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러시아 민요 <저녁종>, 러시아 성악가(베이스) 이반 레브로프가 부릅니다
[ 저녁 종 ]
저녁 종! 저녁 종!
얼마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지!
어린 시절 시골 고향
내가 사랑하고 아버지 집이 있던 곳
난 저녁 종과 영원히 이별했었네
거기서 마지막으로 종소리를 들었네!
이젠 살아있는 이 몇 없에
그 땐 즐거웠고, 젊었었지
저녁 종! 저녁 종!
얼마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지!
[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벚꽃 동산>의 탄생지를 찾아 ]
체호프는 1860년 남러시아의 아조프 해에 면한 항구도시 타간로그에서 태어났습니다. 타간로그는 모스크바에서 1,200km의 원거리에 위치합니다. 어디서 무슨 편으로 가든지 돈 강 하구에 가까운 주도(州都) 로스토프를 거쳐야 합니다.
로스토프에서 자동차로 타간로그를 향해 떠납니다. 서쪽으로 86km의 거리입니다. 길은 내내 평지이고 포플러 가로수 길의 연변은 가도가도 초지입니다.
타간로그가 포함된 로스토프 주(州)는 러시아 연방 중에서 가장 땅 넓이가 큰데, 주 전체가 거의 이런 평원이라고 합니다. 사시장철 바람이 불기 때문에 경작지들은 방풍림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체호프가 처음 문명(文名)을 떨친 출세작은 28세 때(1888년) 쓴 중편 <초원>입니다. 단순한 스케치 풍의 이 소설에서 소년 예고루슈카의 눈에 비친 광막한 스텝의 묘사가 향기롭습니다. 이 광야는 작가 자신이 소년 시절을 보낸 고향 땅 주변의 초원의 이미지를 재생시킨 것입니다.
로스토프를 떠난 지 1시간 반 만에 타간로그에 들어섭니다. 타간로그는 터키어로 각갑(角岬)이라는 뜻입니다. 지도를 보면 도시가 아조프 해 북안(北岸)에 뿔 모양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습니다. 북쪽은 초원으로 이어지고 나머지 삼면이 바다입니다.
옛날에 '정적의 도시'라 불렸다더니 지금도 거리는 항구 도시 같지 않게 한적합니다. 체호프 때 6만이던 인구는 현재 30만. 구시가지는 아직도 고취(古趣)가 풍깁니다.
차는 체호프 문학박물관 앞에 멎습니다. 이 박물관 건물이 체호프가 다니던 중학교입니다. 작은 광장을 앞에 두고 2층짜리 누런 구교사가 기다랗습니다. 정문 왼쪽 벽에 중학생 체호프의 조그마한 조각상이 걸려 있습니다.
* 체호프가 다니던 중학교(현재 박물관)
문학박물관에서는 체호프의 일생을 연대순으로 일별하게 됩니다.
이 문학박물관 외에 타간로그에는 체호프의 생가와 그가 점원 노릇을 하던 아버지의 잡화상 가게가 기념관입니다. 그리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60년에는 시민들이 모금으로 체호프의 동상이 섰습니다.
이 동상이 선 소공원, 생가가 있는 거리, 문학박물관 근처에 새로 생긴 중학교, 도서관, 극장 등에 체호프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 동상
극장은 극작가 체호프에게 연극을 개안시킨 곳입니다. 그의 대희곡들을 키운 요람의 극장이기도 합니다. 체호프가 6세 때인 1866년에 세워진 극장은 2층 건물이 거의 당시대로입니다.
정문 옆에는 기념판이 걸려 "체호프가 중학 시절 이 극장을 다녔으며, 이것을 기념하여 1944년 체호프 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뿔 모양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온 타간로그 시가지를 양분하며 한복판으로 곧게 뻗은 길이 체호프 가(街)입니다. 체호프가 자라던 당시에도 중심가의 하나였습니다. 중심가라지만 높은 건물이나 상점의 간판들이 늘어선 것도 아니고 1,2층짜리 고옥의 민가들 뿐이라 거리는 심심합니다.
이 체호프 가의 69번지에 체호프의 생가가 있습니다. 생가의 건물은 길가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의 정문을 들어서서 기다란 정원 사이의 소로로 한참 들어가야 합니다.
집 앞의 정원에는 한쪽 가에 체호프의 흉상이 놓여있고 그의 작품 <벚꽃동산>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벚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있습니다.
* 생가
대작가 체호프를 낳은 집은 자그마한 것이 그야말로 장난감 같습니다. 진흙 벽돌의 집은 벽에 회칠을 하여 눈부시게 하얗고 녹색 양철 지붕에 녹색 덧문이 달려 있습니다. 건평이 11평도 채 안됩니다. 올막졸막한 방 3개에 부엌이 달린 건물은 160년 전 그대로입니다.
체호프가 타간로그를 떠난 것은 중학을 졸업한 19세 때였습니다. 그는 모스크바 행 기차를 탔습니다. 그 출향관(出鄕關)의 철도역이 지금 당시 자리에 그대로입니다. 소광장을 앞에 두고 2층 짜리 벽돌 건물의 자그마한 역사가 고색이 짙습니다. 체호프의 작가로서의 일생은 이 역을 떠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체호프를 보내고 역은 고향을 지키고 있습니다.
체호프가 1884년(24세)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후 1886년부터 4년 간 모스크바의 집이 지금은 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 모스크바 집
사도바야 쿠드린스카야 대로는 모스크바 시가지를 포위하는 환상도로의 하나입니다. 이 길가에 주위의 회색빛 높은 건물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2층짜리 빨간색 단독건물이 유난히 눈에 띕니다. 이것이 체호프 기념관입니다. 체호프 때는 ‘옷장’이란 별명으로 불렸다는데 정말 옷장 같기도 하고 인형의 집 같기도 합니다.
건물 오른쪽의 철책 문을 들어서면 건물의 복판쯤에 옛날의 현관문이 나 있습니다. 문 앞에 ‘의사 A.P. 체호프’라는 문패가 아직 붙은 채 있습니다.
기념관의 서재 한쪽에 보이는 의사 가방은 의사 체호프가 쓰던 것입니다. 체호프는 이 방에서 매일 정오부터 하오 3시까지 환자를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의학은 나의 본처요, 문학은 애인”이란 말을 했습니다.
기념관 2층의 전시실에서는 <갈매기>의 여주인공을 만납니다. 리카 미지노바. 이 여자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아주 예쁩니다. <갈매기>에 나오는 지주의 딸 니나의 모델입니다. 리카는 체호프의 여동생 마리아의 친구였습니다. 리카가 마리아한테서 빌린 책을 돌려주려 이 집을 찾아왔을 때 체호프가 초대면을 했습니다.
미모의 여자가 현관에 있다는 말을 듣고 체호프는 2층에서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체호프가 첫눈에 반해서 그 후로 둘은 친해졌습니다. 체호프보다 나이가 10년 아래였습니다. 리카는 문학, 연극 등 이것저것 취미를 가진 여자였고, (<갈매기>에서 니나는 여배우가 됩니다) 한 가지 일을 끝까지 못하는 성미였습니다.
체호프는 속을 드러내 놓지 않았지만 리카는 적극적이었습니다. 체호프는 당시 결혼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리카는 결국 포타펜코라는 작가의 애인이 되어 그의 아기를 낳게 되고, 그 아기가 죽자 버림을 받게 됩니다.
(희곡에서 니나는 작가 트리고린의 아기를 낳고, 그 아기도 죽습니다) 리카는 뒷날 모스크바 예술극단의 무대감독과 결혼했다가 1937년 67세의 나이로 파리에서 죽습니다.
* 동상
체호프는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는 동안 전부터 시골에 집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여러 군데 물색 끝에 당시 모스크바에서 기차와 마차로 2시간 반 거리의 농촌이던 멜리호보의 영지를 찾아냈습니다. 225ha나 되는 광대한 땅이었습니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32세 때인 1892년 3월 이 집으로 이사를 와 1899년 얄타로 옮길 때까지 7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이 집은 지금 기념관이 되어 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자동차로 하이웨이를 타고 남하합니다. 약 70km쯤 되는 지점에 이르자 ‘체호프 시(市)’라는 인터체인지 표시판이 나타납니다. 거기서 조금 더 지나서 ‘멜리호보’의 싸인을 따라 길을 빠집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A.P. 체호프 기념관’이라는 안내판이 길가에 서서 왼편을 화살표로 가리킵니다. 기념관은 인근에 민가가 보이지 않는 외진 곳입니다.
기념관 건물은 목조 단층입니다. 과히 큰 집은 아닌데 방들이 올막졸막하여 10칸이나 됩니다. 현관을 들어서자 왼쪽의 갓방이 체호프의 서재입니다. 채광이 좋아 아주 환합니다. 창문으로는 푸른 정원이 가득 찹니다.
* 멜리호보의 집
체호프가 손수 가꾼 정원에는 백화가 난만합니다. 체호프는 이 집에 들자 사과나무, 벚나무, 라일락, 장미 등을 많이 심었습니다. 그가 특히 좋아한 것은 장미였습니다. 당시의 영지 225ha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그 가운데 4ha가 정원입니다.
정원 한쪽 꽃밭 가운데에 외따로 소옥(小屋)이 하나 있습니다. 시옷 자 모양의 지붕이 비둘기집 같습니다. 문 옆에 ‘<갈매기>’를 쓴 나의 집‘이라고 적힌 기념판이 걸려 있습니다.
체호프는 본채가 손님들로 들끓자 멜리호보에 온 지 2년 뒤인 1894년 이 별채를 따로 짓고는 ‘인형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애초에는 방문객용이었으나 나중에 체호프 자신의 집필실이 되었습니다.
조그만 침실을 지나면 서재인데, 이것이 이 소옥의 전부입니다. 침실과 서재를 합쳐 6평밖에 안 됩니다. 이 서재의 창가 쪽에 놓인 책상에서 체호프는 <갈매기>를 썼습니다. 빠끔한 창문 밖으로 뜰이 손바닥만하게 내다 보입니다. 그는 이 뜰을 보며 <갈매기>의 호수를 그리고 있었던 겁니다.
서재의 벽에 걸린 사진은 <갈매기>의 모스크바 첫 공연 때 체호프가 모스크바 예술극단 배우들과 함께 찍은 것입니다. 그 속에 이 공연의 주연배우이자 나중에 체호프가 결혼하게 되는 올가 크니페르의 얼굴이 있습니다.
멜리호보는 당시 제법 큰 마을이었으나 다들 인근 도시인 체호프 시로 나가 버리고 지금은 100호 가량이 남아 있습니다. 멜리호보에서 10여 km 거리의 체호프 시는 옛 지명이 로파스냐였는데 1954년 체호프 사거 50주년 때 개칭되었습니다.
멜리호보에서 쓴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가 초연된 것은 189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에서였습니다. 결과는 비참한 실패였습니다. <갈매기>가 화려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2년 뒤인 1898년 모스크바에서의 첫 공연 때부터였습니다.
이 <갈매기>의 모스크바 초연의 극단이 그 해 창단된 '모스크바 예술극장'이었습니다. 이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그 이래 전통을 이어 오며 현재 러시아 최고의 극단으로 살아 있습니다.
* 모스크바 예술극장
모스크바의 크렘린 쪽에서 가장 번화가인 고리키 대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후도제스트벤노고 테아트라 가(街)가 나옵니다. 이 거리 초입의 3번지가 모스크바 예술극장 건물입니다.
석조의 누르스름한 3층짜리 극장은 자세히 보면 맨 꼭대기 이마에 갈매기가 한 마리 부조로 날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에술극장의 마크가 갈매기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딴 것입니다.
건강이 나빠진 체호프는 가을만 되면 각혈이 시작되어 긴 러시아의 겨울을 기후가 온난한 땅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898년 멜리호보의 집을 팔고 흑해 연안의 보양도시 얄타에 새 집을 지어 만년을 지내게 됩니다.
* 얄타 지도, 고향인 타간로그는 오른쪽 로스토프나도누 바로 왼쪽에 있습니다
얄타라면 1945년 미,영,쏘 3거두의 회담장소로 유명하고, 해방 후 우리나라의 운명과도 직결된 역사적 지명으로 우리는 잊지 못합니다.
우크라이나의 얄타는 뒤편으로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언덕 아래의 해안도시입니다. 시내 어디를 가나 휴양지의 분위기가 물씬합니다. 나무가 많은 거리, 사람이 많은 거리, 특히 1km의 거리의 넓은 해안로는 차가 다니지 않는 산보로라 인파로 빽빽합니다.
* 얄타
'크리미아는 우크라이나의 진주, 얄타는 크리미아의 진주'라고 일컬어집니다. 크리미아 반도의 동안(東岸)에 위치한 얄타는 흑해 연안에서뿐 아니라 러시아 땅 전체에서 가장 인기있는 리조트지로 인구 12만의 이 도시에 연간 300만 명 이상의 휴양객이 찾아옵니다.
얄타는 대개의 경우 대(大)얄타를 통칭하는 것입니다. 대얄타에는 동쪽으로 구르즈프에서 얄타 시를 지나 반도 남단의 포토스까지 약 70km의 해안지역이 포함됩니다. 얄타회담이 열린 곳은 얄타에서 3km 거리의 리바디야였습니다. 회담장이던 백색 2층짜리의 리바디야 궁전은 관광명소가 되어 있습니다.
* 리바디야 궁전(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었던 곳)
해안로에서 체호프 가로 빠지는 사잇길의 하나가 리트켄사 가(街)요, 이 길의 13번지에 있는 얄타 유일의 극장 이름이 체호프 극장입니다. 1900년 4월 모스크바 예술극장이 체호프를 위해 일부러 얄타까지 와서 그의 <바냐 아저씨>와 <갈매기>를 이 극장에서 공연했습니다.
체호프의 이름은 그가 태어난 타간로그와 마찬가지로 그의 만년의 땅인 얄타에도 체호프 도서관, 체호프 사나토리움(휴양소) 등 도처에 늦은 봄날의 꽃잎처럼 흩어져 있습니다. 하다 못해 흑해 연안을 순항하는 유람선의 이름조차 '체호프 호'입니다.
얄타가 무대로 나오는 체호프의 작품으로는 단편 <개를 데린 부인>이 유명합니다. 그가 얄타의 새 집에서 맨 처음 쓴 작품이기도 합니다.
얄타에서 시가지를 에워싼 뒷산 쪽으로 올라가면 해변에서 약 2km의 고지대에 체호프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은 하얀 집이 정원의 나무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 집 맞은편의 현대식 새 건물은 기념관 부속의 전시실로 따로 지은 것입니다.
* 얄타의 집
체호프는 1899년 직접 지은 이 집에서 만년의 5년 동안을 살았습니다. 그의 마지막 집이 됩니다. 소설 <개를 데린 부인> <골짜기> <약혼자> 외에 희곡 (세 자매>와 <벚꽃동산>의 산실이 여기입니다.
넓이가 0.37ha(약 1,100평)라는 정원은 각종 나무들과 기화요초로 빽빽하여 작은 식물원 같습니다. 체호프는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여 직접 심은 나무가 159종이나 됩니다. 그 중 40%가량이 아직 살아남았습니다.
체호프가 살던 집은 3층짜리입니다. 기념관 오른쪽에 1904년 체호프가 죽자 누이동생 마리아가 애도의 뜻으로 심은 사이프러스나무가 비목(碑木)처럼 서서 체호프를 잃은 후의 세월을 헤아려줍니다.
기념관 안은 침침합니다. 전시품이 모두 오리지널이어서 손상을 막기 위해 조명을 밝게 안 한다고 합니다. 집은 크고 방은 많으나 방들이 모두 올막졸막합니다. 2층의 서재로 들어갑니다. 창문의 윗부분이 4색의 채색 유리입니다.
채광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체호프가 일부러 끼운 것입니다. 책상은 유리로 덮였습니다. 그 위에 놓인 것은 체호프가 쓰던 연필, 철필, 가위, 종이칼, 편지 무게를 달던 소형 저울, 우표 붙일 때 적시던 연적 같은 유리 물그릇(체호프는 페결핵 환자였기 때문에 우표에 침을 바르지 않았습니다), 촛대 2개,의사 체호프의 도장 등등, 이 서재에는 약 9,000권의 장서가 있었는데, 체호프의 고향 타간로그의 도서관에 모두 기증되었다고 합니다.
* 부인 올가와 함께
이 방에 서니 아득히 도끼로 벚나무 찍는 소리가 은은히 들리는 듯합니다. 체호프 최후의 걸작 희곡 <벚꽃동산>의 마지막 장면을 쓴 곳입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벽에 어떤 화가가 그린 벚나무 동산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이 희곡의 배경이 되는 벚나무동산에 대해서는 실제로 어느 동산을 염두에 둔 것인지 아직 정설이 없습니다. 어떤 이는 체호프가 젊을 때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마을에서 본 벚나무 밭이 모델일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모스크바에서 80km 떨어진 아브람체보에 있던 시인 악사코브의 집 정원이라고도 합니다.
* 타간로그 시절 가족 사진 , 맨 아래 점퍼 차림의 체호프, 그위 어머니와 아버지
두 군데 모두 지금도 벚나무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딘들 어떻겠습니까. 작품 속의 트로미포프의 대사대로 "러시아 전체가 우리의 동산'인 것을.
서재 옆은 침실입니다. 이 방에 <벚꽃동산>에서 가예프가 "귀중하고도 존경할 만한 책장이여"하고 외치게 되는 책장의 실물이 놓여 있습니다.
* 침실
체호프가 이 집을 떠난 것은 1904년 5월 1일, 폐결핵의 병세가 악화되어 치료차 독일로 향발하면서였습니다. 그는 아내 올가와 함께 베를린을 거쳐 보양지 바덴바일러에 머물다가 거기서 44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 묘지
[ 안톤 체호프와 <갈매기>, <벚꽃나무> ]
안톤 체호프(1860~1904)라면 단편소설의 명수로 세계문학사에 빛나는 작가입니다. 그의 문학은 췌언(贅言)이 없습니다. 간결과 절제의 문학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주로 그리는 그의 작품 속에는 권태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는 허무가 흐릅니다. 44년의 짧은 생애 동안 500편이 넘는 작품을 썼습니다.
또 그는 극작가로로서도 유명합니다. 소위 분위기극(雰圍氣劇) 또는 정극(靜劇)이라 불리는 여러 희곡들로 독특한 연극세계를 개척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갈매기(1896년)>요, <벚꽃동산(1903년)>입니다.
첫댓글 읽을거리 많아서 좋은데 용음회 모임소식 찾으려니 헷갈리셈 ㅋ
송대감! 그동안 용음회 모임결과는 모임안내문 게시할 때 몇번 간략하게
추가하여 게재하였음을 알립니다. 아마도 참석인원이 적다보니까 그렇게
했는데 다음부터는 모임결과를 종전처럼 별도로 게재할 예정임을 알려드
립니다. 금번 송년 모임은 참석인원이 꽤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울러 내년부터는 보다 많은 회원들의 참석을 위하여 모임날을 토요일로
바꿀 계획입니다. 회원들의 호응도가 좋아 올해보다는 모임 분위기가 훨씬
나아질것으로 기대가 되네요.
세계 3대 단편문학가로서만 알았었는데, 작년에 어느 극단에서 그의 작품 '갈매기'를 공연한다.고 우연히 들어
그가 희곡도 썼었나?라고 생각했던 것을 생각하니 많이 배워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명 예술가의 발자취를 찾아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려 주셔서.. .
류대감! 체호프의 <갈매기>는 지구촌 모든 연극인들에게 바이블처럼 여겨지
는 대단한 작품이지요.
오랫만에 러시아 민요를 소개하였는데 러시아 노래는 다른 국가들의 민요
에 비해 굉장히 독특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들게 하는 엄청난 매력이
담겨 있습니다.슬라브적인 유장하면서도 애잔함이 깃들어 있다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