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 빗줄기 꽂히는 날엔 외 1편
류미월
가슴에 가지런한 빗줄기 가랑비가 가지런히
빗금 긋고 나리고
바람 부는 날
마음은 드넓은 평원에 깃발처럼 내려꽂혀 소리없이
휘날린다
헝클어진 머릿속에 초원이 펼쳐지고
눈 오고
비 오고
회오리바람 불고
뭔지 모를 밀서가 날아와 잠 안 오는 오늘 밤
그 어려운 암호가 술술
해독돼도 좋고
끝까지 미궁으로 남아있어도
괜찮다
괜찮다고
접시 깨지는 파열음 때문에 지근지근 머리가 아파도
괜찮다
괜찮다고
누가 뭐랄까
다독의 힘이 빠지고 맥없는 허탈감
달콤했던 혀에 담긴 속삭임이
밀어처럼
하얀 두루마리 창호지 편지 위에 엔딩 없는
은실비 뿌린다
천상을 향해 지상에 메아리 퍼지는 연주곡처럼
라일락 · 사월
라일락과
라일락의 사이
사막여우와
낙타풀의 사이
사방에 그늘지지 않는
벽뿐이다
라일락, 라일락 따내도
따내도 지지 않는 꽃
아무리 지우려고 애써도
지워지지 않는
라일락 향기
라일락, 라일락
수수한 옷차림 고혹한
자정향紫丁香 수수꽃다리
꽃향은 멀리멀리 벽을 뚫고
낙타 등을 타넘는다
낙타 등을 타고 사막여우의
꼬리에까지
풀포기 하나 없는 사막
모래언덕 위에
라일락 라일락
수수꽃다리 라일락의
꽃말이 카라반의 꿈속을
건넌다
바람이 바람을 구름이
구름을
독오른 방울뱀이 일 년 치의
울음을 한꺼번에 쏟아낸다
류미월
1961년 경기도 포천 출생,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4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나무와 사람 외.
2023년 아르코 문학창작지원금 선정(수필)
제15회 가람시조문학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