존재하는 너에 대한 시끄러운 꿈이다. 귀를 통해 흘러드는 강물 소리는 나의 안에서 울림을 키워 밖으로 나온다. 산발한 버들가지를 들어 물낯을 치는 이유도 허물어져 가는 자신을 달래거나 힘든 심신을 일으키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라 귓속으로 들어온 소리를 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몸짓 때문이다. 속으로 수십 번은 되뇌었을 법한 흰 머리카락 오천 장이란 말은 귀를 통해 들어온 말이 밖으로 나가는 순간의 음성과 섞이면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렇게 육체의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침울함의 외벽에 기대어 '너'를 향해 가는 길은, 사실 어두운 시간을 지나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는 '나'를 향해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길 위에 절벽을 넘어 다시 살아가야 하는 시간의 뒤편에 관처럼 깊은 안색을 하고 있는 '그'가 있다. 마주보면서 남몰래 웃는 나인 그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한쪽 신 벗고 돌아올 때 해안 절벽에서 몸을 날려 죽은 자가 있었다 한 몸 받아들고 바다도 꽤 심정이 어지러운지 내일은 관처럼 깊은 안색을 보러 가기로 했다 마주보며 남몰래 웃어도 그나 나나 뒤꿈치가 좀 아플 것이다 ―「뒤꿈치가 깨진」부분
깊은 안색을 보러 가는 주체와 깊은 안색의 주체는 동일인이다. 절벽에서 죽은 자도, 이를 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도 '나'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1) 섬들이 머릿수건을 고쳐 쓰며 노을을 입니다. 소를 몰고 수평선을 넘어가던 바다가 내게 손짓을 합니다 쉽게 무너지는 물을 밟고 등에 떨어지는 채찍을 맞으며 오라 합니다 잠들고 깨어나는 하루가 오늘도 첫 제사 같습니다 ―「꽃과 소」부분
2) 태어나본 적 없는 핏덩이들이 엄마, 엄마, 부르며 클로로포름 냄새를 토했다 얼굴 깨어진 사진틀을 지나 목구멍까지 거미줄이 걸린 나를 어린것들이 읽고 있었다 개가죽나무처럼 어두워진 마당이 기우뚱 함석 사립을 밀고 나갔다 ―「빈집」부분
3)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이발소 그림처럼」부분
끊임없이 생명을 거세시키면서 삶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죽음을 놓고 제사 지내기, 수사적 기법의 부재가 낳은 것이 풍경이고, 이런 풍경이 보여주는 것은 죽음과 삶을 연결시켜주는 경계다. 시 3)에서 풍경 속에 놓여 있는 것은 퇴색한 이발소의 그림이 아니다. 뾰족한 가시에 심장이 찔려 아파하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남루하고도 지루한 삶도 아니다. 사실 이발소의 그림은 바로 '나'이고 '너'인 풍경인 것이다. 독한 감기로 몸살을 앓을 때도, 계속되는 삶의 고통 속에서 괴로워할 때도 내면의 우울을 말하기보다는 고통 자체를, 모순 자체를 응시할 수 있었던 거리는 바로 자신을 풍경 속으로 밀어 넣었던 어법과 시적 전략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이 미묘한 '거리'와 '차이'들이 변주되면서 서정은 그렇게 확장되어 가는 것이다. 내면의 공간을 세계 밖으로 밀어내기라는 힘겨운 싸움을 견디면서. ― 계간 《시작》2007년 여름호에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박무(薄霧)ㅡ 조 정
사방이 부드러운 종이 같았어요 엷고 따스하게 풀어진 안개 겨드랑에서 흰 나비 몇 마리 날아오고
동백 숲 너머 소나무 네댓 그루 중 두 번째 나무 왼쪽 가지에 산비둘기가 울었어요
울음으로 만든 산비둘기 알이 모시풀 잎사귀 사이로 흩어져 내렸어요
늙은 거미 손바닥이 축축해지고 울어야 할 일 쓸어 모아 전생에 다 울고 온 끝이라 마른 내처럼 울지 않아도 견딜만하던 나마저 흐릿해졌어요
반대편 가지에 혀가 두 겹인 새들이 날아와 여러 가지 말로 이야기를 했으나 안개가 속속 삼키고 산비둘기 울음만 대팻밥처럼 창틀에 쌓였어요
비탈 아랫집 개 짖는 소리도 바람에 닳아 묵묵한 목질이에요 오늘 기상 예보는 흰 상여 같은 날 나비 떼가 지붕보다 높이 날아다녔어요
---------------------------------- 안개에는 운무, 해무, 연무, 농무, 안개 등이 있다. 이 시의 제목인 ‘박무(薄霧)’도 안개의 한 종류이다. 매우 작은 물방울이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현상으로 수평의 시정 거리가 1킬로미터 이상에서 10킬로미터 미만인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바닷가, 특히 서해바다에서 따뜻한 공기가 내륙으로 이동하는 과정에 맑은 하늘에 갑자기 박무가 몰려와 시야를 흐릴 때가 많다. 이 시는 이런 자연현상과 관련해 느끼는 세련된 정감을 섬세한 언어로 표출하고 있어 특히 주목이 된다. 우선은 엷게 낀 안개인 박무를 “사방이 부드러운 종이 같았”다는 표현이 돋보인다. 독자들도 충분히 “엷고 따스하게 풀어진 안개 겨드랑에서 흰 나비 몇 마리 날아오”는 느낌을 알 수 있고, “소나무 네댓 그루 중 두 번째 나무 왼쪽 가지에서 / 산비둘기가” 우는 느낌을 알 수 있으리라. 이어지는 구절도 박무(薄霧)의 현상, 즉 몽롱하고 혼몽한 착종의 자연현상에서 느끼는 심리현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울어야 할 일 쓸어 모아 전생에 다 울고 온 끝이라/ 마른 내처럼/ 울지 않아도 견딜만하던/ 나마저 흐릿해”진 화자가 느끼는 것들을 묘사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대편 가지에/ 혀가 두 겹인 새들이 날아와 여러 가지 말로 이야기를 했으나/ 안개가 속속 삼키”는 정서적 분위기를 공감하지 못할 독자는 없다. 이은봉(시인, 광주대 교수)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시신기증 ㅡ조 정
어머니를 해부학교실 냉동고에 두고 왔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왔다 머지않은 곳마다 신호등은 그 눈이 선지적으로 붉었다 날이 뜨거웠다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대학 앞 버즘나무들이 투르크족처럼 푸르고 굳세었다 많은 자동차와 간판들 사이로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가로 세로 하늘로 걸쳐진 사다리 천사거나 야곱 출렁거리는 허리춤에 매달려 어머니는 영사기 리모컨의 꺼짐 버튼을 누르는 중이었다 중풍에 무너진 오른 팔을 늘어뜨린 채 상영되던 어머니 하늘은 완전히 비었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웨딩 리본과 풍선을 펄럭이며 흰 무개차가 스쳐 지나갔다 깔깔깔 빈 관 끌리는 소리도 무사히 따라오는지 근심하며 집에 왔다 울타리에는 찔레가 지고 어린 장미들이 피었다 어머니는 벌거벗긴 채 냉동고에 있었다
............................................................................ 시신기증이란 근래에 들어 의학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반드시 본인과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대개는 몸이 아파서 오랫동안 의학의 도움을 받아온 환자들이 사후 자신의 시신을 의과대학에 기부함으로 그동안 도움 받은 의학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이 일반이다. 그런데 시신기증의 결정을 내리는 것은 기증자 본인이지만 기증을 행하는 것은 그의 가족들이다. 여기서 기증자와는 또 다른 정서적 괴리가 발생하는 것이다. 효경에 실린 공자의 유명한 말씀이 있다.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니라.” 이 말씀은 아주 오랜 세월 우리의 정신을 붙들고 있다. 자신의 신체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 부모에 대한 도리인데 하물며 부모의 몸을 실험의 대상으로 기증하고 온 자식의 감정이라니, 조정 시인의 이 작품은 그 감정의 선명하고 서늘한 색채를 보여주고 있다. 1연의 선지적으로 짙붉은 신호등과 2연의 투르크족처럼 짙푸른 버즘나무, 3연의 흰 무개차와 하얀 찔레꽃으로써 화자 자신의 심리를 선연한 색채로 드러내고 있다. 작품 속의 그녀는 1연의 1행에서 어머니를 해부학 냉동고에 두고 신호등을 건너온다. 그러나 2연에서 다시 대학 앞을 벗어나지 못한다. 3연에서 그녀는 좀 더 멀리 웨딩카를 스쳐지나 집에 도착했으나 마음은 아직도 해부학실 냉동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찔레와 장미의 가시에 찔린 듯 아프고 불편함을 보여준다. 내가 이 작품을 추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들끓는 슬픔을 건조하게 말할 수 있는 세련된 시의 구성과 더불어 절절한 화자의 심리를 객관화시킨 여러 묘사를 통해 감정의 전이를 볼 수 있음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1연에서는 선지적으로 붉은 신호등이 어머니의 시신을 해부라는 전제 아래 의과대학 냉동고에 내려놓고 오는 화자의 내면을 끌어당겨 보여준다. 2연에서는 그 대학 앞 가로수인 버즘나무들이 투르크족처럼 굳세고 푸르른 것을 말하며 젊은 의대생들이 가로수처럼 둘러선 실험대 위에 벌거벗겨진 어머니를 연상한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것이다. 중풍으로 오랫동안 병원의 도움을 받던 어머니는 기독교적 실천으로 죽은 몸을 타인의 고통을 위해 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사와 야곱의 허리춤에 매달려 영사기를 리모컨으로 힘들게 끄고 있는 어머니를 보여 줌으로 화자의 복잡한 감정의 교차를 독자 또한 겪게 한다. 그리고 3연에 이르러서 집에 오는 길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인 웨딩카와 빈 관을 대비시킴으로 삶의 양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2행의 깔깔깔은 이중적으로 읽힌다.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이들의 웃음이 천연덕스럽기도 하고 비웃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찔레가 지고 어린 장미가 피어났지만 화자의 마음은 여전히 해부학 냉동고 속 어머니에게 머물러 있음을 보여줌으로 모든 것이 기계화가 되고 물질화가 되는 시대 속에서 피어나는 한 떨기 찔레꽃 같은 심상과 마주치게 하였다. 버즘나무는 플라타너스를 우리말로 이른 이름이다. 버즘나무의 꽃말은 ‘용서와 휴식’, 자식의 도리라는 명분을 거스름으로 안고 있는 화자의 죄의식을 스스로 용서하길 바라며 훼손되었을 그들 부모의 시신과 함께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 곧 5월이다. 버즘나무들이 푸른 잎을 키워 서늘한 그늘을 만들 것이다. ㅡ 정온 / 1966년 전북 김제 출생. 2008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오, 작위 작위꽃』.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누린내풀과 피아노 소리를 지나온 햇살 ㅡ조 정
가을이 아무 데나 있다
책장에서 신곡 지옥편을 반쯤 뽑았을 때 감나무 그림자가 내 등을 만져주었다 마음이 지남철처럼 쓸쓸하게 오전 열한 시를 모과 향기를 끌어안았다
부고를 받았으나 찾아가지 못한 빈소에서 어린 상주의 손톱을 보내왔다
오른발에 검정 끈 왼발에 초록 끈 운동화를 신었다 얇은 코트를 입는 습관에 담겨 걸었다 땅과 겨루던 근심들이 문 안에 눕고 풀들이 뿌리 가까운 데서부터 시들었다
보르게세 공원으로 가겠다는 소식을 부쳤다 그토록 먼 곳에서 플라타너스 잎이 수수만 장 날았다 슬픔을 지지하는 자들 어깨가 젖었다
몸 없는 계절에게 안기면 며칠이나 안기겠니 철조망에 감기는 순색 공기를 끌고 새들은 국경을 넘었으며 골목에는 풀을 베어 태우는 연기가 수북하였다
개와 나는 축대 밑에 지저깨비처럼 앉아 빵을 나누어 먹었다
—《문예바다》2014년 봄호 --------------- 조정 / 전남 영암 출생.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이발소 그림처럼』.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동개(冬蓋) ㅡ조 정
낙엽 몇 페이지 빈틈없이 밀착한 자리 잇몸에 저장한 체온이 초병처럼 작고 위태롭다
일체 세사가 창 밖에 있다
말랑말랑한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나무 한 그루마다 전속되어 숲은 때로 육천만 년간 연습해온 협연을 들려준다
긴 휴지부 속으로 끌려 내려온 겨울 하늘이 살갗에 점멸하며 피 묻은 지승문자를 풀어 읽었다
아들은 집 나간 지 삼 년에 소식이 없다 이웃에는 더불어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어찌된 셈인가 긴 잠이 죽음은 아니어서 천천히 망각을 통과하며 맛보는 신선한 상추 냄새
몸을 물과 같이 풀어도 베이는 자리가 있다 신전과 세속이 만나는 난간 궤도 밖 떠도는 폐우주선이 시간의 기지개처럼 한가로웠다 —《실천문학》2012년 여름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해남 ㅡ조 정
두 계절을 비운 집이 방금 자고 일어난 자리처럼 따뜻하게 구겨진다
석양이 낡은 벽의 얼굴을 만지고 가는 중이다
기다린 흔적 남기지 말라는 당부 잊은 듯하다 길 쪽으로 목을 뺀 채 말라 죽은 강아지풀 십여 평
방문은 잠겼다 바다와 저무는 해와 찔레나무는 유리창 안에 있다 그들의 맨발인 내가 내 어깨 너머로 부서져 내리는 것을 내다보고 있다
이 방이 누구 가묘였더라
들어가 함께 누울 수 없는 길들이 실뱀 떼처럼 나를 빠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인화되지 않아도 좋은 필름 감기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