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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1. 3 주일예배설교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시편 139:1-10)
옛날 어느 수도원에 덕망이 높은 수도원장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특히 한 아이를 총애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못 생기고 지력도 떨어지는 아이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른 제자들의 불만이 쌓여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제자들이 모여 원장님에게 항의를 합니다. 그러자 그 수도원장이 조용히 말합니다. “그래 좋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그것을 풀어 갖고 오너라. 그러면 내가 왜 그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는지 알게 될 거다.” 이렇게 말한 후 원장님은 제자들에게 새 한 마리씩 나눠줍니다. 그러면서 해지기 전까지 각자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새를 죽여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죽여야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해질녘에 제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수도원 마당에는 죽은 새들이 수북이 쌓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그 아이는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한참 후 그 아이가 헐레벌떡 달려오는데, 그 손에 새를 산 채로 들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쾌재를 부릅니다. 원장님은 그 아이에게 왜 새를 그냥 갖고 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장님!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새를 죽여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으슥한 곳을 찾아봐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때 원장님이 미소를 지으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총애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느냐?”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생생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사실 신앙생활 한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 때에는 하나님을 잘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배 시간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의식하지만,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하나님의 임재를 전혀 느끼지 못할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한 주간 내내 보낼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직 미성숙해서 그런 겁니다. 하지만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하나님께서 늘 내 곁에 와 계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한번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의 삶 가운데 얼마나 생생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또 체험하며 사는지 말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살 때가 종종 있다면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하게 느끼며 살지 못한다면 역시 신앙을 체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말입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늘 체험하므로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139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시를 다윗의 많은 시편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의 하나로 평가합니다. 그 이유는 이 시편에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고 계심을 노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의 속성 : 전지전능성과 편재성
본문을 통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가장 두드러진 속성 두 가지, 곧 전지전능성(全知全能性)과 편재성(遍在性)을 아주 회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1) 전지전능성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특별히 우리 인생에 대한 것을 완전히 아십니다. 1절 이하를 쭉 보면, ‘안다’는 말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절.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 3절. “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기서 ‘안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이것은 ‘체험을 통해 속속들이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이름을 소개하고 인상착의를 익힙니다. 그것도 아는 겁니다. 그러나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죠. 하지만 두 번, 세 번, ... 오랫동안 여러 번 만나면서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언행심사를 모두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나를 만드신 창조주이시기에 나 자신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 사실을 가리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 숫자까지 다 세고 계시다고 표현합니다(마태복음 10:30).
6절을 보면 하나님의 그 전지성이 얼마나 놀라운지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또한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13절~14절을 보면 우리의 인체의 신비에 관해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 ”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의 오장육부를 창조하셨는데, 그 신비로움이 너무 놀라워 기묘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 앞에 단지 ‘원더풀’(wonderful)이라고 감탄할 뿐입니다. 정말 우리가 인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신기하지 않습니까? 피가 돌고, 쉼을 쉬고, 머리털이 나오고, ... 그 하나 하나가 다 신기한 것뿐입니다. 우주를 신비롭고 질서 있게 만드신 것처럼 우리 인간을 아주 신비롭고 질서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질서 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더불어 능력이 필요합니다. 역사 이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고 탁월한 천재성이 있는 과학자들이 있어도 우주의 별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몇 개의 별이 있는지 알지도 못해요. 또한 아직 인간의 세포 하나 만들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신비한 우주와 인간을 만드는데 6일밖에 안 걸렸어요. 또한 죽은 자를 살리지 못해요. 하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단숨에 말씀만으로도 능히 살리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십니다.
그래요 여러분! 하나님은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나의 좋으신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담대함으로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편재성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만일 어떤 한 공간에만 갇혀 있다면 별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 계십니다. 이를 가리켜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 혹은 ‘편재성’(遍在性, omnipresence)이라고 합니다.
8절을 보면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도, 땅속 깊이 내려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9절~10절을보면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새벽 날개’는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비추는 햇살을 가리킵니다. 그 빛의 속도만큼 빨리 바다 끝으로 달려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편재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레미야 23:23~24“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데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2. 감찰하시는 하나님 :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선
전지전능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1~3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감찰하시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통촉하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기 보면 ‘살펴보다(감찰하다), 밝히 알다(통촉하다)’ 등의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시선을 절대로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7절에서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하나님은 요한계시록 1:14의 말씀처럼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은 흔히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부담스런 시선이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시선을 전혀 받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반면에 너무 시선을 많이 받으면 부담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됩니다.
* 그러면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 즉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됩니까?
1. (인간의 편에서 볼 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우리로 하여금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두려움에 빠져 숨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예: 아담, 요나).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은 거룩하고 충성된 삶을 통해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거룩하고 충성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지만 워낙 착실한지라 인정받고 가정 총무가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추파는 던집니다. 어느 날 집안에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여인은 요셉을 유혹하지만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겠습니까? 요셉이 목석이라 그랬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라 가능했던 겁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창세기 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래요. 여러분! 우리가 (거룩하고 충성된 삶을 통해)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비결은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요셉처럼 늘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통해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복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으로부터 도와주시고, 궁극적인 승리를 주십니다.
환난이나 악조건 가운데 두려워하거나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예: 출애굽기 14장의 이스라엘 백성).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주기 위해 지금 여기에 계심을 알게 됩니다.
* No where is God. → Now here is God.
그래요.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 우리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든 환난과 어려움으로부터 건져주십니다.
인생에서 수많은 환난을 겪었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지켜보시고 도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던 다윗, 그는 본문 전체에 걸쳐 우리를 늘 주목함으로 보호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10절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래요. 여러분!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주목하시다가 여차 하면 우리를 둘러싸며 도와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처럼, 또한 험산준령을 통과하는 것처럼 수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예) 다니엘과 세 친구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다니엘 6장),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다니엘 3장) 하나님은 그들을 주목하시고 보호하셔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화)
어떤 아이가 친구 생일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 1m 앞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아버지가 아이에게 친구 생일잔치에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졸라댑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온다고 했고, 다른 아버지들은 다 허락하는데 아버지는 왜 그러는 거냐고 아이가 항의합니다. 하도 그러자 아버지는 결국 허락합니다. 아이는 너무 좋아서 눈보라를 헤치며 친구 집으로 갑니다. 힘들지만 겨우 겨우 도착합니다.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다봅니다. 그때 눈보라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이가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눈보라를 헤치며 살금살금 아들의 뒤를 따라왔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아니하시는,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결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그 모든 어려움에서 단련하신 후에 더 좋은 인생의 소유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을 믿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결론)
여러분은 매일의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갑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환난과 고난이 많은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늘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해 결국 승리할 것을 확신하며 담대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그래서 남은 생애가 날이 갈수록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