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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미술 (토니 고드프리) 중 머릿말 4.5장 요약분.
1. 개념 미술이란 무엇인가?
개념 미술은 형태나 재료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개념과 의미에 관한 것이며, 미술인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개념미술은 독창적이고 수집 및 매매될 수 있는 미술 대상의 전통적인 존재방식에 도전한다.
작품이 전통적인 형태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개념미술은 관람자에게 좀 더 적극적인 반응을 요구한다.
실제로 개념적인 미술작품은 관람자의 정신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개념미술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일상적인 오브제, 사진, 지도, 비디오, 차트 그리고 언어 그 자체를 이용한다.
종종 그 형태들의 복합일수도 있다.
미술과 표현 그리고 그것들이 사용된 방식에 대해 철저한 미술 비평을 제공함으로써, 개념미술은
대부분의 미술가들의 사고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존경하고 찬탄해마지않던 20세기 미술에 개념미술이 의문을 품은 것은 바로 우리의 문화와 사회의 내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개념미술은 1966-72년에 정점이자 절정에 이르렀다.
이 용어는 1967년경 처음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으나, 개념미술의 특징은 20세기를 통틀어 존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개념미술이 최초로 표명된 것은 프랑스 미술가 뒤샹의 ‘레디메이드’들이었다.
그러므로 1960년대 말에 개념 미술가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은 50년 전 뒤샹이 예시한 것이었고, 어느
정도는 1916년 다다의 반 예술적인 제스처 안에서 예상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20년간 네오 다다이스트들과 미니멀리스트들을 포함한 모든
영역의 미술가들에 의해 다시 제기되고 확장되었고 이러한 문제들은 1960년대 말에 나타난 미술가
세대가 완전하게 발전시키고 이론화했다.
개념미술은 사실 국제적인 현상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뉴욕뿐 만아니라 샌디에이고, 프라하. 부에노
스아이레스에서도 개념미술을 볼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뉴욕이 미술 확산과 발전의 중심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동안 뉴욕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가장
비중 있게 논의되어왔다.
개념미술이 매체나 양식으로 설명될 수 없다면 그것과 마주쳤을 때 그것이 개념미술 작품임을 어떻게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개념미술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 레디메이드를 들 수 있다.
미술작품의 독창성과 미술가의 손작업의 필요성을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개입’으로서 이미지,택스트. 사물등을 미술관이나 길거리 같은 예기치 않은 문맥 속에 갖다놓아
그 문맥으로 관심을 끌어내는 것이다.
셋째는 ‘자료형식’이다.
실제 작품과 개념, 행동등은 모두 증거와 기록, 차트 그리고 사진을 제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언어’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개념과 진술, 조사 등의 언어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우리는 유형별로 분류하는 데는 조심해야한다.
개념미술가들이 그것을 금기시해왔기 때문이다.
많은 개념미술가들이 자신들의 작업이 제한되어 정의되는 것을 거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작품
또한 정해진 명확한 유형으로 분류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공공연하게 미술관에 반대하는 이유 중 하나는 미술관이 종종 불합리한 결과를 발생시키기도
하는 ‘범주’를 계속 주장하기 때문이다.
개념미술작품을 특정한 양식이나 매체가 아닌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제기로 볼 수 있다면,
혹자는 ‘이것’이 오브제, 이미지, 퍼포먼스 또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 표현된 아이디오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미술일수 있다”는 전제만으로도 완벽해진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개념 미술은 재귀적이다.
개념미술은 상상함으로써 또는 증명함으로써 부정이나 회의를 넘어선다.
회의하고 상상하는 양면적인 작용이 개념미술의 기반을 이룬다.
수많은 정의가 제기됐으나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미술에 대한 정의는 없다.
초기에 비교적 널리 사용된 정의는,1967년 ‘아트포럼’에 실린 미술가 르윗의 <개념미술에 관한 글들>에서
나왔다.
“개념미술에서는 이이디어 또는 개념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미술가가 미술의 개념적인 형식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계획을 세우고 결정을 내리는 모든 것들이 미리
행해지며 그 실행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부수적인 것임을 뜻한다.
개념은 작품을 만드는 기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르윗의 작품과 같은 작업방식에 가장 잘 적용된다.
그는 곧 자신이 작업하는 방식의 개념적인 미술과 다른 미술가들이 하는 개념미술을 구별하고자 했다.
초기에 알려졌던 또 하나의 정의는 코수스가 1969년에 발표한 <철학을 따르는 미술>이라는 글에서 볼 수
있다.
“개념 미술에 대한 가장 ‘순수한 정의는 그것이 의미하게 되는 바의 ’미술‘이라는 개념의 기초를 탐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 역시 미술가로서의 코수스 자신의 실행에 대한 정의다.
몇 년 뒤 비평가 루시 리파드가 비판했듯이, 개념 미술가들의 수만큼 많은 개념미술에 대한 정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순수한‘개념미술과 추측하건대 ’불순한‘개념 미술이라는 허상이 제기되었고, 그것은 나중에 ’올바른‘작업
방식과 ’잘못된‘ 작업방식에 대한 논쟁을 예고했다.
1960년대 후반에 개념미술에 특히 관심을 기울인 비평가 리파드는 개념미술의 주요 공통요소로서 미술
대상의 ’비물질화‘를 강조했지만 다른 비평가들은 이것이 실제와는 괴리가 있다고 거부하였다.
그러나 1995년 리파드는 ’미술 대상에 대한 재고‘라는 회고전 카탈로그에서 훨씬 더 신중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내가 볼 때, 개념미술은 그 안에서 개념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되 재료는 이차적이거나 별로 쓸모없거
나 일시적이거나 저렴하며 또 두드러지지 않고, 더 나아가 비 물질화하는 그러한 작품을 뜻한다.”
1996년경 코수스 역시 훨씬 융통성 있는 정의를 내린바있다. “간단히 말하면, 개념 미술가들은 그 기본적
인 신조로서, 형태나 색채 또는 재료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지고 작업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지닌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후반의 가장 중요한 그룹인 ‘미술과 언어’는 모더니즘의 신경질적인 붕괴로서의 개념미술의
특징을 나타냈다.
신경질적인 붕괴는 삶이 기초하고 있는 모든 것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을 때 발생한다.
개념미술가들은 미술이나 모더니즘의 주장과 그것이 누려온 사회제도에 불신하게 되었다.
개념미술은 모더니즘의 미술의 발전개념에 격렬하게 대항했으며 특별한 종류의 상품으로서의 미술
대상의 존재라는 면에도 반대했다.
미술, 특히 회화에 내재한 순수하게 망막에 기초하거나 시각적인 성격은 모더니즘 이론가들과 주동자들에
의해 고양되었는데 이는 모든 시각적인 경험과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언어의 역할을 강조한 개념 미술가들
에게는 이것은 저주스러운 일이었다.
모더니즘미술은 세련되고 밀폐된 담론이 된 반면 개념미술은 그 담론을 철학과 언어학 , 사회과학 그리고
대중문화에 개방시켰다.
개념미술은 정치적으로나 미술적으로나 권위를 의심받게 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개념미술은 양식이 아니다.
또한 시기를 지정하거나 한정시킬 수도 없다. 다소 논쟁적으로 말하자면, 개념미술은 비판적 정신에 입각
한 전통이다.
개념미술이 바로 그 전통이라는 관념을 반대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전통’이라는 단어의 사용은 모순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개념미술작품을 보고 있을 때 그 작품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관람자, 곧 당신인 것처럼, 결국 당신은
스스로 무엇을 믿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2.개념미술 작품들 (토니 고드프리의 ‘개념미술’중 8개의 개념미술 요약)
1) 디베츠와 루텐벡
“영국식 아침식사의 에너지는 미술가들인 디베츠와 루텐벡에 의해 진짜 강철 막대를 부러뜨리는 힘으로
변형되었다”
이 작품에서 위트를 찾는다면, 그것은 플럭서스 스타일의 장난이 아니라 하나의 제안이 아주 심각하게
실행되고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캡션의 ‘진짜’ ‘변형되었다’ ‘미술가’등과 같은 단어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여러 개의 질문이 암시적으로 제기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즉, “무엇이 ‘진정한’ 영국식 아침식사인가?” " 이것이 ‘정말로’ 일어난 일인가? “라는 질문뿐 아니라,”
진정한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그것이다.
진부하고 무표정한 스타일을 통해 이 사진들은 그것이 모두 사실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실제로 강철 막대를 부러뜨렸는가를 증명할 수 있는 방도는 없다.
‘변형되었다’는 무슨 뜻일까? 이들이 과연 ‘미술가들’일까?
무엇이 이러한 행위를 미술로 만드는가?
아침식사가 강철 막대로 변형된다는 가정은 가능한가?
오히려 텍스트와 이미지가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가?
이러한 의문들은 매우 투명해 보이지만 사실은 다분히 문제가 있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로
관심을 이끈다.
우리는 이 시기의 시각적 소통에서 가장 지배적이고 영향력 있는 형태가 광고였음을 기억해야한다.
광고에서 텍스트와 이미지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고도로 조작되고 조종하는 상호관계로 묶여있다.
결국 실제 오브제인 강철 막대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마치 오브제는 주제가 아니라고 강조라도
하듯이 그것에 관한 지속적인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2. 코수스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에서 ‘진정한’작품은 개념이다. 즉, “의자란 무엇인가”"어떻게 의자를 재현할
것인가“”미술이란 무엇인가“ ”재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그가 미술이 미술인 것이 곧 미술이 다들 동어 반복적이라고 설명했던 것처럼, 의자가 의자인 것이 곧
의자임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다. 우리가 실제로 볼 수 있는 세 가지 요소(의자의 사진, 실제의자, 의자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그러한 원리에 따른 것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즉 이작품은 평범한 의자와 사전을 직접 복사한 의자에 대한 정의와, 심지어 코수스가 직접 찍지도 않은
사진 등으로 이루어졌다.
코수스의 “세 개의 의자”전시가 끝나서 치울 때, 그 작품을 소장한 주요 미술관은 대개 그것을 어디에
보관해야할지 고심하게 된다.
다시 말해 ‘개념미술’과가 없고, 그러므로 쌓아놓을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미술관의 논리에 따라 의자는 디자인과에, 의자 사진은 사진과에 그리고 사전적 정의인 사진
복사는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그들은 작품을 해체시킴으로써만 보관할 수 있었다.
3.코수스와 파올리니.
- 코수스의 “개념으로서의 보편적인” 와 파올리니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코수스와 파올리니의 이 두 작품에서 말과 시각적인 제시물의 결합을 볼 수 있다.
두 미술가 모두 텍스트(말)를 강조했다.
코수스는 ‘보편적인(universal)이라는 단어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네거티브로 사진 복사해 전시했다.
파올리니는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에서 ’무한성(infinity)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택해 활자체로 인쇄하고
석판화로 찍어냈다.1969년 코수스가 주장했듯이 그의 작품은 순수하게 개념적인 미술이다.
이 무렵 그는 “개념 미술에 대한 ‘가장 순수한’정의는 그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미술’이라는
개념에 기초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코수스는 미술작품과 그것의 ‘기록’을 명백하게 구분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내가 미술작품으로서 이 사진 복사를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이것은
그가 그러한 작품의 부제를 ‘개념으로서의 미술’이라고 붙인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 복사된 개념은 그것이 폐기되어도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부적절한 과정의 일부로서 다시 제작한
것은 그것의 재현형태와 연관되었지 ‘미술’과 연괸되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사진 복사를 효과 없는 가짜 회화로 보기 시작하자 그 작업을 그만두었다.
코수스는 작품의 부제를 통해 그가 미술을 동어반복으로 보았음을 나타냈다.
즉 미술개념과 미술은 똑같은 것이며 미술임을 입증하기위해 미술 밖의 문맥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미술로
이해될 수 있다.
코수스에게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동어 반복적이었다.
즉 레디메이드들은 “나는 미술이기 때문에 미술이다”라고 스스로 드러냈는데 그것은 라인하르트가
‘미술은 미술로써 미술이다“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반대로 형식주의 회화는 ”나는 내가 다른 회화들과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미술이다“를 통해 그
자체를 드러낸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그것은 예형론적(typological)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코수스는 회화가 결코 미술의 본성에 대한 문제를 다룰 수 없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회화매체는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미리 설정된 해석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수스의 작품이 미니멀리즘과 미국추상의 이론들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면 파올리니의 작품은 유럽의
미술과 문학 그리고 특히 만초니의 예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피상적으로 볼 때 파올리니의 ‘무한성’은 코수스의 작품과 똑같은 영역을 다루고 있는 듯하다.
즉, 사전에서 추상적이 개념에 대한 정의를 추출해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코수스의 일회용 사진 복사와 달리 파올리니의 작품은 화랑에서 매매될 수 있는 석 작품제목에
어울리게 이 석판화는 무한에 이르기까지 복제할 수 있었다.
파올리니는 오브제를 상기시키거나 암시하는 반면 코수스는 오브제들을 정의하고 그려낸다.
코수스에게 회화가 옛것이기 때문에 폐기되었다면, 파올리니에게 회화는 유령으로든 꿈으로든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코수스가 진술하는 한편, 파올리니는 암시했다.
4. 발데사리
보통 개념미술가들은 회화라는 매체를 경멸하면서도 회화 그 자체로서보다는 기록미술이라는 차원에서
회화를 종종 사용하곤 했다.
발데사리는 “지시하기”에 근거한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중에는 1969-70년의 “네 개의 의뢰된 그림”이 있다.
그는 친구와 도시를 걸으며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 친구의 손이 지시하는 것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러고 나서 아마추어화가들에게 자기가 찍은 사진을 보내어 그들이 선택한 사진을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발데사리는 그 위에 그림을 그린 사람의 이름까지 각각 스텐실로 적은 그림들을 전시했다.
그렇다면 누가 미술가인가?
작품을 구상한 발데사리인가, 아니면 그림을 그린 화가들인가?
전통적으로 볼 때 그림을 그린 사람이 미술가이다. 그림들이 다른 어떤 이미지를 모사했을 때조차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19세기 삽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판화를 고흐가 모사한 것을 ‘반고흐의 작품’으로 본다.
그러나 여기서 일련의 그림들은 언제나 ‘발데사리의 작품’으로 논의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저작권은 그 실행보다는 개념에 돌아가게 된다.
미술에는 어떠한 요소가 존재하는가? 회화에서는 어떠한가?
그 그림의 전체적인 총합에는 어떤 요소가 있는가? 또한 그 안에는 기본적인 개념이 들어 있는가?
만약 그것이 개념 안에 있다면 우리는 실제 그림들을 미술 그 자체보다는 미술의 기록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5.나우먼
비트겐슈타인이 명백히 불합리한 논제의 가정을 언어로 분석했다면, 나우먼은 다른 방식으로 풀어냈다.
즉 납판위에 글을 새기고 그것을 정원의 나무에 못질하여 붙였다.
거기에서 우리는 원예작품이나 기념판을 볼 것이라고 기대할지도 모른다.
제시된 것과 그 문맥은 작품의 의미의 일부가 되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진실인가? 그것이 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은유적으로 사실성이 있는가?”와 같은 질문을 해봄으로써, 진실-말하기에 대한 전체적인 문제의
속성을 중심에 놓고 있다.
또한 이러한 작품을 통해 나우먼은 대부분의 야외조각이 지닐 수 있는 방해적인 특성을 거부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지 않았으며, 몇 년 뒤 나무가 자라나
그것을 능가하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없어져버릴 것임을 지적했다.
나우먼은 ‘미술가는 무엇을 하는가?’라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사진작품“ 너무 식어서 쏟아버린 커피”에서 그는 “나는 그 많은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재료를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스튜디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과 내가 그곳에서 하고 있는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많은 양의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그것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전통적인 미술은 대체로 작품의 질과 성공 즉, 완벽함을 중시한다.
그러나 결핍을 바라보고 그것과 함께 살아야하는 것이 개념 미술에서 일상에 대한 의무의 일부이다.
나우먼의 스튜디오는 스스로 해결해가는 철학자의 공간이 되어갔다.
생각이외에 그가 사용한 유일한 재료는 종이, 쓰레기 그리고 그 자신의 신체였다. 신체와 신체의 경험은
그에게 중요한 접근 방식이었다.
“나는 일종의 작업방식으로서 내 신체를 재료의 일부로 사용하고 또한 조작하고 있었다.
나는 신체가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생각한다.
때로는 그 행동이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과 연관되기도 하고, 때로는 행위 그 자체가 작품이 되기도 한다.”
생각하기, 움직이기, 만들기가 모두 그가 말하는 행동이었다.
1965년부터 그는 “바닥과 천장 사이를 왕복하는 두개의 공, 스튜디오를 오락가락하면서 바이올린으로
한음표 연주하기”처럼 단순한 행동을 기록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디베츠와 루텐백이 텍스트와 이미지사이의 연결과 단절을 통해 개념미술에 대한 하나의 열쇠를 도입했
다면, 나우먼은 사고와 신체사이의 연결과 단절이라는 새로움 열쇠를 도입했다.
개념미술은 종종 비신체적이며 이성적이라고 간주되지만, 놀랍게도 전통미술에서 떨어져 나온 오브제는
가끔 신체적인 경험과 관련된 실험으로 이끌었다.
6.롱
꼭 신체적인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1967년 영국의 롱이 찍은 예술성이 없어 보이는 사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도보에 의해 만들어진 선”은 공원을 가로질러 왔다 갔다 하면서 기록한 흔적이다.
그의 도보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그 사진이 전시되고 팔릴 수 있는 것이라고 해도 미술작품을 구성한 것은 바로 걷는 행위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작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었고, 상업 화랑의 밖에서 존재했다.
또한 환경에 지속적인 손상을 전혀 주지 않았기 때문에 생태학적으로도 건전하다.
만약 미술가가 통상적으로 선을 긋는다면, 걸어서 선이 만들어지는 것 또한 드로잉이 되는가?
그렇다면 걸을 때 우리는 모두 미술가인가?
롱이 자연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음으로써 자연속의 존재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한, 그
역시 정치적인 진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해석의 정치적인 차원이 중요하다.
1988년 그레이엄은 1960년대의 분위기 변화를 이야기하면서.
“미니멀리즘은 미몽에서 깨어난 좌경의 실존주의적인 지성에 매우 가까웠다.
미니멀리즘이 개념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때, 개념적인 것은 도덕적이고 유토피아를 꿈꾸며 청교도적
이고 개인적이 되었다.
개인적이라는 것은 개인적 정신성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신좌파…….매우 도덕적이고 청교도적인 전망에 가까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롱의 작품을 플럭서스보다 훨씬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이러한 잠재적인 도덕적. 정치적 의미이다.
7. 로버트 스미드슨.
좀 더 본질적인 개입은 로버트 스미드슨의 “거울 전치(포틀랜드섬, 영국)”에서 볼 수 있다.
“나는 거울을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의미에서 거울은 실제 거울이면서 동시에 반영이기 때문이다.
즉 개념과 추상으로서의 거울이며 개념적 거울이라는 의미에서의 거울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울은 전치이다”
이러한 복잡한 진술은 거울이 인간의 의식과 비슷하다는 개념이다.
즉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깨닫는 것은 곧 그것으로부터의 분리(소외. 전치)를 깨닫는 것과 같다.
스미드슨은 장소와 비장소의 개념에 관심이 있었다.
장소는 실제의 위치를 뜻하며 비장소는 그것의 재현을 뜻한다.(예를 들어 화랑의 공간에 놓여있는 한
무더기의 돌은 비장소이다. 하지만 그는 장소가 항상 변화와 엔트로피의 과정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그의 그 기본적인 관심은 시간의 추이와 관련되었다.
미니멀리스트들의 작업방식과 마찬가지로 스미드슨에서도 계산은 배열에 관계했다.
또한 ‘거울전치’는 미술의 개념적인 작업의 범례적 형식과 관련되는 전체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 작품이 7개의 연속적인 흑백사진 이미지로 실리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것은 다른 크기로
실렸을 것이다.
종종 따로 전시되곤 했던 반면, 그의 사진작업 카탈로그에는 이 작품이 연속된 128개의 슬라이드 목록
으로 정리되어있다.
개념 또는 행위가 가장 중요했다면, 그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는 그것이 속해있는 문맥에 의존한다.
아마도 우리가 사진에 대해 가져야할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것을 연구계획의 증거로 간주하는 것이다.
8. “미술과 언어” 의 서문.
이 잡지는 1969년 ‘미술과 언어’그룹의 구성원인 앳킨스, 베인브리지, 마이클 볼드윈, 헤럴드 허렐이
개념미술을 알리기 위해 시작되었다.
“개념미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어떤 윤곽을 명시하고자 시도한 이 책이 바로 개념미술이라고 가정하자.
처음에는 이 책이 시각예술의 한정된 한계 안에 묶여있는 과거의 많은 상황들과 평행하는 듯 보일 것이다.
예를 들어 큐비즘 그림들이 처음에 무엇이 시각예술인가에 관한 어떤 윤곽을 밝히려는 시도인 동시에
시각예술 그 자체로 명시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른 점은 이른바 ‘작품의 형태’라는 문제이다.
개념미술이 처음부터 관심을 쏟은 것은 시각예술의 형태를 엄격하게 지배하는 것으로 보이는가에 대한
조건- 즉 시각예술은 시각적으로 남는가― 을 의심해보는 일이다.”
그는 또 개념미술의 구조 안에서는 미술 만들기와 특정종류의 미술이론 만들기가 똑같은 절차이다라고
지적했다. 여기서도 앳킨슨이 미술대상보다는 미술작업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 주목할 만하다.
즉 중요한 것은 사물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것은 네오다다가 우선시한 것, 즉 오브제에서 벗어나는
열쇠였다.
앳킨슨은 “영국의 개념 미술가들은 특정한 지점에서 그들이 끌어들인 문제들의 본성이 구체적인 오브제에
대한 언어적 한계를 넘어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쓰고 있다.
구체적인 오브제는 더 이상 그것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론적인 대상들과 관련된 똑같은 것을 발견하고 나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의 종류에 근거해
언어와 대상의 명확한 한계를 설정했다”
이러한 주제들은 기본이 되는 언어형태, 즉 단어를 기초로 한 언어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어떤
임의의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형태가 오늘날 미술의 문제에서도 가장 통찰력 있고 유연하게 대처
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앳킨슨은 결론지었다.
그는 언어를 쓰는 사회를 떠나서는 미술을 상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철학자 리하프트 볼하임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미술형태가 미술사회의 언어 사용을 초기적 질문의 관점으로 받아들임으로써만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일은 결코 상식 범위를 벗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미술의 재료는 미술에 관한 논의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씌어지는 데 사용된 방식은 간접적으로 개념미술에 대한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것은 의식의 본성에 관한 문제이거나 엣킨슨 자신이 나중에 묘사했듯이 “여기에서 증식해 나온 반동
적인 무용들처럼, 자아와 자의식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개념미술
5장, 개념미술의 다양성
1960년대 후반 자본주의가 완전히 개화했을 때 미국은 광고업자와 호보활동가의 시대이자 눈에 띄는
소비의 시대로 돌입하고 있었다.
기술적인 발전은 더 편한 삶, 더 나아질 삶을 약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세계에서 인간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주의 분석은 설득력을 잃었다.
왜냐하면 마르쿠제가 지적했듯이.
“문명에 의해 사물의 세계가 인간의 정신과 몸으로까지 연장됨으로써, 바로 그 소외의 개념은 의심스러
워진다.
사람들은 그들의 자동차와 하이파이 스테레오, 멋진 이층집, 부엌의 편리한 가전제품들을 통해 자신들을
인식한다.
개인이 사회에 연결되는 메커니즘도 변화해왔으며, 사회적인 통제는 그것이 만들어낸 새로운 욕구와
연관된다”
미술작품에서, 그 자체의 가치로서의 새로움을 향한 이러한 열망은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테크닉에 의해
예증되고 완성되었다
개념미술은 언어의 오용에 대한 반응과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사물이나 사건의 상태와 그것의 문서화 그리고 미술가의 역할 등이 개념미술가들에 의해 점점 의문시
되었다.
이장에서는 최소한 임시라도 개념미술을 7개 영역에 걸친 작업으로 분류해 볼 것이다.
7개 모두 권위주의와 그것의 기만적이고 발광적인 수사학에 의해서는 인정받지 못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연속적 작업, 반형태의 조각, 언어를 기반으로 한 작업과 이론적인 작업, 모노크롬 회화, 발명,
아르테 포베라를 연상시키는 레디메이드에 대한 시적 접근을 들 수 있다.
1. 연속적인 작업
보크너는 “연속적인 또는 체계적인 사고는 일반적으로 예술적인 사고에 대립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고
말했다.
최상의 예술적 업적이 응축된 단일한 회화 또는 조간을 걸작이라고 한다면, 연속적 작업은 일련의 대안
들을 제공하지만 그 대안들은 어느 것도 우선권이 없다.
그러므로 연속이나 과정의 기본을 이루는 개념이 결과적인 작품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비평가 존 코플런스는 1968년 “연속적인 방식에 따라 걸작 개념은 폐기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연속주의는 예술의 신비나 아우라에 대한 공격이라기 보다는 확실히 위계적인 구성 질서에 대한 거부이다.
독일에서는 페터 로어가 1962년경 선불교와 관계를 맺으면서 연속적인 구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품과 다른 사람들의 연속적인 작품들이 최면효과를 지닌 주문처럼 보인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으
며, 그것은 마치 미니멀 음악에 대한 경험과 유사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미에 대한 강조는 사라져버렸다.
1965년 로어는 “ 이 회화는 아무런 초점도 없으며 오히려 초점은 모든 곳에 산재 한다”고 말했다.
그의 초기 연속적 작품들은 계산기를 이용한 것인데 그것은 오로지 이전의 계산에서 남아있던 숫자들을
종이가 떨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었다.
1965년경 영화의 커트장면을 모아 짧은 반복적 영화로 재편집하고 있었다.
전체구성이 부여하는 정확한 관계를 빼앗긴 오브제 또는 단편은 미결된 채 남아 있었다.
그것의 개념적인 의도는 불확실했으나 확실히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뒤샹이 워홀에 대해 말했듯이 “누군가 50개의 켐벨 수프 깡통을 가져다 캔버스에 놓았다고 하자.
우리가 관계하는 것은 망막적인 이미지가 아니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50개의 캠벨 수프깡통을 캔버스로 옮기고자 했던 바로 그 개념 이었다”
몇몇 사람들에게 반복은 의미의 대상 또는 기호를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논쟁의 중심적인 텍스트는 아우라의 소실에 대한 분석을 다룬 발터 벤야민의 <기계 복재 시대의
미술작품>이었다.
50번 반복한 워홀의 마를린 먼로는 기호가 되었으며 현존성을 잃어버렸다고 여겨져 왔다.
그러나 우리는 로어가 자신의 작품을 후광 또는 복제에 대한 내재성을 가진 것으로 본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사용된 “결코, 결코, 결코, 결코, 결코”라는 다섯 번의 반복이
단어의 의미를 소멸시켰는지 아니면 배우나 독자들로 하여금 단어의 다양성과 강도를 충만하게 느낄 수
있도록 했는지 생각해봐야한다.
르윗은 특히 연속적인 작업과 연관되었다.
“연속을 사용하는 미술가는 아름답거나 신비한 오브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계획의 결과를
정리하는 비서의 역할로 기능 한다”
이 시기의 그의 드로잉들을 보면 단순한 수학적 개념이 수행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선을 긋고 계산을 함으로써 드로잉을 만드는 것이 종종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르윗은 사물이 단지 하나의 개념처럼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완벽한 개념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 나는 나의 전체 생각이 미술작품이 될 수 있도록 완벽해져야만 한다는 개념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1968년 르윗은 벽 위에 드로잉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직접 실행한 것은 아니고 다음과 같은 지침서를 제도공에게 주었다.
“ 1만개의 임의적인 직선들을 한명의 제도공이 그린다.
하루에 1,000개의 선을 열흘 동안 120평방인치의 사각형안에 그린다.
선들은 짧지 않게 딱딱해 보이지 않게, 교차하면서 만나되 임의적이 되게 한다.
네 가지 색채를 사용해 벽의 전체 표면을 덮을 수 있도록 최대한 촘촘하고 균일하게 선을 분산시킨다.”
벽에 직접 그림으로써 그는 벽의 일루저니즘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벽위에 제작했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매매될 수 없었다. 그것은 전시가 끝나면 지워지거나 그 위에 페인트가 칠해짐으로써
일회성 미술이 되었다.
제도공은 한 개의 벽 드로잉에 대해 그 자신이 손으로 그린 작품을 스스로 지우도록 명령받게 된다.
르위은 ‘좀 더 진보한“개념미술가들이 언어만 강조하거나 숨이 찰 정도로 언어를 이용하는 것을 못마땅
하게 여겼다.
그는 부분적으로 그러한 미술가들을 충자하기도 했으며, 논리도 부정했다.
” 개념미술은 논리적일 필요가 없다.... 개념들은 직관에 의해 발견된다“
그렇다면 르윗은 개념미술을 하기는 한 것인가? ”나는 그러한 운동으로서의 개념미술에 연루되지 않았다.
다만 다른 종류의 개념들을 발생시키기 위해 추상적이거나 기하학적인 형태를 사용하는 데 관심이 있었
으며 철학의 침체 속으로 빠져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개념이나 지침서를 연주자를 위한 악보처럼 여겼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우리는 그가 작품을 위한
패러다임으로서 언어보다는 오히려 음악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비평가 버니스 로즈가 주장하듯이 “ 경험의 뿌리로 되돌아가려는 야심과, 재현이든 추상적이든 전통적인
시각방식에 부합한 태도들에 오염되지 않은 상징화에 대한 원초적인 경험을 재창조하려는 야심이 개념
미술의 중심부에 있다”면 솔 르윗의 작업 또한 개념미술의 중심에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계수행위를 하는 작품.
다른 미술가들은 기본적인 계수행위를 하는 작품으로 전향했다.
1965년이래 폴란드의 화가 로만 오팔카는 1부터 무한에 이르는 연속된 숫자들을 회색 바탕위에 흰색으로
쓰는 일만 해왔다.
그뿐 아니라 그는 숫자들을 말해 테이프에 녹음하기도 했다.
원래 계획에 충실하여 그는 작업방식을 거의 바꾸지 않았으며 다만 가장자리에 1퍼샌트의 흰색 물감을 더
섞어 배경보다 조금 더 희게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그것들은 ‘ 흰색 바탕에 흰색으로 그리는 그림’에
접근했다. 시간의 경과를 강조하기 위해, 오팔카는 매일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다.
가와라도 시간의 경과에 대한 강박을 나타냈다. 1966년 그는 ‘날짜그림’을 시작했는데 작품마다 날짜로
이루어졌고 모노크롬의 배경위에 그려져 있었다 .
그림의 완벽한 표면을 강조하기 위해 4,5개의 물감 층으로 세심하게 제작했으며 독특한 표현의 흔적도
전혀 남기지 않았다.
1991년경 그는 이러한 그림을 거의 2,000여장 그렸다.
그는 그것들을 상자 안에 넣어 팔았는데 각 상자에는 그날의 지역신문 한 페이지가 들어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그림들은 그날 가와라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말해준다.
종종 전시되는 그의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도 있었다. “나는(오려낸 신문 모은것을)읽었다.
나는 (그가 만난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그가 갔던 곳에 똑같이) 갔다” 로어의 작품들처럼 그의 날짜
그림들은 명상의 형태로 논의될 수 있다.
2. 반형태의 작품
이 무렵 재료와 과정을 강조한 많은 조각들은 “소리들이 그 자체가 되게 하라”는 케이지의 명령을 “재료
들이 그 자체가 되게 하라”고 해석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과정미술, 반형태, 포스트 미니머리즘등 여러 가지용어가 그러한 작품들을 기술해왔다.
재료에 대한 강조 때문에 그것은 개념이나 언어만으로 진술하는 미술에 반대되거나 또는 그러한 미술에
대한 필연적인 추론으로 보였다.
완성된 마지막의 명확한 결과보다 과정을 강조하는 반형태는 어떤 점에서는 다분히 언어적 미술로서의
형식주의에 대한 반동이었다.
이 무렵 많은 미술가들이 화랑에 흙무더기, 실뭉치, 철사, 건초 가마니, 거칠고 조각난 돌맹이들을 들여
왔다.
관람자의 눈앞에서 평가절하 되거나 변화를 겪는 재료들이었다.
롱은 화랑 바닥에 흙과 솔잎 또는 작은 가지들로 단순한 선이나 원을 만들었다.
1968년 라파엘 페러는 얼음으로 조각 작품을 만들어놓음으로써 작품의 불가피한 소멸을 통해 제작의
과정보다는 재료의 과정을 더 강조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는데 주목해
야한다.
즉, 일찍이 캐프로는 유동체라는 해프닝에서 사람들을 초대해 얼음벽이 녹는 것을 지켜보게 한 적있다.
1964년 캐나다에서 이언 백스터가 2톤의 얼음조각을 만들었는데, 이것 또한 소멸 .비 영원성, 변화, 파괴
등의 개념을 나타내기 위한 작업이었다.
스미슨도 점액질의 불안정한 재료로 자연 속에서 조각을 만들거나 자연에 개입했다.
1969년 그는 짐차에 아스팔트를 가득 실은 뒤 로마 근처의 채석장 한구석에 쏟아 넣었다.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면서 흩어졌다” 이렇게 붓고 떨어뜨리거나 흘러내리게 하는 많은 다른 작품들이
있었다.
3 언어를 기반으로 한 작품과 이론적인 작업들
개념으로서의 미술이면서 동시에 개념뿐인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언어를 기반으로 한 작품의 목적이
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러한 말들을 나타낼 수 있는가? 언어적 제시가 결과로서의 작품과 같은가?
발데사리는 1967년과 1968년 연속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회화에 관한 이야기나 경구를 전문
표지판 제작자가 캔버스위에 쓴 것이다.
언어적 제시만이 언제나 그의 예술의 일부였다. 언어제시를 위해 그림을 필요하거나 회화가 의미에
도움을 준다면 이미 ‘의뢰받은 그림’에서 보았듯이 회화를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코수스 같은 사람들은 회화를 개념미술가들이 피해야만 하는 일종의 오염으로 보았다.
코수스는 발데사리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존 발데사리의 흥미로운 팝 회화들이 실제 개념미술에
대한 ‘개념적’풍자만화로 이루어지는 종류의 작품을 암시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정말로 부적절하다”
이점에서 왜 1960년대 말의 많은 미술가들이 언어를 우선적, 배차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첫째, 미술 대상을 계속 빗물질화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둘째, 좀더 폭넓은 청중과 의사소통하려는 야망이 있었다.
셋째, 하랄트 제만이 말했듯이 ‘두뇌적인“작업을 향한 욕구가 있었다.
배리는“ 나는 언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언어가 관람자에게 직접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어와 연관될 수 있다. 언어는 관람자와 작품사이의 갭에 다리를 놓아준다.
내가 단어를 읽거나 책을 읽을 때 그것은 저자가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페이지는 내게 그 자체를 읽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나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넷째,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모든 미술작품이 근본적으로 언어라는 것이다.
‘미술과 언어’의 서문에서 코수스가 썼듯이 “모든 미술 제안의 언어적 성격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미술
개념에서 근본이다. 그것은 미술제안들이 과거의 것이든 현재의 것이든, 또한 그것들의 구성에 어떠한
요소들이 사용되었든 간에 상관없이 그러하다”
다섯째, 미술의 의미를 이론화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빗물질화하려는 경향에 애한 또 다른 주요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술시장에 대한
혐오였다.
1972년 우술라 메이어가 언급했듯이 “대상에서 개념으로의 이동은 이 사회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일상적이 소모품들의 개념에 대한 경멸을 암시한다.
개념 미술가들은 미술을 미술판매자가 아닌 진정한 미술가들에게 돌려주어야한다는 직업적인 의무를
제시 한다” 미술 대상을 없앰으로써 미술가는 ‘양식’이나 ‘질’과 같은 용어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
1968년의 글 ‘미술의 빗물질화’에서 존 챈들러와 리파드는 1945년 이후 미술시장을 지배한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작품 제작방식이 “거의 배타적으로 사고의 과정만 강조하는 극단적인 개념미술”에 자리를
내주었다고 주장했다.
작품이 스튜디오 밖에서 이루어졌기에 “스튜디오는 다시금 연구실이 되고 있다.
그러한 경향은 미술, 특히 사물로서의 미술에 대한 빗물질화를 선동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것이
계속되면 사물이 완전히 퇴화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많은 미술가들은 빗물질화에 대한 강박증을 바보
같은 짓으로 여겼다.
보크너는 1970년 “발설된 말 이외에는 어떠한 생각도 그것을 지탱하는 사물 없이 존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심지어 글 하나를 타이핑하더라도 종이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도 미술 대상의 전적이 빗물질화는 여러 미술가들에 의해 추구되었다.
이언 윌슨과 트리스틴 코즐로프는 가장 극단적인 경우였다.
윌슨은 순수하게 언어적인 작품을 만들고 어떠한 물질적 흔적에서 벗어나 기위해 펜으로 종이에 쓰기
보다는 화랑에서 그것을 큰소리로 말했다. 코즐로트는 전시에서 녹음기를 썼기 때문에 사물을 사용한 것
이라고 논쟁될 여지가 많았지만 그녀역시 소리를 가지고 작업했다.
그중 1970년 작품 ‘정보, 이론 아님’에서 기계는 방안의 모든 소리를 녹음했다.
모든 비물질화한 전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로버트배리의 전시였다.
그는 화랑 현관문에 “전시기간 중 화랑 문을 닫습니다”라고 안내문을 써 붙였다.
볼 만한 작품도 없었거니와 볼 수 있는 방조차 없었다. 즉 미술가가 제시했던 모든 것은 전시가 계속 되고
있다는 사실 또는 주장이었다.
그의 관심은 관람자의 경험에 있었다.
관람자가 갤러리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느낄 당혹감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마도 재미있다고 느끼거나 화가 난 그들은 배리가 자기 입장을 나타내기 위해 실제로 언어를 필요로
했다는 것을 생각했을 것이다.
갤러리 문 위에 붙은 그 8개의 단어가 미술, 또는 미술의 일부였을까?
웨이너는 한동안 비물질화한 미술을 만드는데 몰두했다.
“나는 내가 나머지 생애를 특정한 것보다는 재료의 일반적인 개념을 취급하는데 사용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 그리기를 이미 포기한 그는 언어만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 미술은 결과로서의 사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인간존재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에서
사물과 사물의 관계에 관한 것이었다.
언어를 기본으로 한 미술은 우편배달이나 텔렉스 시스템을 통한 상호 소통을 허용했다.
그것은 불필요한 산물을 만들어내는 욕구를 제거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버긴의 ‘순수한 정보미술’에 대한 요구는 무엇보다도 “미술관들의 창고를 차지하고 방해하는 모든 금속
조각과 대량의 캔버스, 즉 생태학적 오염”에 대한 반격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버긴은 직접 의사소통할 수 있는 미술을 원하고 있었다.
저드가 조각제작소에 작품에 관한 설명서를 텔렉스로 보냈던 반면 다른 개념 미술가들은 미술작품 자체를
전달하기위해 설명서를 직접 사용한 것이다.
이때는 의사소통이 본질적으로 선한 것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상호간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한 미술가들의 국제적인 개념 공유는 반민족주의적인 감수성을 지닌 이
당시의 예술가들에게 커다란 매력으로 작용했다.
언어를 기본으로 한 미술은 또한 사고의 행위를 낯설게 만들었다.
만약 얼마간의 종이 스크랩과 벽에 쓴 글만 남기고 모든 오브제를 없앤다면 머릿속에는 오직 언어만 남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레이엄의 “1966년 3월 31일”에서 극단적으로 표명되었다.
우리는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시작하여 바로 우리의 눈 속에서 끝난다.
대우주에서 소우주로의 이행이다. 이러한 것들을 상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우리의 정신
또는 문자 그대로 우리 자신의 물리적 신체로 되돌려지며 각막과 망막사이의 극히 작ㅇ든 틈으로 돌아
가게 된다. 오브제가 진실로 빗물질화하고 오직 개념만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경험 속에 있었다.
사무적이고 학문적인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낯선 미학을 만들어냈으며 미술적이고 감정적인 자기표현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거나 비평가의 세련되고 장황한 통찰력도 거부했다.
마이클 볼드윈의 글은 그들의 전형적인 특징이 잘 드러난다.
“ 누군가가 일상적으로 유효한 절차와 과정에 관해 경솔하게 지껄이기 전에, 그는 이러한 개념들이 문맥
적으로 명료한지 아닌지 생각해봐야한다.
이러한 경우 많은 것이 ‘미술대상’ ‘미술작품’ 또는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존재론적으로 수용하는 대 대한
그의 흥미에 기능적으로 관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누군가 그것을 간단한 용어로 나타내고 싶어 한다면, 그는 어떠한 종류의 전체성이 미술인가를
밝혀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주로 분류학과 연관 된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러한 논의는 단순히 미술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논쟁적으로 미술 그 자체였다. 즉 미술에 관한 언어가 아니라 미술로서의 언어에 관한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개념미술가들이 미술로서의 언어만을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미술로서의 미술에
관한 이론을 세웠다는 것이다.
4. 모노크롬 회화.
언어를 기본으로 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한편으로 가장 말이 없고 ‘침묵적인’ 미술인 모노크롬이 있었다.
1965년 초쯤 멜 램스덴과 버긴은 회색 모노크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로드첸코와 라인하르트의 종말적 미술을 다시 반복한 것이었다.
모노크롬은 ‘부재상태의’언어였다.
모노크롬을 둘러싼 글들은 본질적이었고 거기에 적용된 용어들은 ‘침묵의 회화’ ‘본질적인 회화’ ‘까다로운
그림’ ‘ 근본적인 회화’등 수적으로 많을 뿐 아니라 다양했다.
그러나 용어들에서 공통적인 것은 가장 기본적인 물감의 성질로 되돌아감으로써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명료하게 만드는 개념이다.
앨런 찰턴같은 미술가에게 그것은 목적 그 자체였다. 그러나 버긴과 램스덴을 포함한 대부분의 모노크롬
화가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귀류법으로 작동했으며 그 다음에 그들은 회화를 완전히 뒤로 남겨두었다.
5. 발견(?)
회화의 본질을 동시적으로 희석시키고 부정하려는 의도가 뷔랭과 토로니의 작품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이 개입으로 작용한 방식은 미리 알려져 있던 요소였다.
1966년 말 이 두화가는 독특한 형식에 도달했다.
뷔랭은 8.7센티미터의 넓이의 세로줄을 그렸고 토로니는 ‘주어진 짐받이에 30센티미터의 규칙적인
간격을 두고 붓으로 50번 눌러’ 자국을 만들었다.
올리버모셋과 미셸파르망티에도 기본적으로 그들의 작품을 단순화시켰는데 모셋은 평범한 배경위해
단하나의 원을 그렸고 파르망티에는 수평의 띠들을 그렸다.
과거의 구상회화와 추상적인 제스처 페인팅 전시로 이어질 연례전시로 열린 ‘젊은 회화의 살롱’개막일에
이 네 명의 화가는 그들의 이름 밑에 각각 자신의 특징적인 그림을 그리는 형식을 택했다.
그러는 동안 확성기에서는 “뷔렝, 모셋, 파르망티에, 토로니가 여러분이 지적으로 되길 충고합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다음날 그들은 자신의 그림을 치우고 “ 뷔랭 , 모셋, 파르망티에, 토로니는 전시를 하지
않는다”라는 슬로건만 남겨두었다.
그들이 행위와 배포한 팜플렛엔 그들이 회화에서 발견한 잘못된 모든 것의 목록이 들어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꽃, 여인, 에로티시즘, 일상적인 환경, 미술, 다다이즘, 정신분석과 베트남 전쟁에
미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우리는 화가가 아니다” 비록 일시적이기는 했어도 그러한 공동작업은 그 무렵 전형적인 일이었고 공동
작업은 ‘걸작’을 만드는 고독한 천재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6월에 열린 또 다른 전시에서 그들은 파리의 강당무대위에 그림을 걸었다.
1시간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난 후 그들은 당혹한 청중에게 종이를 나눠주며
“확실히 이것은 뷔랭, 모셋, 파르망티에, 토로니의 그림을 바라보는 문제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자리에 있던 뒤샹은 “정말 실망스러운 해프닝이다.
누구도 이보다 더 하지는 못할걸!”하고 말했다.
그가 사용한 ‘해프닝’이라는 단어는 사실 개입이었다.
스텔라의 ‘당신이 보는 것은 당신이 보는 것이다‘ 라는 명구는 그 자체의 논리적인 결론이 있었다.
즉, 회화란 어떠한 신비한 메시지나 미학적인 전율을 결하고 있다.
회화는 단지 존재한다.
그러나 회화가 어디엔가 놓여짐으로써 결정적으로 그것이 제도적이든 문화적이든 그 문맥에 대한 관심을
끌어낸다.
이러한 모든 침묵 때문에 회화가 정치적인 의미까지도 갖게 되는 것이다.
토로니도 뷔랭처럼 그의 생애를 통틀어 독특한 형식을 유지했다.
계속해서 똑같은 것만 반복한다고 비난받자 “나는 사랑하는데 관심이 없어요.
사람은 늘 똑같아요”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이 사람에게 당신의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것은 그의 일이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해 붓으로 만든 표시들은 항상 똑같지만 또한 항상 다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른 문맥에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듯 그의 정확한 그림방식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실험에 의해 도달된 것이다.
6. 아르테 포베라.
아르테 포베라는 말 그대로 ‘비천한’ 또는 ‘보잘것없는’ 미술을 뜻한다.
이 말은 그 제작에 사용된 평범한 재료들 때문에 생긴 용어로, 위에서 탐구한 모든 다양한 접근 방식들은
그 중심에 미술작품을 비신화화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아르테포베라와 연관된 이탈리아 미술가
들은 그와 반대 입장을 취했다.
깨끗하고 추상적이며 정신적인 과정보다 오브제와 재료에 연관되는 시적인 연상에 호소한다는 사실은,
아르테 포베라가 개념 미술에 연관되는데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967년 첼란트는 “ 중요하게 일어난 사건은 일상적인 것이 미술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물리
적인 현존성과 행동이 곧 미술이 되었다.
도구로서의 언어의 근원들은 새로운 언어학적인 분석에 종속되었다.
그것들은 새로 태어났으며 그 안에서 새로운 휴머니즘이 발생했다” 사실 첼란트와 미술가들이 모두 현학
적이고 수사학적인 태도는 그들의 작업과 다른 개념미술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아르테 포베라는 ‘탈 문화주의’를 향한 그리고 전 도상학적 단계로 이미지를 퇴행시키는 환기적인 현상
이었다. 그것은 민주적인 통일성에 의해 이해된 자연과 ‘생리학적이면서 동시에 정신적인 단편’으로서의
인간과 같은, 일상적이고 원초적인 요소들에 대한 찬가 같았다.
장 크리스토프 암망은 “ 아르테 포베라는 기술적인 세계와 반대되는 시적인 메시지를 열망하고 가장
단순한 수단에 따라 그러한 메시지를 표현하는 미술이다.
상상력의 힘에서 파생되는 재료를 통한 가장 단순하고 가장 자연적인 법칙 및 과정으로서의 이러한
회귀는 개별화한 사회에서 인간의 행동을 재평가하는 것과 등가적이다”라고 말했듯이 어쨌든 처음에
아르테 포베라의 정치적인 차원은 매우 특수하게 나타났다.
1968년 쿠넬리스는 12마리의 살아있는 말을 끌고 와 화랑에 마구간을 만들었다.
이 작품을 비롯한 아르테 포베라의 작업들은 레디메이드에 대한 방향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화랑의 흰색공간과 그 익명성, 중립성이 지닌 방부성에 대한 응수였다. 12는 열두제자, 1년의 열두
달은 신비한 연상과 관련된 숫자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통하는 비범한 감각적 경험이었다.
즉 말의 땀 냄새, 분뇨, 말들이 말발굽을 옮기면서 내는 소음, 폐쇄 공포적인 감각, 말과 연상되는 것들
등과 같은 것이었다.
아르테 포베라의 다른 미술가처럼 쿠넬리스도 뒤샹이 사용했던 산업적인 오브제에는 관심이 없었고
롱과 스미드슨이 사용했던 자연적인 오브제와 재료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감수성과 구조사이의 균형을 재설정하는데 연관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들은 감수성을 나타내며 화랑은 구조를 뜻한다.
그것은 마치 회황서 물감이 감수성의 기능을 하고 틀이 구조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동물은 또는 진짜 생명체와 진짜 사물에 대한 강조를 나타낸다.
그것은 언어에 대한 강조와 등가적이며 아르테 포베라의 특징이기도 했다.
많은 미술가들이 오브제 제작에서 언어로 전향하고 있을 때 쿠넬리스는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의 1967년 이전 작품은 단어와 숫자들을 그린 그림이 주를 이루었으며, 이와 병행해 가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1966년경 다른 작품에서 그는 신선한 커피를 일련의 저울위에 올려놓고 줄줄이 매달았다.
미술관에 진동하는 커피냄새는 다시 한번 감각에 호소했다.
큐레이터는 그의 지침서에 다라 정기적으로 신선한 커피를 보충했다.
커피냄새는 신체적인 감각들을 일깨웠을 뿐 아니라 그것에 관한 기억도 상기시켰다.
뒤샹이 항상 냉정했던 반면, 쿠넬리스는 오브제와 재료들을 살아있고 변덕스러우며 불확실한 채로 남겨
두었다.
뒤샹식의 레디메이드를 시적으로 재 작업한 것은 단순히 이탈리아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독일의 보이스와 루텐벡, 벨기에의 브루데어스는 모두 기본적인 재료와 형태들로 작업하면서 그것들을
낯설게 만들었다.
만약 아르테 포베라가 개념미술의 일종이라고 여겨진다면 메시아 같은 독일의 보이스의 작품은 어떻게
고려되는가?
보이스의 작품은 막강한 자아를 갖고 있었다.
즉 그의 작품은 그 자신과 그의 신화, 그의 가르침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우리가 개념미술이라고 상정하는 것, 즉 이성적이고 반자전적이며 신중한
오브제의 창조와 아주 많이 다르다.
그의 레디메이드는 항상 그의 서명에 의해 강조되었다.
그의 레디메이드가 서명이나 제목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보이스는 그것을 극단까지
밀고 나가서 마치 캔버스가 회화를 위한 것이듯 그의 레디메이드는 서명하기위한 물건에 불과한 것으로
보였다
1974년 뉴욕에서 강연할 때 보이스는 칠판 지우개에 ‘무소음 칠판 지우개’라는 딱지가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550여개의 모든 지우개에 서명함으로써 ‘비용을 들이지 않고 미국 첫 방문을
상징할 수 있는 배수를’ 만들었다.
명백히 그것은 서명행위였고 서명은 오브제를 보이스에 귀속시켰으며 중요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의 ‘지방의자’와 브레히트의 의자 그리고 코수스의 의자를 비교해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보이스가
시트위에 지방덩어리를 올려놓고 그것을 조각가들이 진흙 주무르듯 조작함으로써 의자에 대해 무엇인가
행위를 했다는 것이 명백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레디메이드라기보다는 조각이다.
그의 배수들은 기념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레디메이드였다.
즉. 보이스의 레디메이드의 목적은 보이스와 그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는것이었다.
보이스적 레디메이드는 전통적인 미술작품과 같은 기능을 했다.
그것은 보이스의 생애와 가르침의 담화에 대한 삽화로 미리 약호화한 것이다.
대부분의 개념미술과 달리 보이스의 레디메이드는 전적으로 아이러니를 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