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마라톤을 올림픽 경기종목으로 만들기 위한 오랜 투쟁이 있은 뒤인 1984년 8월5일, 사상 처음으로 열린 올림픽여자마라톤은 모든 여자마라토너들에게 있어서 승리의 구간달리기(=lap) 같은 것이었다.스타트라인의 유명선수들 가운데는 완주한 마라톤에서 한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는 노르웨이의 그레테 바이츠(Grete Waitz), 1982년 유럽선수권전 우승자인 포르투갈의 로사 모타(Rosa Mota),그리고 여자마라톤 세계기록을 여러번 경신했으며 당시의 세계기록 022243의 보유자이자 사상 최초의 여자 서브0230 선수였던 미국의 조안 베노이트(Joan Benoit)도 있었다.
베노이트는 메인주,케이프 엘리자베스에서 1957년 태어났다.그녀가 좋아한 첫 육상종목은 스키였다.2차대전중 군대 스키선수였던 아버지가 그녀에게 스키를 가르쳤던 것이다.4년제고등학교 2학년때 그녀는 슬로프에서 발이 분질리는 사고를 당했다.그 사고의 회복운동으로 시작한 것이 달리기였는데,그 후 그녀는 달리기를 스키 못지않게 좋아하게 됐다.
대학에 가서도 달리기는 여전했지만 학키선수가 됐다. 어느날,전일의 13마일(약 20km-역자주) 달리기를 한 여파로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연습장에 나타나자 코치는 그녀를 그 시즌이 끝날 동안 훈련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학키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했다.1979년 그녀는 보스톤마라톤에 나가서 여자부에서 우승했다.그 마라톤은 그녀의 두번째 마라톤이었고 보도인 대학의 4학년 때였으며 이때부터 미국 (여자마라톤) 신기록을 세우기 시작했다.
졸업후 베노이트는,여전히 한주에 100마일(약 160km-역자주)을 달리는 훈련을 하고 있었지만,보스톤대학에서 여자 트랙과 크로스컨트리의 코치로 일했다. 1984년 올림픽에서 사상 첫 여자마라톤이 열린다는 것을 듣고, 베노이트는 자기가 할 � 있는 최선의 훈련을 통해 그 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올림픽경주의 출발선에 선 베노이트는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자체가 행운이라는 느낌이었다. 올림픽 선발전이 있던 날의 17일 전에 그녀는 무릎수술을 받았다.빨리 회복됐고 선발전에서 우승함으로써 그녀는 미국팀에 배정된 3개의 참가 티켙중 하나를 가까스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베노이트와 선발전을 통과한 다른 두 선수,줄리 브라운과 줄리 이스포르딩은 각각 올림픽선발전 통과를 기념하는, 달리는 여자 모습의 구리입상(立像)을 받았다. 그 조각은, 여러해 전 보스톤마라톤에서 성(性-gender)의 장벽을 부순 여자로 유명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로베르타 깁(Roberta Gibb)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시의적절한 기념품이었다.
그해 6월17일 베노이트는 올림픽 10000미터 선발전에서 2위와 큰 격차로 우승했다.그러나 마라톤과는 달리, 여자 10000미터 종목은,비록 4년 뒤인 서울올림픽에서 실시될 예정이었지만,그 대회에서는 아직 채택되지 않았다.
베노이트는 대회일 여러날 전에 LA로 갔다.그러나 TV보도로 그녀의 도착이 알려지자, 매스컴이 모르는 훈련주(走)가 불가능하게 됐다. 개막행사 후 그녀는 혼자서 오레곤주 유진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서 친구집에 머무르면서 경주를 준비했다.나흘 뒤,그녀는 LA로 돌아왔다.그리고 8월4일 밤은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마침내 여자러너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밝아왔다.
육상선수들이 국가명의 알파베트 순으로 트랙에 입장했다. 초청자인 미국은 가장 나중에 입장했다.각국의 국가대표 육상선수들은 키 순으로 입장했다.키가 작은 베노이트는 마라톤 출발선이 설치된 산타모니카대학 스타디움의 가장 마지막 입장자였다.
28개국,50명의 선수들이 산타모니카 대학을 오전 8시에 출발,무더운 로스앤젤리스의 26.2마일을 달리기 시작했다.만일 여자장거리 선수들의 정치적 투쟁이 그 올림픽 당시보다 더 성공적이었더라면 여자마라톤 참가자들은 오히려 더 적었을 것이라는 점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도 올림픽여자장거리는 3000미터와 마라톤,두 종목 뿐이었기 때문이다.여자 5000미터와 10000미터 종목을 1984년올림픽종목으로 채택되도록 만들기 위해, 미국시민자유연맹(the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과 국제러너위원회( the International Runners Committee)가 제기한 소송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8월5일 아침,전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장거리 선수들이 모두 LA의 거리를 달리게 됐던 것이다. 그 중 상당수는 5000미터 전문선수이거나 10000미터 선수였으나 마라톤 전문선수도 많았는데, 이들 모두 새로운 역사를 만든 것이다.
올림픽마라톤은 여러번 선두그룹이 바뀌고 주행전술도 바뀌는게 보통이다. 심사숙고한 주행속도와 전략적으로 계산된 가속주행 시점과 속도가 주자를 우승으로 이끄는데 도움을 준다.그러나, 첫 올림픽여자마라톤에서는 단 한가지 전술적 결정만이 금메달주행을 성공하게 만들었다.경주를 시작한지 겨우 14분 뒤에 너무 주행속도가 느리다고 느낀, 미국의 조안 베노이트는, 선두그룹을 빠져나와 앞서서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중에 베노이트는 "나는 선두에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신에게 다른 사람의 달리기가 아닌, 나만의 달리기를 하자고 다짐하고 있었고 그 주행이 정확하게 그 달리기였다.나는 어떤 다른 생각도 없었다."라고 말했다. 출발 15분 조금 후에 그녀는 선두그룹에 앞서서 달리고 있었지만 첫번째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는 동안) 다시 선두그룹에 얽히는 것이 싫어서 물을 마시지 않고 그곳을 지나쳤다.
많은 사람들에게 베노이트의 행동은 어리석게 보였다. 결국 어떤 마라토너라도 자신을 지속적으로 달리게 만드는 경쟁자들이 필요하다. 베노이트는 혼자서 마지막까지, 어떻게 선두주행을 지속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런 예상과는 달리) 그 다음 5~6마일을 지나면서 그녀의 앞선거리(lead)는 더 벌어져서 다른 어떤 선수도 그녀를 추월하려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베노이트가 지나치게 속력을 낸다고 느꼈으며,결국 무더위가 그녀를 멈추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노이트는 편안하게 달렸고 주폭(走幅)을 옮길 때마다 앞선거리를 늘여갔다.하얀 페인트공 모자를 쓰고 홀로 달리는 여자마라토너의 모습이 그 역사적인 마라톤의 잊혀질 수 없는 이미지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출발후 5마일 지점에서 그녀는 다른 러너들을 13초 앞섰다.19마일 지점에서는 앞선시간이 2분으로 늘었다. 그 2분의 앞선시간은 그 경기중의 가장 시원한 시간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제 2위그룹의 러너들, 바이츠와 그녀의 팀 동료인 잉그리드 크리스티얀센(Ingrid Kristiansen),그리고 로사 모타는 점점 증가하는 열기속에서 베노이트를 따라잡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레테 바이츠만 약간 그 차를 좁히는 것으로 끝났다. 바이츠의 가속주(加速走) 시작이 너무 늦었던 것이다. 올림픽 스타디움으로 두번째 사용되는, 로스앤젤레스 콜리세움(the Los Angeles Coliseum) 트랙의 완주선에서 경주는 끝날 예정이었다.그 경기장 건물이 시야에 들어오는 지점에서 베노이트는 1983년 보스톤마라톤에서 그녀가 우승한 모습을 그린, 거대한 벽화를 지나갔다. 한 빌딩의 측벽에 묘사된 그 그림은 나이키 회사가 (그리는)비용을 부담한 벽화였다. 그림 때문에 약간 당황도 했지만, 동시에 더 힘이 나기도 했다. 이제 그녀는 훨씬 더 중요한,또 다른 마라톤의 우승에 다가가고 있었다.올림픽 스타디움으로 통하는 터널을 통과하면서 베노이트는 자기의 삶이 바야흐로 완전히 바뀌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이 터널을 통과하면," 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말했다. "너의 삶은 영원히 바뀔 것이다." 이제, 물론 되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베노이트는 대경기장의 함성속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자신에게 똑바로 앞을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끝난 것이 아니야,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트랙을 돌고 이것을 결정지어야 해..." 올림픽 트랙에 들어선 그녀는 자기를 응원하는 7만7천명에 달하는 팬들의 환호에 작은 마음의 흔들림도 없이, 계속 달렸다. 완주 200야드(약183미터-역자주)를 남겨둔 지점에 가서야 마침내 그때까지 지켜온 엄격한 마음자세를 허물었다.그녀는 크게 웃으면서 모자를 벗어 관중들에게 흔들었다. 그녀는 022452에 완주했다.이 기록은 (당시) 여자마라톤 역대 3위의 기록이었고 이전 5개 올림픽마라톤에서 세운 20위까지의 남자기록과 비교해도 13번째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레테 바이츠는 022618로 2위였고 로사 모타는 놀랍게도, 바이츠보다 (불과) 39초 늦게 3위로 완주선을 통과했다.모타는 20마일 지점에서 가속주행을 시작, 크리스티얀센을 앞서 나갔으며 그 앞선거리(lead)를 끝까지 유지함으로써 노르웨이인을 제치고, 개인최고기록(PBR)022657로 동메달을 땄다.
바이츠는 나중에 그날 자신의 주행이 잘 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베노이트의 주행은 위대한 것이었다 라고 말했다.
베노이트는 나중에 그날 경주는 너무 쉬웠다고 말했다. 3대 TV방송국 방송에 출연한 뒤,베노이트는 대회가 끝난 3일 뒤에 메인주(州)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올림픽에서 자기에게 쏟아진 스포트라이트(the spotlight)를 벗어나 조용한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그러나 조안 베노이트(이제는 조안 사뮤엘슨으로 불린다)는 사상 첫 올림픽여자마라톤의 우승이 자기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그녀는 미국의 수백만명에 달하는 여자러너들의 우상이 됐던 것이다.마치 프랭크 쇼터(Frank Shorter)의 1972년 올림픽(뮌헨올림픽-역자주)마라톤 우승이 미국남자들에게 장거리달리기가 만들어낸 흥분과 반대급부를 통해, 미국의 러닝 붐을 야기한 것처럼 조안 베노이트의 우승도 그녀의 따를려고 애쓰고 있는 모든 여자러너들의 노력을 합리화했던 것이다. 그녀는 하루아침에 미국의 여자달리기운동의 지도자가 됐으며 세계적 유명인사가 됐다. 1980년대 미국 여자달리기에 조안 베노이트의 우승이 끼친 영향력은 마치 스피리돈 루이스(원조 올림픽마라톤 우승자-역자주)의 우승이 1890년대 그리스인의 자긍심에 끼친 영향력과 비견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서 올림픽마라톤에서의 우승은 항상 마라톤을 사랑한, 단순한 한 개인의 우승일 뿐이었다.고향 메인주로 돌아가서 그녀는 대학동료인 연인과 결혼했다.그리고 1985년 시카고에서 그녀는 또다른 여자마라톤 미국신기록,022121을 작성했다.
달리는 장면을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
http://www.youtube.com/watch?v=7dFgH_vDh6E&feature=related
첫댓글 감동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