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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db.history.go.kr/id/ma_016_0030_0090
친애하는 여러분이시어! 나는 미국에서 본국 게신 여러분에게 둘재번 올니는 편지를 써 부친 뒤 수일 뒤인 1월 15일 새벽에 매연과 「모-터」소리에 잠긴 유육시가(紐育市街)를 뒤에 두고 부두에 나가 아일랜드로 가는 배를 집어탓소이다. 미국에 더 잇스면서 자본주의국가로 가장 고도의 단계에 이르럿슬 뿐더러 (中畧-원문) 이 나라의 정치와 경제조직이며 사회사정등을 더 만히 살피고 십헛스나 압길이 급한지라, 그냥 떠나기로 한 터이외다. 그렇다해도 미국에 여러 달 머무른 사이에 이 나라 민중의 기실이란다든지 또 노농 러시아(勞農露西亞)와 양극단에 잇서서 세계의 문화를 풍미하고 있는 「아몌리카이즘」을 보았는데 대개는 시사와 정치에 관계되는 것임으로 (삼천리)「三千里」지(誌)를 통하야 말슴들일 자유가 업서서 그냥 지내가기로 한 것이외다. 실상 저도 여러 도시에서 재류(在留)동포들을 위하여 또는 미국인과 유럽인을 위하여 청하는대로 목이 쉬게 연설도 수십 차하였고 그 반대로 내가 저곳 명사를 일부러 찾아가 손목을 붙잡고 열열히 협의한 일도 많으나 그를 아니 적는다고 여러분께서 상상도 못하여 주시랴. 좌우간 나는 그 달 22일에 남부 아일랜드의 유명한 항구 「쿠인스타운」에 도착하엿소이다. 태평양을 건널 때에 그 배 사무장이 일일이 해양을 지적하면서 '저기에서는는 몇 해 전에 빙산에 부딪친 「다-다넬」호 기선이 침몰된 곳입니다. 또 저기는 영불연합함대(英佛聯合艦隊)가 세계대전란(歐洲大戰亂)때에 독일 잠항정(獨逸潛航艇)때문에 여러 번 격침당했던 곳입니다'이라든지 하는 설명을 들을 때에 실로 새삼스럽게 몸에 소름이 끼치더이다. 저 아무 근심업시 양양(洋洋)히 흐르는 바다몰 우에 온갖 두러운 비극이 이르낫겟거니 그래서 우리 배가 지금 지내는 이 바다 밋 속에도 수만의 생령(生靈)들이 아직 호곡(呼哭)하며 잇겟거니하면 엇전지 머리가 차지더이다. 더구나 천애(天涯)에 흐르는 외로운 나그네(孤客)이매 저녁햇빛에 물드린 대서양의 망망(茫茫)한 해상을 바라볼 때에 그 순간에 향수에 아울러 이러한 감상적 정회(情懷)가 이러남을 금할 길이 업더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도착한 「쿠인스, 타운」항구로 말하면 속칭 '황후촌'이라 하야 얼마 전까지도 시가찬연(市街燦然)한 훌융한 도시이더니 수백년래 영국령이 되어 오는 동안에 부절(不絶)히 이러나는 전쟁때문에 그만 말할 수 업시 황폐하여저서 여러 곳곳에 총화(銃火)의 세례를 밧은 건물과 파손된 거리때문에 처참한 늑김을 가지게 하더이다. 나는 8시간을 이 항구에 배가 정박하는 틈을 타써 동선(同船)하엿든 「캐나다」 신펜 당지부장 부부와 함께 택시를 불너 타고 시가를 지나 그 곳 공원에까지 올라가 보앗는데 서방에 보이는 아일랜드의 전야(田野)도 모다 전쟁을 치고 난 자리가치 지름끼라고 업고 수목도 불에 탄대로 잇고 도로나 교량도 파훼(破毁)된 것이 만헛더이다. 민중의 건물인들 미국에서 보든 것 가치 정미(整美)한 것이 하나인들 어대에 잇스리까. 실로 모든게 처참하다 함은 이를 가르친 듯 하더이다. 그래도 요지음에는 자유국이 된 뒤에 신정부의 손으로 부흥사업이 성(盛)히 이러나는 모양으로 길가마다 새로운<15> 가로수가 서기 시작하고 또 도시의 구역도 개정이 되며 좌왕우래(左往右來)하는 아일랜드인의 얼골 우에도 희망과 정열의 빗치 떠오르더이다. 나는 이 모양을 보고 잿 속에서 날개를 털고 이러나는 「불사조」라는 새를 생각하엿소이다. 아일랜드와 아일랜드 민족을 보고 죽지 안는 새를 연상(聯想)한 것이 엇재 올흔갓해서요.
친애하는 여러분이시여! 나는 다시 「쿠인스, 타운」을 떠나 영국 「립퍼불」항구를 잠시 거처 4시간만에 북아일랜드에 잇는 「캉스, 타운」항구에 도착하엿소이다. 이 '황제촌'이라 함은 북아일랜드의 유명한 항구요, 또 아까의 '황후촌'(皇后村)이라는 것이 남아일랜드에 엇는 유명한 항구로 되어 이 두 항구가 장구 모양으로 양쪽에 벌러잇스면서 아일랜드 자유국의 문명과 온갖 국가의 경제를 대부분 삼키고 뱉고(呑吐)한다 하더이다. 여기서 기차로 아일랜드 서울인 「떠부린」시내를 직입(直入)하는 터이니 겨우 자동차로 40분만 가면 된다 한즉 마치 우리 서울과 인천항의 관계와 흡사하다 할 것이외다.
그런데 나는 이번 세계일주 여행에 아일랜드에서 몹시 치중하엿스니만치 미국잇슬 때에 벌서 아일랜드 여행의 만흔 편의를 가젓섯스니 즉, 내가 아메리까 「픽스킬」피서지에서 어학공부를 하고 잇슬 때에 수십만 재미 아일랜드인(數十萬 在美愛蘭人)을 거느리고 잇스면서 신펜黨紐育洲總支部長(신페인당 지부장)으로 잇는 M博士를 갓가히 알게 되어 氏로부터 「떼벨라」氏에게 친절하게 소개하는 장문의 서찰을 지녓섯고 또 뉴욕(紐育)에 이르러 「빗세이」 즉 여행권(旅行券)의 사증(査證, 비자를 말함.)을 얻을려고 아일랜드 총영사관에 가서 총영사를 만났을 때에도 벌서 나의 말을 들엇슴이지 기다리고 잇섯든드시 아일랜드 사정을 속속드리 잘 설명하여 주며 그 우에 아일랜드 정계의 여러 명사에게 소개하여 주는 글발을 하여 줌으로 그도 또한 지내게 되엇스니 이것은 아일랜드에 처음 여행인 나에게는 실로 큰 소획(所獲)이 아니라 할 수 업섯나이다. 딴 말이나 뉴욕(紐育)에는 영국총영사관외에 당당한 아일랜드 총영사관이 잇서서 아일랜드인에 대한 것은 전부 그 곳에서 처리하고 잇는데 자유국이 된 뒤로부터는 영국외교관들도 아일랜드의 외교에 대하여는 손끄락 하나 저치지 못하고 잇더이다. 아일랜드는 실로 자유롭더이다. 지배를 벋어나서 이제는 명실이 모다갓게 독립이 되어 잇더이다!
「떠부린」도시에 도착한 나는 즉시 택시를 불너 타고서 그날 오후 3시경에 떠부린 민립대학에 갓소이다. 『떼벨라」氏를 맛나자면 '민립대학으로 가라'는 말을 들엇기에 그래서 사무실로 드러가니 마츰 떼벨라氏는 2주일 전에 신페인당의 일로 남부 아일랜드로 출타하엿다 함으로 엇절가고 망서리는 까리에 그곳 대학교 노교수(老敎授) B博士가 나오면서 '무슨 일이냐'고 뭇기에 나는 코리안사람으로 '아일랜드 방문을 왓노라' 하는 말과 '미국 「픽스킬」에서 가지고 온 소개장'을 내어 보이니 그 분은 크게 반기면서 응접실에 잇글고 드러가서 멀니서 엇지왓느냐고 10년구지(年舊知)가치 정(情)을 보여 주더이다. 그 뿐더러 나종에는 교수시간(敎授時間)이 아니면 자기가 친히 압헤서서 안내하여 드릴것을 그만 시간때문에 못하는 것이 유감천만이라고 하면서 즉시 아일랜드 정청내무성(政廳內務省)에 전화를 걸어주더이다. 그리고 나더니 내일 아침 아홉시에 정청문(政廳門) 앞으로 가면 내각(內閣)의 비서가 나와 기대리기로 되엇슨 즉 그 시각에 가보라고 하더이다. 이러케 진정으로 주선하여주는 노박사의 심정에 한긋 논쾌(惀快)를 느끼면서 그날은 「호텔」로 도로 나와 피곤한 다리를 쉬엇소이다. 아일랜드는 정치적 환경이(略-원문) 같은 경우의 외국인을<16> 대(待)함에 유별함이 잇겟거니와 이와가치 하여줄 줄은 저는 몰랐소이다.
익일 아츰에 그 말대로 정청(政廳)으로 간즉 문전에는 무장한 파수병이 잔뜩 직히고 서서 자유국 창시초(創始初)의 소란한 분위기가 내외에 가득하더이다. 파수병 사이로 엇든 신사 한 분이 직히고 섯다가 나를 보더니 「미스터, 허」냐고 무르면서 마저 드리어 정청내무서로 잇글어 가기에 그 곳에 가서 약 5분간을 기대렷슬가 할 때에 내무차무격에 해당하다는 엇든 여관사(女官史) 한 분이 나와서 친절히 마저 주는데 그 분이 순수한 아일랜드(愛蘭)말을 하고 나는 겨우 영어를 번지는 관계로 우리의 대화는 몹시 지체난통(遲滯難通)이엇슴니다. 그는 답답하든지 중국말을 아느냐고 뭇기에 중국말도 아나 일본말도 안다 한 즉 즉시 「색크레타리」(秘書)를 불느더니 민립대학에 잇는 중국유학생을 불느더이다. (일본인이나 조선인으로 아일랜드에 유학하고 잇는 학생은 한 사람도 업다 하더이다.) 조곰 잇다가 남방 쑤저우 성(南方蘇州)에 산다는 중국인 청년 한 사람이 드러왓는데 그 사람 입을 거치는 중국어 통역은 더구나 말이 잘 안되기에 나는 사퇴하고 그제부터는 영어-일본어 사전(英和字典)을 끄내들고 한참 둘이서 책보며 이약이하엿지요. 피차에 땀이 빠젓스나 담화의 내용은 꺼림김 업는 중요한 것이엇소이다. 그런 뒤에 그 내무차관이 그 때 마츰 개회중의 아일랜드 의회와 고등법원과 공소원(控訴院)의 서기장에게 전화를 거러주기에 나는 의회와 재판소견학을 할 차로 그곳을 나왓나이다.
그래서 바로 그 길로 재판소를 방문하엿나이다. 아일랜드의 법정결구(法廷結搆)의 웅대하다 함은 이미 듯던 말이나 실로 유명한 저 런던 재판소(倫敦裁判所)보다도 그 건물이나 설비(設備)에 잇서서 결코 지지 안터이다. 아일랜드도 역시 고등, 복심, 지방 3심제도 엇는데 영국과 미국의 법조계(法律界)와 달라서 아일랜드 불문법(不文法)을 만히 쓰는 까닭으로 법정안은 판결례(判決例)가 갓득 찻더이다. 그것은 실로 재판장의 등 뒤에서부터 피고와 방청객이 안는 자리의 등 뒤에까지 전부 장서벽(藏書壁)을 하여노코 연대순으로 판결례를 갓득 비치하여 두엇는데 그러기에 재판하다가도 재판장이든지 피고든지 변호사든지 제 마음대로 그 벽장의 문을 열고 판결례를 차저보면서 재판을 진행하더이다. 그리고 내외국서적이 그러케 만히 재판소에 비치되어 잇는 곳은 동양은 말고라도 영국,미국에도 드문것 갓더이다. 변호사공실(辯護士控室)에도 전속도서관(專屬圖書舘)이 잇고 판사에게나 검사에게나 모다 그러케 훌융한 도서실이 잇는 것을 볼 때 최신지식을 흡수하기에 급급하는 신흥국가의 의기가 경탄할 만 하더이다. 내가 재판소에 갓다고 분주한 분을 타서 남자 판사 3인과 여자 판사 한 분과 아일랜드 변호사 여러분들이 식당에다가 임시 환영연(歡迎宴)을 열고 환대하여 주더이다.(畧-원문) 그러고 재판소에서 나와 즉시 감옥구경으로 저는 떠낫슴니다. 감옥이 크고 깨끗하고 채풍통광(採風通光)이 잘되어 위생상으로 조흔것은 한갓 부러울 뿐이엇습니다. 그 속에는 연극장과 라듸요와 대규모의 도서실이 잇서 소정의 공장 노역 시간 이외에는 수인(囚人)들이 말숙하게 「세비로」로 차리고 제 마음대로 노더이다. 예컨대 그 속에서 뻬스쁠 경기대회도 열고 무도회나 음악회도 열닌다 하며 또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수인의 가족 그 중에도 애처(愛妻)들이 감방에 가치 드러와 즐겁게 하로 이틀씩 지내다가 가기까지 되어 실로 문명국가의 금도(襟度)가 달는 것을 깨닷하게 하더이다. 저도 감옥의 청(請)으로 수인 압헤서 강연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엇나이다.
친애하는 여러분이시여! 재판소와 법정을 나와서 나는 앗가 내무차관이 주든 상하양원의 방청권을 가지고 아일랜드 의회의 방청으로 갓나이다. 그런데 나가 드러갓슬 때는 하원의 의제(議題)는 무슨 법률안 토의가 되어서 자미 업서 곳 나와서 상원으로 갓나이다. 상원은 총의석 65, 6개중 결석의자가 겨우 3, 4개에 불과하고 그 외는 전부만석된 장내에서 모다 항분(亢奮)의 되어 설단화(舌端火)를 토하며 국사를 격렬히 논전하는 중이엇슴니다. 나는 나를 인도한다고 따라왓든 정청(政廳)외 비서관에게서 오늘 의사 일정이 마츰 중국문제의 토의라고 하는 말은 들엇나이다. 즉 여러분도 아실 터이나 장작림이 쫏기여 만주로 가다가 죽고 장개석이 정권을 잡음과 동시에 난징사건 제남사변이 첩출(疊出)하야 영국에서는 대거 중국에 한창 출병하든 때엇슴니다. 매일 신문을 보아도 오늘은 영국에서 육전대 몃천명과 군량 얼마를 싯고 군함 몇척이 중국을 향하야 출발하엿다 하는 등의 기사로 국민을 흥분케 하든 때라 그 때 아일랜드 의회에서도 영국의 이 대 중국 출병의 군사비를 부담할 것이야 아니할 것이냐 하는 것을 토의하는 마당이 되엇는데 그 날은 결국 현재 중국에는 영국인민은 만히 거주하는지 모르나 아일랜드 자유국 인민은 단지 7인밧게 거주함이 업슨 즉 무용한 출병의 군사비를 지불할 필요가 업다고 만장일치로 부결이 되더이다. 그 날 내가 계단 위 방청석에 잇스매 의석에서 소근소근하그 소리와 가치 그 만흔 사람들이 나를 연(連)해 주의하여 보면서 의원들이 의장을 부르며 연설할 때에도 맨 처음에 나의 좌석을 주의잇게 보고 연설을 비롯하더이다. 나는 이 의회장내의 주의인물이<17> 되엇스나 그 태도가 조곰도 업서 보임은 스사로 깨다를만 하더이다. 뒤에 비서관이 하는 말을 드르면 아일랜드 상원의원들은 그 날 내가 간 것을 런던 잇는 중국 공사관 참사관 (中國公使舘叅事官) 되는 분이 일부러 영국출병문제로 아일랜드의 공정한 여론를 듯고 저 의회에 차저 온 줄만 알고 그리하엿다 하더이다. 그 뒤 상하의원들과 회담할 기회가 잇슬 때에 그 분들이 「중국사람이냐」고 뭇길래 난는 솔직하게 중국인은 아니나 조선인으로 중국과 순치(脣齒)의 관계에 잇다고 잘 설명하엿드니 그런가고 하며 대단히 깁버하면서 지금 아일랜드(愛蘭)은 신흥하는 중국국가에 만흔 기대와 원조를 악기지 안는다. 이약이 하더이다. 그리고 또 조선사정에 대하여(중략-원문) 만히 알고 십흐니 귀국하거든 신문잡지와 서책(書冊)을 만히 보내달라고 비단 의원들 뿐아니라 각 대학과 재판소와 기타 단체에서 열구(熱求)하기에 런던(倫敦)와서 위선 본국 신문과 조선사정집 둥을 여러 곳에 보내어 주었나이다. 그리고 동아일보 사원의 명단을 가지고 떠부린에서는 제크다는 「인덴펜스」란 신문사를 방문하여 그곳 간부를 맛나고 아일랜드의 현재와 과거에 대한 조흔 자료를 만히 어덧소이다.
수박 것할키라하여도 너무 어이가 업시 쓰고 십흔 말을 모다 빼어버리게 되어 슴슴하기 짝이 업슴으로 이 따위 말을 작고 하기 죄송하와 부활하는 아일랜드의 사정을 이에 끗치고 이제는 세계최대의 강국이라든 영길리(英吉利)로 기행의 발길을 옴겨놋나이다.
친애하는 여러분이시여! 나는 외지에 가면 의뢰히 그 도시의 지도를 몬저 싸고 그러고 자석을 사서 차고 그러고는 고국 사람부터 차저가는 법이외다. 지도는 시가의 교통상황을 알자는 초보자의 용심(用心)이요 자석은 영국가치 구름과 안개(雲霧)가 만히 끼어 눈 압히 보지 안는 곳에서는 밤이나 낫이나 간에 동서남북의 방향을 알기 위함이요 우리 형제를 차즘은 안내를 청하기와 우리 사람의 사정을 알자는 까닭이외다. 그래서 저는 「떠부린」시에서 떠나 런던(倫敦)에 왓다가 즉시 아츰 차를 타고 「켐뿌릿지」시에 이르럿사외다. 캠브릿지 대학(劍橋大學)의 법과대학에 잇는 오랜친구 박석윤군을 선착(先着)으로 맛나자는 까닭이외다. 캠브릿지 시(劍橋)는 크더이다. 20여만이 되는 시민들이 전부 대학때문에 살아가는 것 갓하야 굉장한 대학 교사(校舍)가 전 시를 덥고 잇는 속에 상인들은 그주위을 들너싸고 영업하여 가는 듯 하더이다. 옥스퍼드 대학(牛津大學)이나 이 캠브릿지 대학(劍橋大學)이 모다 세계적으로 일흠이 놉흔 것에는 틀님이 업스나 이러케 건물이 고무에고 대규모일 줄은 몰낫슴니다. 결국 그 날 오후 4시반경에 박군이 유학한다는 법과대학을 차저 갓소이다. 법과대학은 시가를 지나 교외라고 할 만한 먼 발층에 따로 떠러저 잇는데 기숙사로<18> 가니 미리 통기(通寄)하여 두엇슴으로 잇서 주어야 할 박군이 업더이다. 나는 저윽히 실망하면서 일곱시까지 그 대학 강당과 도서실로 도라다니면서 매우 기달렸나이다. 그러나 박군은 여전히 아니오더이다.
그런데 큰 일은 나는 오늘밤 안으로 기어히 런던으로 도라가야 함이엇사외다. 그 까닭은 내일 아침에 일즉히 오사카 매일신문 특파원과 가치 나는 동아일보의 특파원자격으로 런던(倫敦)「타임스」신문사롤 견학차로 가기로 되어 타임스 신문사와 긋게 약속하여둔 터임으로 만사불계(萬事不計)하고 가야 하는 것이외다. 런던 갈 막차시간은 점점 박두하여 오는데 박군만은 여전히 아니오더이다. 나는 기다리다 못하야 대학구내를 뛰어 나왓나이다. 어듁컴컴한 거리에는 사람 하나 구경 할 수 업고 가로의 전등불빗도 사오마장(四五馬場)에 한 개씩 보일 뿐.
나는 런던으로 떠나기로 결심하엿나이다. 그래서 정거장이 잇슬 방향을 향하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구부로로 닷기 시작하엿나이다. 영국은 신사국인 까닭인지 해질녘에는 행객(行客)이라고 업고 더구나 택시 가튼 것도 업더이다. 그래서 별로 길도 보지 못하고 한참 오는데 웬 남녀 둘이 남남접어(喃喃接語)하며 팔을 끼고 지나는 것이 보이더이다. 생각건대 분명 약혼 하엿거나 그러치 안으면 사랑을 속삭이는 청춘남녀의 커플 가트나 언제 남의 살피를 보고 안젓슬 때 오릿까 실례되는 줄을 알면서 그 압헤 가서 정거장 가는 길을 뭇고 또 런던 가는 막차가 아직 잇겟느냐 하는 것을 불숙 무럿소이다. 그랫더니 그 청년신사는 스텍기끗으로 이리 이리 가다가 요리 조리 빠지면 정거장이 나오는데 막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안어서 엇더케 될는지 크게 의문이라고 하더이다. 나는 일례(一禮)한 뒤 다시 두 주먹을 쥐고 「마라손」하기를 시작하엿소이다. 외투는 버서서 한손에 움켜쥐고.... 아마 조선이수로 2, 3리나 왓슬가 할 때에 누가 뒤여서 「미스터!!」 「미스터!」하고 목이 빠지게 부르면서 따라오더이다. 나는 웃뚝 섯슴니다. 그 소리는 내가 다라온 곳으로부터 작고 작고 나더이다. 나는 가슴이 덜컥 나려안더이다. 영국에서는 무인지경에서 흔히 저러케 따라와서는 육혈포(六穴砲)로 위협하면서 두 손을 들라하고는 금품을 강탈하여 가는 도적이 만헛스니까. 나는 이런 생각을 함애 섯불니 행동하다가는 목숨을 이를가 겁이 나서 더 도망할 기력이라고 업섯나이다. 이러한 경우에 도망하면 흔히 총살을 당하는 터이니까 실상 만리지국에서 일흠도 모르케 강도에게 개죽음을 당하고야 엇지 분하여 혼(魂)이라도 고국에 도라 가겟슴니까.
나는 허리에 찻든 돈 지갑(錢袋)를 얼는 풀엇나이다. 세계를 한번 보고 오자고 고국에서 사지를 12,000원에 팔아서 그 동안 2000여원은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쓰고 1000원은 영국에 떠러저잇는 딸 정숙(허정숙)에게 주고 아직 남은 현재 돈 8000여원을 이 지갑(錢袋)속에 너허 두엇든 것입니다. 은행에 맛기어 노코 각국 이곳저곳에서 가는 맛마다 차저 쓰고 십헛스나 그러자면 싯그러운 수속 등이 잇서서 전부 100불 1000불짜리의 고액의 지폐로 바꿔 지갑속에 너허 차고서 아모대나 여행할 때에 끄내어 쓰든 것이외다.
따라오는 그 사람은 점점 갓가워 오더이다. 나는 얼는 지갑를 달달 마라서 오른손에 쥐엇슴니다. 만일 저 쪽이 손을 들나고 위협하거든 드는 체 하면서 그 지갑를 얼는 겻헤 풀밧 속에 던저 버리려 하는 꾀 때문이엇소이다. 그런데 점점 갓가히 오는 사람을 보니 「미스터!」「미스터!」하든 그 사람은 다른 아모개도 아니고 악가 길을 가러처 주든 그 청년신사엇슴니다. 그는 숨을 급하게 돌녀 쉬며 「지금 당신을 보내노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필연 당신이 외국사람인 것 가튼데 길 일코 고상하는 모양이니 어서 가서 도아주고 오라」하기에 왓노라 하면서 자기가 몬저 서서 주석주석 정거장가는 길을 거러주더이다. 말만 드르면 이러케 고마운 일이 어대 잇겟슴니가. 그러나 엇재 너무도 기적(奇蹟)갓하여 나는 그 말을 밋지 못하겟더이다. 그래서 방심못하고 울며 겨우자 먹기의 심리에 갓갑게 그 뒤로 한참 따라가는데 얼마 가다가 호수가 나오고 그 호수 그 가운데 조고마한 오솔길이 잇뎌이다. 그 신사는 이 오솔길도 가면 매우 갓가우니 그리로 가자고 하더이다. 나는 첫마듸에 단연거절 하엿슴니다. 그 녀석이 호수 중구픔에 가서 나를 물에 탁 차 버릴는지 누가 압니까. 다른 큰 길로 가로 가자면 3, 4倍 더 도라간다는 간절정년(懇切叮嚀)한 그의 설명도 모다 뿌리치고 나는 큰 길을 잡어서 것기를 고집하엇나이다. 그도 마지 못하여 내 뒤를 따라오더이다. 한참만에 정거장에 왓섯나이다. 차(車)시간은 아직 남엇습데다. 그 신사는 그제야 마음에 모자람없이 흐뭇한듯 자기는 아일랜드인이 지금 앗가 그 곳에서 기대리고 잇슬 터이기에 도라간다 하며 가려고 하더이다. 그제야 나는 그 영국신사의 금도(襟度)를 깨닫고 그를 강도로 아러오든 제가 도로혀 붓그럽더이다. 우리는 다방(喫荼店)에서 차(荼)를 내어 마이고 여러번 악수한 뒤 갈라젓슴니다. 영국인 중 이런 분은 실로 정직고결한 신사더이다. 이제는 저는 런던으로 가나이다. 「맥드날드」도 맛나기로 되엇고 타임스 신문사로도 가보기로 되엇는데 저의 마음은 알 수 업는 흥분을 늣기어 지나이다. 그러면 여러분이시어 다시 편지 올닐 때까지 안녕히 계십시요. 아세아의 고국에는 아마 눈이 몸시 왓슬 줄 아나이다. 여기도 추어서 저는 열차 깐에 드러가면 외투를 뒤집어 썻나이다. (次號繼續) (19) <1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