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9년 1월 22일 밤 승정원에 한장의 봉서가 내려왔다. 그 봉서를 승지들이 뜯어보니 첫 머리에 중옹, 백이1) 란 글자가 있고 하단에는 을유 등록2)이란 글자가 있었다. 승정원에 내려온 봉서가 선위의 조서였던 것이다. 이전에도 간혹 영조가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자주 벌인 짓이기는 했지만 어찌됬든 신료들은 비상이 걸렸다. 왕이 세자에게 선위를 하겠다고 하면 일단 무조건 말리고 보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상식. 비까지 내리는 한밤중에 대소신료들과 세자가 모두 달려와 봉서를 거둘 것을 청하였다.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날이 지나 1월 23일이 되었다. 영조는 이 때 자신이 선위하는 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럼에도 신료들과 세자의 반대가 계속되었다. 이 때 세자는 울기까지 하였다. 영조는 선위의 영을 거두는 대신 대리청정의 전교를 내렸다. 김재로가 그것도 안 된다고 하자 영조는 그럼 다시 선위하겠다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신료들은 대리청정의 영을 받들겠다고 하였다. 그 뒤 영조는 이런 발언을 하였다.
“어린 세자로 하여금 아득히 국사(國事)를 모르는 상태에 두었다가 뒷날 만약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에 의해 그릇된다면 내가 비록 알더라도 어찌 일어나 와서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오늘 이 거조는 뒷날에 반드시 효험이 없지 않을 것이다.”
-위와 같은 기록에서 발췌-
사실상 이 발언은 위에 나와있는 선위 의사를 밝히는 5가지 이유 중 후반부의 2가지 이유와 함께 영조가 이번에 선위쇼를 벌이고 대리청정의 영을 내린 진짜 이유를 밝힌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영조가 선위 의사를 밝힌 것은 주로 노,소론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세자에게 국정 경험을 쌓고 노,소론의 당쟁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게 해주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대리청정을 한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하면 신료들과 세자가 무조건 반대할 테니 그 전에 선위쇼를 벌여 대리청정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여담으로 선위의 영을 내린 1월 22일은 하필 혜경궁의 관례 날이었다.3) 세자로서는 혜경궁의 관례를 축하해주면서 기뻐해주다가 선위의 영때문에 갑자기 오밤중에 비를 맞아가며 뜰에 엎드리며 울어야 했다. 이를 통해 볼 때 영조는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서 세자의 사생활 같은 것은 거의 염두에 둔 것 같지 않다.
<대리청정>
-2008년 방여된 MBC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대리청정의 장면을 담고 있다. 출처는 http://rocarlo.tistory.com-
대리청정의 영은 1월 23일에 있었지만 절차 진행등의 이유로 실제로 세자가 정무에 임한 날은 2월 16일이었다. 영조는 일단은 뒤에 앉아서 세자가 일 처리를 하는 것을 지켜보며 충고도 하고 주의도 주었다. 아직까지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미움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니기에4) 충고나 지적은 주의에 가까웠다. 다만 세자의 성격이 너무 급하다고 보고 이에 대해 주의하라는 경고를 날리기는 했다. (이전 포스팅 http://rozanov.egloos.com/680888 참고)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어보였다. 그런데 이 대리청정은 다른 대리청정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상한 대리청정>
사실 얼핏 보기만 하면 대리청정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영조의 나이는 당시 기준으로는 나이가 꽤 들었다고 볼 수 있는 57세.사도세자는 당시 기준으로는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15세였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대리청정은 무언가 이상했다. 영조가 너무 정정했던 것이다. 조선에서 세자가 임금을 대신해 정무를 대행하는 대리청정은 사도세자 이전에는 2번 있었다. 바로 세종 때와 숙종 때였다. 대리청정을 명할 때 세종과 숙종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세종은 너무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한 덕분에 대리청정을 명할 때는 겨우 자리보전 하는 신세였고 숙종 대리청정의 의도가 어찌 되었든 역시 배가 부어오르고 한 쪽 눈이 거의 안 보이는 등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영조는 너무나도 정정했다. 영조가 매우 건강한 상태에서 정무를 세자에게 대행하던 셈. 그래서였을까 세자는 항상 "대조께 아뢴 뒤 결정하겠소" 라고 말하는 일이 잦았다. 물론 이게 처음부터 영조가 관리하기로 했던 병권, 형벌등의 사안에 대해서만 이랬다면 문제가 아니었겠지만 문제는 거의 모든 정무에 대해 이렇게 말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말만 대리청정이지 최종 결정은 대조 즉 영조가 하는 셈이었다.
-사도세자는 거의 모든 일은 영조께 아뢰었다. 사실상 대리청정의 의미가 없는 셈이었다.-
좌의정 조현명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사도세자에게 모든 일을 거의 대조께 아뢰기만 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적은데 너무 신중한 것 역시 옳기 못하며 스스로 결정할 것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덤으로 이 때 세자의 답변은 "대조께 품하여 아뢰겠소" 였다. 경종에게 "맨날 유의하겠소만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라고 신하가 한 마디 하자 "유의하겠소"라고 한 것과 사실상 같은 상황이다.) 다만 조현명 자신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전례와 다른 대리청정이라서 그랬는지 1달 후 영의정 김재로와 같이 '매사를 대조께 품의해 결정하여 사람의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십시오"라고 이전의 말을 번복하는 발언을 해야 했다.
영조는 이에 대해 불평의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랬다면 병권, 형벌 등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업무를 사도세자가 결정하도록 강제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불평은 지나가는 말이었을 뿐 영조 자신도 진짜로 그렇게 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는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지만 정작 권력을 나눠줄 준비는 되지 않았다.-
그런데 대리청정 결정 자체는 훗날 비극의 가장 큰 씨앗이 되었다. 대리청정을 지켜보면서 영조는 점점 사도세자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게 된 것이다. 그 전에도 어느 정도 실망하고 꾸중과 질책을 가하긴 했지만 이 때는 단순히 기질에 대한 우려의 성격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대리청정을 거치면서 그의 실망이 점점 깊어지고 따라서 세자를 더욱 더 미워하게 된 것이다. 시한폭탄에 불이 붙은 것이었다.
1) 중옹, 백이: 중옹은 주나라 태왕의 둘째 아들로 형과 함께 셋째 계력이 왕위를 물려받게 하기 위해 도망친 인물이고 백이 숙제로 유명한 백이는 고죽국와 왕자로 아우 숙제가 왕이 되게 하기 위해 도망친 인물이다.
2) 을유 등록: 1705년 숙종이 세자 경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다가 세자와 신료들의 반대로 취소한 사건을 말한다.
3) 한중록에서는 이 때 대리청정의 영이 있었다고 하는데 실록과 비교해볼 때 혜경궁의 기억 오류인것으로 보인다.
4) 한중록은 대리청정이 화의 근원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실록에서도 대리청정 이후에는 대리청정 이전과 비교해 사도세자에 대한 영조의 꾸중 횟수가 증가하고 그 강도가 강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