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발견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 등의 영화를 통해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쳐 온 홍상수 감독의 2002년 작품으로 김상경, 추상미, 예지원 등이 출연했다.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춘천과 경주는 관광·역사 유적지가 많은 곳으로 누구나 한 번씩 가 보았음직한 공간이다. 하지만 영화에 담긴 춘천과 경주는 그런 곳으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삶의 배경으로만 나올 뿐이다. 이들 공간에서 세 남녀, 경수(김상경), 명숙(예지원), 선영(추상미)이 벌이는 우스꽝스런 연애 이야기를 통해 감독은 사랑(생활)의 행위들에 담긴 뻔뻔스러움, 지리멸렬함, 덧없음, 유치함, 상투성, 무력감 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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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은 여전했다. 마감은 언제나 코앞이었고 이자 납입일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정리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정리된 일은 없었다. 계절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지나치게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고 꽃들은 개화 예상일을 배반하며 보란 듯이 피어났다. 한두 차례 비가 내렸고, 봄인데도 강원도 어느 산에서는 눈꽃이 피기도 했다. 만년 꼴찌 팀의 스트라이커 같은, 팀을 떠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고독한 스트라이커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다. 설레는 연애의 감정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때는 봄이었지만, 발등에 벚꽃잎이 난분분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의미 없는 반복일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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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사꽃이 피고 있었다. 추풍령을 지나 경주 가까워지면서 연둣빛 봄산 사이에 드문드문 들어앉아 있는 복사꽃밭이 보였다. 희미하게 들어앉은 복사꽃밭은 어쩌면 환몽 같기도 했고 놓친 생각 같기도 했다. 창문을 열자 매큰한 꽃내음이 밀려왔다. 몸이 잠시 간지러웠다. 대릉원 앞은 관광버스로 가득했다. 수학여행을 떠나온 학생들과 단체 관광객들, 봄나들이를 나온 상춘객들이 유채꽃밭 속에서 바글거렸다.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차들은 쇠사슬을 이어놓은 듯 길게 늘어서 있었다. 50미터를 나가는데 20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차들은 꾸역꾸역 밀려들었고 용케 빈자리를 찾아내고는 주차를 했다. 길가에 놓인 앰프에서는 4분의 4박자 트로트 음악이 흘러나왔다. 귀가 멍멍했다.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토요일이었고 봄이었으니까.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대릉원, 안압지, 포석정, 보문단지…. 경주, 낡은 사진 속에 남아 있는 도시. 수학여행, 단체여행으로 누구나 한 번쯤 가 봤던 곳. 현재성을 상실한 채 과거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도시. 경수는 빛바랜 도시 경주로 온다. 영화 『생활의 발견』 이야기다. 냉소적인 시선, 심심한 내러티브, 혹독한 주제, 비열하고 가학적인 내용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를 보며 내내 불편했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외면하고 싶던 생활의 뻔뻔한 실체와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화 캐스팅을 거절당한 경수는 선배를 찾아 춘천으로 간다. 그곳에서 명숙을 만난다. 처음 본 남자 앞에서 살사를 추고 “우리 어색한 거 깨게 뽀뽀나 할까요?”라고 말하는 명숙.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경수는 이런저런 소동을 벌인 뒤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선영을 만나고 그녀를 따라 경주에 내린다. |
어렴풋하지만 기억난다. 영화 속 장면들. 보문단지의 콩코드 호텔과 황오동과 사정동 거리, 퇴색한 골목을 헤매며 이들은 지루한 줄다리기를 했다. 막창집에서 소주를 마셨고 점집에도 갔다. 경수는 선영에게 집요했다. “사랑하지 않죠?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고 토라지는 명숙에게 질렸던 그는 선영에게 똑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대릉원 근처에 힘겹게 주차를 하고 황오동으로 갔다. 경수와 선영이 걸었던 골목이다. 해장국집 골목 뒤편에 있다. 하지만 황오동 골목은 이미 사라졌다. 고분군 복원 문제로 모두 이주했다. 골목은 지저분했다. 쓰레기 더미와 폐자재만이 을씨년스러웠다. 전봇대에 붙은 이삿짐센터 스티커와 전단지가 봄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경수의 집요함은 사랑이었을까? 그냥 생활일 뿐이었을까? 사랑이라고 하면 우습고 생활이라고 하기에는 구차하고….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에서 보았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것처럼 품위를 손상시키고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언제 우리의 품위와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래서 사랑을 하려 노력한 때가 있었던가. 그랬다면 우리는 충분히 훌륭한 인간이었을 것을. 춘천과 경주를 이리저리 헤매는 경수의 모습이 차라리 우리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해 지자. 우린 경수처럼 살아가고 있다. 홍상수 감독은 그걸 태연하게 보여 주는 것이고 우린 그 태연함 앞에서 당황해 하고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매일 매일을 열심히 살기로 했어요”라고 농담처럼 말하는 명숙의 말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치열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자위다. 우리의 생은 ‘사랑한다’는 농담의 연속이다. 스러진 벽 앞에 핀 유채가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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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을 지나 사정동으로 갔다. 점집이 많다. ○○보살, △△장군, ××선녀… 보살과 장군과 선녀가 살고 있는 집들이 키 높은 대나무를 대문 앞에 꽂아 두고 서 있다. 골목은 미로처럼 이어진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노인들은 볕이 잘 드는 담에 기대어 앉아 봄볕을 쬐고 있다. 스쿠터를 탄 다방 아가씨들과 중국집 배달원들이 골목을 지나다닌다. 이게 생활의 실체다. 경수는 경주에 와서 첨성대며 석굴암이며 불국사에 가지를 않는다. 그는 단지 골목을 걷고 점집에서 선영과 함께 점을 볼 뿐이다. 무당에게서 그는 “네 인생은 별 볼 일 없다”라는 말을 듣는다. 선영은 떠나가고 낙심한 경수는 선영의 집 앞에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다가 끝내 발걸음을 돌린다. 저녁이 왔고 골목을 걸었다. 몇 번인가 길을 잃었고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겨우 제자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래,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경수는 서울로 돌아가서도 똑같은 일상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행했던 커다란 파국이 사실은 별 것 아니었음을. 농담에 불과한 것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

사정동 거리를 헤매다 대릉원 옆의 어느 허름한 여관에 들었다. 대릉원 돌담길을 지날 때였는가. 환한 가로등 옆 벚꽃이 바람에 지기 시작했다. 삼각대를 세워 놓고 카메라를 걸었다. 셔터를 꾹 눌렀다. 조리개 11, 셔터 스피드 6초. 6초 동안 자동차가 네 대가 지나갔고 고등학생 남녀가 파인더 속으로 들어와 앉았다. 관광식당에 주차되어 있던 관광버스 한 대가 빠져나갔고 자전거 두 대가 지나갔다. 6초 동안 그렇게 많은 움직임이 있었다. 모니터에는 단지 돌담과 고등학생 남녀와 벚나무의 흔들림만이 기록되어 있었다. 여관방에 누워 생각했다. 차라리 선영이 솔직했다. 하룻밤에 무슨 사랑이냐고 비웃다가도, 자신도 똑같이 ‘사랑한다’를 남발하고, 잘 나가는 남편을 절대로 버릴 수 없지만 욕망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던 그 여자가 솔직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 마음의 흔들림이 간절했고 그 잔상이 오래도록 남았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황룡사지에 잠깐 들렀다. 황룡사지. 593년간 존재했던 신라 최고의 사찰이 있던 곳. 1238년 몽골 침략으로 불타 버리기 전까지 총 93년이 걸려 절이 완성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신라 최고의 거찰이었지만 지금은 황량한 벌판만이 남아 있다. 벌판의 넓이는 2만 5,000평. 2만 5,000평의 폐사지, 혹은 잔상이 주는 쓸쓸함을 느껴 보고 싶었다. 목탑터 너머 절의 중문 근처에 절터에 나뒹굴던 석재를 모아 놓은 곳이 있다. 황룡사 곳곳에 쓰던 주춧돌과 맷돌, 문설주들이다. 이끼와 잡초가 무성하다. 돌무더기 위에 앉아 장석남의 시 「황룡사터 생각」을 중얼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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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두 눈을 부릅뜨고 생활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때도 필요하지만 외면할 것은 좀 외면하며 살자. 시를 읊조리듯, 그러도록 노력해 보자. 마감이고 이자 납입일이고 며칠쯤 모른 체 하며, 발등에 꽃잎 몇 장 묻혀 가며, ‘어느 생에서는 꼭 그 주춧돌 위에 자정 넘긴 하루씩은 세워 보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하면서. 그렇다고 생활이 까발려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래야 인간은 못 되더라도 괴물은 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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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갑수 | 1997년 『문학동네』를 통해 등단. 신문사, 잡지사 등에서 오랫동안 일했으며 요즘은 음악과 시를 벗하며 여행을 다니고 있다. 시집 『단 한 번의 사랑』과 여행 산문집 『당분간은 나를 위해서만』, 『구름그림자와 함께 시속 3km』를 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