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와 치킨게임을-3
기억이란 놈은 세월이 흐르면 닳아지고, 헤지고, 엷어지고, 그러다가도 생생한 모습으로 내 앞에 떡 버티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좀처럼 기억해 낼 수 없는 것도 있지만 결코 호락호락하게 지워지지 않고 오래도록 뇌리에 남아 수많은 잔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있다. 볕 좋은 봄날 들썩들썩 솟아오르는 새싹처럼 말이다. 친구들은 나보고 별난 것도 다 기억한다고 타시락거린다. 그래도 안 잊히는 일이야 낸들 어쩌랴.
황병욱 선생님이 어느 날 오후, 어깃장만 치는 나만 불러놓고 말했다.
“이건 말해서 안 되는 건데 내가 하 답답해서 하는 거다. 지능지수 검사결과 너 IQ가 146으로 우리 학교에서 두 번째로 높더라. 검사 결과가 잘못 나온 건지 모르지만…. 좌우간 뭔가 좋은 방향으로 노력 좀 해 봐라.”
그랬다. 선생님 말씀처럼 검사 결과가 잘못 나왔거나, 하 답답해서 꾸민 말씀이라 지금도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후로도 난 여전했으니까. 머리가 좋았으면 그러고 그랬을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 자신도 인정하지만 기억하나는 기똥차다.
교감 초임 때였다. 군위의흥에서 밤늦게 대구로 차를 모는 중이었다. 하늘은 별 하나 없이 먹장구름 일색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먹장구름에 빗방울이 간혹 빗금을 긋고 있었다. 그 풍경은 지금도 디테일하게 정지화면처럼 머리에 내장 돼 있다. 하양에 있는 가톨릭대학 정문 앞을 지나는데 헤드라이트에 웬 여학생이 첼로를 껴안고 씨름을 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 버스도 끊어진 시각이었다. 나는 여학생 가까이 차를 세웠다. 여학생은 엉너리를 부리며 다짜고짜 자기키보다 더 큰 첼로를 뒷좌석에 쑤셔 박고 조수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일단은 망우공원으로 갑시다.”
학생이 올라타자 차 안에 술내가 확 풍겼다.
“이단은?”
나는 기가 막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이죽거렸으나 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니 이미 뻗어 있었다. 암팡지게 솟아오른 가슴과 허연 무다리를 팽개친 채. 입술에는 침까지 흘리고 있었다. 나 참, 술 한 잔 마신 거야 어쭙잖아도 행동거지가 영 궤란쩍었다. 망우공원에서 학생을 깨웠다. 뚱한 얼굴, 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학생은 길고 오랜 잠에서 깨어 난 사람처럼 멀뚱했다.
“집이 어딘데?”
“수성구청 옆인데요. 아저씨 미안합니다.”
“여학생이 정신을 놓을 정도로 술을 마시면 쓰나?”
“애인이 이민을 가서요.”
“젊은 사람이 무슨 이민을?”
“나이가 마흔 넘은 걸요.”
허접스러웠으나 그날 그 학생이 마흔 넘은 아저씨가 좋은 이유를 내게 말해 주었다. ―물론 그 여학생도 내가 전연 모르는 사람이었기에 남의 이야기 하듯 부담 없이 했으리라. 나는 회의적이었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는 법, 도덕적(무엇이 도덕적인지 모호하지만)으로 바람직한지는 재단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밤이 너무 늦어 큰길까지 나와 서성이던 그 애의 어머니에게 매란 없는 학생을 인계했다. 학생 어머니는 고맙다고 정중하게 말했으나 정중한 눈빛은 아니었다.
훗날 가톨릭대 앞에서 여대생 셋이 손을 들어 태워주었는데 긴가민가하여 중년의 남자가 좋다면 좋은 이유를 에멜무지로 물어보았더니 그 애들은 키드득거리며 하나같이 그 날 밤 여학생의 말을 리바이벌해주었다. 내겐 경악스러웠지만 그들에겐 내밀한 이야기였다.
“내가 다 맞추면?”
“아저씨 꿈도 야무지네요.” 그녀는 정색을 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저씨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 드릴 게요.”
“딴죽걸기 없기.”
“그럼요.”
“맹세할 수 있어요?”
“에이 아저씨는, 좋아요. 하늘에 나를 걸지요. 어기면….”
그녀는 아마조네스의 여 전사처럼 돌직구를 날리며 손칼로 자신의 목을 따는 흉내를 냈다.
“좋았어. 첫째, $#&@%.”
“통과!”
그녀가 웃었다.
“둘째, %*&@^.”
“맞아요.”
그녀가 코끝을 찡긋했다.
“셋째, *&^$#.”
“2차는 제가 살게요.”
그녀는 혀를 쏙 내밀었다.(티베트 인사법처럼, 혀 없는 악마가 아니라는 듯)
“네째, $%#@&.”
“이제 하나 남았어요.”
이번에는 혀를 잘근잘근 씹었다.
“자,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는 약속 취소하시지.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점쟁이 옆집에 사는 빠구미란 말이요.”
정말 나는 그 정도에서 끝나기를 바랐다. 뻔히 알면서 절벽을 향한 ‘치킨게임’을 하기엔 내 나이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못질을 했다.
“거다가 사실 나란 인간은 시러베 거든. 그러니까 내 말은, 당신 상상 이상의 것을 원할 수도 있다 이 말이요”
나는 사실 시뜻해 지기도 했다. 그녀보다 나 자신이 더 두려워서였다면 핑계일까. 그녀는 정말 내가 얼마나 시망스러운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대학시절 껌 좀 씹었다고요. 쪼잔한 것은 딱, 질색팔색이거든요. 삶은 판타지가 있는 일종의 방랑이지요. 독박 쓸망정 고! 할래요.”
그녀는 생파리 잡아떼듯 강다짐했다. ‘단호박여’(말과 행동을 단칼에 하는 여성)였다. 고집이 코뿔소처럼 하늘을 찔렀다. 끝내 나머지도 말해 주자 그녀의 얼굴이 불게 타올랐다. 그녀가 난처해했으면 내가 더 난처했으리라. 난처해 짓는 웃음을 눈앞에서 본다는 것은 정말 난처하니까. 또 그녀가 독방으로 끌려가는 죄수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면 나는 그녀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이라고. 허나 그녀는 그 게 아니었다.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레이저를 쏘듯 ‘빠직’ 쏘아보는 그녀의 눈빛은, 치킨게임의 끝을 보고 싶어 안달하는 짓궂은 철부지처럼 나를 향해 액셀러레이터를 더욱 세게 밟고 돌진해 왔다.
“여자지만 나도 존심이 있잖아요? 약속대로 희망 사항이 뭐죠? 다 들어 드릴 테니까 명만 내리십시오, 각하! 나는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삶이 뭐 그리 거창한 가요. 다 게임인 것을….”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는 마시던 술마저 조금 흘러내렸다. 은색 똑딱이가 달린 신발을 까닥이며 잔뜩 옹송그린 등짝으로 빤히 쳐다보는 눈빛이 퍽 낯설게 느껴졌다. 도리어 나는 소태를 씹은 사람처럼 애먼 얼굴이 되어 잔득 찌푸렸다. 그녀는 안주로 나온 달걀말이를 오물거리며 눈빛으로 채근했다. 귀여운 볼우물을 한껏 파가며. 그녀의 아득하고 깊은 눈빛은 일종의 감지기 같았다. 내 속마음을 그대로 뱉을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위장할 것인가를 가늠하는. 가로지나 세로지나 검출된 소자가 대량이거나 폭발적이길 은근히 바라며 그 끈을 바짝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엉큼한 셈속이 뽀록날까 목구멍이 간질간질하여 술을 부어넣고 에둘러 말했다.
“어떤 요구도?”
“그래요, 어떤 요구도….”
그녀는 숨을 꼴까닥 넘기며 아망을 부렸다. FM대로 가겠다는 거다. 완전히 도락구였다. 심장이 펌프질했다. 이 보다 명백한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축구광 까뮈의 말처럼 공은 어느 누가 바라는 쪽으로 절대 오지 않는다.
그 때였다. 삑사리 났다. 그 사고는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테이블이 와장창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며 가까이 앉은 그녀의 어깨에 초장 그릇이 떨어진 것과 청년이 지르는 분노의 외침이 들린 것은 동시였다. 그녀의 어깨에 떨어진 초장그릇에서 초장이 튀어 그녀의 얼굴과 내 얼굴도 초장 천지가 되었다. 정말 초를 치고 말았다. 나는 휴지를 뽑아 그녀에게 건네고 나도 얼굴을 훔치며 진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청년이 넥타이를 맨 중년사내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금방 칠 듯 행짜를 부리고 있었다.
“당신이 비정규직의 아픔을 알아? 아직도 걷지 못하는 쌍둥이 딸들에 대해 뭘 안다고 주둥이를 놀려! 너 멋대로 해고 했으면 아가리나 닫고 있지 무슨 심보로….”
그 와중에도 나는 생각했다. 당했으면 갚아줘야 한다. 상대가 센 놈일수록. 그러나 청년은 부르르 떨리는 주먹을 끝내 내지르지 못했다.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카키색 스키니 진에 베이지색 터틀넥 스웨터를 받쳐 입고, 무릎까지 오는 흰색 버버리 패딩 코트를 걸치고 있었는데 검붉은 초장과는 상극의 색상이었다. 하얀 패딩 코트는 검붉은 초장이 떨어진 낙엽처럼 완전히 덮어 버렸다. 그녀는 휴지로 얼굴에 묻은 초장을 닦고 있었는데 옷은 포기한 듯 했다. 내가 보아도 패딩 코트와 바지는 재생 불가로 보였다. 그 때 상을 뒤 엎은 사내의 친구로 보이는 청년이 궁싯거리며 다가와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친구가 억울하게 직장에서 쫓겨나서….”
“아니….”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 앞에서 가오를 세우고 싶었다. 절절한 속내야 따로 있었지만….
뭐 하는 짓이냐고, 불뚱가지처럼 냅다 고함을 지르려는 내게 그녀는 손바닥을 보이며 내 말을 채뜨렸다. 그리고 청년의 어깨를 부축하며 말했다.
“우린 혼자가 아닙니다. 남자가 울 수는 있어도 이만 일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죠. 흔들리지 않고 예쁜 꽃을 피울 수 있나요? 이 옷은 당신들 자존심에 비하면 발가락의 때만도 못합니다. 남자의 존심을 거꾸로 매달면 쓰나요?”
뭐 이런 내용으로 그날, 그녀가, 그 청년을, 도리어 위로한 것 같다. 그리고 내게도 몇 마디 했다. 우리가 그들에게 할 말은 ‘고맙다’는 말 뿐이고, 우리가 ‘배퐁냥’하게 인문학을 나불거릴 수 있는 것도 그들 덕분이라고. 나는 뒤통수를 오지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나와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다. 어레미 채가 굵어 허투루 볼 존재가 아니었다. 삶의 근원에 밀착해 생각하며 사는 여자였다.
그녀에게 소매를 잡혀 팔공식당을 나섰다. 그녀의 옷에서 초장 냄새가 아니라 몸에서 잘 구어 낸 빵처럼 구수한 냄새가 났다. 아니 70년 전에 맡은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코를 벌름거렸다. 하늘에는 멍이 든 달이 떠 있었다. 마침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타며 그녀가 껄렁하게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꼭 약속을 지킬 게요.”
“그래요. 꼭 지켜요.”
멀어져 가는 택시를 보고 이번에는 내가 고함치듯 못을 박았다. 갑자기 마신 술이 어떤 독주보다 취기가 오르고, 어떤 환각보다 더 몽롱했다. 설명할 수 없는 이런 묘한 파토스는 어디서 유래하는 어떤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어릴적 다 잡다 놓친 참새는 언제나 알찌근했고 사라지는 것은 아쉬웠다. 그러거나 말거나 얼어붙었던 내 가슴이 우릿해 왔다.
그 때, 칼바람은 아직 날을 숨기고 있었지만 솔숲에 옹크리고 있던 전초병이 튀어나와 내 귀뺨을 갈기고 달아났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댓 발짝 걷는 새에 몸의 온기가 싹 걷혔다. 꿈을 꾼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비가역성에 나는 내처 걸었다. 하늘에 개밥바라기는 보이지 않았고 구름만 머흘머흘 흘러가고 있었다. 비의적이었다.
그날로부터 오늘이 꼭 일주 일 째다. 내 생각으로 그녀는 올해가 가기 전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날 것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런 확신이 온다. 그 날은 우주 쇼가 벌어질 것 같은 예감마져 든다.
첫댓글 우주쇼...
구경 걸 기대
자네가 벌리는 화려한 지상 쇼. 삭막한 세상에 그런 이해심
많은 여인이 있다니,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가 아닐까?.
갑오년이 몇날 밖에 없는데 넝쿨채 굴러온 호박이네 을미년에나 네 글을 읽을 수있을까 했는데 말이다
새해인사 미리하자 인사!!!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다 싶은 청춘!
진행중일 땐 그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미소로 바뀌면서
재미있는 추억이 된다--- 든대요...
추억이 너무 많은 무무님! 츄카츄카요~~ ㅎ
IQ145 님 자기자랑 디게 심한것 가타요..ㅋㅋ
그 머리로 어깃장만 놓았소이다.
버릴 글자 하나 없이 깡뚱하다 iq가 정말 145가 맞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