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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왜 낯설어야 하는가
김성현 인지과학연구소 wisdom tooth 대표
문학작품을 비롯한 예술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참신성이다. 사물을 새롭게 보는 것,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현대예술에서는 ‘낯설게 하기’라고 한다. 평범해 보이던 일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이성복 시인은 그의 수필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에서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정’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라고 했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이 사물을 새롭게 보는 것과 새롭게 표현하는 것 즉 ‘낯설게 하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익숙한 것, 기존의 것을 흉내 내는 것은 예술로서 왜 가치가 없는 것일까? 남들이 생각해 내지 못한 것, 최초로 생각하고 새롭게 표현한 것, 그 자체 때문에 예술로 가치 있는 것일까? 물론 그 자체만으로 의미는 있다. 사물, 자연,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으므로 가치 있고,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예술에서 ‘낯설게 하기’는 이런 것보다 근본적이고,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우선 이성복 시인의 표현을 새롭게 다듬어 보자. “일상적 삶이 느낌에서 사실”이란 표현을 보자. 인간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현상을 지각하여 인식하게 된다. 느낌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이 언제나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느끼고 싶은 것만 느끼는 존재이다.’ 인간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지각하는 느낌은 착각과 착시 그리고 외부로부터 들어온 정보를 자신의 욕구와 과거 경험 그리고 기억에 따라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느낌은 언제나 사실로 연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 이 아니라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인식’으로 수정될 필요가 있다.
두 번째로 “일상적 삶이 위험에서 안정으로 끊임없이 이행된다.”라는 표현은 ‘낯설기에서 익숙함 ‧ 적응’ 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예술이 일상적인 삶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된다고 주장한 이성복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예술은 안정된 삶에서 위험한 삶으로 돌아가게 되고, 이러한 위험으로의 도래가 예술의 목적인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성복 시인의 표현은 다음과 같이 다듬어져야 한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인식’으로, ‘낯설기’에서 ‘익숙함 ‧ 적응’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 반대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인식에서 느낌으로, 익숙함 ‧ 적응에서 낯설기로.”
그러면 왜 예술은 익숙한 것에서 다시 ‘낯설게 하기’로 돌아가야 하야 할까? 이것은 독창성과 창의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일상을 한번 돌아보자. 우리의 일상은 익숙함이다. 늘 해 오던 일은 많은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도 잘할 수 있다. 운전을 예로 들어보자. 초보 운전자일 때는 온몸의 신경을 이용하고,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도 운전이 서툴지만, 익숙하게 되면 적은 노력으로도 운전을 더 잘할 수 있다. 인간은 이렇게 낯선 것에서 익숙해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다 일단 익숙해지면 그 일을 편안하게 수행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익숙함에 숨어 있는 여러 문제가 있다.
한 예를 보자, 한동안 우리나라 자동차 보험업계가 무사고 10년 이상 된 운전자들의 보험을 거부한 적이 있어 사회문제가 되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사고를 내지 않는 운전자는 보험회사에 경제적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통계상으로 보면 그렇지 않다. 자동차 접촉사고나, 가벼운 교통사고를 낸 사람은 사고 경험 때문에 운전에 주의하게 되어 대형 사고를 내지 않지만 무사고 경력 10년 이상인 운전자가 큰 사고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10년 동안의 무사고가 운전자에게 안전 불감증을 갖게 해서 큰 손실을 내는 대형 사고를 낸다는 통계결과가 나와 있다.
문화인류학 연구방법에도 이런 것을 이용한 연구법이 있다. 문명사회의 한 학자가 밀림에서 생활하는 원주민을 연구하기 위해 그 지역에 직접 방문해서 연구하다가 6개월 정도 되면 다시 문명사회로 나왔다가 한동안 생활을 한 후 다시 밀림 지역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는 낯선 문화에 6개월 정도 생활하다 보면 그들의 생활에 동화되어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일상의 익숙함’으로 돌아가 보자. 익숙함이 편리하기는 하지만 편리함은 또 다른 문제를 잉태하고 있다. 익숙함은 편리함과 동시에 안정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안정은 새로운 변화에 저항한다. 그래서 안정은 정체로 이어진다. 즉 안정은 변화와 발전을 거부하게 된다. 발전 없는 사회는 정체되고 그러한 사회는 붕괴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속한 자연과 환경 그리고 사회는 늘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보면 인간의 두뇌는 빙하기 때 폭발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추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먹잇감을 찾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한 결과 지능이 발달한 것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한 노력이 인간을 성장시킨 것이다. 또한, 일상적인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보고자 하는 것, 즉 ‘낯설게 하기’를 통해서 호기심을 유발하고,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하며, 창의적인 생각에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통하여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래서 예술을 창의적인 것이라고 하지 않고 ‘낯설게 하기’라고 하는 것이다. 창의와 독창성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예술과 철학은 모두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특성이 있다. 물론 다른 어떤 학문과 산업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이 두 분야는 인간의 정신적인 삶에 더욱 가깝게 와 있다. 여기서 한 철학자의 견해를 들어보자. “철학 역시 예술의 ‘낯설게 하기’와 관계 깊다. 철학은 명백한 것의 토대를 파헤치고, 친숙한 것의 익숙함을 해체하고,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Wayne D. Bowman. 음악철학에서).”
인간의 뇌는 효율성을 바탕으로 진화됐다. 효율성은 일상적인 문제해결에는 많은 도움을 준다. 예를 들어 수학 사칙연산을 계산기 등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암기로 조 단위 이상까지 계산할 수 있고, 단 몇 분 만에 단어 5백 개 이상을 순서 하나 틀리지 않게 암기도 할 수 있고, 그 역순도 가능하다.
이러한 효율성은 문제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속한 환경은 늘 변하고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진리는 단 하나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만 변하지 않고 모든 것은 다 변한다. 변한 환경에 기존의 방식을 고수해서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동일본 대지진에서 알 수 있듯이 재난에 대비해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그 매뉴얼에 없는 환경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았으며 도리어 기존 매뉴얼 때문에 문제를 눈앞에 두고도 해결하지 못하고 매뉴얼에 얽매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학과 예술이 ‘낯설게 하기’를 덕목으로 하는 것은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새롭게 성장하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창의적으로 발전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문화 ․ 예술이 발전과 성장을 위한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이것을 그 사회의 에너지라고 하는 것이다. 문화와 예술이 발전한 사회가 성숙한 사회이고, 성숙한 사회는 문화와 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대한민국 사회의 죄악이다.
김성현 인지과학연구소 wisdom tooth 대표 nikeship@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