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폰 비스마르크
출생-사망 : 1815.4.1 ~ 1898.7.30
국적 : 독일
활동분야 : 정치
출생지 : 프로이센의 쇤하우젠
주요저서 : 《회상록 Gedanken und Erinnerungen》(1898∼1919)
독일의 정치가. 프로이센 총리로 ‘철혈정책’으로 독일을 통일했다. 보호관세정책으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통일 후 유럽의 평화 유지에 진력하였으며 여러 동맹과 협상 관계를 체결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독일 통일과 국가 발전에 큰 공적이 있다.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지방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한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다(1836∼1839). 호전적인 기질로 대학 시절 친구들과 싸움이 잦았으며, 처음 맡은 베를린 법원 견습 서기직도 성격에 맞지 않아 자주 자리를 이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847년 독실한 신자였던 여성과 결혼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독실한 신도가 되었으며 내면의 변화가 시작되었고 이후 프로이센 연방의회 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하였다. 베를린의 3월혁명(1848) 때는 반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 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혁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1851∼1859)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통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후에는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다.
18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그는 러시아 주재대사(1859), 프랑스 주재대사(1862)가 되면서 안목을 넓혔고, 18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 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던 시기에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그는 취임 첫 연설에서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라고 선언하며 이른바 ‘철혈정책(鐵血政策)’의 의지를 밝혔다. 그는 의회와 대립하면서도 독단으로 군비확장을 강행하였고, '철의 수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결국 그는 1864년, 1866년 두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하였고, 나아가 1870∼1871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1871년 독일제국 총리가 되어 1890년까지 이 지위를 독점하였다.
경제면에서 그는 보호관세 정책을 써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정치면에서는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 유지에 진력하였으며,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호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를 고립시키려 했고, 독일의 국력을 신장시켜 그 지위를 높이려 했다. 한편 그는 러시아투르크전쟁(1877) 후 베를린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는데, 일례로 1872년부터 카톨릭교도들을 억압하기 위해 ‘문화투쟁(Kulturkampf)’을 시도했으나 실패하며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사회주의자 진압법(1878)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 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 등의 사회 정책을 추진하여 사회주의 세력을 와해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증가하고 그는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다.
그는 원래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 ·카메룬(1884), 독일령 동(東)아프리카(1885) 등을 경영하였다. 그의 집권 아래 독일 공업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 집권 말기에는 그의 평화 정책에 반대하는 제국주의자가 늘어갔다. 18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한 후 정책의 주도권을 놓고 비스마르크와 충돌하였으며 1890년 3월 사직서를 제출하도록 압박함으로써 28년간의 비스마르크의 정치가로서의 수명은 끝을 맺었다. 그의 《회상록 Gedanken und Erinnerungen》(3권, 1898∼1919)은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