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m75의 단신을 극복하고 자로 잰 정확한 컴퓨터 토스로 세계를 호령하고
국가대표 부동의 세터로 10여년간 군림.
75년 국가 대표 발탁
78년 로마세계선수권에서 한국배구 사상 첫 4강 진출
현지언론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재주를 부리듯 자유자재로 코트를 요리한다"며 김호철 극찬.
79년 멕시코 유니버시아드 강만수, 이인 등과 대회사상 첫 정상 등극
이탈리아 배구 파르마 단장이 김호철에 직접 러브콜.
81년 세계최고리그 이탈리아 배구 세리아A 진출.
이탈리아 3대 스포츠(F1, 프로축구, 프로배구) 중 하나인 프로 배구리그는
아르헨티나,브라질,미국,러시아,네덜란드,독일,스페인,유고,체코,프랑스,폴란드
루마니아, 불가리아,벨기에,페루,크로아티아,호주,쿠바,일본,중국
전세계 각국의 내노라는 배구선수들이 모두 모여 14개팀이 격돌하는 최고의 빅리그
81년 맥시카노 파르마와 계약(81-84)
선진배구를 배우겠다는 꿈을 안고 이탈리아로 갔다.
하지만 자존심 센 이탈리아인들은 선뜻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말이 전혀 통하지 않아 손가락 그림을 그려가며 선수들과 겨우 사인을 맞추고 경기에 나섬..
그런데 팀의 간판센터가 그의 사인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공격을 하는 것이었다.
네가 토스한 볼이 나빴다는 푸념과 함께.
그러자 김호철은 5,000여 관중이 보는 앞에서 냅다 그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관중이 모두 일어나 김호철을 향해 야유했고 벤치도 안절부절.
그러나 김호철은 아무일 없다는 듯 특유의 화려한 볼배급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팀의 임원부터 선수까지 그의 말을 거역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승을 한번도 못했던 파르마를 진출하자마자
81∼82, 82∼83 2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며 일약 명문팀 반열에 올려놓음.
리그 MVP 2년연속 수상.
최우수 용병상 수상.
이탈리아 기자단 선정 MVP 수상.
상대 블로커들 "킴(Kim)이 토스를 하면 내 두 발이 못에 박힌 듯 꼼짝하지 않는다"며
김호철의 신의 경지에 오른 토스에 감탄.
파르마시, "그(Kim)를 위한 찬송시" 매스컴을 통해 발표.
"당신은 그렇게 작은 몸으로 어떻게 그렇게 힘차게 날 수 있나.
당신의 손은 황금으로 만들어졌나.
당신은 우리 파르마의 영원한 수호신"
이때 김호철,
"키 작은 게 한이었다. 그래서 밤마다 체육관 옥상에 올라가 줄넘기를 1,000개씩 하며 점프라도 잘 해보자며 이를 악물었다." 감동발언
파르마 시민들, 김호철을 연호하며 감동의 눈물이 강을 이루고
이탈리아 국민들 "마니 도르(황금손)"라 부르며 김호철을 추앙.
한국 언론들 "컴퓨터 세터"라 부르기 시작.
85년 파르마를 떠나자 파르마시 눈물바다.
현대자동차 복귀. 슈퍼리그 MVP(1986) 수상
87년 이탈리아 최고 명문팀 트레비소로 다시 복귀.(87-95)
현지 언론, "김은 머리 뒤에도 눈이 달려 있다" 극찬.
95년 불혹까지 현역 생활. 40세에 은퇴하자마자 바로 감독 생활.
95년 파르마 감독 부임.
데뷔 첫해에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어 각광받음.
97년 최고 명문팀 트레비소 시슬리의 감독으로 부임.
97년 준우승, 98년 우승으로 이끌어 지도자로서 명성을 날림.
99년 라벤나 밀라빌란디아 감독
2000년 2부리그 트리에스테 감독을 맡아 2부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1부리그에 진입시킴.
이탈리아 배구협회, 청소년 대표의 부진 타계책으로 김호철 감독에게 적극적인 구애.
이탈리아 청소년 국가대표팀 지휘봉 잡음.
2003년 현대캐피탈 3년간 끈질긴 러브콜 끝에 16년만에 고국에 금의환향.
첫댓글 와 진짜 최고다 ㄷㄷ
조셉 과르디올라와 너무 비슷해 보이는 김호철 감독님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