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은 50년 간의 군인 황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콘스탄누스 왕조 시대를 맞이하였다. 로마 제국의 서방은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가 동방은 리키니우스가 분할 통치하고 있었으나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서로 적대 관계였다. 콘스탄티누스는 AD 311년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어 막센티우스의 반란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얻은 후 AD 312년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군하였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로마 제국의 최전선 중 하나인 라인강을 지키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다.
막센티우스는 AD 312년 10월28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마 북부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막센티우스는 테베레 강변에서 배수진을 펼쳤지만 전투경험이 풍부한 콘스탄티누스의 군대의 공격에 밀려 막센티우스는 강물에 떨어져 익사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강물에서 막센티우스를 건져낸 뒤 그의 목을 잘라 장대에 걸고 로마에 입성하였다. 본래 로마 시민과 원로원은 막센티우스를 지지했지만 결국은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콘스탄티누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되어 로마 제국 서방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콘탄티누스 1세는 동방의 정제인 리키니우스를 밀라노에서 만나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시키고 여러가지 논의를 한 뒤 로마 제국에 만연된 그리스도교를 공인하는 내용이 포함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였다.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통치를 좌우하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동방의 부제인 막시미누스 다이아가 AD 313년 3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리키니우스가 통치하는 속주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리키니우스의 반격에 패배하고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사망하였다. 이렇게하여 리키니우스 역시 로마 제국 동방 지역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 두명에 의해 양분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키니우스와의 사소한 분쟁이 발생하자 2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가면서 AD 314년 10월8일 카발라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리키니우스의 병력이 3만5천명으로 숫자면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세보다 많았으나 콘스탄티누스 1세의 기병대가 결정타를 입히자 리키니우스는 2만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발칸반도의 트라키아 속주로 도망쳤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리키니우스를 뒤쫒아 발칸반도에 들어가면서 마르디아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승리하면서 리키니우스는 아시아 속주로 도망쳤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일단 리키니우스와 휴전을 맺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맏아들 크리스푸스와 함께 라인강과 도나우강의 건너편의 게르만족과 전투에 전념하며 7년을 보냈다. 그 사이 리키니우스는 군대를 재건하는데 시간을 보냈고 AD 324년 7월3일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다시한번 맞대결을 벌이게 되었다. 이번에도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였다. 패배한 리키니우스가 또다시 아시아 속주로 도망쳤지만 이번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아시아 속주까지 뒤쫒아 가면서
9월18일 소아시아의 칼케돈 근처에서 크리스폴리스 전투를 벌여 다시한번 승리를 거뒀다. 리키니우스는 니코메디아로 도망쳤으나 더이상 버티기 어려웠기 때문에 항복하였으나 테살로니카에 감금된 후 이듬해 반란 혐의로 처형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유일한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이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발칸반도의 비잔티움을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새로운 로마(Nova Roma)라고 명명하면서 이후 1,000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중심이 되는 도시를 건설하였다.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1세 사후에 그의 이름을 붙여 '콘스탄티노플리스'로 개명했다.
로마 제국을 재통일한 콘스탄티누스 1세는 이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마무리하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에는 속주의 민정과 군정을 구분하여 총독을 군정 임무에서 배제시켰으나 속주에 따라서는 여전히 총독이 군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철저하게 구분하였다. 이는 황제 근위대장(프라이펙투스 프라이트리오)는 예외가 아니어서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근위대의 군정 기능을 박탈하고 오로지 민정에만 치중하도록 그 기능을 변경하였다. 이제 로마 제국의 민정은
속주 총독-관구 대리인(비카리우스)-근위대장-정제/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조직 체계가 구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군사개혁에도 착수하여 근위대장의 군정 기능을 배제시키면서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한 오랜 전통의 황제 근위대를 페지하였다. 또한 로마군을 국경을 수비하는 하급 부대인 리미타네이(Limitanei)와 관구(Diocese)에 기반을 둔 상급부대인 코미타텐세스(Comitateses)로 구분하여 리미타네이가 국경을 수비하는 동안 코미타텐세스가 요격하는 종심방어전술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근위대장의 군정기능을 대신할 새로운 직책인 마기스테르(Magister, 군사령관)을 신설하였다.
이제 군사 조직에 있어서도 둑스(군단장)-코메스 툭스-마기스테르(군사령관)-정제/부제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지휘체계가 완성되었다. 다만 마기스테르는 보병과 기병으로 나뉘어져 각각 마기스테르 페리툼(Magister Peditum, 보병대장)과 마기스테르 에퀴툼(Magister Equitum, 기병대장)이라고 불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정책은 AD 309년까지 이어졌지만 그리스도교의 확산은 피할 수 없었고 AD 305년 로마 동방의 정제가 된 갈레리우스가 AD 311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그리스도교 박해 칙령을 완화시키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신앙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그리고 로마 서방의 정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13년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장려하였다. 비록 밀라노 칙령은 그리스도교의 포교를 장려한 것이 아니라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여 그리스도교도 다른 모든 종교와 평등한 입장에서 포교할 수 있는 권리만 부여한 것이었다. 그동안 박해만 받아온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특혜를 얻은 것과 동일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내전을 통해 로마를 재통일한 후인 AD 325년에 최초의 공의회인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정리하였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삼위일체설을 정통 교리로 인정하면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를 성립시켰다. 최종적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37년 죽기 직전에 세례를 받으면서 최초의 그리스도교의 로마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로부터 대제의 칭호를 부여 받게 된다. AD 326년 갑자기 콘스탄티누스 1세는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던 맏아들 크리스푸스를 자신의 후처이자 크리스푸스의 계모인 파우스타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고문 끝에 처형하였고 파우스타 역시 살해당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파우스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를 지명했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죽자 후계자 중 첫째인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담당하게 하였고 둘째인 콘스탄티우스 2세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아시아와 이집트를 맡게 되었으며 막내인 콘스탄스는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재통합된 로마제국은 그의 사후 다시 셋으로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들 3형제가 공동 황제되어 로마 제국을 3분할하였으나 AD 340년 콘스탄누스 2세가 콘스탄스의 영토를 노리고 쳐들어갔다가 전사하였고
AD 350년에는 콘스탄스가 내부의 마그넨티우스 반란에 살해당하면서 콘스탄티우스 2세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이에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복 동생인 갈루스를 부제로 삼아 제국 동방을 맡긴 뒤 병력을 이끌고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어 콘스탄티우스 2세는 갈루스를 반역죄 혐의로 처형하였으며, 제국 동방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의 공격 기미가 감지되자 마지막 남은 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 로마 제국인 서방을 맡겼다. AD 360년 율리아누스가 병사들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면서 내전의 위기가 다시 찾아왔으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율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 역시 AD 363년 사산 왕조 페르시아 원정 도중 전사하였다. 병사들에 의해 요비아누스가 새로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콘스탄티누스 1세가 창건한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58년 만에 단절되고 새로운 발렌티아누스 왕조가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