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수천사 (殺手天使)
THE IRON ANGEL
- 4 -
소녀는 말이 없었다.
원래 말을 못하는 것인지 먹느라고 말을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렉스와 가스필은 소녀의 먹는 모습만 말없이 지켜보았다.
양고기 캔을 다 먹은 소녀는 조금 숨을 돌리는가 싶더니 알렉스가 새로운 양고기 캔을 따서 내놓기가 무섭게 또다시 먹기 시작했다. 그것을 다 먹은 후 목이 마른 지 가스필의 빈 맥주컵을 바라보았다.
"마시는 건 좋은데- 이건 물이 아니라고."
가스필은 컵에 새로운 맥주를 담아 주며 그렇게 말했다.
소녀는 맥주를 급히 들이킨 후 이제는 둘 다 텅 비어버린 양고기 캔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었다.
가스필은 품속에서 고기 캔 몇 개를 더 꺼냈다.
"자- 원하는 걸로 골라봐. 소고기? 닭고기? 염소? 캥거루? 펭귄?"
알렉스가 소고기 캔을 따서 소녀에게 주었다. 소녀는 또 그것을 허겁지겁 먹었다.
"야, 넌 대체 누구야?"
가스필이 물었다.
소녀는 대답대신 빈 맥주컵을 가스필에게 내밀었다.
"내가 네 바텐더로 보여?"
가스필은 한 손으로 맥주통을 밀었다.
"네가 직접 떠 마셔."
소녀는 직접 맥주를 떠서 마셨다. 그리고 소고기 캔을 다 먹어치웠다.
"하루 종일 자기만 하더니- 이제 눈뜨자마자 먹기만 하네. 팔자 한번 늘어졌군."
가스필은 헛웃음을 날렸다.
소고기 캔을 다 먹고 나서 소녀는 염소 캔을 땄다.
"이젠 좀 적당히 먹어둬!"
가스필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소녀는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러지 마. 배가 많이 고픈가 본데."
"아무리 그래도, 이건 내 식량이란 말야. 캔 하나면 한 끼 식사는 충분한데. 혹시, 머리 같은 델 다쳐서- 배가 부르니 이제 그만 먹으라는 명령을 머리가 내리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럼 곤란하잖아. 배가 뻥 터질 때까지 계속 먹으려 할 테니."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가스필과 알렉스는 잠자코 소녀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녀는 먹고 또 먹었다.
염소, 캥거루, 펭귄까지 모두 다 먹어치웠다.
"이젠 없어!"
가스필이 말했다. 사실이었다.
"더 먹고 싶다면 차고에 가서 네가 직접 가져와."
소녀는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와 가스필이 지켜보고 있노라니 그녀는 성큼성큼 주방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처음부터 그곳에 자신이 먹을 것을 넣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냉장고의 음식들을 끄집어냈다. 먹다 만 칠면조구이, 식은 토스트, 유통기간이 지난 우유 등을 챙겨와서 탁자 위에 쭉 늘어놓았다.
소녀는, 그것들을 먹기 시작했다.
"정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군."
가스필은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도 할 말을 잃은 듯 그녀의 먹는 모습만 멍하니 볼뿐이었다.
"대체 이 여잔 어쩌다가 알게 된 거야?"
"글쎄, 뭐 내가 죽인 놈들에게 붙잡혀 있었어."
"그때부터 말을 못 한 거야?"
"글쎄, 뭐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내내 자다가 지금 일어나서는 내내 먹기만 하잖아."
"그럼 이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단 말야?"
"몸에 멍이 들었던데- 누구한테 맞았거나, 어딘가에 부딪혔거나, 그렇겠지."
알렉스는 소녀를 힐끔 보았다. 왼쪽 뺨에 살짝 긁힌 자국이 나 있는 게 보였다. 눈 밑에도 옅은 피멍자국이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이 여잔?"
알렉스가 물었다.
"뭘 어째? 저 가고 싶은 곳으로 가야지."
"가고 싶은 곳? 그게 어딘데?"
"나야 모르지. 난 저 애가 아니니까. 어디로 가고 싶은 지는 저 애 만 알겠지!"
알렉스는 다시 소녀를 보았다.
"뭔가 사연이 있는 여자 같은데…… 눈이 슬퍼 보여."
"난 관심 없어!"
"식사가 끝나면 물어보자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
"또 모르지. 다 먹고 나면 다시 잘지! 영원히 그것만 반복할 지도 모르잖아."
가스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켠 후 이곳저곳을 돌며 문을 열어보았다.
"음- 이 방이 좋겠군. 한숨 푹 자야겠어."
가스필이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자 거실에는 알렉스와 소녀만 남았다.
창 밖에서 천둥이 울리고 비가 창문을 때렸다. 그리고 실내에서는 소녀의 음식 먹는 소리가 조용히 들렸다.
알렉스는 소녀가 음식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소녀는 음식을 다 먹자마자 방안을 한 바퀴 빙 돌아본 후 소파에 누워 잠을 잤다. 알렉스는 잠든 소녀와 탁자 위의 빈 그릇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 5 -
"눈을 떠."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바닥에 누워있던 알렉스는 슬며시 눈을 떴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었다. 손목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였다.
"누구야?"
방 한가운데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때 번개가 쳤고 방안의 그림자가 짧게 모습을 드러냈다. 가스필이었다. 그는 오른손의 칼날을 빳빳이 세우고 있었다.
"왜 그래?"
알렉스는 바닥에서 일어났다.
가스필은 왼손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갔다.
"쉿, 놈들이 왔어."
"놈들이라니? 누구?"
"군인들."
알렉스는 커튼 사이로 창 밖을 확인했다.
비와 어둠의 장막 너머로 긴밀한 움직임이 있었다. 총을 든 그들은 몸을 낮추고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몇 명이나 될까?"
알렉스가 물었다.
"서른 명 남짓."
가스필은 대답을 하며 천천히 방을 나갔다. 알렉스는 그의 뒤를 따랐다.
"어쩌지? 완전하게 포위를 한 것 같은데……."
"그보다……."
가스필은 앞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가스필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은 들개의 눈빛처럼 번들거렸기에 알렉스는 잠깐 숨이 막히는 듯했다.
"어째서 저들이 네가 있는 곳을 아는 것일까?"
"글쎄……?"
"네 몸 어딘가에 위치 추적기가 부착되어 있다는 결론이야."
가스필은 왼손을 들어 알렉스의 목을 만졌다. 차가운 느낌에 알렉스는 어깨를 움찔했다.
"바로 이거야!"
가스필이 들어 보인 것은 알렉스의 목에 걸린 유란 제국 군대의 '인식표'였다.
가스필은 인식표를 떼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외투 주머니 속에 넣었다.
"저 애를 깨워."
가스필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소녀를 향해 턱 끝을 세웠다.
알렉스는 소녀를 흔들어 깨웠다. 그 사이 가스필은 탁자 위로 올라가 천장으로 통하는 작은 문을 아래로 내렸다.
문이 아래로 열리면서 사다리가 내려왔다.
"무슨 문이지?"
"지붕으로 통하는 문이야."
가스필은 짧게 대답하고 사다리를 타고 올랐다.
알렉스는 간신히 깨운 소녀를 탁자 위로 올렸다. 소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순순히 사다리를 탔다.
천장 위는 좁은 다락이었다.
오래된 옷과 책들, 못쓰는 액자들과 나무작대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창고로 사용한 듯한 공간이었다.
앞으로 쭉 걸어가니 지붕으로 통하는 창이 나 있었다.
가스필은 창문을 소리나지 않게 열었다. 창문이 열리자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처럼 비바람이 밀려왔다.
"조심해서 따라와."
가스필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소녀와 알렉스가 따랐다.
알렉스는 창을 나서기 전에 자신들이 올라왔던 다락방의 문을 닫은 후 굴러다니는 작대기로 단단히 관건했다.
알렉스가 막 창문을 빠져 나와 지붕위로 발걸음을 내디뎠을 때 아래층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군인들이 집안으로 들이닥친 것이 분명했다.
폭우는 엄청났다. 한치 앞도 가늠하기 힘들었다.
지붕 위에서 균형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물 묻은 기왓장에 발이 자꾸만 미끄러지려 했다. 소녀는 몇 번이고 발을 헛디디며 몸을 기우뚱거렸다.
알렉스는 혹시라도 소녀가 떨어질 까봐 뒤에서 어깨를 잡아 주었다.
"자- 여기 아래가 바로 차고야."
가스필이 돌아보며 말했다. 빗물의 벽 때문에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여기 통로가 있으니 뛰어내린 후 차를 타고 곧장 달려."
"넌?"
알렉스가 물었다.
"난- 좀 놀다 갈 테니."
알렉스는 뭐라고 말을 해줘야 할 지 몰라 잠시 머뭇거렸다. 가스필은 금방이라도 지붕 아래로 뛰어내릴 것 같은 포즈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리 내려가! 그리고, 북쪽으로 가. 첫 번째로 나오는 상점에서 아침을 먹고 있어."
"그곳에서 기다릴게."
가스필은 지붕 끝에 웅크리고 앉은 채 아무 대꾸도 없었다.
알렉스는 소녀를 먼저 내려보낸 후 곧바로 자신도 뛰어내렸다.
차고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차고 주위를 에워싼 군인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알렉스는 소녀를 옆에 태운 후 시동을 걸었다. 시동이 걸림과 동시에 가속페달을 밟으며 출발했다.
차고의 문이 부서지고 차가 요란한 소음을 냈다.
"잡아라, 저 놈을!"
군인들의 함성과 부산한 움직임을 뒤로하고 차는 쭉 뻗은 도로 위를 시원스럽게 달렸다. 등뒤에서 군 차량의 시동 거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알렉스는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뒤는 가스필이 책임질 것이다.
*
북쪽의 도로를 따라 차를 달리며 백미러를 확인했다. 뒤에 따라붙는 차량은 없었다.
알렉스는 차의 덮개를 씌었다.
다닥다닥, 하고 덮개를 때리는 비의 소리가 빠른 연주의 음악처럼 들렸다. 소녀는 그새 또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를 달리니 멀리 상점의 간판이 보였다. 이제 비는 그쳐 있었다.
상점 앞에 차를 세우고 소녀를 흔들어 깨웠다.
"밥이야 밥. 밥 먹을 시간이라고!"
소녀는 눈을 번쩍 떴다.
알렉스와 소녀는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켰다. 동쪽 하늘에 차츰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상점은 주유소와 여관을 겸하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여관의 손님들을 위해 상점은 여러 가지 아침 메뉴를 구비해놓고 있었다.
알렉스와 소녀가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 그 안의 손님들이 일제히 그들을 쳐다보았다.
손님은 총 여섯 명이었다.
바로 앞 테이블에 자리한 노부부는 샌드위치를 스프에 찍어먹고 있었다. 안쪽 구석의 테이블에는 폭주족처럼 보이는 근육질의 남자 셋이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며 술과 고기를 먹고 있었다.
그들 중 빨간 두건을 머리에 두른 남자 한 명이 소녀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카운터 테이블에는 사십 대로 보이는 뚱뚱한 여자가 혼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여자는 모피 코트를 입고 있었고 무척 부유해 보였다. 그러나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소녀를 테이블에 앉힌 후 카운터로 갔다.
카운터에는 키가 큰 웨이터가 유리컵을 반질반질하게 닦고 있었다. 보기 좋게 콧수염을 기른 그는 나이가 꽤 지긋해 보였다.
"뭘 드릴까요?"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걸로 주세요."
"그렇다면- 오믈렛을 드셔보시겠습니까? 저희 가게의 오믈렛은 맛이 아주 끝내줍니다. 저희 가게만의 특별한 소스가 첨가되기 때문입니다. 그 소스는 무려 마흔 가지의 재료로 맛을 낸……."
웨이터는 소스의 특별함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 했다.
"예- 그걸로 주세요. 그리고 커피 한 잔과 우유 한 잔도 주세요."
"우유는 데워 드릴까요?"
"예, 그렇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손님. 다 해서……."
웨이터는 계산기를 톡톡 두드린 후 영수증을 내밀었다.
"천오백 유니입니다."
"선불입니까?"
"먹고 튀는 손님들이 워낙 많아서."
알렉스는 빳빳한 제국 화폐 한 장을 꺼냈다.
"일만 유니군요."
웨이터는 금고에서 잔돈을 꺼내 지불했다.
"음식은 곧 대령하겠습니다."
"그리고-."
"뭐, 또 더 주문하실 거라도?"
알렉스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려다가 말고 머뭇거렸다.
옆에서 커피를 마시던 중년 여인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는 주머니 속에서 역 십자가가 그려진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가 도로 집어넣어다.
"왜 그러십니까, 손님?"
"아닙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웨이터는 주문서를 주방에 제출한 후 다시 유리컵을 닦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던 여인은 계속해서 알렉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알렉스는 여인의 눈치를 살피며 자리로 돌아왔다.
소녀가 있는 테이블로 돌아와 보니 불청객이 있었다.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두른 그 남자였다. 그는 소녀와 마주보고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소녀는 그저 무심하게 창 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낯선 남자가 있든 공룡이 있든 관심 없다는 투였다.
"이것 봐, 남의 자리에서 뭐 하는 거야?"
알렉스가 말했지만 남자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문제가 생기는 건 원치 않아. 어서 비켜."
"네 녀석이 문제 그 자체인데, 어떻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있겠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를 쳐다보았다. 그의 왼손에 무언가가 구겨져 있었다. 그것은 알렉스의 얼굴이 붙어 있는 수배 전단이었다.
알렉스는 허리춤에 감추어 두었던 총을 꺼내려 했다.
"허튼 수작하다가는 목이 날아갈걸?"
등뒤에서 들린 소리였다.
알렉스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뒷목에 총구가 겨누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의 일행들이 어느새 알렉스를 에워싸고 있었던 것이다.
웨이터는 유리컵을 닦다가 굳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않고 있었다.
"탈영병이더군!"
빨간 두건의 남자가 일어서며 말했다.
"무엇 하러 탈영 같은 걸 하고 그래? 짬밥이 맛이 없던? 아니면 구보 뛰기가 싫던?"
그는 손바닥으로 알렉스의 뺨을 툭툭 쳤다.
"자- 순순히 밖으로 따라 나와. 여긴 장사를 하는 곳이니 소란을 피울 수 없잖아."
알렉스는 출입구로 걸어나가면서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몸을 돌려 총구를 밀쳐내고 저들보다 빨리 총을 뽑아들 확률은 얼마인지를.
그것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등뒤의 남자가 개머리판으로 알렉스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알렉스는 쓰러졌다.
쓰러진 알렉스에게 발길질이 가해졌다.
알렉스는 모래투성이가 되어 숨을 헐떡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기회를 포착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승기를 잡은 양 우쭐거리며 알렉스의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다시 한번 발길질이 가해졌고 알렉스는 배를 움켜잡으며 신음하는 척했다. 그의 손에 모래가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또다시 발길이 날아왔다.
알렉스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리며 그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발을 헛디딘 그 남자의 얼굴에 모래를 뿌렸다. 남자는 얼굴을 감싸쥐며 괴로워했다.
알렉스는 남자의 등뒤로 돌아가 왼손으로 그의 목을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허리춤에 숨겨둔 총을 뽑았다.
하지만 이미 다른 두 남자도 총을 겨누고 있는 상황이었다.
세 개의 총구가 서로를 향해 불을 뿜기 직전이었다.
"어이- 보이스카웃!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어서 총을 내리는 게 좋을 걸."
바로 앞에서 총구를 겨누고 있는 붉은 두건의 남자가 한 걸음 다가오며 차갑게 웃었다.
"시체를 끌고 가면 반값밖에 못 받는단 말야."
알렉스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네 친구들에게 연락해! 내 몸값이 더 오를 테니 와서 잡아보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너희들 셋을 모두 죽일 거거든. 그러면 적어도 내 몸값이 지금보다 두 배 정도로 뛸 것 아냐!"
"어디- 한 번 해 보시지? 누가 죽게 될지."
붉은 두건의 남자는 웃음을 거두었다.
"어린 녀석이 겁도 없이! 너 정말로 사람 죽여봤어?"
붉은 두건의 남자는 총의 격침을 당겼다. 그리고 방아쇠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때 상점의 출입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나왔다.
"그만 두시오!"
키가 큰 웨이터였다. 웨이터는 두 손을 휘휘 저으며 붉은 두건 남자에게로 갔다.
"이것 봐, 칼! 자네에게 긴히 할 말이 있네."
웨이터는 붉은 두건 남자, 칼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칼은 여전히 알렉스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무언가 흥미로운 제안을 받은 모양이었다.
"어떤가? 자네가 손해볼 건 없지 않은가?"
"그것 참- 오늘은 정말 재수가 붙는 날인가 보군."
칼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총구를 내렸다.
그는 알렉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동료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잘 지키고 있어. 그리고 내가 신호하면 안으로 들어와."
그러고 나서 칼은 알렉스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이것 봐 보이스카웃! 네 놈은 뭔가 여자를 후리는 능력이 있는가 보군."
칼은 큰소리로 웃으며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상점 안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총을 겨누고 있던 남자는 총구를 내리고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알렉스는 자신이 목을 감고 있던 남자를 풀어주었다. 남자는 손으로 목을 문지르며 상점으로 들어갔다.
알렉스는 한참동안 상점의 문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상점의 문이 리드미컬하게 움직였다. 웨이터가 나타나 알렉스에게 손짓을 했다.
"다 끝났으니 이제 들어오시오."
알렉스가 상점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오토바이의 굉음이 들렸다. 상점 뒷마당에서부터 먼지가 자욱히 피어올랐고 이어서 세 대의 오토바이가 북쪽으로 달리는 것이 보였다. 알렉스는 총을 허리춤에 찔러 넣고 상점의 문을 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카운터 앞에서 알렉스는 웨이터에게 물었다.
웨이터는 유리컵을 닦으며 고갯짓을 했다.
"저 부인에게 물어보시오. 저 부인이 문제를 해결하셨으니."
돌아보니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는 모피 코트의 여인이 보였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알렉스가 다가가 물으니 여인은 위엄있는 동작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놈들에게 두 배를 줬지."
"무슨 뜻이죠?"
"네 목에 걸린 현상금의 두 배를 줘서 보냈다고."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저에게 그런 호의를 베푼 것이죠?"
그 물음에 여인은 허탈한 미소를 흘렸다.
"훗- 난, 돈이 많거든. 짓다 만 폐 건물들 알지? 거기에 들어간 돈의 반이 내 돈이었어. 뭐, 결국, 공사가 중단되면서 수십 억 유니를 날려버렸지만- 상관없어. 아직 돈이 많이 남았거든."
알렉스는 여인의 옆모습을 스케치하듯 꼼꼼히 살폈다.
귀에 걸린 진주귀고리만 해도 값이 꽤 나갈 것 같았다. 엄청난 부의 소유자임은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공허함이 깃들여 있었다. 그녀의 눈은 그녀의 막강한 경제적 파워로도 해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절박하게 좇고 있는 듯 해 보였다.
"저를 도와주신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렉스가 다시 물었다.
그제야 여인은 알렉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쩐지 너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여인은 갑자기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돌변했다.
그녀는 가죽 지갑에서 뭔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역 십자가가 그려진 명함이었다.
"아니 이걸 어디에서?"
여인은 지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라이터로 불을 붙인 후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아까 언뜻 보니 너도 같은 명함을 가지고 있더구나."
"예-."
알렉스는 품안에서 역 십자가가 그려진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저쪽에서 유리컵을 닦고 있는 웨이터가 가끔씩 무슨 일인가 싶어 시선을 보냈다.
"혹시 '검은 집'이라고 들어봤어?"
여인은 알렉스가 꺼낸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검은 집이라고요? 처음 들어요."
여인은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내뿜었다.
"일종의 종교 단체지."
"종교 단체요?"
"사이비 종교지."
여인은 짤막해진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새로운 담배를 꺼냈다. 그녀는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가죽 지갑에서 서류 뭉치 같은 걸 꺼내 알렉스에게 건넸다.
"이게 뭐죠?"
알렉스는 서류 뭉치를 이리저리 넘겼다.
사람들의 이름이 쭉 적혀 있었다.
"실종된 아이들의 이름이지."
"예?"
"넌 누가 실종된 거지?"
여인은 담배 연기에 파묻힌 얼굴로 알렉스를 보았다.
"전…… 동생을…… 여동생을……."
"여동생? 이름이 뭐지?"
"루디예요.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루디에 대한 갑작스런 그리움에 알렉스는 다리를 비틀거렸다.
"더 어린아이도 있어."
알렉스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여인을 보았다. 여인의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바로 내 딸이지."
여인은 품안에서 작은 사진 하나를 꺼내 보였다. 금발의 귀여운 소녀였다.
"케이시야. 그 애는 아직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공원에서,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사라졌어. 미친 듯이 뛰어다녔지만 그 앤 보이지 않았어. 나중에 알고 보니, 어떤 젊은 남자가 그 앨 차에 태우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었어."
여인은 억지로 눈물을 참는 것처럼 담배를 뻑뻑 피워댔다.
"대체 아이들을 납치하는 이유가 뭐죠?"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여인은 길게 붙어 있는 꽁초의 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난 딸아이의 납치 사건에 내 모든 재력을 다 동원할 거야. 케이시만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면- 내가 가진 전부를 다 버릴 수도 있어."
여인은 왼쪽 눈동자가 경련을 일으키듯 천천히 떨렸다. 그녀는 간절하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셨다 내뿜기를 반복했다.
"남편과 나는 무기 제조업으로 돈을 벌었지."
여인은 거의 다 타버린 꽁초를 아쉬운 듯 손에 들고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연기를 꿈꾸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거대한 제조 공장을 만들어서 무기들을 헐값으로 팔아 넘겼지. 전쟁은 우릴 부자로 만들어 주었어. 말하자면 우린- 사람들의 피와 살로 부를 축적한 셈이지.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어. 남편은 오 년 전에 죽었는데 어느 부랑자의 총에 맞아 머리가 날아갔지. 그 부랑자가 쏜 총은 우리 공장에서 제조된 총이었어.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공장을 매각하고 제국에서 추진 중이던 사업에 투자를 했지."
상점 안은 조용했고 언제부턴가 유리컵을 닦던 웨이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국은 이 일대에 카지노를 만들 계획이었어."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이었다. 이 일대를 거대한 향락도시화 하려 했던 제국의 계획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무산되었던 것이다.
"왜 그 계획이 무산되었는지 아나?"
"글쎄요."
"그 놈들 때문이지."
여인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검은 집."
"하지만……."
알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국의 계획이 그런 사이비 종교에 의해 막혔단 말입니까?"
"제국도 그들을 두려워했던 거야."
"예?"
알렉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제국을 두렵게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하기나 한 소리일까.
"공사가 중단된 원인은 간단해.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갔기 때문이야."
여인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어딘지 면도칼 같은 날카로움이 묻어 났다.
"귀신을 보았다는 목격자들이 늘어나면서 공사는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지. 제국의 군대가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이 일대를 뒤졌지만 그 결과는 더욱 참혹했어. 그들은 결국 끔찍하게 죽어간 동료들의 시체만 수거해야 했지."
"……."
"제국은 카지노 사업을 취소하고 은밀히 조사단을 만들어 '검은 집'에 대해 알아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어. 조사단은 어느 폐 건물 안에서 목이 잘려나간 시체로 발견되었거든. 시체가 있던 곳에는 피로 씌어진 역 십자가 모양이 있었지. 그것은 제국에 대한 피의 경고와도 같은 것이었어. 결국 제국은 두 손을 다 놓아버린 거야. 이 일대를 아예 포기해버린 셈이지."
어디에선가 찬바람 한줄기가 바닥을 타고 흘러와 잔 먼지를 날렸다.
여인은 새 담배를 꺼내려다 말고 뒤를 흘끗 쳐다보았다.
"저 여자는 누구지?"
알렉스는 소녀를 보았다. 소녀는 자신의 오믈렛을 다 먹어치우고는 알렉스의 몫을 먹고 있었다.
"모르는 여자예요. 우연히 알게 된 여자인데-."
"또 다른 일행이 있나?"
알렉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 다른 일행이 악마의 해결사라 불리는 가스필이라는 얘기를 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되었다.
그러나 여인은 깊이 묻지 않았다.
"난 지금 접선책을 만나러 가야해."
여인은 역 십자가가 그려진 자신의 명함을 지갑에 넣으며 일어설 채비를 했다.
"접선책이라니요?"
"말했지? 난 이 사건에 내 모든 걸 다 걸었다고. 지금까지 난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검은 집에 대한 접선을 시도했어. 제국 화폐를 많이 뿌리고 다녔지. 그런 것 따윈 지금의 내게 휴지 조각보다 못한 것이니까. 결국 어제 저녁, 접선책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여기서 북동쪽으로 오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그들의 집회소가 있다고 했어. 이제 희망이 보여. 곧 케이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조금만 기다려라 케이시."
여인은 묘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눈동자에 격정적인 감정을 담았다. 조금 섬뜩한 모습이었다.
"이 엄마가 널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악마의 소굴에서 널 구해주마!"
여인은 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일어섰다. 여인이 일어서자 알렉스도 따라서 일어섰다.
"저도 같이 가겠어요."
여인은 알렉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날 좀 도와주겠니?"
"예!"
알렉스는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연한 어둠의 레이스에 동지가 생겼다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일이었다. 여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난 글로리라고 해. 잘 부탁한다."
여인은 손을 내밀었다. 알렉스는 그 손을 잡았다.
"전 알렉스예요."
여인은 손을 두 번 흔든 후 웨이터를 불러 커피 값을 계산했다. 그리고는 짐을 챙기기 위해 자신이 묵었던 이 층 방으로 올라갔다.
알렉스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소녀는 막 두 개의 오믈렛을 다 먹어치운 후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소녀는 어제에 비해 한결 생기가 도는 듯했다. 백짓장처럼 창백했던 뺨에는 옅은 홍조가 감돌았다.
알렉스는 소녀의 나이를 가늠해보았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한두 살 위인 것 같았다.
"저기- 이보세요-."
알렉스가 말문을 열었지만 소녀는 알렉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계속 우유만 마셨다.
"그러니까, 난 지금 어딜 가봐야 해요. 아까 나하고 같이 이야기했던 그 여자 분을 따라가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소녀는 우유를 다 비웠다. 빈 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알렉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하고 같이 가면 오히려 더 위험해질 수 있으니, 그냥 여기서 가스필을 기다려요. 아시겠어요?"
알렉스는 도통 대꾸가 없는 소녀가 답답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여기서 가스필을 기다리세요. 가스필이 오면……."
알렉스는 역 십자가 명함을 소녀 눈앞에 보였다.
"난 내 동생을 찾으러 '검은 집'이란 곳에 갔다고 전해주세요."
소녀는 계속 무표정한 얼굴로 알렉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알렉스는 소녀가 알아차렸다고 스스로 결론지어버리고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가지."
글로리가 계단을 내려오며 말했다.
그녀의 뒤에는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두 명이 수행 비서처럼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뒷머리를 어정쩡하게 기른 마른 체구의 남자였고, 또 한 명은 머리를 빡빡 깎은 근육질의 남자였다. 그들은 각각 짐 가방을 하나씩 들고 있었다.
"저 분들은 누구죠?"
"긴 머리는 샘, 짧은 머리는 테드야. 보디가드라고나 할까."
글로리는 두 명의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상점을 나섰다. 알렉스는 그들의 뒤를 따르려다가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녀는 이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마치, 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부모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알렉스는 다시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뭐, 더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오믈렛 하나 더 시켜드릴까요?"
소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유도?"
소녀는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키 큰 웨이터에게 오믈렛과 우유를 주문한 뒤 돈을 지불했다.
"나중에 제 일행이 여기 도착할 겁니다. 그럼 그에게, 제가 북동쪽으로 오십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갔다고 전해주세요."
알렉스는 웨이터에게 그렇게 당부했다. 하지만 웨이터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는 그런 것에는 관심 없다는 투로 유리컵만 반짝반짝하게 닦았다.
알렉스는 다시 소녀 곁으로 갔다.
"몸조심하세요. 워낙에 험한 세상이니-."
소녀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 밖 어딘 가만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알렉스도 따라서 창 밖을 보았다. 비 개인 아침 하늘은 에메랄드빛을 내뿜으며 고요히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문득 지금 이 순간 가스필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했다.
- 6 -
알렉스는 검정색 세단의 뒷좌석에 앉아 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민가가 보였다. 마당에서 비쩍 마른 개와 즐겁게 뛰어 노는 꼬마 아이의 모습도 보였다. 아침밥을 짓는지 굴뚝에서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일면 한가로운 풍경 같아 보였으나 실은 이 근처의 모든 집에 어둠의 기운이 깃들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끔 보이는 어른들의 얼굴에는 근심과 피로가 역력히 드러나 보였다. 그들은 죽을병을 앞둔 사람들처럼 생기가 없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검은 집'의 여파가 이 일대 전부를 침식시키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일대 사람들은 대부분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거나, 소중한 가치관을 잃었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다.
글로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일대, 즉 H 구역 전체가 '검은 집'의 종교에 물들어 있었다.
약 육 개월 전, 갑작스레 생겨난 이 이상한 종교 집단은 H-1, H-2, H-3, H-4, H-5, H-6 구역을 삽시간에 잠식해버렸다.
그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은 H-7, H-8 두 군데뿐이지만 그 역시 잠식당하기는 시간 문제였다.
H 구역 사람들의 반 이상이 '검은 집'의 신자였고, 그들 중 삼십 퍼센트 정도는 열렬한 광신자들이었다. 그들은 검은 집의 교리를 적극적으로 따랐다.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응징을 가하는데 서슴지 않았다.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게 뭡니까?"
"뻔하지 뭐."
글로리는 차안에서 담배를 태우며 창문을 조금 열었다.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을 원하는 거지."
글로리는 연기를 창 밖으로 훅 뿜어냈다.
"세상이 이 꼴이니- 뭔가에 기대고 싶은 거야. 사람들은 언제나 나약한 자신을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하는 심리가 있거든. 무언가 절대적인 힘을 추종하고 따르며 그것을 신봉하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거지. 현실의 불안이나 괴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악마주의를 신봉할 수 있죠."
"주위를 둘러봐."
글로리는 말을 하며 실제로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알렉스도 창 밖의 풍경을 주시했다. 비썩 말라비틀어진 고목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은 기괴하게 뒤틀리고 있어."
글로리의 목소리는 무척 건조하게 느껴졌다.
"종교가 사라진 세상이지. 성자도 현인도 죄다 증발해버렸어. 이제 우리가 믿고 기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글로리는 말을 하며 가끔씩 기침을 했다.
"마음을 기댈 수만 있다면 악마라도 상관없는 거야."
글로리는 창 밖으로 담배꽁초를 버렸다. 그리고 가방에서 서류 몇 장을 꺼냈다.
"이걸 읽어봐."
"이게 뭐죠?"
서류에는 역 십자가의 무늬와 함께 여러 가지 교리들이 적혀 있었다. '검은 집'의 교리였다.
알렉스는 그것을 읽어가며 교리의 터무니없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 내용은 무조건적인 악마의 찬양에 다름없었다.
이제 곧 악마가 현세에 강림할 것이니 모두 어둠의 힘을 신봉해야한다고 피력하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항은 악마가 그림을 통해서 강림한다는 것이었다.
"그림?"
알렉스의 머릿속에 동생 루디의 모습이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루디는 무수한 그림을 그렸었다.
"그럼 설마……."
"왜 그래?"
"제 동생을 납치한 이유가……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라면……."
알렉스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럴 리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글로리는 알렉스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주시했다.
"알렉스, 검은 집의 교리에 의하면 악마는 그림을 통해서 나온다고 했어. 그럼, 설마, 네 동생이 그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거야?"
알렉스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동생이 그런 그림을…… 말도 안 돼."
문득 알렉스는 루디가 사라진 날 오두막에서 보았던 그림이 떠올랐다. 그때 그림은 살아 꿈틀대는 생물처럼 미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착시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동생에게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동생을 납치한 이유가, 그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알렉스는 무거운 음성으로 얘기했다.
"제 동생에게 그런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놈들이 알아차렸던 거예요. 그래서 그 앨 납치한 겁니다.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해서."
"만약 그렇다면 다른 아이들은 왜 납치를 한 것일까? 내 딸 케이시는 그림이라고는 그릴 줄 모르는 아이인데."
"글쎄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겠지요."
알렉스는 주먹을 꼭 쥐었다.
"다른 무서운 이유가……!"
차는 한 시간 여를 달려 작고 허름한 건물 앞에 도착했다.
"여기인가요?"
글로리는 주머니에서 작은 엽서를 꺼내 확인했다.
"베네치아. 맞아 여기가 틀림없군."
알렉스는 차에서 내려 건물의 외관을 훑어보았다.
적갈색의 벽돌로 이루어진 이 층 건물이었다. 건물에는 커튼이 쳐진 창문이 네 개 나 있었다. 그리고 일 층 입구 위에는 직사각형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베네치아.
간판의 테두리에는 조악하게 만들어진 네온이 깜빡였다.
글로리는 앞장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알렉스는 허리춤에 숨겨둔 두 개의 총을 확인하며 글로리의 뒤를 따랐다. 두 명의 보디가드, 샘과 테드는 밖에서 대기했다.
건물 안은 동굴처럼 컴컴했다.
원형 테이블이 여섯 개 있고 안 쪽에는 당구대가 있었다. 테이블에는 손님들이 없었으나 당구대 근처에는 남자들 몇 명이 당구를 치고 있었다. 중저음의 그로테스크한 음악이 뱀처럼 꿈틀꿈틀 실내를 부유했다.
글로리는 카운터로 가서 웨이터를 불렀다.
사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근육질의 웨이터가 다가왔다. 그는 글로리와 알렉스를 경계의 눈빛으로 살폈다.
이어서 글로리가 웨이터에게 무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웨이터는 묵묵히 듣기만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웨이터는 잠깐 기다리라고 짧게 말한 뒤 구석으로 난 작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글로리는 카운터의 또 다른 웨이터에게 소다수 두 잔을 주문했다. 두 개의 잔에 담긴 소다수가 나오자 그녀는 그것을 들고 카운터 옆에 위치한 테이블에 앉았다.
"알렉스, 이리 와서 앉아."
알렉스는 글로리 앞에 앉았다.
"어떻게 됐어요? 접선책은?"
"곧 올 거야. 더운데 이거라도 마셔."
글로리는 소다수 한 잔을 알렉스에게 내밀었다. 글로리는 땀을 많이 흘렸다. 그녀는 소다수를 마시며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확실히 가게 안은 찜통처럼 무더웠다.
알렉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쪽에서 당구를 치던 남자들 몇 명이 알렉스를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부인, 이쪽으로 오시죠."
어느새 근육질의 웨이터가 테이블 옆에 다가와 있었다.
글로리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으며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갔다. 뒤따르는 알렉스를 근육질의 웨이터가 막았다.
"당신은 뭐야?"
웨이터는 굵은 왼쪽 팔뚝으로 알렉스의 가슴을 밀쳤다.
"일행이니 같이 들어가게 해 주세요."
글로리가 말했다.
웨이터는 무언가 못마땅한 얼굴로 알렉스를 힐끔거리며 통과를 의미하는 손짓을 했다.
알렉스와 글로리는 작은 문으로 들어가 이 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이 층 복도에 오르니 누군가가 시가를 피우며 글로리를 맞이했다. 삼십대로 보이는 키가 크고 깡마른 남자였다.
"어서 오세요."
그가 말했다.
그는 글로리와 안면이 있어 보였다.
그는 곁눈질로 알렉스를 살피다 글로리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했다. 글로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이 방으로 들어가세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검은 집'의 입교는 무척 까다롭고 피곤합니다. 자칫 변을 당할 수도 있어요. 다만, 당신이 단체에 후원금을 기부하겠다는 식으로만 나간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제국 화폐를 반기지 않을 곳은 없으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시가 연기를 남기며 반대쪽 복도로 사라졌다.
문 앞에서 글로리는 알렉스에게 주의 사항을 알려주었다.
"명심해둬. 이제부터 넌 내 아들이야."
알렉스는 머리를 굴리며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이제부터 글로리의 아들이 되어 연기를 해야 하는 것이다.
글로리는 알렉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남편을, 너는 아버지를 잃은 거야. 총기 사고로. 그래서 우린 믿음이 필요하게 된 거지. 그게 입교를 하게 되는 이유인 거야. 내말 알겠지?"
"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스의 어깨를 몇 번 토닥였다.
알렉스는 결의에 찬 글로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문득 그녀의 호흡이 무척 가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글로리가 문의 손잡이를 천천히 돌릴 때 알렉스의 호흡도 가빠졌다. 심장이 뛰고 손끝에 경련이 일었다. 루디를 데려간 어둠의 비밀이 저 문 너머에서 알렉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끼이이익.
심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컴컴한 방 한가운데 촛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촛불은 테이블 위에서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촛불 옆에는 한 남자가 의자에 푹 파묻힌 듯이 앉아 있었다.
알렉스와 글로리는 남자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디프? 당신이 디프인가요?"
글로리가 어둠 속의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말이 없었다.
알렉스는 글로리의 어깨 너머로 남자의 모습을 관찰했다. 체구가 몹시 작은 남자였다.
알렉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인상을 좀더 자세히 살폈다.
촛불에 희미하게 비친 남자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이를 드러내지 않고 웃고 있는 입가엔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입과 턱의 모양만 봐도 오십은 돼 보였다.
알렉스와 글로리는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제 그들은 촛불이 일렁이는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비로소 촛불에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그는 꼽추였고, 오른쪽 눈알이 없었다.
알렉스는 심장이 멎을 듯한 전율을 느꼈다.
틀림없이 그는 동생의 일기장 속에서 언급되었던 그 애꾸였다. 분명 그가 동생을 데려 갔을 것이다.
알렉스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장에 총을 빼들고 그의 머리를 겨누고 싶었다.
"디프 씨? 전 글로리예요. 이 앤 내 아들 알렉스고요. 우린 소개를 받고 왔어요."
글로리가 말을 건넸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용한 실내에는 먼지가 차곡차곡 쌓이듯 침묵만 쌓였다.
"으흐흐흐."
듣기 거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꼽추의 웃음소리였다. 그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나직한 웃음소리였지만 어딘지 신경을 갉아대는 듯한 오싹함이 배여 있었다.
"디프 씨!"
글로리가 다시 남자를 불렀다.
그때 꼽추는 하나 밖에 없는 눈동자로 글로리와 알렉스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붉은 구슬을 박아놓은 오른쪽 눈동자가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했다.
"알렉스- 글로리-!"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당신들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그는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러니까- 루디, 루디를 찾으러 온 거지? 엉? 네 여동생 루디."
그는 알렉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비실비실 웃었다. 그는 마치 알렉스의 모든 것을 훤히 꿰뚫고 있는 듯했다.
알렉스는 혐오와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애꾸는 고개를 돌려 글로리를 보았다.
"당신은 글로리. 케이시를 찾으러 왔겠지. 그런데- 당신들이 모자 지간이라고? 으흐흐흐-."
"디프 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우린 '검은 집'에 입교를 하려고 온 거예요. 이미 소개가 다 된 걸로 아는데."
말을 하는 글로리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이미 공포에 질려버린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린 꼽추는 비실비실 웃으면서 박수를 쳤다.
갑자기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어떤 물체가 허공을 가르고 날아와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였다.
"꺄악!"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이 어둠 속을 갈랐다. 글로리의 비명소리였다. 글로리는 머리를 감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알렉스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방에서 음침한 어둠의 조각들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스윽, 하고 피묻은 물체 하나가 촛불 앞에 나타났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알렉스는 치를 떨며 사방을 주시했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어떤 물체는 쇠파이프였고, 그것에 부딪힌 무언가는 글로리의 머리였던 것이다.
"알렉스! 네 놈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꼽추가 말을 하는 동안 사방에서 점차 발자국 소리와 쉭쉭, 하는 호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루디는 성모야. 마의 능력을 타고난 아이지. 예언의 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어. 그 애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그 앤 그림을 그려야해. 그건- 말하자면 출입구지. 마왕께서 강림하실 출입구! 그 애 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아주, 성스럽고 위대한 일이지."
이제 촛불 주위로 몰려든 사내들의 모습을 알렉스는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귀신처럼 어둠 속에 숨어, 꼽추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넌 너의 죽음을 자초한 거야. 네 놈이 이런 짓만 벌이지 않았다면 그냥 살려둘 수도 있었는데, 쯧쯧! 어린 녀석이, 세상 무서운 것도 모르고 날뛰다니. 처절한 죽음의 고통을 뼛속까지 느끼게 해주마!"
알렉스는 촛불 주위에 몰려든 사내들의 숫자를 확인했다. 어림잡아도 열 명은 될 것 같았다.
알렉스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글로리의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이마는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번들거렸다.
알렉스는 글로리의 허리를 껴안고 느릿느릿 뒷걸음질 쳤다.
쇠파이프를 든 사내들도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죽음의 축제를 즐기려는 모양.
복도로 나온 알렉스는 계단이 있는 쪽으로 갔다. 그러나 계단 아래에 진을 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당구봉을 든 남자들이었다.
아까 당구장에서 알렉스를 가만히 노려보던 그들이었다.
그들은 약에 취한 듯 탁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모두 다섯 명이었고 천천히 알렉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알렉스는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글로리를 품에 안고, 허리춤의 총을 꺼내들었다.
"다가오면 쏜다. 어서들 물러나!"
알렉스는 경고의 의미로 천장을 향해 총을 한 발 쏘았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었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좀비들처럼 그들의 몸짓과 표정에는 악령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삶에 대한 어떤 애착도 초월한 듯한 그들에게 알렉스가 든 총은 그 자체로 장난감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알렉스는 진땀을 흘리며 총구를 이리저리 휘둘렀다. 이제 그들은 다섯 걸음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었다.
"으와아압!"
괴상한 기합과 함께 당구봉을 든 남자 한 명이 미친개처럼 달려왔다.
그것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당구봉과 쇠파이프를 든 남자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었다.
알렉스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사내들 사이로 언뜻, 꼽추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복도 벽에 기대어 서서 서늘하게 웃고 있었다.
<계속>
첫댓글 정말 재미로 꽉 찬 소설이네요. 다음편도 기대합니다.^^
헉.! 뭔가 일이 잘 풀린다싶었는데..;; 도대체 가스필은 언제 오는거야.ㅠ 그리고 정체불명의 아가씨가 뭔가 크게 한건 해주실꺼 같은데..;; 계속 자다 일어나 계속 먹기만 하는..;; 참 난감한 사람이네요.ㅎ 다음편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ㅎ
꼬리말 주신님들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