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생 이*ㄷ 할머니도 1939년생 김*ㅅ 할머님도 당신을 부르는 소리에 머리부터 손질하셨다. 이*ㄷ 할머니는 생수를 손에 발라 흐트러져 있던 머리를 반드시 넘기셨고, 김*ㅅ 할머님은 향기 좋은 샴푸를 머릿기름처럼 바르시며 부스스했던 머리를 정리하셨다.
식도락 맞은편 건물 입구에 앉아 계시던 이*ㄷ 할머니는 겨우내 보이지 않으셨다. 매일 보이던 모습이 안 보이니 식도락 식구들은 걱정했다. 이*ㄷ 할머니는 늘 외출하셨다. 그런데 코로나가 세상을 멈추게 하면서 할머니의 외출도 줄어들게 되었다. 작년 이맘때, 코로나 때문에 다니지 못해 다리가 홀쭉해졌다며 핏기 없는 야윈 다리를 보여주시며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시기도 했는데 며칠 전 만난 이*ㄷ 할머니는 배웅하기도 힘드셨는지 방 문밖으로도 나오지 못하셨다. 아흔이 넘은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셨는데 코로나 때문일까 이제는 기력 없는 아흔 넘은 노인이 돼버리셨다.
어쩌다 도시락을 가지러 오실 때는 바지춤에 매달려 있는 몇 개의 주머니 중 하나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돼지 저금통에 넣어주셨다. 그냥 가시라고 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라며 천원 이상을 넣어 주기도 하셨다. 지나는 길에 나누는 반가운 인사 끝에는 언제나 그냥 보내는 법이 없으셨다. 가지고 다니시는 검은 봉지에는 누군가를 위해 준비한 듯 늘 먹을거리가 담겨 있었는데 어느 날은 떡이 나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옥수수가, 어느 날은 길 한가운데서 검은 봉지를 펼쳐 요구르트를 주셨고, 껌이든 사탕이든 쥐여 주셨다. 그러면서 꼭 하시는 말씀. 누구 주지 말고 먹으라고...
딸이 한 명 있다고 하셨는데 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언젠가 거리에 앉아 쉬고 있는 할머니에게 다리 아파 쉬시냐고 물었더니 조카가 온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셨다. 한동안은 매일 그 자리에서 그렇게 조카를 기다리고 계셨다. 얼마 전 방 청소하고 간 봉사자들이 찾아 놨는지 방 한켠에 전화기가 있었다. 수화기를 드니 통화음이 들린다. 길모퉁이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할머님이 떠올랐다.
어느 날 숨을 쉴 수 없다며 병원에 데려가 달라고 찾아오신 김*ㅅ 할머님. 김*ㅅ 할머님은 쪽방에 살게 되시면서 수급 신청을 두 번 하셨다. 가족 중 누군가가 어머니가 그럴 리가 없다며 협조를 거부했고 수급비도 의료급여도 받을 수 없었다. 지난해 부양의무자 기준이 완화되어 다시 한번 신청해 보자고 했지만 안 한다고 하셨다. 김*ㅅ 할머님의 주민등록에 있는 많은 주소 중 하나는 강남구 압구정동. 아들과 살던 때의 주소다. 아들이 지금도 강남에 살고 있고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는 말에 더 이상 권하지 못했다. 수급 신청 과정은 또 하나의 상처만 만들었다. 병원 동행을 하던 어느 날 처음으로 쪽방에 오시게 된 이야기를 해주셨다. 두서없는 이야기에는 후회와 미련의 시간들이 그리움과 섞여 잠시 흔들리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체념으로 쓸쓸한 미소를 지으셨다.
김*ㅅ 할머님은 선불폰을 사용하시는데 충전을 안 해 정지된 지 오래시다. 어느 날 핸드폰이 걱정되셨는지 사랑방으로 핸드폰을 가지고 오셨다. 선불폰에 대한 부담이면 집 전화를 놓자고 말씀드리니 일단 전화기 상태를 확인해 달라고 하셨다. 충전이 되자 휴대폰이 켜졌고 안심하셨다. 그러면서 휴대폰에 있는 자식들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셨다. 큰아들, 딸, 작은 아들, 조카...
병원 가는 날이면 늘 시간보다 앞서 오셨는데 오늘은 30분 전에 말씀드렸음에도 오지 않으셨다. 기다리다 다시 찾아가니 이제야 생각난 듯 깜짝 놀라시며 준비를 서두르셨다. 지팡이를 짚고도 휘청거리던 걸음은 코로나로 집에만 머물게 되면서 더욱 휘청거렸다. 괜찮으신 듯 열심히 걸으셨지만 그럴수록 더 위태로웠다. 이런저런 검사를 마치고 익숙하게 찾아가시던 진료실을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가셨다.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다.
마른 눈물 흘리며 두 손 꼭 잡고 고맏다시던 이*ㄷ 할머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일 년 내내 만사형통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라며 인사하시던 김*ㅅ 할머님... 복잡한 마음... 삶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