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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평윤씨(대종회)
 
 
 
카페 게시글
누구나 자유 게시판 스크랩 파평윤씨 소정공파 족보 원본 번역
용연봉강재사랑 추천 0 조회 1,179 16.11.22 03:01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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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목(草木) 근간(根幹) 심후(心厚)하고 건실(建實)해야 지엽(枝葉) 무성(茂盛) 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거늘.

 시조 태사공을 근원으로 백만 후손이 번성 하고 있으며 선대 열성조 께서는 수많은 왕후(王后)장상(將相) 거유(巨儒) 부마(駙馬) 충신(忠臣) 열사(烈士)등을 배출해서 명문거족(明門巨族) 면목울 여실(如實) 과시(誇示) 했으며.

 현세에도 학계, 정계, 법계, 재계, 문화, 사회 전반의 모든 영역에서 영역을 주도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이 부지기수(不知基數) 미래를 장식할 어린 새싹들이 줄지어 자라고 있으니 경사라.

 이는 오로지 우리 열성조의 음덕 (蔭德)임을 깊이 감명 받아 대대 손손 명문거족 파평윤씨의 세계를 이어가길 바라는 바이다.

 

 최근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파평윤씨의 기록을 조사한봐 사실과다르거나 옛날 문서의 한자의 뜻을 잘못 해석하여 후손들에 조상의기록이 잘못전달 됨을 안타까이 여겨 글을 올리는 바이다.

 

 특히 현세는 국제화, 가족화, 저출산, 호주제 폐지 등으로 이기심만 팽배하고  심지어는 시조 이름도

알지 못하는 (특히 여성) 후손이 증가하는봐 1000여년을 이어온 파평윤씨의 가승을 잃을까 노심초사 하는바이다.

 이에 가승을 기록하니 참조 하고 파에 따라서는 조금씩 가계도가 다를수 있지만 최소한 알아야 할것만을 골라 기록하는 바이다.

 

                    2009 02 13 파평윤씨 소정공파 35세손   윤영갑

  부산 사하 장림 아미산 아래 본가에서

 

  

                                               파평윤씨의 역사적 고찰

 

파평윤씨 사적에 의하면 파평용연리에 있는 연중에서 윤온가득석함 하였는데 공의 좌우 곁트랑에는 81 하고 양견에 유적우 하되 여일월상하며 족유 칠흑자라 하되 여칠성 이라 했고 또삼국사기에는  신라 진성여왕 7 계축8 15 용연에서 석함 출현이라 하셨다.

 한편 종인의 사록에는 태사공이 고려광종 24 계유년에 81세로 졸간임소 (사망) 하셨다 한다.

 

  고려의 대학사 명제선생은 태사공의 謫居東京(적거동경 = 귀양갔다는 이라함을 의심 하였으나 고려사기에 혜종이 즉위후 공의 상모비범함을 시기하고 출수동경이하는 구절과 역사에 혜종이 시기심이 많다는 등을 종합하여 최근 사고로 고록간차(역사적으로 고증 했다는 하셨다.

 

  씨족통보에 의하면 동료 장수가 공의 선대를 물은즉 궤변답이무선대요 화생여 파평 출신이라 (해석= 선조가 없으며 파평 출신이라 대답함) 함으로서 더이상 파평윤씨에 대해서는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이 용연은 윤씨의 시조 발상지로 칭하게 되었고 유적으로 수호하게 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시조 강생 1067 서기 1960 기해년 봄에 전국의 윤씨종문 대회를 열고 총의로서 용연 (연못) 준설하고 사적 유적지로 새로 단장하고 꾸며 보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파평 용연은 파평윤씨의 발상지로 칭하고 있다

 

 

                                   윤씨 성이 생기게된 경위

 

  고대 제왕기(帝王紀) 의하면 윤씨의 연원은 중국천수(天水) 하였다 (현재 중국 감숙성 위천도현 ).

  상고시대에 소호금천씨(현호玄哮) 次妃所生 아들 () 옹주윤성(尹城의 뜻은 성을 다스린다는 = 현재군수직함) 봉하여 사호(祀弧) 책임케 하였다.

 

  한국의 윤씨 성을 살펴보며는 기자(箕子= 중국 은나라 태자로서 은나라가 망한후 조선에 도망하여 기자 조선을 세웠다고 ) 동쪽 조선으로 도망 올시에 수행한 관원중에 윤씨가 있었다고 하였고

  신라시대에 시영(尹始榮) 께서 출현 되어 윤씨 성의 연원이 되었다.

우리의 성자(姓子= 성씨의 ) 시조 태사공을 천수보육(하늘로부터 받아 기르고)하고 수윤창성(윤씨의 성을 따랐다) 노파 윤온의 성자가 다시 우리 파평윤씨의 성의 연원 되었다.

 

  편집자주: 태사공을 연못 석함에서 궈두어 길렀던 할머니의 성이 윤씨임을 감안하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기자조t선  연혁 역사 자료를 연구 해야 것으로 사료됨 

 

                   시조 태사공 강생 약사 (始祖 太師公 降生略史)

 

  신라 진성여왕 7 계축(癸丑서기 893 8 15 경기 파평땅 용연중(龍淵 ) 부유석함(연못에 떠있는 상자)에서 강생하셨다. 태사공 묘지비석에 의하면 파평 용연에 윤씨 성을 가진  노파가 석함을 습득하여 함을 열어보니,

   그얼굴이 관옥 같고 울음 소리도 우렁차며

  가슴에는 "" 등에는 "" 같은 붉은 반점이 뚜렸하고 양쪽 곁트랑에는 비늘이 81개가 달려있고 발에는 사마귀가 7 달려 있었다한다.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짐작하고 정성을 다해 기루웠더니.

 어릴때 부터 문장과 무술에 뛰어난 재주가 있을뿐 아니라 초인적인 용력(勇力) 있었다한다.

 

                     시조 윤신달 약사 (始祖 尹辛達 略史)

 

  시조 태사공의 ( =돌아가신 어른의 존함) 신달 이시며

시호(諡號 =돌아가신뒤 왕께서 내리신 칭호) 소이공(昭裏公)

이시니 신라 56 경순왕 8  서기 934 고려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국을 창건 하시고 벼슬이 통합삼환 벽상익찬공신 삼중대광태사(統合三韓 壁上翊贊公臣 三重大匡太師) 오르시다.

 

 시조비는 문화유씨시니 고려태조 왕건의 처형(妻兄)이시라 태조 왕건과는 손위 동서 지간이라.

 

 고려태조 왕건이 승화 하시고 혜종이 등극하면서 태사공을 시기하여 동경대제독 (東京大提督) 으로 동경유수로 혼자 가시게 하니 가족과 떨어져 30년을 외롭게 사시다가 경주(慶州)에서 작고 하시니 서기 973 향년 81세라.  경북 영일군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하서좌(서쪽산 아래) 안장(安葬) 하셨다

 

  편집자주: 시조 태사공 태어날때  비늘이 81 곁트랑에 달려있어 81세로 장수 하셨다 사료됨 1000여년전 당시 평균 수명이 40 정도로 감안할때 보통사람의 2배로 장수 함은 파평윤씨 가문이 장수 가문임을 입증 하는 바이다

 

 

                                                  파평윤씨 영상공파 직계 족보

 

    존함    시호                관작및 약사

  1:  신달   태사공   고려통합삼한벽상 익찬 개국공신 삼중대광태사 동경대제독

 2:  선지   공신공   벽상삼한 익찬신공

 3금강   복사공   상서성 좌복사  

 4집형   문정공   상서성 우복사

 5:        문숙공   문과급제 추충좌리 평용척지 진국공신

 6언이   문강공   문과급제 정상문학 호부상서판은청광록대부

 7순신   시랑공    문과급제 중붕대부 사부상서시랑

 8상계   유수공    상서랑위이사  서경부유수

 9복원   록사공    문과급제 상서성좌복사 은청광록대부

10:       어사공    문과급제 감찰어사 상서서형부사

11:       문현공    문과급제 삼중대광수검의 정승 은평부원군

12안숙  양간공    추성익위좌리공신 삼중대광도 검의사사

13        영평군    순성익대보리공신 삼중대광은평군  

14승순  충간공    문과급제 수충양절보리공신

15:       소정공    추충익대좌명공신 사조판서 숭정대부파평군

16:  희제  한성공    정현대부 한성부사 의정부 좌찬성

17:       백천공   추충적덕의보록공신

18필상  영상공    생원문과중시급제 의정부영의정 파평부원군

                               갑자사화로 사약 받으시고 중종4 사면복 되시다

19:       통덕랑    입남조 (영상공의셋쩨 아들로 갑자사하로  남해로 피신 이름도 숨기고 외로이 사셨다)

                 

 편집자 : 소정공파의 직계만 기록 하였다  한문을 병행하여 기록하여나 하나

지면상 어려움이 있었음을 양해하여주길 바라는 바임.                       

 

 5세손 ! 우리의 윤관장군 5000 역사이래 오직 한분

*****척지장군 (拓地將軍) *****  

 

  문숙공의 휘는 관이시요 시호는 문경공(文敬公) 이시다.

  고려 11 문종대왕때 문과에 급제 하시고 북녁 오랑케 여진족을 징벌 하사 국경을 중국 요동반도까지 넓히신 장사로서  관작이 추충좌리 평용척지진국공신이시다

 

우리나라 역대 장군들은 적의 침략을 방어 하신 분들이나

오직 우리 문숙공 께서는 국경을 중국 요동반도 까지 넓히신 분으로 척지장군 이시라 한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당시국가 능력이 넓은 땅을 다스리지 못하고 버려 두었던 것이다.

 

  지금 중국이 동북공정이란 프로젝트로 우리의 윤관장군께서 

징벌하여 넓히신 우리의땅 요동반도(현재 만주땅 전역) 차지하고 있으며 심지어 우리의 한반도 까지도 자기들의 소수민족이라 역사를 조작하면서 까지 우기니 오오 통제라

 조상  문숙공께서 구천에서 얼마나 비통해 하실까? 우리는 빨리 국력을 키워 만주땅을 되?고 이참에 고구려 땅도 ?아야 것이다.

 


             15세손   지조와 절개를 유훈으로 남기신 소정공 약사

 

  공의 휘는 곤이요 시호는 소정공 이시며 관작은 사조판서 숭정대부 추충익대 좌명공신 이시었다.

 그러나 공은 높은 관작에 계시면서도 평생을 고심 속에서 사셨다 한다. 이유인 선조 대대로 고려 충신의 후예로서 이조 3 태종대왕 이방원 과는 어릴때 부터 동문수학 같이자란  친우라 이방원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이조 관작에 참여 하게되니 선조들의 지조와 절개를 허물어 트린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로인해 공은 아들이 태어날 마다 중국의 은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건국 되었을때 수양산에 들어가 주나라 곡식은 입에 넣지 않겠다고 고사리로 연명하다 굶어 죽어면서 까지 지조를 지키신 너무나 유명한 백이숙제(伯夷叔濟) 이름자중 이자와 제자 그리고 수양산의 산자를 따서 큰아들을 희이,둘째아들을 희제 셋쩨아들을 삼산으로 작명 하시고 나는 기왕 선조 들에게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이 되었어나 너희들은 대대로 백이숙제와 같은 굳은 의지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길 바란다고 하셨으니 소정공의 심정을 우리 후손들이 어찌 헤아려 보지 않을수 있겠는가.

 

이로 인해 지조와 절개를 소중히 생각하는 오문(우리가문)

파평윤씨소정공파의 전통을 자랑하며 계승하길 바라는 바이다.

 

 

                                           18세손    영상공 윤필상 약사

 

  영상공의 휘는 필상이요 시호는 영상공 이시니 작위는 영의정 이르셨다.

 공은 15 소정공의 차남 희제 한성공의 손자로서 성종대왕에 이르러 영의정에 오르셨는데   그당시 우리 가문내에 소윤대윤으로 분리되어 세력 다툼이 심했는데 성종대왕비 윤씨가 연산군을 낳으시고 폐비된 뒤를 이어 소정공의 셋째아들 삼산의 손녀가 왕비로 동택되어 정현 왕후가 되시니 영상공의6 여동생 이시라.

 

  가문의 명예와 권력이 극에 이러렀던 시기 성종대왕이 승화 하시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미궁에 감춰졌던 자기생모 폐비 윤씨의 문제를 들추어 내니 연산군 10 서기 1504 갑자사화(甲子士禍) 라는 참사가 일어 났으니 우리 영상공 께서 어찌 무사 할수 있었겠는가 제일먼저 사약을 받으시고 가세가 흩어졌으며 가족들은 산지 사방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이후 폭군 연산군이 갑자사화 으로 폐위되고 중종(中宗) 4 모든 종문의 가솔이 사면복작 (서기 1509) 되셨지만   

       !!!!!!! 오오 통제라!!!!!!!!!  !!!  마를수 없는 눈물이여

당시 피신한 가솔들은 숨어사신 관계로 정보 통신이 어두워 사면복작 되신 줄도 모르고 형제간의 소식도 모른체 생을 마감 하셨다 한다.

 

  영상공의 아들은 3분중 아들은 충청도 둘째는 부산구포  셋째는 남해로 피신 했으나 끝내 서로 만나지 못하고 남해로 피신한 셋째 통덕랑 윤중의 가계도로 영상공의 가계도를 이어가고 있으니  충청도와 구포로 피신한 영상공의 가계도를 갖고 계신 분이 이글을 본다면 500년이나 형제의 소식이 끊어진 가문의 한을 풀수 있지 않으까 생각하는 바이다

 

 

 

 十九世 入南祖 略史 (19세 남해로 들어온 선조의 약사)

 入南朝의 諱는 仲 이시오 爵位는 通德郞(통덕랑) 이시며 領相公의 三子 시니

甲子士禍(갑자사화)로 말미암아 목숨을 걸고 避身하여 南海郡 西面 井浦 海邊에서

九命自生으로 이름까지 숨기시고 숨어 사신바 끝내 定着하시고 代代로 世居 하게 되니 公을 入南朝시라 한다

公은 兄이 두분 계셨는데(18세 領相公의 아들은 3) 큰아들은 侃() 이시고

둘째 아들은 ?() 이시라 두 兄弟分의 後孫들은 忠淸道와 釜山 龜逋에 世居 하신다는 말은 들었으나 아직 確認은 못했다.(현재도 부산 구포에 가면 윤씨성을 가진 분들이많이 세거하고 있으나 구한말 양반 상놈 제도가 폐지 되면서 集姓村의 有名人事의性을 自意半 他意半으로 갖게된 歷史的인 冠禮를 보아 누가 眞定한 領相公의 後孫인지는 구별할 길이 없음 허나 南海로 避身한 셋째 아들의 家系道는 섬 이라는特殊한 環境이고 특히 先山이 있으며 族譜를 嚴格히 管理 하여 남해의 윤씨성을가진 분들은 眞定한 파평윤씨 임을 누가 疑意를 提起할수 있겠는가?)

 그 當時는 交通通信 情報가 어두워서 甲子士禍 이후 불과 5년만에 赦免復爵 되었건만避身하여 숨어 사시는 고로 赦免된 줄도 모르고 兄弟間의 消息도 모르고 외로이漢陽 하늘만 바라보며 平生을 보내셨다

  萬若 그 當時 至今과 같이 T.V RADIO, 휴대폰, 인터넷. KTX 등의 交通通信情報가 發達하였다면 늦어도 하루만에 本家에 到着 할수 있었을 뿐 아니라 우리 先祖의 빛나는 業績을 繼承하여 家門의 榮光을 回復 할수 있었건만 이 어찌 哀惜(해석)하고 痛嘆(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 조상의 빛난 업적을 영상공파 후손에 널리 알려 다시 우리 선조의 찬란한 업적을  중앙무대에서 맘껏 펼쳐 보이며 대한민국을 주도하는 吾門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2009 02월 13 소정공, 영상공 35세손 윤영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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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6.11.22 09:35

    첫댓글 소정공 영상공파 직계 족보에 대한
    좋은글 너무 감사합니다,
    영상공파 40세 윤경섭 입니다.

  • 16.11.23 22:17

    소정공파계보에서 16세 희제 한성공파-정헌대부(政憲大夫)-한성부사(韓城府事)-좌참찬(左參贊)
    17세 경(坰)-백천공파(白川公-배천공)-숭록대부(崇祿大夫)-영의정(領議政)-파평군(坡平君):시호

  • 16.11.23 22:23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백천공(배천공)-황해도 백천군수.영의정등 주요 관직역임!!

  • 19.09.01 09:30

    영상공 윤필상의 장자인 참의공뮨간의 계보를 이은 참의공파 37대손 윤금식입니다.
    저희는 충청남도당진에서 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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