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영양의 개요
영양군은 영산인 일월산의 정기를 받아 예로부터 충의열사와 문인들이 배출된 유서깊은 선비의 고장이며 천혜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유한 청정지역으로 여름철에는 피서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문화재는 국보 제187호인 봉감모전5층석탑을 비롯하여, 보물, 천연기념물, 민속자료, 유무형문화재 등을 많이 보유하고 있고, 특산물로는 고추, 사과, 담배, 더덕, 천궁, 천마, 어수리와 곰취나물 등이 유명한데, 특히 영양고추는 산간고랭지 기후와 토양의 특성으로 매운맛과 단맛이 잘 어우러져 전국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영양고추는 일교차가 큰 산간지역에서 재배하여 매우면서도 달콤한 맛과 향이 뛰어나며, 특히 심한 일교차 때문에 과피가 두꺼워 고춧가루가 많이 나는 것이 자랑이다.
2)영양위치
경상북도 동북부 태백산맥의 내륙지역에 위치하여 동쪽은 울진군과 영덕군, 서쪽은 안동시, 남쪽은 청송군, 북쪽은 봉화군 등 5개 시군과 경계하고 있음.
- 동경 : 128도 59' ~ 129도 19'
- 북위 : 36도 29' ~ 36도 52'
3)지형/지세
태백산맥이 동남방향으로 뻗어 많은 대소계곡을 형성하여 북고남저의 산간분지상의 지역을 이루고 있으며 전반적인 해발고도가 경북에서 가장 높음.
* 영양고추 수비초를 아십니까?
수비초는 당초 1960년대부터 영양군 수비면 일대에서 재배되던 품종으로 맵고 달착지근한 맛이 나며 고춧가루의 품질이 다른 품종보다 뛰어나 전국 제일의 고추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수확량이 적은 데다 병해충에 약한 문제점이 있어 농민들이 갈수록 재배를 기피하면서 일반 종묘업체에서 파는 다수확 품종과 섞여 교잡종으로 바뀌는 바람에 1990년대 이후 사라졌다. 영양고추시험장과 영양군은 가격이 국내산의 4분의 1에 불과한 중국산 고추가 대량 수입되면서 지역 특산품인 고추의 입지가 흔들리자 고품질 고추를 개발하기 위해 1997년 수비초 복원에 나섰다. 이문중 연구사 등이 중심이 돼 전국에서 유전자원을 수집하고 각종 문헌과 예전에 수비초를 재배했던 농민 등의 고증 절차를 밟아 장기간의 시험재배와 혈통보존작업을 거친 끝에 지난해에야 품종 형질을 고정시켰다는 것. 수비초는 올해 1월 국립종자관리소로부터 품종보호 출원을 획득했다. 영양고추시험장 권태룡(權泰龍․41) 연구담당은 ꡒ수비초는 ꡐ매콤하다ꡑ, ꡐ감칠맛난다ꡑ 등의 평가를 받은 고추의 대명사였다ꡓ며 ꡒ수비초가 복원돼 ꡐ영양고추ꡑ의 명맥을 확실하게 잇게 됐다ꡓ고 말했다.이 연구사는 ꡒ수비초의 모양과 맛 등을 유지한 채 역병과 탄저병 등에 강한 품종으로 만들기 위해 앞으로 3~4년 동안 재교배작업을 해야 한다ꡓ며 ꡒ이 작업이 완료되면 농가에 수비초를 본격 보급할 수 있을 것ꡓ이라고 말했다.
2. 일월산개요
일월산(1,218m)은 산세가 공중에 우뚝 솟아 웅장하고 거대하며, 산정은 평평하고 급하지 않으며 동쪽으로 동해가 바라보이고 해와 달이 솟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 하여 일월산이라고 부른다. 꼭대기에는 일자봉, 월자봉의 두 봉우리가 솟아 있고 천축사라는 사찰터와 산령각, 황씨부인당, 용화사, 천화사 등이 있다. 특히 일월산은 태백산의 가랭이에 위치, 음기가 강한 여산으로 알려져 그믐날만 되면 전국 각지의 무속인들이 이 산을 찾아 영험함과 신통함이 더한 내림굿을 한다. 그렇게 하면 점괘가 신통해진다 하여 무속인들로부터 성산으로 추앙받는 곳 이기도 하다. 그리고 심산유곡에 자생하는 일월산 산나물(고사리, 참나물, 금죽, 나물취 등)은 향과 맛이 좋다.
등산코스 : 1) 일월면 용화리 -> 삼거리 -> 산마루(3km, 2:00)
2) 청기면 당리 -> 천화사 -> 산마루(8km, 2:00)
3.선바위와 남이포
경북 영양군의 지붕인 일월산(日月山:1,219m) 동쪽 기슭에서 흘러온 반변천이 영양읍의 남쪽 입암면 연당리에 닿으면 청계 천과 만나서 모양을 바꾼다.
반변천은 깎아세운 듯한 절벽을 끼고 돌아 흘러 오고, 청계천 역시 반대쪽 석벽을 흘러오다 반변천과 합류한다. 이처럼 유유히 흐르던 두 개천이 절벽 아래에서 만나 큰 강을 이루는데 ,이곳의 강변을 남이포라 부른다. 그리고 이 기암절벽과 강을 사이에 두고 절해고도에서 뽑아온 바위를 푹꽂아 놓은 듯한 선바위가 있다.
선바위는 언 듯 보기에는 거대한 촛대를 세위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이곳 남이포와 선바위 주변에는 깨끗한 조약돌과 부드러운 모래가 깔려있는 넓은 백사장이 있어 여름철에는 피서지로서 다른계절에는 산책로로서 좋다. 또 푸른 강물속에서 어른거리는 남이포와 선바위의 풍경은 늘 그려왔던 평화롭고 따뜻한 시골 강변 모습 그 대로이다. 또한 요즘 선바위 지구개발을 하기위하여 주위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각종 부대시설과 농산물직판장 이 자리를 잡고서 관광객들의 구미를 당기기도 한다. 이처럼 아름다운 남이포에는 그에 어울리는 전설이 남아 있어 더욱 감칠맛이 나게 한다. 옛날 신사리에 있는 운룡저수지에 용이 살았는데 아룡과 자룡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아룡과 자룡은 지혜와 용맹이 뛰어나고 인간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묘수를 가졌다.
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아룡과 자룡 이 역모를 도모하자 대적할 장수가 아무도 없었다 급기야 조정에서는 젊고 지략이 뛰어난 남의 장군을 토벌대장으로 파견하여 남의장군의 군사와 적 군인 아룡 ,자룡 형제의 무리가 드디어 남이포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먼저 양군 의 대장인 남이장군과 아룡,자룡 형제가 맡붙어 칼싸움을 벌였다.하늘로 솟구쳐 날며 격렬한 칼싸움을 벌인후 아룡과 자룡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하늘에서 종횡무진 벌어진 싸움에서승리를 거둔 남이장군이 높이 솟은 석벽에 자신의 얼굴을 칼끝으로 새기면서 땅 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곳을 남이포라 불리게 되었고한다. 당시 남이 장군이 천계천의 물길을 돌리지 않으면 또 역적의 무리가 나올 것이라며 칼로 산을 잘라 물줄기를 돌렸다고 하며,그 때 마지막으로 칼질한 바위가 선바위 라고 한다.
4. 서석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연당동에 위치하고 있는 서석지는 선비 정영방(鄭榮邦 : 1577~1650)이 은거하던 곳이다. 이 서석지는 그가 36세 되던 해인 1613년에 조성되었다.
서석지는 뒤에 자양산(紫陽山)을 등지고 완만한 남쪽 기슭에 터잡고 있다. 연못(서석지)을 중심으로 경정(敬亭) 주일재(主一齋) 수직사 남문과 담장(높이 1.5m)이 주위를 아늑히 에워싸고 있는 향원(鄕園)인데 주위 산천이 맑고 수려하여 아름다운 경관을 갖추고 있다. 연못의 호안은 막돌로 싼 석축이며 북변에는 못속으로 돌출한 작은 방형석단을 내쌓아 단(壇)을조성하여 송, 죽, 매, 국을 심어 사우단(四友壇)이라고 했다. 사우단의 뒷편에 3칸 홑처마 맛배집을 지어 주일재(8평)라 하였는데 2칸이 온돌방이고 1칸은 마루이다. 이 주일재에는 운루현(雲樓軒)이란 현판이 걸리어 있다. 서편 못가에 4칸 대청과 2칸 온돌방이 있는 경정(14평)을 지었고, 경정 뒷편에 수직사와 관리사를 지어 생활하는데 불편이 없게 하였다.
서석지는 凹형(가로 13.4m, 세로 11.2m, 깊이 1.6m)의 연못 모양을 하고 있는데 연못 동북쪽 귀퉁이에 산에서 끌어들이는 수입(水入)도랑을 읍청거(揖淸渠)라 했고, 그 마주보는 서남 귀퉁이에 물이 흘러나가게 무너미 돌랑을 만들고 토예구(吐濊口)라 하였다. 이 연못을 서석지라 한 것은 연못바닥에 튀어오른 서석군(瑞石群)에서 유래한 것이다. 서석군은 주로 동북편에 많고 수면에 기괴한 현상을 드러내거나 물속에 얕게 잠기어 있어 특이한 현상에 따라 이름지어져 희귀한 수경(水景)을 이루고 있다. 서석군의 돌빛은 흰편이어서 수중석이라도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서석군이 집중되어 있는 동편 못둑을 영귀제라 부른다.
서석(瑞石)들의 이름은 19종에 이르는데 서편 경정 밑의 역석(列石)들을 옥성대(玉成臺), 그 북쪽의 세 돌을 상경석, 그 동쪽 돌을 편수중에 집중되어 있는 서석들은 수륜석, 어상성, 관란석, 화예석, 상운석, 봉운석, 난가암, 통진교, 분수석, 와룡암, 탁영석, 기평석, 선유석, 쇄설강, 희접암 등이다. 수륜석이란 낚싯줄을 드리우는 돌, 어상석은 물고기 모양의 돌, 봉운서근 구름봉우리 같은 돌, 선유석은 춤추고 노는 돌, 쇄설강은 눈같이 깨끗한 돌, 탁영석은 세속을 초월한 돌이란 뜻으로 서석의 이름들은 모두 상징적 현상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연못 옆 향단(香壇)에는 4백여년 된 은행나무가 서 있다. 연못 바닥을 평면으로 처리하지 않고 음영의 입체감을 조성하면서 고고한 사염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담았다. 현재 서석지는 중요민속자료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5. 연당동 석불좌상
입암면 연당1리 마을길 건너편의 전각에 석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석불좌상은 그다지 크지는 않으나 몸체와 광배,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왼손에는 둥근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인 이 불상 뒷면에는 "市元年己酉八月佛成之/ 所屯沙干卽中成之/ 金獻長戌像師"라고 새겨져 있어 신라 진성왕3년(889)에 조성된 석불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이 일부 떨어져나가 그 표정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몸체와 광배, 대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옷주름은 형식적이며 본래 돌이 작았는지 옆에서 보면 기이한 형태이다. 그러나 8각 대좌는 균형잡혀 있으며 세 조각으로 깨진 광배의 무늬는 화려하고 섬세하다. 전체 높이는 2.23m이며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1호이다.
불상 왼쪽 아래에는 나무 곽 안에 자그마한 남근 입석을 세웠고, 새끼줄을 감아 모시고 있으며 전각 둘레에도 새끼줄을 쳐놓았다. 마을 사람들은 남근석과 불상에 풍요와 안녕을 기원한다.
6. 봉감모전오층석탑 (국보187호)
이곳 영양의 길들은, 길은 강을 따라 나는 것이 제격임을 잘 보여준다. 반변천과 그 지류들을 따라나 있는 길을 가다보면, 굽이굽이 산자락이 앞을 가로막기도 하고 강물이 발 아래 출렁거리기도 하면서 강 따라가는 길맛을 제대로 보여준다. 입암면 산해리 봉감동에 있는 봉감모전오 층석탑을 찾아가는 길도, 반변천의 지류인 동산천과 만났다 헤어지곤하 면서 지루함이 무엇인지 모르게 하는 길이다. 봉감마을에 들어서 강가를 향해 가다보면 멀리에서도 우뚝선 자태가 몹시도 늠름한 오층탑을 볼 수 있다. 이 탑이 있는 마을이름이 '봉감 (鳳甘)"이어서 탑 이름이 봉감모전탑이 됐다. 지금은 밭이 된 평평한 이 터전은, 이처럼 장대한 탑을 가진 절이 들어설 만큼 넉넉한 터는 아니다. 그러나 멀리 병풍처럼 두른 산세며, 봉감탑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만 가면 만나게 되는 태극처럼 휘어진 동산천 줄기가 만드는 풍광은, 왜 이런 산 깊은 곳에 이토록 공들여 탑을 쌓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이 봉감오층석탑은 돌을 벽돌처럼 잘라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터를 고른 위에 흙과 돌을 혼용하여 지표면을 정리했고 그 위에 제 법 큰 자연석을 여럿 이용하여 기단부를만들었다. 그 가운데에 모전 석 재로 1층 몸돌 받침을 두단쌓고 그 위에 5층을 올렸는데 상륜부가 없는 상태에서도 전체 높이는 11m에 이른다.
탑신은 벽돌모양으로 가공한 수성암으로 쌓았는데, 돌을 두툼하게 잘라 다듬었지만 크기는 그다지 고르지 않은 편이다. 또 모퉁이가 군데군데 깨져나간걸 보면 단단한 석질은 아닌 듯하다. 1층 탑신은 18단을 쌓아 올렸는데 높이는 2.3m 너비 3.26m이다. 남쪽으로 감실이 나 있 는데 높이 1m 폭 1m 깊이 1.06m이며, 화강암으로 섬세하게 다듬은 문기등과 이맛돌로 짠 문틀로 공을 들였다. 그위에 "天王門" "四大菩薩家" 라고쓴 것은 후대의 일일 것이다. 옛날에는 문을 달고 그 안에 부처를 모셔놓았던 듯하다. 지붕 부분은 13단으로 되어 있고 1층 전체 높이는 2.35m이다. 가장 많이 튀어나온 모서리돌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데, 옛날에 풍탁 등을 달았던 구멍으로 여겨진다.
2층 이상은 층마다 중간 부분에 턱을 두었는데, 그 아래쪽은 비교적 큰 돌 로 자유롭게 쌓고 위쪽은 모전 석재로 차곡차곡 쌓아, 턱 아래 위를 서로 다르게 쌓은 방식이 특별하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탑들 가운데 특히 충청도지 역을 중심으로 굄돌처럼 몸돌 아래쪽에 좀 튀어나온 별석을 한 층씩 끼우는 보기가 있는데 그런 것의 변형일지도 모르겠다.
지붕 부분은 1층의 받침 수가 8단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한 단씩 줄고 처마 너비도 점점 좁아지는데 고른 체감률로 균형 잡혀 보인다. 또 각층이 아래쪽 은 넓은 반면 위쪽은 좁아져서 몸체 자체에서도 체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처럼 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기에 국보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 하 대나 고려 초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런 좋은 보기가 있어서인 지 영양의 현2동에도 제법 허우대가 좋은 모전석탑이 세워져 있다.
쌓은 석재 사이의 줄눈에는 회를 발랐었던 듯한데 빗물에 녹아 군데군데 흰 물기가 흘러내리고 있다. 1990년에 해체 수리할 때에 주변에서 상륜부 목심 주초석"을 찾아냈고 탑 안에서도 사리구를 보관하던 석함 일부를 발견하였다. 아마도 과거 어느땐가 해체 또는 붕괴되어 수리를 했던 모양인데, 그때 안에 있던 사리를 다른 곳으로 옮기고 깨진 사리구 석함을 탑 안을 채우는 돌로 이용했던 듯하다.
중국에서 탑형식이 전파되면서 목탑과 전탑이 함께 전해졌다. 목함은 목조건 축으로서 별다를 바 없이 지어졌으나 전탑은 다소 변형되었다. 본디 벽돌을 구워 건물을 짓는 데 능하지 않던 우리로서는 흙을 다져 틀에서 찍어낸 벽돌 을 굽기 보다는 돌을 돌 모양으로 잘라쌓는 방법을 택했으니 그 첫 보기가 634년에 세운 경주의 분황사 석탑이다.
모전석탑의 형식은 크게 두가지로 대별되는데, 하나는 분황사탑이나 봉감오층탑처럼 돌을 벽돌모양의 일정한 크기로 잘라 쌓은 것이다. 비교적 자르기가 좋은 석재인 안산암이나 수성암등이 주요 재료이다. 다른 하나는 전형적인 석탑을 쌓듯이 돌을 매우 크게 잘라 쌓되 몸돌 모서리에 우주를 새기지 않고 지봉돌 낙수면도 전탑처럼 층급을 둔 형식의 전형적인 석탑에 좀더 가까우며 쓰인 돌도 대개 화강암이다. 의성의 탑리 오층석탑이나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이 그러하다.
7세기 중엽에 세워진 분황사석탑과 의성 탑리오층석탑 이래 모전석탑은 통일 신라시대와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여럿 세워졌는데 , 경상북도에 많이 남아 있는 편이고 강원도 정선, 충청북도 제천 등 백두대간을 갓넘은 곳에 몇몇 이 있으며, 예외적으로 멀리 전라남도 강진 월출산자락인 월남사터에 한 기 가 있다.
○ 모전석탑이란? ○
모전석탑은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아닌 것이" 라고 할 때의 대나무와 같다. 말그대로 벽돌을 닮은[模塼] 모양으로 돌을 잘라 쌓은 석탑이다. 그러므로 쌓은 재료는 돌이되 생김새는 벽돌로 쌓은 전탑을 닳았다. 석탑과 전탑.모전 석탑이 형식적으로 크게 구분되는 것은 지붕돌의 낙수면 모습이다. 석탑은 처마선이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모습이지만 전탑이나 모전석탑은 층층이 쌓았기 때문에 계단처럼 층급을 이룬다.
모전석탑은 우리나라 문화가 만들어 낸 특이한 것이다. 불교가 도입되고 불교 문화가 자리잡는 가운데 한국적인 문화형태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탑은 본래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부터 만들어졌고 불교가 점점 동쪽으로 전파되면서 거치는 나라들에 따라그 나라의 고유한 건축형식과 결합하여 나라마다 독특한 형식을 이루어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석탑이 바로 그것인데, 모전석탑은 석탑으로 정립되는 가운데 만들어진 과도적인 형식이다.
7. 학초정
규모 : 정면3칸,측면2칸,팔작기와지붕
정 침 : 정면9칸, 배면5칸, 측면6칸
대문채 : 정면4칸 측면단칸,박공기,지붕
1985년 12월 30일 경상북도민속자료 제64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효종 때 삼수당(三秀堂) 조규가 지은 정자와 살림집으로 당시 정자를 삼수당이라 하였으나 소유주가 바뀌면서 학초정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박종만이 소유․관리하고 있으며, 삼수당은 잔디가 빛이 나서 일년에 3번씩 아름답다는 뜻이다.
앞에는 반변천(半邊川)이 흐르고 뒤에는 갓등산이 둘러싸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정자가 있고 안쪽에 살림집이 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2칸의 온돌방과 4칸의 대청마루가 있다.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으로 대청 뒤쪽과 왼쪽 판자벽 사이에 설치한 2짝의 울거미 널문은 가는 중간설주가 세워져 오래 전에 사용한 수법을 보였다. 살림집은 ㅁ자집 형태의 앞면이 양측으로 돌출한 형태로 영남 내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이다.
8.측백수림 (천연기념물 제114호)
측백나무는 중국 및 우리나라에 분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단양, 달성, 영양, 안동 등지에서 자라고 있다. 절벽 암석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는 경우가 많으며, 주변환경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주택과 마을 주변에 많이 심는 나무이다.
영양의 측백나무 자생지는 영양읍내에서 가까운 반변천(半邊川)의 건너편 절벽에 위치하고 있으며, 숲 내의 측백나무 높이는 3~5m로 그리 높지 않으며 지름은 보통 10㎝ 정도이다. 주변에는 희귀종인 모감주나무와 털댕강나무가 같이 자라고 있다.
영양의 측백나무 자생지는 우리나라의 측백나무 자생지가 그리 많지 않으며, 측백나무가 중국이 원산지이고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도입되어 들어왔다는 학설을 부인하는 중요한 학술적 증거가 되기 때문에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9. 현일동삼층석탑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현일동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화강 석탑. 1977년 8월 22일 보물 제610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27m, 기단폭 2.13m이다.
논 가운데에 있는 자그마한 삼층석탑은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석탑 가까이에 가서 사방을 둘러보면 주변의 논밭이 탁트여 있어, 영양에도 이처럼 넓고 평평한 공간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석탑은 밭 가운데에 있으며 주변에 신라․고려의 와편(瓦片)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층 기단(基壇) 위에 층을 올린 중형의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으로, 3층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탑의 맨 꼭대기 지붕 바로 위에 놓여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만이 남아 있다. 상층 기단 면석에 우주(隅柱:귀기둥)와 탱주(撑柱)가 있고 팔부신중(八部神衆)이 조각되어 있다. 상층 기단의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으며, 하면에는 부연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이 별개로 되어 있는데 우주가 조각되어 있다. 하층 기단에는 한 면을 3구(區)로 나누어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되어 있다.
10.현일동 당간지주
석탑과 100m쯤 떨어진 곳에 한쪽만 남은 당간지주가 서 있어서, 절의 공간 영역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높이가 3m쯤되는 이 당간지주는 생김새는 투박하지만 듬직하게 생겼 는데, 바깥쪽에 두 줄을 새겨 간단한 장식을 했다. 지주 아래쪽에는 양지주 사이에 간대를 세을 때 꽂도록 자리를 만들어 놓은 간공도 있다. 당간지주 둘레는 돌로 축대를 쌓듯이 마감을 해놓았으니, 밭을 만들기 전에 원래 땅높이가 그 정도였을 것이다.
11.현이동 모전오층석탑
현1동 삼층석탑에서 개울 건너편을 보면,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받이에 제법 규모가 크고 튼튼한 모전석탑 한 채가 이 삼층석탑을 마주하고 있다. 다가갈수록 장대한 이 탑의 높이는 7m인데, 평지보다 좀 높는 구릉에 자리해서 그런지 우선 규모에 압도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호인 이 탑은 커다란 암반 위에 서 있다. 높이 3.2 m의 바위를 기단으로 삼았고, 다시 한변의 너비 2.9m 높이 3cm 의 낮은 받침 을 만들고 그 위에 벽돌 모양으로 자른 검붉은 점판암으로 5층을 쌓았다. 너비 7.5m 높이 80cm 되는 석축기단은 1980년에 해체,복원할 때에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지대석 네 귀퉁이에 하나씩 뚫려 있는 구멍은 무엇을 꽂았던 곳인지 알 수 없다.
지대석 위에 올린 1층 탑신은2m 높이에 12단으로 짜여져 있다. 동면으로 감 실을 냈는데 한 변이 62cm 되는 네모난 방이다. 나무문을 단 문틀은 돌로 문설주와 인방을 짜넣었는데, 문설주 돌에는 뜻밖에 섬세하고 화려한 당초문 이 새겨져 있어 이 탑에 들인 공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위와 아래의 인방은 새로 갈아끼운 듯 돌빛이 희어서 다소 어색하다. 나무문을 열면 근래의 것인 듯하지만 불상 한구를 모셔두어 감실이 본래 부처를 모시던 곳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탑의 비례는 매우 엄정하여 알맞은 상승감과 비례를 보여준다. 몸돌이 올라 간 높이 비례는 1층 몸들이 12단인 데 견주어 2층부터는 7단으로 줄었고 3층 은 6단, 4층과 5층은 모두 5단씩이다. 5층에서서 다시 한 단이 줄지 않은 것은, 멀수록 작아보이므로 4층보다 5층을 실제로도 작게하면 시각적으로는 너무 작아 보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주가 있으 나 새로 만들어 얹은 듯한 화강암의 빛깔이 몸체와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이 모전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할 때에, 점판암 돌을 쌓아올리면서 돌 사이사이에 흙으로 보강한 것이 점차 빠져나와 깔끔한 인상은 사라져버린 듯하다.
또 군데군데 강자갈도 섞인 모습인데, 해체, 복할 때에 뭔가 어설프게 한 것 이 아닌가 싶다 보수 당시 탑 안에서 사리구가 나왔다고 한다.
탑 뒤쪽에는 근래에 세워진 듯 대웅전 건물이 있고 돌담 너머에 요사채도 있 다. 그런데 대웅전 아래쪽을 잘보면 기단 양편으로 계단 양쪽을 지탱하던 소 맷돌이 묻혀 있으니, 본래 이곳에 있던 절의 건축부재를 그런 식으로 심어놓 은 것이다. 세월 탓이겠지만 제대로 된 모습이 아니어서 좀 아쉽다.
12. 화천동3층석탑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화천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1977년 8월 22일 보물 제609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59m, 재료는 화강석이다.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식의 탑으로, 통일신라시대 3층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1974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나, 기단부가 파괴되었고, 상륜부도 결실되었다. 현일동 삼층석탑(보물 610)과 같이 기단부와 탑신석에 장엄한 조각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9개의 돌로 된 하층 기단부는 3개의 돌로 된 면석과 우주(隅柱:귀기둥)와 탱주(撑柱)가 있고, 또한 안상(眼象)을 음각하였으며 그 안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상층 기단부에도 우주와 탱주를 모각하여 구역을 만들었으며, 팔부신중(八部神衆)을 조각하였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이 각각 별개석으로 되었으며, 여기에 우주가 있다. 1층 옥신 각면에는 악귀를 밟고 서 있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자세를 생령좌(生靈座)라고 한다. 1981년 탑 부근에서 부도비로 추정되는 비석 조각이 발견된 적이 있다.
조성시기는 탑의 조각양식이나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3. 수하계곡
수하 계곡은 태백산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일월산이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는 불영계곡, 동쪽으로 백암온천이 위치하고 있다.
이 계곡은 울진 왕피천의 원류로 아직은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호젓한 계곡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울창한 수림 속으로 곳곳에 계곡이 빚어 놓은 이름 없는 폭포와 웅덩이들이 이어지고, 주변의 울창한 숲과 기이한 바위들의 자연 경관이 있어 운치를 더해준다. 계곡 안쪽으로는 수하리 송방 자연휴양림이 있어 각종 시설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14. 용화제련소
영양, 폐광부지가 야생화 공원으로 [경향신문 2004-07-15 기사]
수십년 동안 각종 중금속으로 오염된 채 방치돼 있던 폐광산 일대가 야생화 공원으로 변했다. 경북 영양군은 15일 일월산 자락인 일월면 용화2리 옛 일월광산 일대 5,475평을 ꡐ일월산 자생화 공원ꡑ으로 조성, 16일 개장한다고 밝혔다. 이 곳은 1920년대부터 금․동․아연 등을 캐던 광산과 제련소가 있던 곳으로 1960년대 초 폐광된 뒤 지금까지 방치돼 왔다. 영양군은 2001년부터 국비 33억여원 등 38억여원을 들여 오염된 땅을 매립하고 일월산 야생화 등을 옮겨 심어 자생식물 공원으로 조성했다.
이 공원에는 주변에 자생하던 금낭화․구절초․벌개미취․원추리 등 야생화 62종 10만9천여 포기와 하늘말나리 등 점차 사라져가는 희귀 야생화가 심어져 있다.
또 느티나무와 화살나무 등 조경수 1만1천여그루와 꽃창포․붓꽃 등의 습지식물 관찰단지, 인공 연못, 수로 등이 어우러져 있다. 이 고장 출신인 조지훈 시인의 ꡐ승무ꡑ 시비도 세워져 있다.
영양군 김영묵 산지개발담당은 ꡒ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정도로 오염된 땅이 전국 최대 규모의 자생식물 공원으로 탈바꿈했다ꡓ며 ꡒ향토 자원인 자생식물 보존 및 생태관찰 학습장으로서 뿐 아니라 인근 수비면 반딧불이생태공원과 연계한 관광 명소가 될 것ꡓ이라고 말했다.
봉화군에서 봉화터널과 영양터널을 거쳐 일월산 북쪽 자락을 내리닫다보면, 일월산 자생화공원을 만나게 된다. 계절별로 일월산에서 피는 자생화를 이식해놓았는데, 원래 이곳은 제련소였다. 일월산 용화광산은 1939년에 일제 식민 수탈기 때에 문을 열었다. 금은동 아연이 생산되던 곳으로 70년대까지 운영되어오다가, 1994년 법적인 수명까지 다 하게 되었다. 용화광산에서 캐낸 광물을 이곳 자생화공원 터에서 제련을 하였는데, 현재에도 제련소 잔해가 남아있다. 그 잔해를 활용하여 자생화 꽃밭과 전망대와 산책로를 조성했다. 지나는 길에 잠깐 쉬어갈 만한 곳이다.
용화광산은 일제 때인 1939년부터 광산개발이 시작돼 1976년 폐광 때까지 금.은.동.아연 등을 채광해 왔다. 공원에는 ꡐ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ꡑ로 시작되는 영양 출신 시인 조지훈의 ꡐ승무(僧舞)ꡑ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또 전망대와 정자 등을 설치, 관광객들이 공원의 야생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일월산 자생화공원은 국내 자생식물공원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15. 주실마을
마을 입구 어귀의 주실숲에 지훈 조동탁 시비와 그의 형 조동진 시비가 서 있었다.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빛을 찾아가는 길 중에서)는 시비에 새겨진 구절처럼 짧은 생애를 치열하게 고뇌했던 조동진 시인의 민족의식이 그대로 전해 오는 듯하다. 마
주실마을은 일월산 일자봉 자락의 지맥이 끝을 맺으면서 곳곳에 명당 터를 만들고 문필봉과 연적봉을 비롯한 삼봉(三峰)이 앞 다퉈 달려오는 듯한 형상을 하면서 수 없는 인재들을 배출한 곳이다. 영양과 봉화를 잇는 지방도를 끼고 일월산 자락에 넓게 형성된 이 마을은 영양지역의 대표적 전통마을이다. 이 마을은 여러 가지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다. 온 마을이 기와집들로 이뤄져 있고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마을 구성원 모두가 일가친척인 점이 우선 여느 마을과 다르다. 그리고 전통마을이면서 일찍부터 양력설을 쇠는 문화가 특히 남다르다. 대개 우리나라의 전통마을에서는 정부의 정책추진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음력설을 쇠고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주실마을은 80년전부터 일찌감치 양력설을 쇠고 있다. 신문물을 일찍 받아들인 이 마을은 인재양성을 위해 월록서당을 지었던 선조들의 교육열을 이어받아, 근대에 와서는 자식들을 대도시나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 신교육을 배우도록 했다. 이렇게 멀리 떠나간 자식들이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시기에 맞춰 명절을 지내자니 양력설이 적합하여 양력설을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는 「주실마을 민속놀이」가 열리기도 한다. 60․70대 어른들이 어릴 적 놀아왔던 전통놀이를 재현해 마련한 놀이이다. 도구를 새로 만들어 재현하는 놀이는 한국전쟁 후 명맥이 끊어졌던 팔목놀이와 화가투 놀이, 주사위놀이, 내방가사 옮기 등이다, 화가투(花歌鬪)놀이는 가투라고 불리던 옛 시조놀이로 카드에다 각 시조의 초, 중, 종장을 따로 써 놓은 다음 한 사람이 초장을 부르면 다른 사람들은 나머지 카드에서 중, 종장을 찾는 게임이다. 게임도 하면서 시조에 대한 지식을 넓히는 놀이다.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 병참공파 후손들이 모여 살아가는 집성촌락이다. 1929년(조선조 인조 7년) 호은공 조전(趙佺)선생이 입향하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지금은 100여 세대가 살아가고 있다. 주씨(朱氏)들이 살았던 이곳에 조전선생이 입향한 이후 마을 이름은 매한(梅寒)이라 불리었다. 이후 1700년대 매계(梅溪)와 매곡(梅谷)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고칠 때 주곡(注谷)으로 바꾸었다. 특히 호은공의 17세 호봉, 옥천형제와 임호, 임악형제 등 사종반이 1677년때부터 매년 과거에 급제하면서 마을의 만년대기를 닦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이후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까지 265년간 이 마을에는 63명의 선비들이 수많은 문집과 글을 남겨 벼슬길 이상의 영광을 누리면서 문향의 반석을 다졌다. 이 때문에 이 마을에는 대대로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조선후기 실학자인 정약용과 이가환, 채제공 등과 교류하면서 개혁을 실천, 관례와 혼례를 통합하는 등 생활개혁을 추진해 주실의 개혁전통을 세우기도 했다.
마을 중앙으로 장군천이 흐른다. 일월산 일자봉 자락의 샘골에서 출발한 물길이 일월면 도곡리와 가곡리를 거쳐 이 마을 중앙 장군천으로 흘러들었다가 반변천으로 몸을 숨긴다. 장군천은 강 좌우에 널려있는 용골․논골․성지골․새미골․감북골․앞산골 등의 골짜기와 맞닿아 있다. 주실마을은 이러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죽고 또는 주실로 불려졌다 한다.
이 마을에 유난히도 많은 전통가옥이 있고 또한 잘 보존되고 있다. 더욱이 한옥과 현대식 건물이 조화롭게 배치돼 마을 전경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지금도 마을 전체 구성원들이 서로 두레와 품앗이를 통해 농사일에 나선다. 이런 전통적 관습이 살아 있음은 그림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마을 입구에 단아하게 자리하고 있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이 보인다. 한국근대문학에 큰 발자취를 남긴 조지훈과 거의 형 조세림이 태어난 생가다. 입구(口)자형 측․정면 7칸으로 정자형식의 사랑채와 조지훈 시인 태실(胎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생가 입구 표지판 아래 한국문인협회가 마련한 현대문학 표지 동판이 눈에 띈다. 영양문인협회 관계자는 그가 시를 통해 얻고자 했던 물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조지훈선생의 시 속에는 언제나 파괴된 균형과 질서를 복구하고자 고뇌했던 영혼의 기갈이 나타나 있고 해방직후 혼미했던 사회에 대한 계몽과 시대적 소명감의 조급함을 엿볼 수 있다."
조지훈은 1920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시문에 능했던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형 세림이 조직한 '꽃탑회'에 참가, 마을 소년문집을 만드는 등 유년시절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6세때 영양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선후배들과 마을 안에 있는 월록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이 마을 관계자 한 분은 "지훈선생이 정규교육을 받은 것은 보통학교 3년이 전부였으며 이 때문에 느꼈던 지적 목마름은 엄청난 독서로 나타났다"고 회고한다. 일본 유학을 다녀와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아버지 조헌영은 일찍이 이들 형제에게 신문학을 전달하고 보들레르, 오스카 와일드,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을 접합케 해 사회를 보는 눈과 시시계를 경험케 했다.
이 집은 조선 중기 인조조에 입향조인 조전의 둘째 아들 정형(廷衡)이 창건했으나 한국전쟁 과정에서 소실됐다가 1963년 복구됐다. 경상북도 기념물 78호로 지정된 이 태실에서 태어난 인물로는 건국독립 유공자인 의병장 조승기,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지낸 조근영, 한글 맞춤법 통인안의 입안자 조헌영 박사, 경북도지사로 한국전 당시 대구사수 후퇴불가를 주장했던 조준영, 배화여고 시절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여류시인 조애영 등이 있다.
마을 전체에서 고고한 선비의 기상과 전통과 학문, 예절을 중시했던 선조들의 기풍이 배어 나오는 듯한 마을로서, 일찌감치 신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교육을 접하게 함으로서 근현대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들을 배출한 주실마을은 한마디로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곳이다. 월록서당과 호은종택, 만곡정사, 침전정과 학파정 등은 일찌감치 유학을 새롭게 개혁해 후손들에게 배움을 열었던 선조들의 깊은 뜻이 서려 있는 곳이다. 특히 마을 동쪽 끝 산자락에 오롯이 앉아 있는 월록서당은 주곡의 한양조씨, 도곡의 함양 오씨, 가곡의 야성 정씨 등 3부곡(富谷) 문중이 후진양성을 위해 공동으로 건립했던 교육기관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지정 받아 보존되고 있다. 이 서당을 통해 조지훈선생과 오일도선생 등이 어릴 적 한학을 배웠다.
마을중심 뒤 산자락에 터를 잡은 옥천종택은 조선 숙종 때 경학과 문장이 뛰어나 당시 남인의 사표가 됐던 옥천 조덕린 선생의 고택이다. 이 건물은 정침채 옆에 초당을 지어 글 읽는 별당 기능으로 사용했으며 17세기 양반주택의 표본으로 가치가 높다.
구한말 변혁기를 맞아서는 의병운동과 개화개혁운동, 해외 신학촌 건설, 독립운동 등에 뜻을 세운 인물이 수없이 배출됐으며 대표적 인물로 조승기 의병장, 조병희 선생, 국민교육회 조창기 간사, 독립운동가 조만기 선생 등이 있다. 마을 안에서는 영진의숙, 배영학당, 동진학교가 세워져 노동야학과 여성야학을 일으켜 민족교육에 나섰으며 1920년대에는 노동공제회, 신간회, 청년동맹 등 민족운동에 동참하면서 영양지역 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민족시인 지훈 조동탁과 세림 조동진 형제의 아버지였던 조헌영 선생은 신간회 중앙회 검사위원을 맡아 활동하면서 1928년부터 양력과세로 마을 설 문화를 개혁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이 같은 개화분위기는 신교육의 열기로 이어져 해방이후 서울과 해외로 유학한 이가 무릇 수백여명, 이 중 30여명이 넘는 박사가 배출되고 대장급을 비롯 군장성만 10여명에 이른다.
16. 조지훈 趙芝薰의 삶과 시 (1920.12.3~1968.5.17 )
본 명 동탁(東卓)
출생지 경북 영양(英陽) 주곡리
주요저서 <승무(僧舞)(1939),><조지훈 시선>,
한국민족운동사 등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시인, 수필가, 한국학 연구가, 민속학과 민족운동사에 공헌 한국 문학사를 최초로 저술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조지훈(1920~1968, 본명: 동탁)은 본관이 한양이며, 호가 지훈이다. 한의학자로서 제헌 및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조헌영의 4남매 중 둘째아들로 일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주실마을은 전통 마을이면서도 실학자들과의 교류와 개화 개혁으로 이어진 진취적인 문화를 간직한 매우 유서 깊은 마을이기도 하다.
조지훈은 영양보통학교를 3년 다녔고, 마을에서 소년기를 보내면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후 마을에서 소년회가 조직이 되고, 지훈은 꽃탑소년회 활동을 통하여 문학적인 싹을 키우기 시작하였고, 많은 문학작품을 읽고 통신강의록으로 중학과정을 독학하고 17세에 처음 상경하여 오일도의 시원사에 머물고, 조선어학회에 드나들며 많은 세계명작을 읽으며, 고 한용운 홍노작 선새을 찾아보는 등 바쁜 나날을 보낸다. 19세 봄에 혜화전문학교에 입학 후 곧 문장지를 통해 추천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상황에서도 민족의 혼이 살아 숨쉬는 정서를 바탕으로 한 그의 시 세계는 청록파 시인으로 일컬어지게 되고 또한 우리나라 시문학사의 주류에 서게 된것이다. 20세에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 편찬원이 되었으나 학회검거사건으로 방랑의 세월을 보낸 적이 있다. 해방후 김동리, 조연현 등과 함께 청년문학가 협회를 창립하였으며, 문학의 순수성과 민족문화 수호육성에 힘섰다. 교직과 문단활동을 함께 하면서도 창작을 계속하여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펴낸 「청록집」, 그외 「승무」, 「봉황수」, 「풀잎단장」, 「역사 앞에서」 등 250여편의 창작시가 있다. 1956년에는 자유문학상을 받았으며, 1961년에는 벨기에 국제시인회의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그후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시단을 위해 지도자 역할을 한 공로자이다.
조지훈은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시사를 연결해준 큰 시인이다. 조지훈은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시사를 연결해준 큰 시인이다.
지금 영양 일월 주곡리에는 그의 생가가 기념물로 보존되고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1982년 그의 문하생 500여명이 뜻을 모아 시비를 세우고 "빛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새겨놓았다.
연 보
1920 경상북도 영양군 출생
1939 "고풍의상","승무","봉황수"등이 정지용에
의해 "문장"지에 추천되어 등단
1941 혜화전문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강원
외전 강사
1946 박두진,박목월과 함께 청록집(을유문화사)
간행
1948 고대 문과대 교수
1952 첫 시집 "풀잎단장"(창조사) 간행
1953 평론집 "시와 인생"(박영사) 간행 평론집 "
시의 원리"(산호장) 간행
1956 시집 "조지훈 시선"(정음사) 간행 자유문학상
수상
1959 시집 "역사앞에서"(신구문화사)간행 고대
민족문화연구소 초대 소장
1962 수상집 "지조론"(삼중당)간행
1964 시집 "여운"(일조각) 간행 수필집 "돌의 미학"(고대출판부)간행 평론집 "한국문화사서설" (탐구당) 간행
1967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8 사망 1973 "조지훈전집"(일지사) 전7권 간행
17.시인 조지훈의 주도 18단계
1. 부주 : 술을 아주 못 먹지는 않으나 안 먹는 사람.
2. 외주 : 술을 마시기는 하나 술을 겁내는 사람.
3. 민주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4. 은주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 혼자 마시는 사람.
5. 상주 : 마실 줄도 알고 좋아 하면서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술을 매는 사람.
6.색주 : 성 생활을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7.수주 :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8.반주 : 밥맛을 돋구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9.학주 : 술의 진경을 배우는 사람(주졸).
10. 애주 : 술의 취미를 맛보는 사람(주도).
11. 기주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주객).
12. 탐주 : 술의 진경을 채득 한 사람(주호).
13. 폭주 : 주도를 수련 하는 사람(주광).
14. 장주 : 주도 삼매에 든 사람(주선).
15. 석주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주현).
16. 낙주 : 마셔도 그만 안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 자작 하는 사람(주성)
17. 관주 : 술을 보고 즐거워 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주종).
18. 폐주(열반주) :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 세상으로 떠난 사람.
* 부주, 외주, 민주, 은주 - 술의 진경, 진미를 모르는 사람.
* 상주, 반주 - 목적을 위하여 마시는술이니 술의 진체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 반주 - 2급, 차례로 내려가서 부주가 9급이니 그 이하는 척주, 반주당 들이다.
* 학주 - 비로서 주도 초급을 주고 주졸이란 칭호를 줄수 있다.
* 대주, 기주, 탐주, 폭주 - 이 사람들은 술의 진미, 진경을 오달한 사람들이다.
* 애주 - 비로소 주도의 초단을 주고 주도란 칭호를 줄 수 있는 사람이다.
* 장주, 석주, 낙주, 관주 - 술의 진미를 체특하고 다시 한번 한고개를 넘어선 사람들.
* 열반주 - 9단으로 주도의 명인급이다.
* 9단이상은 이미 이승사람이 아니니 단을 매길 수 없는 위치이다.
참고자료
18.영양의 문인들
감천마을(오일도 생가)
주실마을에서 나와 영양읍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감천마을이 나
오고 이 곳에 시인 오일도의 생가가 있다. 시인 오일도는 24세 때
등단하여 1935년 사재를 털어가며 순수 시문학지 "시원"을 창간한
인물이다. 감천마을 중앙에 터를 잡은 그의 생가는 44칸짜리 건물로
경북 문화재자료 제 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일도 생가 앞의 하천
절벽에는 천연기념물 제114호인 측백수림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어 좋은 경관을 이룬다. 오일도 시비는 마을과 조금 떨어진 도로변
소공원에 세워져 있다. <저녁놀>이라는 시가 시비에 새겨져 있고 명
시를 감상하며 다시금 여행길을 떠나게 된다.
"작은 방 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
놀// 이 우주에 저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저녁놀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 속으로/ 붉은 꿈나라로"
두들마을(이문열 고향)
한편 청송군 진보면과 이웃한 석보면 원리리로 가면 소설가 이문열
의 고향인 두들마을이다. 석계고택, 석천서당, 장부인 안동장씨
유적비 등이 생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이문열 선생이 왜 문학에
심취하고 또 많은 대작들을 쓸 수 있었는지 이해할 만 하다.
이문열은 <새하곡>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
했고 주요 작품으로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젊은
날의 초상>, <황제를 위하여>, <레테의 연가>, <사람의 아들>, <금시
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삼국지>, <수호지> 등이 있다.
1)현대 서정시인 '오일도'
․ 1901년 영양군 영양읍 감천리 780 출생
․ 1925년 <한가람 백사장> 조선문단에 발표
․ 1929년 리교대학 철학부 졸업
․ 1932년 근화학교(덕성여중고) 교사
․ 1935년 시지<시원> 창간7,8호를 내다가 중단, <노변애가>발표
․ 1936년 <을해명 시선집> 발간 오월의 화단을 게재
․ 1938년 삼천리문학에 <송원의 밤> 발표
․ 조세림의 <세림시집> 간행
․ 조국상실의 비애감을 표현한 민족시인
2)현대소설가 '이문열'
․ 1948년 영양군 석보면 원리리 308출생
․ 197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나자레를 아십니까?>
․ 1979년 <사람의 아들> 오늘의 작가상 수상
․ 1982년 15회 동인문학상 <금시조> 수상
․ 1983년 대한민국문학상 <황제를 위하여>
․ 1984년 제11회 조선중앙문학상 <영웅시대>
․ 1987년 이상문학상 <우리들의 일그러진영웅>
․ 소설집 「변경」, 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못하리, 젊은날의 초상, 그해겨울, 새하곡, 추락 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선택
1. 김치의 개요
김치는 주원료인 절임 배추에 여러 가지 양념류(고춧가루, 마늘, 생강, 파 및 무 등)젓갈을 혼합하여 제품의 보존성과 숙성도를 확보하기 위하여 저온에서 젖산생성을 통해 발효된 제품을 일컬음.
2.김치의 유래
'채소를 소금물에 담근다'는 의미의 '침채(沈菜)'는 '팀채', 혹은 '딤채'로 발음되었는데 구개음화로 인해 '짐치'가 되었다가 오늘날의 '김치'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의 김치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중국의 『삼국지』「위지동이전」고구려조로 "고구려인은 술빚기,장담그기, 젓갈등의 발효음식을 매우 잘한다"고 씌어 있어 이 시기에 이미 저장발효식품을 생활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이 683년에 왕비를 맞이하면서 내린 폐백품목 가운데 간장,된장,젓갈류가 들어있어 발효식품이 널리 퍼졌음을 알려준다. 즉 김치류는 3000년 전부터 중국에서 '저(菹)'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기 시작해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에 전래되어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는 제조방법이 변천 되어왔다.이 때까지만 해도 김치류는 무를 주원료로 한 동치미, 짠지,장아찌가 주를 이루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통배추와 고춧가루를 주원료로 한 김치류는 조선시대 중반이후에 결국 배추와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보급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궁중김치
조선시대 수라상은 임금이 평소에 받는 반상으로 김치는 배추김치(젓국지)와 송송이(깍두기), 국물김치 세 가지가 오른다.
젓국지는 궁중에서 담근 통배추 김치인데 조기젓이나 황석어젓을 많이 넣고 담가 붙인 이름이다. 『조선무쌍산식요리제법』에서는 "젓국지는 배추와 무를 씻어 한치 길이씩 썰어 소금에 절인 다음 고추, 마늘, 미나리, 갓은 채쳐 넣고 청각도 조금 넣고 조기젓국에 물을 타 끓여서 식인 후에 간간하게 많이 붓고 뚜껑을 잘 덮어 익힌다."고 하였다. 동치미는 보통 소금과 무와 물이 기본이지만 옛날부터 궁중에서는 고명을 더 많이 넣어 향미를 더하였다. 동치미를 담글 무는 잘고 모양이 예쁜 것으로 골라 씻어서 하루밤 절인 다음 독을 묻고 넣는다. 그 산뜻한 맛에 반한 고종은 겨울철 야참으로 동치미 국물에 육수를 섞어서 메일국수를 만 냉면을 즐겼다고 한다. 이를 위해 배를 많이 넣어 담근 냉면용 국물김치를 따로 담갔다고 한다.
4. 김치의 효능
1) 항균작용
김치는 익어감에 따라 항균 작용을 갖는다. 숙성 과정중 발생하는 젖산균은 새콤한 맛을 더해줄 뿐만 아니라, 장속의 다른 유해균의 작용을 억제하여 이상 발효를 막을 수 있고, 병원균을 억제한다.
2) 섬유소로 장염, 경장염예방
김치 원료가 되는 채소는 자체에 다량의 섬유소가 함유되어 있어 변비를 예방하고 장염이나 결장염 같은 질병을 예방해 준다.
3)유산균정장작용
김치에 사용되는 주재료들은 공통적으로 수분이 많아서 다른 영양소의 함량은 낮게 나타나지만 유산균은 장내 유해세균의 번식을 차단, 위장내의 단백질 분해효소인 pepsin분비를 촉진시키며 장내 미생물 분포를 정상화시켜 정장작용을 돕는다.
한국의 대표적인 발효식품인 김치는 숙성함에 따라 젖산균(유산균)이 증가하고 요구르트와 같이 장내의 산도를 낮춰 유해균의 생육을 억제시키는 정장작용을 한다. 일반적으로 PH4.6˜4.2, 산도 0.6˜0.8 정도가 김치의 맛도 좋고 비타민C의 함유량도 가장 높다.
4)산중독증 예방
김치는 육류나 산성식품을 과잉 섭취시 혈액의 산성화로 발생되는 산중독증을 예방해 주는 알칼리성 식품공급원이다.
5)성인병예방
성인병 예방에도 도움을 주는데 비만, 고혈압, 당뇨병, 소화기계통의 암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6)항동맥정화 항노화기능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김치의 섭취는 혈중 콜레스테롤의 양을 감소시키고 Fibrin을 분해하는 활성을 가져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밝혀졌다. 흰쥐를 이용한 실험에서 김치 섭취는 간의 지방질 농도도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김치는 비타민C, β-Carotin, Phenolic 화합물, 클로로필 등의 활성성분에 의해 항산화작용을 거치므로 노화를 억제하며, 특히 피부노화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김치는 항산화 활성이 있는데 발효가 진행됨에 따라 차이를 보였으며, 숙성적기의 김치에서 가장 높았다.
7)김치의 항암효과
김치의 주재료로 이용되는 배추 등의 채소는 대장암의 예방효과가 있고, 마늘은 위암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마늘은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음식의 양념으로 쓰이며, 특히, 김치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재료이다. 마늘의 강하고 매운 냄새와 맛 때문에 사람들이 먹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지만 최근 마늘의 항암효과가 발견되면서 마늘을 이용한 다양한 음식들이 건강식품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8)생리대사이 활성화 효과
김치의 주 부재료인 고춧가루에는 켑사이신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어 위액의 분비를 촉진하여 소화작용을 도와주며 비타민A와 C의 함유량도 많아 항산화 작용을 한다. 그 뿐만 아니라 마늘에 함유되어 있는 스코리지닌은 스테미너 증진효과가 있으며 아리신 성분은 비타민B₁의 흡수를 촉진하여 생리대사를 활성화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또한 생강에 함유되어 있는 진저롤은 식용증진 및 혈액순환에 좋은 효과가 있다.
5.김치의 특징
김치는 양념류의 삼투압에 의한 수분의 교환, 배출로 만들어진다. 이로 인해 채소의 풋내도 없어지고 미생물과 효소가 작용하여 김치류가 숙성된다. 이 숙성되는 과정이 김치의 맛과 향을 좌우한다. 발효과정에서는 양념뿐만 아니라 미생물의 작용도 중요하다. 김치가 익으면서 생기는 젖산균은 김치를 숙성시키고, 효소는 채소의 유기 성분과 결합하여 맛을 내게 한다. 부패를 억제시키는 역할도 한다.
채소를 소금에 절이면 염분이 채소에 침투하면서 동시에 탈수 작용이 일어나 채소의 수분을 밖으로 내보낸다. 바깥쪽의 소금은 침출된 수분이 용액으로 되면서 삼투앞이 걸려 더욱 침투성을 높이게 되어 김치가 된다. 이러한 소금의 작용은 채소뿐만 아니라 다른물질에도 똑같이 작용한다. 따라서 채소에 함유되어 있던 미생물도 소금의 삼작용으로 활동이 정지하여 탈수 작용으로 사명되거나 효소작용이 둔해진다.
보통 여름에 짠 김치(소금농도 5%)는 2일 정도, 보통 농도(3.5%)에서는 하루 정도 걸린다. 그러나 김장철에는(7~14℃)짠김치의 경우 10~18일, 보통 온도에서는 5~12일이 걸린다. 높을수록 김치가 빨리 익는데, 가장 좋은 맛을 내는 숙성 온도와 기간은 5~10℃에서 2~3주간이다.
소금의 농도는 겨울 김장용에는 2~3%, 봄철에서 4~5%, 여름철에는 5%가 적당한데, 너무 오래절이거나 소금의 농도를 너무 진하게 하면 배추나 무의 단맛이 없어진다.
소금의 농도는 발효작용을 일으키는 미생물의 번식과도 관계가 깊다. 김치를 담그면 초기에는 여러 잡균이 많이 붙게되고 점차 젖산균이 많아져 젖산 발효가 일어난다. 따라서 생성된 젖산과 소금의 채소의 부패를 막아준다. 김치를 상품화하는 데에서 가장 큰문제점중의 하나가 보존성인데, 김치는 발효가 진행되는 살아 있는 식품이므로 숙성기에는 영양가가 가장 높으나 발효와 관련된 일부 미생물은 김치맛이 가장 좋은 숙성기 후에도 계속해서 산을 생성하고 김치조직을 연하게 하며 김치의 성분변화를 일으킨다. 이러한 변화를 김치의 과숙현상이라 부르며, 오래 보관된 김장 김치나 여름 김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폴리갈락튜로나제의 효소활성은 숙성 초기에는 오히려 낮으나 김치즙의 표면에 막이 형성된 후에는 현저히 증가한다. 김치의 과숙현상은 김치의 저장과 유통면에서도 큰 문제거리이다.
김치류는 알맞게 숙성되었을 때 맛이 좋지만 계속해서 발효가 진행되어 완숙기가 지나면 산패되는데 발효속도는 온도에 비례하므로 특히 기온이 높은 하절기에는 하루만 지나도 시어지기 시작하고 2~3일이 지나면 먹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먹을 수 있는 기간이 상온에서는 극히 제한되면 과숙현상은 젖상을 생성하는 미생물의 활동때문에 일어나므로, 이것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김치 품질에 손상을 주지 않고 미생물의 성장을 조절하는 것이다.
김치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포장을 해야하는데 상품화된 김치제품은 일반적으로 대량 소비처에 납품을 많이 하고 있으나 점차 일반 소비자들에게 판매하게 되면서 포장문제가 대두되고 있으며 가정에서는 담근 김치를 저장함에 있어서 온도 관리가 어려워 김치냉장고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냉장고는 단순히 김치의 저장뿐만 아니라 온도제어를 통하여 숙성기능까지 하도록 개량되었다. 또 수출이 활발해 지면서 병 포장이나 그 밖의 포장용기들이 개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