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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는 오랜 기다림 끝에 길고 긴 복도를 지나서 경호원에 이끌려 황제 앞에 나섰다. 신하들처럼 그도 황제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황제 앞에 길게 엎드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프로시키네스>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일어설 수 있는데, 그때 그의 눈앞에는 매우 인상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기계장치의 효과로 황제의 옥좌가 올라가고, 사자와 독수리사자, 황금새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황제는 옛날에 한 천사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가져다주었다는 자주색과 흰색 의복을 입고, 자주색에 황금 독수리장식이 있는 신발을 신고 있다. 방문객은 할말을 잃어버리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는 황제에게 말할 권리가 없다. 오직 황제만이 중개자를 통해 그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이다.” -‘시공사, <비잔틴 제국>’ 중에서
시칠리아의 밀사는 황제 앞에 길게 엎드렸다. 그에게는 이러한 의식이 우스웠지만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을 때의 광경에는 할말을 잃었다. 밀사는 자신이 기계장치들이 연출하는 인상적인 장면에 넋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그것은 타국의 사절에게 동방황제의 위엄을 보이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중개자가 다가오자 그의 뒤에서 황제 알렉시우스 1세의 음성이 들려왔다.
“되었다. 그에게 직접 말할 것을 허락하노라.”
중개자가 머리를 숙인채로 물러나자 밀사는 나직이 입을 열었다.
“위대한 로마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께 시칠리아의 왕 로저1세의 분부로 문안드리옵니다. 또한 투르크의 이교도를 무찌른 폐하의 업적을 찬양하옵니다. 폐하의 용기가 헤라클레스와 같으며 그 지혜는 오딧세우스를 능가하시옵니다. 저는 왕의 분부로 시칠리아와 비잔틴 제국의 동맹을 통해 양국의 평화와 번영을 이루고자 하는 대의를 받들고 왔사옵니다.”
알렉시우스1세는 잠시 밀사를 나직이 내려보았다. 서방인의 뻔뻔함이란! 나폴리를 빼앗고도 이제와 사절을 보내 동맹을 요청하다니....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다면 저들은 밀사가 아니라 군대를 보냈을테지. 황제는 불쾌감을 억누르고 입을 열었다.
“그대의 찬양을 듣기에는 이 몸이 너무도 부족하다. 나폴리의 영지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이 변변찮은 황제에게 그대의 칭찬은 위선인가, 아니면 기만인가”
“당치않은 말씀! 그것은 폐하의 오해이옵니다. 시칠리아가 나폴리를 빼앗은 것은 결코 자의가 아니었사옵니다. 당시 교황 우르반 2세의 명으로 나폴리를 점령하였을 뿐, 어찌 위대한 로마제국과 전쟁을 할 마음을 가지겠사옵니까.”
“교활한 자여, 뱀의 혀를 가졌구나. 그대는 지금 우르반 2세가 죽었음을 빙자하여 그를 팔아넘길 셈인가?”
“아니옵니다. 폐하. 교황 우르반 2세의 죽음으로 억울한 것은 시칠리아 뿐이옵니다. 저희는 나폴리의 수입 대부분을 교황에게 바치고 있사옵니다. 나폴리에서 이득을 보는 것은 오직 교황뿐이옵니다. 카르타고가 무너진 이래 시칠리아 또한 로마의 영토였음을 잊으셨사옵니까.”
“!!!.....”
알렉시우스 1세는 밀사의 말에 분노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밀사의 말을 듣기 전까지 황제는 교황이 시칠리아의 무력시위에 견디지 못하여 억지로 나폴리 점령을 묵인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밀사의 말이 맞다면 교황이 시칠리아를 압박하여 나폴리를 공격하게 하였고 그 이득을 고스란히 챙긴 것이 된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전임 교황 우르반 2세는 황제의 동맹제의를 두 번이나 물리친 채 서방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였고 투르크와의 전쟁중에는 의심스러운 십자군을 편성했다. 덕분에 황제는 그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허겁지겁 대 투르크 전쟁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나폴리의 상실은 너무도 적절한 시기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교황이 죽은 마당에 어째서 나폴리를 돌려주지 않는가. 그대들이 그릇된 교황의 위엄에서 벗어났으니 나폴리는 다시 비잔틴에게로 돌아와야 마땅하지 않느냐.”
“폐하, 우르반 2세는 죽었으나 그의 정책은 대물림이 되었사옵니다. 현재의 교황또한 나폴리를 포기할 뜻이 없을진대 저희가 임의대로 나폴리를 폐하에게 돌려드린다면 교황은 저희를 파문할 것이며, 그순간 시칠리아는 서방 모든 국가의 표적이 되어 바람앞의 촛불처럼 스러져갈 것이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의 왕은 짐에게 동맹을 요청하는 것이 아닌가. 시칠리아는 원래 로마의 영토였으니 짐은 그대들에게도 책임을 느끼노라.”
“어질고 현명하신 말씀! 신은 폐하의 영광을 세세토록 빛내주시기를!! 시칠리아의 군주는 폐하의 말씀으로 기쁨에 벅차오를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러나 시칠리아는 두렵사옵니다. 교황의 미움을 사 다른 나라에게 시칠리아가 침략당할 때, 그들의 창검에 나라가 유린당할 때, 폐하의 용맹무쌍한 군대가 바람처럼 달려와 주지 못할것이 걱정스럽사옵니다.”
“의심을 가지지 말라 섬나라의 사신이여. 비잔틴의 군대는 나의 말이 그대의 귓가에 닿는 것과 같이 빠르리라.”
“감히 누가 의심하리옵니까 폐하. 그러나 바람보다 빠른 헤르메스도 날개신이 없으면 날아갈 수 없듯, 폐하의 군대가 시칠리아에 오기에는 가로막고 있는 바다가 너무도 넓어 신의 마음은 안타까움만이 가득하옵니다.”
순간, 황제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이것은 명백한 모욕이자 도발이었다. 변변한 해군력도 갖추지 못한 주제에 바다건너 영토까지 신경쓰지 말라는 신랄한 비판인 것이다. 시칠리아의 밀사는 엎드린 채 고개를 연신 조아리며 두려움에 찬 목소리로 마음껏 황제를 조롱하고 있었다.
알렉시우스 1세는 분노로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작은 섬나라에서 온 하찮은 밀사의 세치 혓바닥에 비잔틴 황제의 권위가 희롱당하고 있다. 저들은 비잔틴의 영토인 나폴리를 쑥밭으로 만들어 점령한 주제에 뻔뻔스럽게도 동맹을 요청하고 교황을 핑계로 변명을 해대면서 황제를 조롱하고 있지 않은가.
알렉시우스 1세의 가슴 속에서는 거센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평화의 외교문서보다 분노의 칼을 쥐고 싶은 마음이 거셌지만 국내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투르크와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으나 국고의 대부분이 군비로 지출되어 수도를 제외한 비잔틴의 여타 지역은 여전히 낙후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비잔틴의 주력군대는 새로이 얻은 옛 투르크 점령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복종할 줄 모르는 세르비아도 문제였다. 둘째 안드로니쿠스가 포로 전원을 처형하면서 반란은 진압했지만 비잔틴에 대한 반감은 오히려 날로 높아가고 있어서 작금의 세르비아는 바람만 불면 순식간에 다시 타오를 재 속의 불씨와도 같았다.
새로이 군대를 조직하자니 자금이 부족하고 주력군을 돌리자니 점령지의 반란이 신경쓰이는 황제로서는 이래저래 마음이 불편한 터였다. 그런 와중에 시칠리아의 함대는 제 집 다니듯 그리스의 해안을 넘나들었고 그것은 손톱 아래에 박힌 가시처럼 황제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는데 이제는 동맹요청이랍시고 내뱉는 말이 해군력도 변변찮으니 조용히 죽어지내라는 것이다. 옥좌에 앉아있는 황제의 얼굴은 바위같았으나 그 안에는 화산같은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하찮은 밀사의 도발에 넘어가고 있는 자신이기에 더욱 화가 치미는 황제였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 무거운 침묵으로 폭풍을 잠재운 황제는 입을 열었다.
“사신에게 주어진 작은 권세로 나폴리의 처우를 결정하는 일은 그대의 목을 걸어야 할 터, 그대의 주군에게 나의 뜻을 전하라. 섬나라의 가련한 처지를 보아 동맹은 수락하겠다. 그러나 그대들은 나폴리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보이도록 하라. 교황의 사주였든 그대들의 어리석은 탐욕 때문이든 나폴리를 강탈한 것은 시칠리아다. 푸는 일은 묶은 자의 몫인 법, 그대의 군주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짐은 이를 성스러운 동맹의 배신으로 간주할 것이며 그 순간, 그대들의 땅에는 다 서있지도 못할 나의 군대가 피의 재앙이 되어 바다를 메우고 천지를 뒤덮을 것이다.”
황제의 말이 끝나자 대신들의 표정에는 안도감이 스쳤다. 비록 시칠리아의 뻔뻔스러움에 화가 치민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은 현실주의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더 큰 축복은 감정을 자제할 줄 아는 황제를 가진 것이었다. 황제의 말과 약간의 간격을 두고 밀사의 대답이 들려왔다.
“미천한 신이 주님의 햇빛을 계속 바라볼 수 있음은 오직 폐하의 자비로우심 덕입니다. 무한한 기쁨과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이 몸에 폐하의 말씀 하나하나를 새겨 돌아가 저의 왕에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신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주께서 폐하를 지켜주시기를.”
한달 후, 어둠이 깔린 시칠리아의 성에는 왕과 모든 신하들이 모여 있었다.
“밀사가 도착했습니다.”
“들여보내라.”
시칠리아의 왕 로저 1세의 앞에 밀사가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결과는 어떠한가?”
“비잔틴의 황제는 동맹을 수락했습니다. 다만 나폴리에 대한 시칠리아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를 조건으로 세웠습니다. 이것이 이행되지 않으면 동맹을 깨고 보복을 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밀사의 대답을 들은 왕의 입가는 흡족한 웃음으로 일그러졌다.
“아직도 옛 로마의 허울을 벗어나지 못한 늙은이가 그래도 황제놀음은 하고싶은 모양이군. 이미 교황과 황제는 틀어질대로 틀어졌다. 신의 자식인 황제는 인간의 땅을 원하고 인간의 자식인 교황은 신의 권력을 탐한다. 그 갈등이 잘 풀린다면 내 왕관을 내놓으마. 게다가 이미 돈 맛을 안 교황은 절대 우리를 저버리지 못할 걸. 하하하하!”
로저 1세의 큰 웃음소리는 파동이 되어 홀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묘한 진동에 벽과 기둥의 횃불들이 조금씩 흔들려 사람들의 그림자가 춤을 추었다.
“서기관! 이집트의 술탄에게 편지를 보내게. 이제 이슬람의 옛 땅을 찾을 때가 되었다고 말이야. 내년 즈음에 이집트가 예전의 투르크 지역을 공격하면 우리는 함대를 동원하여 그리스에 상륙, 곧바로 콘스탄티노플까지 쓸어버릴 것이고 그러면 황제는 기껏해야 도망쳐서 아나톨리아나 소 아시아에 끼여버릴 터이니 힘 닿는 데까지 진격하여 서로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영토를 나누기로 한 약속을 지키라고 전하게. 그리고 세르비아에 잠입한 밀정에게도 이 계획을 알려주고 내년에 세르비아에서 한번 더 반란을 일으키라고 하도록. 그곳에 주둔중인 비잔틴의 안드로니쿠스 황자는 멍청하지만 전쟁에는 꽤 소질이 있기 때문에 아예 움직이질 못하게 해야 해. 황태자인 알렉시우스 2세는 이집트가, 그리고 둘째인 안드로니쿠스를 내 아들이 맡으면 늙은 황제와 나머지 지푸라기들은 모두 내가 박살낼 것이다. 내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집무를 봐야할 지도 모르겠는걸.”
핫핫핫 하고 크게 웃은 로저 1세는 회의를 끝내고 후궁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의 입은 욕망과 자신감의 웃음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1122년, 비잔틴과 시칠리아는 동맹을 체결했다. 선의에서 우러나온 듯한 신뢰와 우정으로 맺어진 이 동맹은 비잔틴 제국에게 아주 짧은 평화와 안정, 그리고 엄청난 피바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예전에 싱글스토리를 연재하면서 써놨던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정말 오랜만에 우연히 발견해서 올려봤습니다.^^ 근데 보니까 어색하네요.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