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부친 정진철의 일제 시대 행적으로 식산은행 산하기관인 금융조합에 5년간 근무했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으나, 6.25를 전후한 행적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상반된 내용들이 회자되고 있다.
항간에 '한국전쟁 때 (정 장관의) 부친과 아들들이 빨치산에 붙잡혔으며, 부부는 빠져나왔으나 아들들은 비극을 맞았다'는 말도 있으나, 정동영은 "부모님은 전쟁 중에 아들 넷을 질병으로 잃어버리는 불행을 당하셨다"며 "향리인 전북 순창의 회문산 일대는 소설 '남부군'의 무대가 될 정도로 민족상잔의 상처가 깊이 파인 지역이었다"고 밝히는 내용의 글을 지난 5월 자신의 홈페이지에 직접 게시했다. 이렇듯 서로 상반된 이야기에 대해 정 장관 측근은 "정 장관은 가족사를 밝힌 적이 거의 없지만 직접 언급한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라 하니 그간 베일에 싸여있던 정진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원인은 질병이라는 정동영의 발언에 무게를 둬야할 것같다.
그러나 2005년 6월 27일자 노컷뉴스에 보도된 내용을 보자.
독일의 유력일간지인 디벨트 신문 24일자 9면 기사를 인용 보도했는데 그 내용은 '정 장관은 자신의 세 형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했으나 부친은 북한을 미워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얘기를 대북 강경론자들에게 자주 해준다며 이같은 행보로 정 장관은 노 대통령의 후계자로 간주되고 있다'는 요지의 기사다.
정동영의 세 형이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독일 디벨트지의 내용이 어떤 경위로 기사화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월간조선 2004년 10월호에 게재된 정진엽의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東泳이 위로 형들이 있었는데 일제시대와 6ㆍ25전쟁을 거치면서 다 죽었어. 병으로 죽고, 교통사고로 죽고 했지. 셋째가 아주 똑똑했는데 군용 전차에 치어 죽었어" 라는 증언으로 군용 전차에 치어 죽은 셋째를 제외한 세 형의 죽음은 디벨트지의 기사대로 인민군에 의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때 (정 장관의) 부친과 아들들이 빨치산에 붙잡혔으며, 부부는 빠져나왔으나 아들들은 비극을 맞았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으며 부부가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인민군에 협력하는 조건으로 방면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회문산'소재지인 구림면은 '여순 주둔 국군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회문산(순창군 구림면 소재 800고지)'등지를 발판으로 활약하던 빨치산들이 1948년 부터 지방민들을 괴롭혀 왔다. 1949년 괴멸되기 까지는 '김지회부대(구빨치)'가 활동했고, 6. 25동란 중인 1950. 9. 28 서울수복 이후에는 낙오병과 합세한 이현상 등의 남부군이 '회문산'에서 활동하다 1951년 초봄 소백산맥 방면과 변산반도 쪽으로 탈출하면서 회문산 빨치산 시대는 끝이 났다.
사람들에게 까마득하게 잊혀졌던 '회문산'이 세상 밖으로 등장한 것은 회문산 빨치산이었던 이태가 1988년 소설 '남부군'을 출간하면서부터였다. '회문산'에는 '전북도당사령부'와 '빨치산 간부교육장'인 '노령학원'관련 흔적들이 잘 복원되어 있어 빨치산들의 치열하고 처절했던 질곡의 세월을 느낄 수 있다. 이들은 낮에는 은신처에 잠복해 있다 해가 진 후에는 마을로 내려와 양민을 학살하고 양식을 약탈해 갔다. 빨치산이 출몰하던 지역에 살던 생존자들은 낮이면 대한민국 땅이었으나 밤이면 인공 세상이 되는 실정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이렇듯 낮과 밤의 주인이 다른 두 세상을 살아가던 6.25동란 중에 구림면장을 역임했던 정진철 일가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해방 이후 애기면장을 한 탓에 정진철의 행적은 6.25동란 발발 후부터 9.28 수복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소상히 밝혀져 있다.
정진철은 1946년 12월 5일 구림면의 2대 면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 7월까지 1년 7개월의 在任과 그 수 5년간의 공백기를 거쳐 1953년 5월 20일 제7대 면장으로 취임, 1955년 5월 25일까지 2년 간 재임, 1956년 8월 13일 실시된 2대 지방 의회 선거에서 순창 제 2선거구의 자유당 후보로 출마, 전라북도 도 의원으로 당선됐던 기록이 순창군에 보관된 자료(순창군정사지 772쪽, 1998년 발행, 전북 순창군)에 남아있다.
여기까지는 순창군정사지와 정동영의 발언 내용이 동일하다. 그러나 지난 해 열우당의 김희선 친일 특무 애비 은폐 사건의 여파로 소속 의원들의 부친에 대한 친일 의혹이 도마에 오르자 정동영도 피해갈 수 없었다. 有數의 언론사들이 앞다퉈 정진철의 행적을 취재 보도했으나 동일한 상황에 대한 증언 내용 중 상이한 부분들이 드러났다.
월간중앙은 2004년 10월호에 정동영 장관의 작은 숙부 정진형씨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의하면 정진철은 구림면 대한청년단장으로 활동하며 길 안내 등으로 국군과 공비 토벌작전을 도왔다고 한다. 빨치산과의 공방을 거듭하던 중 정진철도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데, 국군의 서울 수복일인 1950년 9월28일(음력 8월27일, 정진형씨는 음력 날짜를 정확히 구술했음) 빨치산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면서 구림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학교 운동장 모퉁이에 마을 주민 28명을 모아놓고 학살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당시 학살 대상이었던 정장관의 부친은 학교로 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미리 도망쳐 죽음을 모면했다는 증언을 했다.
일국의 재상으로서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패륜의 극치를 보여주었던 사건인 '당시 먹이고 재워준 대가를 지급하라'는 소송으로, 지난 3월 28일 전주지법 민사11단독 이민호 판사로부터 "숙부 정모(76) 씨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는 화해 권고결정에 의해 1000만원을 지급받은 정동영이 중.고교 시절에 의탁했던 숙부 정진엽의 월간조선 2004년 10월호 인터뷰 기사를 보자.
정진엽씨는 정진철이 다녔던 금융조합의 직원은 서너 사람으로 해방 직전까지 4~5년간 근무했으며, 해방 이후에도 계속 근무하던 중 美 군정 시절인 1946년 12월에는 똑똑하므로 당시 순창군수가 면장으로 임명하여 전국에서 가장 어린 官選(관선) 면장이 됐다며 정부 수립 이후에는 民選(민선) 면장을 하다 6ㆍ25를 맞았다고 증언했다.
일제시대에는 식산은행 산하 금융조합에 근무했고, 美 군정과 대한민국 정부下에서는 면장을 지낸 정장관 부친은 어떻게 학살을 면했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진엽씨는 인민위원장을 맡았던 張씨라는 사람이 정장관 부친에게 몸을 피하라고 귀띔해 줘 그 말을 들은 정진철은 상황이 급박하다고 판단한 후 바로 산으로 도망쳐서 살아남았다고 했다.
좌익들에게 살해돼 시체로 발견되어야 할 사람인 정진철이 赤治下에서 살아남자, 이번에는 국군에 의해 부역 혐의자로 조사를 받게 됐다.순창 읍내에 주둔했던 국군 11사단 정보과에 잡혀간 정진철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좌익에 연루된 것은 아닌지에 대해 군의 철저한 조사를 받은 후 풀려났지만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한 처지로 그냥 있다가는 죽겠다 싶어 국군에 협조하기로 하고 대한청년단 순창郡 구림面 단장을 맡은 것이라고 증언했다.
대한청년단은 1949년 12월 19일 결성됐고 전쟁 중인 1950년 12월에 국민방위군으로 개편되어, 17~40세의 단원들은 제2국민병으로 소집되어 국민방위군을 조직 훈련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사건으로 말미암아 방위군이 해산되고 활동이 침체된 상태에서 1953년 9월 10일 해체되어 민병대에 편입된 단체다. 그러므로 정진엽씨의 증언에 의하면 정진철은 대한청년단이 해체되기 직전 무렵에 가담한 것이 된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을 놓고도 형제간의 증언이 상이한 경우도 드물 것이다. 정진엽씨의 증언에 의해 새롭게 들어난 흥미로은 사실이 있다. "정부 수립 이후 民選(민선) 면장을 하다 6ㆍ25를 맞았다"는 증언으로 정진철은 6.25 발발을 전후한 시기에 구림면장 신분이었으며, 대한청년단 활동 계기는 인민군 치하에서 살아난 후 즉, 서울 수복일 이후 국군측의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입하여 활동한 것이었지 애국심의 발로였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아뭏든 시대와 상황에 따라 화려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것은 사실인 것같다. 1920년에 사망한 정진철의 조부는 일제시대에 '천석군'으로 순창에서 이름을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단한 지주였다고 한다. 정진철의 조부는 여섯 아들에게 땅을 골고루 나눠 줬기 때문에 1940년 마흔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정동영의 할아버지도 대략 30마지기(약6000평)의 땅을 물려받아 일제시대에도 작은 지주였다니 정동영 장관의 집안은 땅을 소유한 매우 유복한 집안이었던 것이다.
친일 지주출신이며 식민지 착취의 최일선 기관인 '금융조합출신'에서, 우익청년 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낮에는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관'의 편에 서고, 밤에는 '신빨치' 전북도당사령부의 활동물자를 공급해야하는 상황에서, 자식 넷을 잃으면서도 꿋꿋이 고향을 지키고 살아남아 임차주(자유당, 3대 국회의원) 의원 수하에서 활동하다 급기야는 임차주 의원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도의원을 하기까지의 변신 과정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어쨋든 친일 지주였으며 면장이었던 정진철씨가 어떻게 인공 치하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는지는 대단한 수수께끼다. 그런데 근래 정진철씨가 인공 치하에서 임실면 단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었다는 모 前의원의 증언을 비롯하여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다수의 분들이 있다는 괴소문이 항간에 떠돌고 있다고 한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 날리 없다는 속담도 있듯이 지금까지의 사례로 보아 소문이 소문으로만 끝나지 않았음을 익히 아는 국민들은 차기 대선 주자로 유력한 정동영 장관이 괴소문에 대한 眞僞與否를 국민 앞에 명백히 밝혀주길 바라고 있다.
대통령을 꿈꾸는 자로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켜 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국민은 자신들이 선출할 대통령 후보에 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소문이라도 검증 또 검증해야 한다.
우리는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장인 권오석이 진영면장을 비롯한 마을 주민 11명을 죽창으로 살해한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소문을 듣고도 검증을 소흘히 했고, 6.25 전쟁중 양민 학살의 주동자였던 장인의 과거사를 지적하자 "그러면 아내와 이혼하란 말입니까."라며 오히려 상대를 "장인 문제를 가지고 이혼을 강요하는 비정한 자"라고 뒤집어 씌우는 생뚱맞은 장면을 연출한 노무현에게 인정 많은 국민들이 깜빡 속아 넘어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결과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국헌을 문란케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트리는 작태를 서슴없이 자행하여 대한민국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또 다시 2002년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도 검증하고 또 검증한다하여 탓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 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 했다. 차기 대통령을 꿈꾸는 정동영 장관은 국민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 줘야 하며 돌다리도 두드려 본 후 건너려는 국민의 심정을 헤아려야 할 것이다.
첫댓글 노정부는 반드시 차후 여기에대한 답변이 있어야될것이다
정동영은 안됨1
똑같은코드가 무얼 의미하는가 이대로가다간 좌초할것같군요.. 요직에있는분들 오만방자가 극에달하는군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