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58) - 짚신장수
온갖 나쁜짓 일삼는 농식
살인 명령은 거부하는데
농식이 열두살 때 어머니가 죽고 덕스럽지 못한 계모가 들어왔다.
외장꾼 아버지는 집에서 자는 날이 드물었다.
계모의 사촌 오빠는 저잣거리에서 조그만 가게를 차려놓고 고리채 돈놀이도 하고 땅과 집을 사고파는
거간꾼 노릇도 하는 상인이다.
왜소하고 애꾸인 그를 사람들은 일목(一目)이라 부른다.
이상한 것은 저잣거리에서 못된 짓은 도맡아 하는 덩치 큰 왈패들이 일목 아저씨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다.
농식이 저잣거리를 빈들빈들 돌아다니다가 시비가 붙었다.
농식보다 덩치도 크고 나이도 두세살 더 먹은 녀석이 길가에서 푸성귀를 파는 처녀에게 자릿세를 내라고
으름장을 놓는 게 아닌가. 농식이 가로막았다.
이 녀석이 두 손으로 농식 가슴팍을 쳤다.
번개처럼 농식이 그 녀석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푹 꼬꾸라진 놈을 다시 걷어차니 대자로 뻗어버렸다.
멀리서 구경하던 덩치 큰 왈패가 오더니 농식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녀석 장래 끼가 있네. 너는 오늘부터 내 부하야. 나를 삼촌이라 불러라”라고 한다.
농식이 왈패를 빤히 쳐다보더니
“흥! 나는 건달 삼촌 둔 적이 없소”라며 홱 뿌리치고 돌아서는데 왈패가 농식의 뒷덜미를 잡고
땅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그 와중에도 농식은 돌멩이를 잡아 왈패의 발등을 찍었다.
얼굴이 피투성이가 돼 길가에 쓰러져 있는 농식 얼굴을 닦아주는 손길이 있었다.
푸성귀를 팔다가 봉변당했던 그 처녀였다.
옷도 흙투성이에 갈기갈기 찢어지고 얼굴도 피투성이라 집에도 못 들어가고 그녀를 따라 그녀 집으로 갔다.
산자락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에서 아파 드러누운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이틀 만에 집에 갔더니 툇마루에 그 왈패가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농식 손을 잡고 데려간 곳이
일목 아저씨 가게였다. 겉은 조그만 가게처럼 보였지만 안에 들어가니 넓고 깨끗했다.
왈패들 대여섯이 마작을 하고 있었다.
일목 아저씨가 들어오자 왈패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두 손을 모으고 다시 꿇어앉았다.
“오늘 새 식구가 들어왔다. 막내이니 귀엽게 봐줘라” 하자 “예”라고 절도 있게 합창했다.
그날 저녁에 모두 요리집으로 가 너비아니며 육회며 도미회며 진탕 먹었다.
이튿날 그때 싸웠던 왈패를 따라 포목점에 가서 새까만 공단 바지저고리에 금색 비단 조끼를
사 입고 나니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달 스무닷새가 되자 왈패 둘이서 돈을 받아내러 저잣거리 가게를 도는데 농식도 따라다녔다.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앞장서서 못된 짓을 하고 나니 농식은 열다섯이 됐다.
경쟁 국밥집 깽판 쳐서 문 닫게 하기, 노름판에서 잃은 돈 칼로 손등을 찍어 찾아주기,
공사판 입찰가를 미리 알아 알려주기, 잔칫집에 들어가는 참기름 통 바꿔치기….
온갖 공갈·협박에 나쁜 짓을 일삼았지만 살인 청부는 할 수 없었다.
농식이 살인 명령을 거부하자 한 식구라는 왈패들이 농식을 기둥에 묶어놓고 해괴한 고문을 했다.
농식은 살인을 아직 안했지만 수많은 살인 청부를 받아 감쪽같이 살인해주고 어마어마한 돈을 챙겨
삼할은 사또에게 바치고 칠할은 두목인 일목 아저씨 주머니에 들어간다는 걸 알고 있다.
이제 농식도 살인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와 경력이 됐다. 농식은 괴로웠다.
술을 마시고 괴로울 때면 푸성귀 노점상 청실 누나를 찾아갔다.
청실 누나 홀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농식이 장례를 치렀다.
열여덟살 청실이 아들을 낳았다.
농식이 아들을 안자 온몸이 찌릿 낙뢰가 몸을 타고 흘렀다.
가을 겨울 이른 봄까지 청실은 아들을 둘러업고 주막에서 허드렛일한다.
농식이 돈을 갖다줘도 더러운 돈으로 양식을 사지 않겠다며 한사코 주막에 나갔다.
어느 허름한 몰골의 손님이 세수하느라 허리를 굽히는데 마패가 보였다.
그날 밤 청실이 농식 소매를 잡고 주막에 나타났다.
일목 아저씨와 사또는 한양으로 압송되고 왈패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농식의 뒤꿈치 인대를 끊어버렸다.
절름발이가 된 농식은 짚신장수가 됐다.
[출처 ] 농민신문 사외칼럼 - 조주청의 사랑방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