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에 등장하는 아나니아는 4장 36절의 바나바와 대조됩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팔아 얼마를 감추고 그 값이 전부 인 것 같이 사도 앞에 내어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그를 책망할 때 그는 죽게 됩니다. 그가 한 것은 성령을 속이는 아주 심각한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1-6). 그 후에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는 남편의 일을 알지 못한 채 베드로의 질문을 받게 됩니다. “땅을 판 값이 이것 뿐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영을 시험하는(속이는) 삽비라에게도 심판의 말을 합니다. 그러자 그녀도 죽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그녀의 시체를 가져다가 그녀의 남편의 무덤 옆에 장사를 지냅니다. 온 교회와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 했습니다(7-11).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돈 몇 푼 숨겼다고 너무 심한 벌을 내린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는 위선입니다. 교회에서 위상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인 무서운 죄였습니다. 이는 초대교회가 시작부터 죄가 없는 완전한 교회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교회가 얼마나 거룩해야 하는지 보여줍니다. 그것을 위해서 권징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대 교회에 첫 권징이 있은 후에 교회는 더 성장해 나갔습니다.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신자들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였습니다. 믿고 나아오는 자가 더 많아졌고, 병든 사람들이 베드로의 그림자에 덮이기만 해도 낫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16). 백성들은 이렇게 기적을 경험하고 믿는 자들이 많아지는 반면에 대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의 마음에는 시기가 일어나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둡니다(17-18). 그러나 주님의 사자가 그들을 옥문을 열고 꺼내 줍니다. 천사는 가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시 백성에게 전하라고 합니다(20). 복음은 절대로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들은 그대로 행합니다. 텅빈 감옥을 본 공회원들은 사도들이 다시 성전에서 가르친다는 것을 듣고 다시 잡아와 심문합니다(27). 베드로와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금한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그들 앞에서 예수님을 전파합니다. 그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예수님을 왕과 구주로 삼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이 일의 증인이며, 성령도 그렇다고 담대하게 말합니다(29-32). 부활을 믿지 않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에게 죽은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셨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크게 화를 내고 사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리새인 지도자 가멜리엘을 통해서 그들을 살려내십니다. 사도들은 채찍질을 당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가르치는 것을 금지 당하지만 사도들은 이렇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파합니다(33-42). 그들은 참으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담대하게 행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거룩함과 담대함. 이것은 사도들의 삶의 핵심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옵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깊은 존경심입니다. 이 두려움으로 사도들은 권징을 시행함으로 교회의 거룩성을 지켰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인 저와 여러분도 이런 사도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거룩성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자신을 살피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합시다. 위선으로 성령을 속이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 나아가 혹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다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며 살아가 갑시다. 이런 사도적인 신앙을 물려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거룩함과 담대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