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거짓말을 잘도 해댄다. 녀석의 말대로 내가 인정하지 않지만, 선의로 포장한 거짓들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처럼. 뭐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몰아쳐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을 거다. 그러나 도준이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풍전등화처럼 너무 위태롭다. 보러가겠다고 말했다면 내 말은 곧 바람이 되어 힘겹게 버티고 있는 녀석을 꺼뜨렸겠지. 바람이 지나가고 나면 언젠가 또 다시 불은 켜질 것이다.
한동안 버티던 호롱불은... 결국 또 꺼지고 말아. 바람에 의해서. 바람 같은 나로 인해서 도준인 무너지고 만다. 나는 친구를 그렇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 니 뜻... 충분히 알아들었어. 그렇지만, 보러 가줬음 좋겠다. "
슬픈 미소 뒤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 내 말 알아들었단 놈이 아직도 그 소리냐? 먹고살기 바쁘다. 그런 데에 시간낭비 하고 싶지 않아. "
내 마음이 말한다.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만한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자꾸 녀석이 걱정된다고. 사람이 죽어간다는데 그거하나 못해 주냐고. 그렇지. 사람이 죽어 가는데 이렇게 몰인정하게 굴 수는 없는 거지. 막 입을 떼려는 찰나, 이번에는 머리가 말한다. 괜찮은지 들여다보고 상태가 정말 심각하다면 냉정하게 돌아설 수 있겠느냐고. 그게 아니라면, 도준이와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걸 감수해가며 녀석과 잘해볼 생각이냐고. 아니. 그럴 수 없다. 난 그런 길을 선택할 자신이 없었다. 단지 걱정스러울 뿐이다. 걱정되면 문병쯤이야 갈수 있는 거잖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러나 일이 거기서 그칠 거라고 장담할 수 없는 점이 문제였다. 녀석과 나를 연결시켜주는 끈은 생각보다 질기기 때문에.
" 시간 내봐. 오늘은 내가 양보할게. 이틀 뒤....... 희로 집으로 가라 "
" 싫다잖아, 새끼야! 싫다는데 왜 자꾸 보채, 보채기를!! "
자꾸 흔들리게 하지마라, 김 도준. 나 .... 너 때문에 겨우 버티고 있거든? 내가 얼마나 녀석으로 인해 패닉 상태에 빠져 지냈는지 모르면서 흔들어 대지마. 그러니까..... 그러니까 ... 내 맘이 버텨줄 때 그냥 가라.
"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차 잘 마셨다. "
마치 무리의 대장이라도 된 듯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유유히 사라졌다.
" 못 이긴 척 그냥 가지. 내가 가면 너 상처받을 거잖아.....그럴 거면서...... 나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씨X... "
* 다음날 *
출근 전 요란한 벨소리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몇 번 본적 있는 번호였지만 확실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 설마.. 너는 아니겠지? "
- 설마 그 너가... 나는 아니겠지?
젠장! 온몸에 털이 곤두섰다.
" 뜸해서 포기한줄 알았는데 웬일이냐? "
- 번호를 알아내느라 시간 좀 투자했지. 그래서 반갑다는 거야?
" 자존심이란 게 있긴 하냐? "
-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긴 있을걸!
풉.... 얘가 농담도 할 줄 아시네.
" 용건이 뭐야? "
- 말하면 들어줄 거야?
" 욕 안할 때 말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
- 하고 싶음 해도 돼.. 난 니가 욕할 때 섹시 하더라.
뭐..... 뭐 이런...!!! 이러니까 욕을 못 하겠잖아 , 젠장. 정신 나간 정미계집애는 신호 없는 내 반응에 혼자 큭큭 웃는다. 아우 정신 사나워. 한 가지씩 힘들게 해주면 얼마나 좋아.
- 마 현성! 그때 그렇게 말했는데도 연락이 없었던 건 니가 여자 생각을 단 한 번도 안했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여자 생각 할 정신이 없었단다. 이 팔팔한 청춘에 난 남자들과 삼각관계에 빠져있거든.
- 휴........... 너 ... 성 장애 있니?
" 뭐.... 뭐야?!!! "
- 아니면... 게이야? "
이게........ 왜 또 전화해서 사람 속을 긁어대, 씨X! "
- 어떻게 21살 남자애가 그렇게 오랫동안 참을 수 있지?
" 참았다고 누가 그래?! "
결국 또 쓸데없는 오기가 발동하고 만다.
- 참은 게 아니라면?
" 세상에 여자가 너 혼자냐? "
- 풉....... 믿으란 거야?
" 말든지. "
초등학생들도 아니고 말싸움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러다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끈질긴 정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장소에서라면 더더욱... 날 놓치고 싶지 않을 거야.
" 야 "
- 응?
" 만날래? "
- 지금?
" 아니, 내일 "
- 나야 좋지~ 어디에서?
" .....XX동....XX모텔에서. "
- ............진심이야?
" ................... "
- ..........뭐... 상관없어. 내일 보자, 쪽-
뚜..뚜... 미친 짓 같았지만 나를 믿을 수 없기에 그래야만 했다. 평탄한 우정과 인생을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었다. 서 정미.. 제발.. 니가 나 좀... 못 가게 잡아줘라..
탈수된 자신을 느끼면서도 가만히 죽음을 기다려야함은 엄청난 고문이었다. 오아시스까지만 가면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눈앞에 보이는 저기 저곳에 날 살릴 수 있는 물이 있는걸 아는데 알면서도 갈 수가 없다. 근육이 찢기는 것 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는 건 죽는 순간까지 벌을 받는 기분일 것이다.
아르바이트는 하루 쉬도록 허락 받았고 이제 정미와 약속한 모텔로 가기만 하면 된다. 내 발길이 녀석이 있는 그 집으로 향하지 않게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 정미와 있어야 하는 게 달갑지 않았지만 내가 싫어하는 만큼 나를 좋아해주는 정미와 투덕거리다 보면 잊을 수 있으리라. 설령 마음이 바뀌어 모텔을 뛰쳐나가려 하더라도 정미는 다 된 밥을 어떻게든 입안에 넣으려 필사적일 것이고 끈질기게 설득하여 나를 잡아 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꼭 그래야만 했다. 나도 남잔데 솔직히 홀딱 벗고 덤비는 여자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그게 하필 정미라는 것이 찝찝하긴 하지만 난 분명 성적인 감정을 느끼는 상대가 여자이므로 눈 한번 딱 감으면 이상한 길에 빨려 들어가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덧 나는 약속한 모텔 앞에 도착했다. 이상하게 정미에게는 늘 몸이 먼저 반응한다. 지금도 자꾸만 뒤돌아 가려는 발을 힘겹게 붙잡아두고 있는 중이다. 오늘도 역시 머리와 마음은 엇갈린 의견으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며 이번엔 몸조차도 기꺼이 한몫을 하고 만다. 몇 십 분을 모텔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금세 어둑해진 하늘엔 노란 달만이 나를 애처롭게 내려다본다. 지나가는 몇몇의 행인이 모텔 앞에서 알짱대는 나를, 그렇고 그런 눈으로 쳐다보긴 했지만 정작 신경 쓰이는 건 그들의 시선이 아니었다.
8시가 넘고 9시가 넘어갔다. 두 시간이 넘도록 모텔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 나. 저기만 넘어서면 되는데 머리와 마음의 싸움은 좀처럼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바지 주머니에서 징징 울어대는 핸드폰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정미일 것이다. 받지 않는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정미로부터 도망치지 않을까 해서이다. 정미가 아닌 나를 위한 일이래도 이것은 어떤 일 보다 결정내리기 어려웠다. 진동이 멈추자 물고 있던 담배를 수많은 꽁초 속에 던져 끄고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 김 도준' 이란 이름으로 부재중전화와 메시지가 와 있음을 보고 심장은 급격히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젠 도준이란 글자만 봐도 녀석이 떠오르니 환장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심스레 화면을 터치했다.
* 희로한테 거짓말 하는 놈으로 찍히기 싫다 *
안 오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보다 더 끔찍한 협박이었다. 도준이가 녀석에게 그러하듯 나 또한 자신에게 한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다시는 녀석을 만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다짐하고 약속했다. 쉴 새 없이 떠올렸음을 부정할 순 없지만 떨쳐내려 노력한 것 또한 명백한 사실. 선택의 기로에 선 나는 1시간이 1분처럼 흘러가는 긴박함 속에 있었다. 잠시잠깐 고민에 휩싸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한 시간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결정은커녕 단 1% 도 어느 쪽으로 기울이지 못하고 있을 때 인내심이 한계에 도달했는지 정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응 "
-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니?
멍청하고 싸구려 계집애라 생각했던 정미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망설이고 있는 나를 알면서도 지금까지 조용히 기다렸단 걸 봐서 그 사실은 더욱 더 명확해졌다. 요즘 애들처럼 당차고 저돌적이었을 뿐 머리에서 깡통소리 나는 아이는 아니었던 거다. 남자라면 대부분이 혹할 이런 기회조차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보 같은 나를, 정작 약속한 시간보다 5시간이나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던 정미였다. 그렇다면 나는...... 진심으로 다가서는 누군가를 방패막이로 이용해도 되는 걸까. 비겁한 사람이 되지 말자는 내 신조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사람감정을 농락하는 천하의 몹쓸 놈이 되는 일이었다. 난 순간 눈앞에 번쩍 하는 불빛을 본 듯한 착각에 빠졌다. 정미의 진심을 알게 되는 순간, 어떤 것이 더 하기 쉬운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 미안하다 "
- ........ 후.... 너란 아이는 참..
" 여자 혼자 그런데 있지 말고 얼른 집에 가라. "
- 뭐.. 있을만하네. 덕분에 모텔 구경 잘했다, 마 현성!
" ......미안........ 하다...... "
전화를 끊기도 전에 내 발은 이미 녀석이 있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만의 오아시스를 찾아.
첫댓글 글 정말 잘 읽고 가요
이제야....희로에게 가네요...답답한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