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김옥성
피처럼 노을이 퍼진다 골목마다 집집마다 쌀 씻는 소리 밥 짓는 향기 화인(火印)처럼 이마가 불탄다 누군가의 육체로 연명하는 이 도시는 절대로 유령들에게 점령당하지 않는다
방금 전생에서 돌아온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피 묻은 육체가 악몽이 열리는 나무처럼 펼쳐져 있다 저 죽은 육체는 왜 이승에 정박한 닻처럼 무거운 것일까
심장을 파헤쳐보니 너의 슬픔은 한 송이 영산홍이었다 마지막 울음을 뱉어낸 너는 더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후생에서 들려오는 비명이 꽉 들어찼다 어쩌면 나는 그가 전생에서 도살한 짐승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는 내가 전생에서 도살한 짐승이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는 수천수만 번의 생 동안 수천수만 번 자신을 살해한 자들을 도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아무도 알아선 안 되지
순항하는 목숨들은 없는 것일까 그러게 순항하는 슬픔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다 여기는 좌초한 목숨들이 흘러들어오는 곳 그는 빛바랜 일지에 오늘 도살된 육체의 이름을 기록한다 목숨이 갈라질 때마다 저절로 새어 나오는 비명의 기록은 생략한다
삼생을 몇 바퀴 돌고 온 듯 파리가 허공을 휘젓는다 썩은 살점을 찾는 것일까 남아 있는 온기를 찾는 것일까 아니면 피의 기억을 더듬는 것일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괴롭혀왔기 때문에 그는 평생 외롭고 슬펐다
한때는 초식동물의 피에서 초원의 풀냄새를 맡기도 했다 싱싱한 생피를 마시고 옷소매로 피 묻은 입술을 닦고 초식동물처럼 초원을 내달리고 싶었다 풀처럼 거센 바람 속에서 아무렇게나 춤을 추고 싶었다 핏속에 적멸보궁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잠들 수 있을까 잠에서 깨어나 푸른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을까 눈을 뜨면 피의 울음이 고인 하늘에 태어나 있지 않을까 월요일엔 산사에 들러 천수경을 외우리라
그는 너의 뛰는 심장을 기억한다 심장 속에서 끊임없이 붉은 영산홍이 피고 지고 또 피었다 피에서 피로, 피에서 꽃으로, 꽃에서 꽃으로 펼쳐지는 피의 연대기에 대해 생각한다 석양으로 떠나간 사람들은 붉은 꽃으로 태어났다 짐승들도 사람들도 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왜 너의 붉은 육신을 먹어야 하는가 나는 언젠가 너를 먹지 않을 수 있을까
순식간에 공기가 바뀐다 하늘에서 불타고 있는 구름 조각들을 올려다보며 피 묻은 시체들에 대하여 부유하는 것에 대하여 흩어지는 것에 대하여 탄생하는 것에 대하여 더 깊이 생각하려다 그만둔다
곧 밤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므로 우우 진군해오는 어둠의 자식들 울부짖는 짐승들의 형형한 눈동자와 나는
* 도살된 황소 : 렘브란트의 그림(1643년경)
―시집 『도살된 황소를 위한 기도』 2023. 2 ----------------------- 김옥성 / 1973년 전남 순천 출생. 2003년 《문학과경계》에 소설, 2007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에 시로 등단. 현재 단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