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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0일 일요일 (녹) 연중 제28주일 강론 모음
하느님, 감사합니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 모든 죄 중에 가장 우둔하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배은망덕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레아와 사마리아의 경계 지방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떼의 유다인 나병 환자들 틈에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끼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몫을 보여라.”하셨습니다. 그들이 사제들에게 가는 동안에 그들의 몸이 깨끗해 졌습니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치유의 은혜를 받고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이방인인 사마리아 사람 하나만이 하느님을 찬미하며 감사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 사람을 칭찬하며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은 열 사람 중 단 한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은 그처럼 은혜를 많이 받고서도 보답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이들이며 염치없는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았습니다. 그 많은 환자들 중에 시리아의 나아만이 나병의 치유를 받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그 위대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
사마리아 사람과 나아만처럼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감사한 마음을 가?� 합니다. 우리 모두는 단 한 순간도 하느님의 보살핌과 이끄심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혼자의 힘만으로 잘 살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은혜를 체험하고도 그 분께 감사드리는데 인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홉 사람은 구원의 놀라운 선물을 기쁘게 받았으나, 이 기쁨이 표면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나병은 치유되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물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선물을 준 손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이 구원을 가져다 준 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영국의 선교사 스펄젼은 감사에 대해 이렇게 표현을 하였습니다.
“촛불을 바라보며 감사하면 전등을 주시고
전등을 바라보며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며
달빛을 바라보며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바라보며 감사하면 천국, 영혼의 빛을 주신다.”
신앙의 바탕은 감사에서 시작됩니다. 감사는 모든 것의 바탕이 됩니다. 감사합시다. 감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은총의 바탕입니다. 감사는 내가 좋을 때,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이 생겼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느님을 만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Ⅰ테살 5.16-18)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감사할 줄을 모를 때, 감사함을 잊을 때 우리 자신은 자신 안에만 머물게 되고 자신은 더욱 작아지고 좁아지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삶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넓히고, 높은 곳으로, 높은 분께로 인도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시며 감사와 찬양의 중요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에서 나오고 끊임없는 감사 안에서 표현됩니다. 왜 하느님께서 더 많은 은총을 주시지 않느냐고 원망하지 말고 지금까지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시다.
주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천주교 목성동성당 조상래 다미아노 신부
출처 : 안동주보
감옥의 소외와 하느님의 말씀의 연대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그리고 어느 분야에서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흔히 ‘소외계층’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경제 분야의 소외계층은 이제 언급하는 것도 부질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경제생활을 주도적으로 꾸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경제시스템이 촘촘한 그물망의 씨줄과 날줄처럼 상호의존의 구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그물망에 대다수가 갇혀 있을 수밖에 없고, 소수의 특정인이 그들의 이익에 따라 그물을 던졌다 거두어들였다 하는 형국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정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참여’입니다. 특히 자신과 사회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나 제도와 법을 만들 때 참여할 수 없다면,그 사회는 전제주의 사회거나 독재사회에 불과합니다.
정보사회에서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다루는 대중매체가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진할 수도, 방해할 수도, 그리고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문화는 “인간의 전인적 완성과 온 인류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사목헌장 59항)해야 하지만, 현대 사회의 문화는 매매할 수 있는 수많은 상품 가운데 하나쯤으로 간주되고, 그것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은 전인적 완성과 행복은커녕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
누군들 소외계층으로 전락하여, 가난하고 힘없이 그리고 초라하게 살고 싶겠습니까? 또 누군들 그 같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드러내놓고 나서겠습니까? 모두가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소외’의 현상은 남아 있고, 오히려 그 정도와 범위는 심각해지고 있을까요?
오늘 하느님의 말씀에서 그 원인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연대’의 결핍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1독서에서 시리아의 고관 나아만은 한센 환자였지만, 유다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사와 연대합니다.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열 명의 한센 환자와 연대합니다. 열명의 한센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장면을 그려봅니다. 그들 사이 인종에 의한 구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의 동행은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는 한하운의 시 구절 그대로입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머물지 않았고, 유다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지도 않았고,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셔서, 곳곳의 가난하고 힘없고 초라한 이들을 당신벗으로 삼아 연대하셨습니다. “선택된 이들”이라 할 수 있는 교회(하느님 백성)는 그분이 하시던 일을 계속(사목헌장, 3항)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 신수동성당 주임
출처 : 서울주보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11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래아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12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 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13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14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 15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7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 18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19이어서 그에게 이르셨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시작 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희 눈을 열어 주시어 하느님의 선물들을 알아볼 수 있게 하소서.
독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루카 17, 11) 우리는 루카복음에서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은 곧 “세상을 떠나실 일” 입니다. (9, 31) 예루살렘은 그 죽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질 장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가신다는 것은 이미 수난 예고가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사실 수난 예고는 벌써 두 번 되풀이되었고, 이제 한 번 남았을 뿐입니다.
수난을 향해 가는 이 길목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께 마주 옵니다. 가까이 올 수 없었던 그들은 멀리서 큰 소리로 자비를 청합니다. 소리를 높이는 것만이 그들이 예수님께 가닿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그들을 고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격리되어 살던 나병 환자가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인다는 것은, 병이 다 나았음을 확인받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마을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직 자신들의 몸이 깨끗해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바로 사제에게 간 것을 보면, 그들은 병이 곧 나으리라는 분명한 믿음은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열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은 치유를 받습니다. 여기까지는 열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병이 나은 사람들 가운데 아홉은 돌아오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만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 ?” 왜 사마리아 사람이 돌아왔을까요 ?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말이 생각납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 요한복음에서는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는 설명까지 덧붙입니다.(4, 9) 같은 나병 환자라도, 사마리아인에게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귀 기울여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 더 특별하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당연히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의 조건이, 그에게 무상으로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자비를 알아볼 수 있게 해준 것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른 아홉 사람도 나병에서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치유를 베풀어 주신 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계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 기적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치유는 몸이 낫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치유 안에서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 그래서 그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사람, 그 사람은 ‘구원’ 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성찰
오늘 복음에서 구원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는 데, 그리고 그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데 있습니다. 매일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주어지는 것들에 너무 습관이 되어버리지 않는 깨어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든 사람으로부터이든, 처음 어떤 호의나 사랑을 받았을 때는 감동하고 고마워하지만 어느새 익숙해지고 나면 감사할 줄 모르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적인 일에서 예를 찾아봅니다. 직장에서 일이 힘들다고 생각되면, 첫 출근하던 날을 떠올려 보십시오. 저는 아직 취직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지금도 그날의 기쁨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올 2월 1일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출근’ 이라는 것을 해본 것입니다. 일을 할 기회와 시간이 주어지는 것이 얼마나 좋았던지요. 그날, 이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지금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무디어지지 않도록 늘 나를 일깨우리라고 다짐했습니다.
하느님의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카복음을 계속 따라간다면,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그분은 구원의 선물로 당신 목숨을 내어 주실 것입니다. 열 사람의 나병 환자에게 모두 치유를 베푸셨듯이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그 선물을 주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천사들도 보기를 갈망하는” (1베드 1, 12)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선물에 감사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에 감사하는 사람은 구원을 체험할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햇빛과 비를 내려주시듯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만, 오늘 나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선물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아볼 수 있을 때 그날 나는 구원의 열매를 맛볼 것입니다.
기도
주님을 찬송하여라, 선하신 분이시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누가 주님의 위업을 말할 수 있으며 그 모든 찬양을 전할 수 있으리오 ? (시편 106, 1 – 2)
안소근 수녀(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주님 앞에 나설 때 반드시 필요한 것
오늘 복음은 병을 낫게 해주십사 청하는 나병 환자 열 사람에게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치유의은혜는 그것을 받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 하느님께서 살아계심을 알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도록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비천한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치유의 은혜를 받은 열 명 중 그 은혜에 감사하며 다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고, 그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다는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로부터 천대받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원래 유다인이었지만, 이방민족들과 피를 섞어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힌 족속으로 낙인찍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예수님께 있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정해놓은 신분이나 민족적 차별 등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이제는 그 구원이 온전히 베풀어지게 될 것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돌아온 ‘사마리아인의 감사’는 누구에게나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예수님께 대한 합당한 믿음의 행위로 해석됩니다.
특별히 사마리아 사람의 이러한 감사의 행위가 눈에 띄는 이유는, 치유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자기만족 속에 감사할 줄 모르며 살아가는 다른 아홉 명의 유다인 나병환자들과 대비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17-18)
그리고는 감사의 마음을 봉헌하러 온 사마리아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당연하게 내려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 생각도 없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감사의 마음’으로 당연한 그것을 ‘겸손되이’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면, 언젠가 당연한 그것을 자신이 받고 있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 때 너무나 쉽게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연함의 의미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되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사람은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또한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신 감사의 마음으로 그분과 함께 극복하려는 노력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을 지내며, 나는 과연 하느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자로서 다른 아홉 명처럼 그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돌아왔던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처럼 기쁨으로 감사의 마음을 다시금 그분께 봉헌해드리며 살아가고 있는지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합니다.
화랑 성당 주임신부 정태화(사도요한)
출처 : 군종주보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드리는 믿음은 사람을 구원한다” 연중 제28주일 강론 루카 17, 11-19 출처 : 서공석신부님블로그 교구 수호자 대축일과 묵주기도 쾌활한 금도
흔한 시쳇말로 ‘사람의 마음이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즉 화장실이 급하고 아쉬울 때 먼저 볼 일을 보는 사람이 늦게 나오면 야속한 생각이 들지만 정작 자신의 볼 일을 볼 때는 다음을 기다리는 사람의 처지를 까맣게 잊고 정작 자신은 여유있게 볼 일을 보는 경우입니다. 그리 긴 시간이 아니어도 입장이 바뀌면 마치 스프링처럼 자기중심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본성을 드러낸 표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환자 열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기 위해 길을 가는 동안에 나병이 깨끗이 낫습니다. 그들이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였는지 복음사가는 더 이상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열 명 가운데 사마리아 이방인 한 사람만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모두를 기다렸다는 듯이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처음에 나병환자들이 예수님께 자비를 요청했고, 그들의 요청을 하느님께서는 들어주셨지만 그들은 자신의 몸이 이미 깨끗해진 것을 확인하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각자 자기의 갈 길을 간 것입니다. 즉 ‘어떻게, 누구 때문에 자기가 나을 수 있었는가!’를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의 나병환자와는 대조적으로 오늘 제 1독서에서는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용맹하고 힘센 장수였지만 나병환자였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소녀의 말대로 자신의 나병을 고치기 위해서 이스라엘로 갑니다. 요르단 강에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 예언자의 말을 그의 심부름꾼을 통해서 듣지만 화를 내며 발길을 돌립니다. 그러나 그의 부하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엘리사의 말대로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자 그의 나병은 깨끗해집니다. 그 후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하며 엘리사에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합니다.
일상생활에서 크든 작든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았거나 은혜를 입었을 때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지향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특히 가족이나 동료, 이웃 가운데서 기도가 필요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기억합니다. 각자가 원하는 기도의 응답을 듣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기도의 응답은 다양합니다. 즉 우리 각자가 드린 기도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정반대의 결과를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느님께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실망하기 전에 아니 기도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기도를 통해 드려지는 청원이 우리 각자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청해야 합니다. 설사 기도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그 안에서 기도의 의미를 찾고 서로 위로해 주는 것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언제나 성실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다 베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의 첫 마디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김창신 아우구스티노신부(노동자·이주민 사목 전담)
출처 : 전주주보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寰)의 거리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소위 ‘ 문둥이 시인 ’이라고 불리던 한하운 시인의 ‘ 보리피리’입니다.
시인은 다시는 되돌아 갈 수 없는 고향과, 살 부대끼고 숨결 느끼며 함께 살아가는 인간 관계를 그리워하며 인간 사회에서 떨어져 나온 애끓는 마음을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 사람의 나병환자들은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 높여 애원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나병환자라고 하면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었으며 삶에 대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은 그들을 버렸다 하드라도 예수님만은 자신들을 받아주시고 자기들에게 따뜻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고 또한 그 혹독한 질병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유일한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능력에 대한 그들의 믿음은 그들을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의 몸을 보여라” 하시고는 그들을 인간 사회 공동체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돌려보내십求�.
하지만 변소에 갈 때의 마음이 다르고 갔다 와서의 마음이 다른 것이 얄팍한 인간의 마음이라는 말도 있듯이 예수님으로부터 자비를 입은 사람들 중에 겨우 한 사람만이 주님께 되돌아와서 하느님을 찬양하면서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육체적인 치료를 받은 것뿐만 아니라 감사를 드리는 믿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 즉 구원을 얻게 되었지만 다른 아홉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거룩한 자녀가 되었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성체성사를 통하여 날마다 사랑과 은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 열 명의 나병환자들보다 훨씬 더 풍성한 주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나병은 표면의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피부질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깊은 주님의 손닿음, 즉 보다 깊은 치유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닮았습니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세상의 일상적인 생활로 사라져 버린, 그래서 자기들의 입으로 고백한 작은 신앙마저 스스로 지켜가지 못하고 떨어져 나가는 아홉 사람입니까? 아니면 자신에게 닥쳐온 일이 은총이었음을 깨달은 한 사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와 흠숭을 드린 한 명의 사마리아 사람입니까?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드리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께 바치는 완전한 신앙의 고백입니다. 아멘
상평주임신부 /조정제 오딜론 신부
출처 : 마산주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나병환자 열 사람을 만난 이야기였습니다. 유개교의 율법은 나병환자가 사람들 가까이에 오는 것을 금합니다. 오늘 이야기에 등장하는 열 사람도 멀찍이 서서 예수님에게 외칩니다.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사제들에게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병이 치유된 사실을 확인하고 공민권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사제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제들에게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 중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이것이 오늘 복음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는 나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불행들 앞에서 인간은 늘 하느님 혹은 하늘이 준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병은 인류역사 안에 천형(天刑), 곧 하늘이 내려준 벌이라고 일컬어진 대표적 질병이었습니다. 한하운(韓何雲) 시인은 1920년에 태어나 중국과 일본에서 공부하고 함경남도 공무원으로도 재직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나병에 감염된 사실을 안후에 이런 시를 남겨 그것이 어떤 비극인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罰)이올시다./ 아무 법문(法文)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셨다, 혹은 나병을 깨끗하게 하셨다는 이야기는 복음서들 안에 많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이 어떤 놀라운 능력을 가진 분이었는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은 질병을 비롯한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병이나 나병을 낫게 하셨다는 복음서 이야기들은 하느님이 죄에 대한 벌로서 사람들에게 병을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벌을 주거나 저주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온 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벌주고 저주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님에게 돌아오지 않은 아홉 명은 배은망덕하였고, 돌아온 한 사람만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교훈은 이솝의 우화들 안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지 않고, 하느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치유된 사람들 중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은 성당 전례에서 신자들이 성가를 부르는 모습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드리는 행위는 그리스도 신앙인이 성체를 흠숭하는 모습과 같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베풂을 받은 열 사람이지만,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것을 배우려 나선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에게 돌아와서 하느님이 얼마나 은혜로운 분인지를 알아듣고 감사드리는 신앙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베푸셔서 우리가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삶, 우리의 가족,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는 감사할 일이 대단히 많습니다. 우리의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하여 우리와 가까운 분들, 모두가 하느님이 베푸신 결과입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고통스런 일들과 순간들도 있습니다. 오늘의 나병환자들과 같이 사람들로부터 버려지고 참담한 심경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살아야 하는 순간들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돈이 없어서, 계획했던 일이 실패해서, 좌절과 실망을 안고 실의에 차서 살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없으면, 그런 고통과 좌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만 확대해서 보는 시력의 소유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도, 우리를 미워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만 확대해서 봅니다. 우리는 우리 가까이에 있는 은혜로움을 외면하고, 멀리 있는 냉혹함만 알아보고 불행하게 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쁩니다. 더 많이 갖고, 더 건강하고, 더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바쁩니다. 대책도 세우고 계획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된 열 명의 나환자 중 아홉 명은 자기들이 치유되었다는 사실을 알자 바삐 가야 했습니다. 각자 원하던 바를 차지하고, 그것을 누리기 위해 바삐 가야만 했습니다. 이제 나병이라는 불행을 벗어났으니, 그들에게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기가 먼저 해야 할 일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이 베푸셨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큰소리로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을 배우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 안에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던 신앙인의 모습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며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은 살리시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그 절망에서 벗어나 사회에 복귀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병과 소외와 절망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고치고 살리시는 하느님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에게 와 엎드려서 그 하느님의 일을 배우는 사람은 적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그것을 배우는 사람이 올바른 신앙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인간을 소외시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은혜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섬기고 내어주고 쏟아서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고 오늘도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실천하여 구원으로 나가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즉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말을 우스개 말로 바꾸어 ‘하늘은 높고 마누라는 살찌는 계절’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는 교구 수호자 대축일(10월 7일)을 이동하여 기념합니다. 우리 신앙인이 생일, 축일, 결혼 기념일 등을 기념하는 것은 기념일 속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섭리를 생각해 보기 위함일 것입니다. 각각 다른 의미의 고유함을 지니고 있는 기념일을 통하여 은인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그때의 마음을 되새겨 보는 날입니다.
우리 부산교구는 1957년 '부산대목구'로 설정되었고, 1962년 정식 교구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67년 5월 부산교구 설정 10주년 기념 성체대회 중 작고하신 최재선 주교님께서 부산교구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하면서부터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교구 수호자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습니다.
최 주교님께서는 묵주(?珠)의 기도를 매괴신공(??神功)이라고 하시면서 “가톨릭 신자들의 신심 척도는, 천주님의 은총을 얻는데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 방법인, 매괴의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드리나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괴란 장미과의 낙엽 관목으로서 향기는 때찔레의 일종으로 주로 중국에 많이 있으며 이 말은 중국에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주로 성모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니 다른 종교인들은 성모님께 드리는 기도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기도는 ‘내’가 성모님과 함께 그리스도 예수님께 바치는 기도로 환희의 신비(예수님의 탄생), 고통의 신비(죽음), 부활의 신비(부활)및 빛의 신비(일생)는 마치 4복음서를 요약한 것 같아 누구든지 이 기도를 정성껏 하게 되면 예수님의 일생은 물론 4복음서 전체를 한번에 묵상하는 효과를 누리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효과 말고도 이 묵주기도를 신자들에게 권유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휘둘리게 만드는 ‘어둠’들을 없애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태이든지 ‘나’를 어둡게 할 때 마다 이 묵주기도를 하게 되면 효과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쉬운 기도를 하기도 하지만, 어둠이 생길때는 물론 걷거나 버스를 탈 때도 시작은 늘 묵주기도를 하게 됩니다. 묵주기도를 통하여 몸과 마음을 살찌우는 아름다운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용호성당 주임 배상복 이냐시오 신부
출처 : 부산주보
어느 주일에 미사 봉헌 부탁을 받고 성당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공교롭게 개신교 교회가 성당 옆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입구에서는 담임목사로 보이는 분이 주일예배에 참례하는 신자들을 일일이 맞이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그 목사님이 건네는 인사마디가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주일예배에 참석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뵈지만, 그때 속으로‘과연 나는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에게 그런 인사를 드린 적 있었던가? 아니, 과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었던가?’ 하며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란 참으로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로 그 특징들을 말할 수 있겠지만,‘ 감사하는 생활’이라는 대답만큼 가장 적절한 대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실로‘감사하는 생활’이야말로 우리들 신자들의 삶이며, 또한 그것은 우리의 보람이며 자랑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삶을 돌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성당에 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서도 천번 만번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외치던 사람들은 곧 그 자비를 망각해버립니다. 신자가 되어 살아간다는 자체가 하느님께서 주신 큰 은총이며 자비이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이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우리 주변의 가족 혹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하지만, 사실 우리가 감사에 너무 인색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느 저명한 국어학자가 쓰던 표현 중에‘쾌활한 금도(襟度)’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소에 남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넓은 도량을 뜻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잘 이룰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는 먼저 일상 속에서 타인에 대한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좁은 마음은 한순간의 그것밖에 볼 수 없어 곧 망각
해버립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우리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사람이기 위해서는 감사할 줄 아는 넓은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임석환 스테파노 신부/시노드 사무국장
출처 : 대구주보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지난주일 새로 부임한 본당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총이었다.’라는 고백처럼, 지난 본당에서 하느님과 교우들로부터 받은 많은 사랑에 ‘감사하다’는 말밖에 표현할 것이 없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새로 파견하신 공동체에서 앞으로 받을 많은 은총을 떠올릴 때, 다시 한 번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그동안 사제 생활을 하면서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면 늘 불평을 달고 살았습니다. 저를 위한 하느님의 뜻이 아닌 제 뜻에 얽매여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감사하게 바라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자비를 청하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자비를 입은 열 사람 중, 단 한 사람 만이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다른 아홉은 감사할 줄 모르고 제 갈 길을 가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유 받은 열 사람의 서로 다른 처신을 통해, 우리에게 ‘감사’하는 삶의 소중함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감사’는 단순히 예의를 차리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줄 알 때 廚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삶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린 한 사람과 다른 아홉 사람의 삶은 분명 그 결과가 달랐을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축복에 감사드리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받은 것에 감사 할 줄 모르고 늘 불평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루카17,17) 이번 한 주간 하느님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로 다짐해 봅시다.
이재화 안셀모 신부
출처 : 의정부교구
‘나를 구원할 믿음’
세상을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번 보고 말 사람, 계속 봐야 할 사람, 나를 행복하게 하거나 반대로 더 없이 힘들게 만드는 사람,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 내 옆에 있어서 고맙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저 마지못해 끊어내지 않고 근근이 이어가는 사람, 이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리 잡아서 사랑이든 상처든 주고받으며 삶을 이루어 가는 사람….
그중에 내게 있어 소중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나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 그래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행복할 때나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 사람은 그만큼 나와 친밀한 관계일 것입니다. 내게 생긴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그 존재만으로도 내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더더욱 소중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자식 간이든 형제자매 간이든 친구 간이든 어떤 관계이든 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소통이 되는 인격적인 신뢰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과 나는 어떤 관계일까요? ‘나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다’라고 말은 하지만, 진지하게 돌아봅시다. 나와 그분은 어떤 사이일까요?
오늘 1독서에서, 나아만은 깨끗해진 자신의 몸을 보고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2열왕 5,15)”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시라는 것� 다시금 알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복음에서 병이 나은 후에 돌아와 “이분이시구나! 나를 구원해주시는 분이 바로 이분이시구나!”라고 감사를 올린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은,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오히려 충실하신 하느님께 향한 신뢰로 굳어집니다. 이에 예수님의 응답이 따릅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나를 구원하는 것은 멀리 있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내려오셔서 내 손을 잡고 일으키시는 기적이기 이전에, 이미 나와 함께 하시며 행복과 고통을 모두 나누시길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다시 아는 믿음이라는 복음의 초대가 아닐까요? 나에게도 주님께로 향한 믿음, 신뢰하는 마음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바오로 사도가 확신하며 선포합니다. “이 말은 확실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하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2독서, 2티모2,11-12).” 끊임없이 주님과 함께 합시다. 성실하지 못한 우리도 언제나 성실하신 주님과 함께라면(2티모 2,13참조), 기쁨과 감사의 고백을 드릴 수 있습니다. 지지고 볶더라도 끝까지 주님과 같이 살기, 그것이 신뢰를 바탕으로 주님과 친해지는 비결일 것입니다.
상록수성당 보좌 김유곤(테오필로) 신부
출처 : 수원주보
용서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저희들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나병에 걸렸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이, 복음에서는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를 받고 병이 낫게 되는 내용을 보게 됩니다. 저는 나병환자가 등장하는 성경 말씀을 접할 때면 종종 어릴 적 심부름 때문에 가야했던 음성 나환자(한센인) 마을에 대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일곱 남매 아홉 식구의 대가족 살림을 꾸리셨던 어머니에게 한참 성장기인 저희들을 먹이시는 것이 늘 걱정이셨습니다. 빠듯한 살림으로 대가족 먹을거리를 마련하시자니, 늘 저렴한 것을 찾으셔야 했습니다. 덕분에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쯤인가 어머니께서는 저와 저의 바로 위의 형에게 부평삼거리 근처 양계마을에 가서 달걀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시곤 하셨습니다. 지금은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한 공장지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음성 한센인들이 경영하는 큰 양계장 단지였던 그곳까지 가야했던 달걀 심부름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그곳에 가려면 교통편이 없어 집에서 30분이 넘는 먼 길을 걸어야 하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사실은 그곳이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본 일이 없었으면서도 왠지 코도 없고 눈도 없는 사람을 만나면 어쩌나 하는 것이 두려웠을 뿐만 아니라, 한센인들이 어린아이들의 간을 빼먹는다고 하는 허황된 이야기를 어디선가 주워듣고는 그것이 무서워 달걀 심부름 가기가 무척이나 싫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만이 아니라 성경 곳곳에는 나병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나병의 대부분은, 오늘날 이야기 하는 한센병이 아니라 당시의 청결하지 못한 환경과 영양부족에 의한 피부병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당시에 유대사회에서는 다른 종류의 질병들과 함께 나병은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병환자들은 위생적인 이유로서가 아닌, 나쁜 죄를 지은 아주 불결한 죄인 취급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병으로 인해 몸이 아프고 불편한 것도 힘든데, 거기에 사회적이고 종교적인 차별까지 받아야 했으니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병에 걸리거나 혹은 장애를 겪고 있는 분들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차별을 생각해본다면 그리 다르지 않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 의료보험 제도에 대해서 경제논리와 경쟁논리로만 다가가려는 요즘 사회의 움직임을 생각해보아도, 우리의 인식이 어렵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얼마나 무관심하고 차별적인가를 고백하게 됩니다.
병에 걸리고 몸이 불편한 것이 하느님께 벌을 받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벌을 주는 것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김재욱 사도요한 신부 / 주안1동 본당 주임
출처 : 인천주보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 세상에서의 자비는 누구나 받을 수 있으나 ‘구원’은 아주 작은 차이를 깨닫고 실천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자신들의 병을 낳게 해주십사 청을 드립니다. 그들의 간절한 청을 예수님께서는 들어주십니다. 그들은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병이 다 낳게 되었음을 알게 되고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인으로 살아가며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가 바로 이 나병환자들과 같은 기도가 아닐까요? 우리는 항상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살아갑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를 깨달을 때면 우리는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은 참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나병환자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들에게도 항상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당신에게 청하는 가련한 이들의 기도를 주님께서는 물리치지 못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을 살아갑니다. 항상 부족하지만, 항상 죄인이지만 주님의 자비가 있기에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 명의 환자 중에 단 한 명만이 다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지만 자신을 치유해주신 예수님께 땅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분명 열 사람이었건만 예수님을 찾아온 이는 그렇게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분명 나머지 아홉 사람은 치유된 자신의 몸을 자랑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또 치유된 건강한 몸으로 자신의 생을 기쁘게 살아가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거기에서 끝났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의 선물을 더 받았습니다. 바로 ‘구원’이라고 하는 선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바람인 구원을 그는 얻은 것입니다. 건강한 몸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하느님 나라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단 하나를 더 했을 뿐입니다. 바로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 것이지요. 아주 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이 쉬운 일이, 이 당연한 일이 구원을 주었습니다. ‘구원’은 이렇게 작은 차이에서 옵니다. 이 세상에서의 자비는 누구나 받을 수 있으나 ‘구원’은 아주 작은 차이를 깨닫고 실천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이에게 주어집니다.
감사하며 살아가고 계신가요? 항상 더 많은 것을 주십사 청하고만 계시는 것은 아닌가요? 주님이 안타까운 눈으로 말씀하십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여러분을 찾고 계시는 주님께 나아가 감사기도 드리시기 바랍니다.
장성준 안셀모 신부 거진본당 주임
출처 : 춘천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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