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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윤석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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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설교 | |
성경낭독 : 렘 31:31-34; 요 12:20-33 본문 : 욘 1:4-16 제목 : “선지자를 회유하시는 하나님” |
선지자를 회유하시는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받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요나서를 읽을 때 ‘하나님의 관점에서’ 읽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변적 사건들’에 마음을 뺏깁니다. 예를 들어, 요나가 사명으로부터 도피했다던가, 니느웨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았다던가......이런 종류의 일들이 마치 요나서의 핵심인 것처럼, 그렇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나서를 읽을 때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하는 점,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만 하는 점은, 이 성경 역시 그 주인공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모든 성경을 읽을 때, 구속역사를 움직여가고 계시는 위대한 주이신 하나님을 그 중심에 놓고 읽으려고 애써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우리를 향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어떤 흥미로워보이는 이야기를 만나면 잽싸게 그것을 ‘나의 삶에다’ 갖다두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읽을 때 그 주인공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께서 구속역사를 이루어가실 때 이 본문이 무슨 기능과 역할을 하는지......그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삼은 말씀은, 겉으로 보기에는 별반 중요한 교훈을 지닌 말씀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야기책이든, 어떤 영화나 드라마든, 이야기가 전개되어 가는 과정이란게 있죠. 결정적인 주제,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결정적인 무언가가 있다면, 거기까지 가기 위한 ‘다리’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서에서 이 부분은 마치 그런 본문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사건은 요나가 물고기에 잡아 먹히는 사건이고, 그렇기 때문에 요나가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는 사건은, 바로 이 결정적인 사건을 향해 가기 위한 ‘다리’ 역할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가 탄 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고, 심지어는 본문 전체의 나침반 역할을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방향지시등을 잘 켜고 가 보면, 결국에는 이 주제가 가서 닿는 곳은 “하나님”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또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도록 합시다.
피할 수 없다
1. 피할 수 없음 : 큰 바람
오늘 말씀 전체를 여는 주제이면서, 동시에 전체 주제의 배경이 되는 주제는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여도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곧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선지자를 반드시 불러, 교회를 회개시키시려는 간절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먼저 ‘피할 수 없다’라는 주제를 살펴봅시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슬러 다시스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그 행로는 지난 주일 설교에서처럼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행로였습니다. 요나는 “욥바로 내려”갔고, “배로 내려”갔으며, 또 거기에서도 “배 밑창으로 내려”갔고, 심지어는 “산의 뿌리”, 곧 “스올의 뱃속”까지 내려갔습니다.
우리는 지난 설교에서, 이 이유를 들었습니다. 요나가 계속해서 “내려”간 이유는, 그의 행로가 “야웨의 낯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듣고 배웠습니다.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반드시 “내려가는” 길일 수밖에 없다는 것! 심지어 그것은 “스올의 뱃속”, 곧 지옥을 향한 길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렇다면, 그 “내려감”의 경로라는 것이, 과연 ‘성공’하기는 한 것일까요? 요나는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는 있었습니까?
함께 4절을 보도록 합시다.
4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 지라
1)
여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성경이 이 사건을 기술할 때 “바람이 불었다”는 방식으로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4절은 “바람이 불었다”고 하지 않고, “야웨께서 바람을 내리셨다”라고 씁니다. 바람이 분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야웨께서 바람을 불게 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동자가 야웨 하나님입니다.
2)
심지어 여기 “내리시매”라고 번역한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이 아닌데(14회), 주로 칼이나 창 같은 것을 ‘내던질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런 뉘앙스를 살려서 읽으면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정도가 아니라,
야웨께서 폭풍을 내던지셨다
라는 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마치 이방 신들의 신화에서 주로 등장하듯, 천둥과 폭풍의 창을 든 거대한 신이 바다 위에 출렁이고 있는 작은 배 하나에게 그 창을 집어던지는 것과 같은 그런 느낌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구절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폭풍의 창을 집어던지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장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3)
그리고 우리말로야 그냥 “바람”이지만, 아마 성도들께서도 자주 들어서, 히브리어에서 ‘바람’은 ‘영’과 같은 단어를 쓰신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히. 루아흐).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브리어권 사람에게는 “바람이 불었다”와 “성령이 불었다”가 같은 말인 것이지요. 그래서 칼빈 선생님도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실 때 밤새 동풍이 불게 하신 것을(출 14:21) “성령님이 부신 것”이라고 주석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4절을 읽으면
야웨께서 폭풍을 내던지셨
을 뿐 아니라, 어쩌면
야웨께서 성령님을 불게 하신 것
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정리
자, 그러면 정리해봅시다.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직’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욥바로, 배로, 밑창으로......계속해서 내려갑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도망치고 도망쳐서, 도달한 곳이 어디일까요? 마치 서유기 이야기에서 손오공이 할 수 있는 모든 술법을 부려서 멀리멀리 날아가서 세상의 끝으로 보이는 기둥에 오줌을 싸고 왔더니 거기가 “부처님 손 바닥 안이었다”는 이야기처럼, 요나는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쳤지만, 결국 그가 도달한 곳은 “야웨께서 보내신 바람 혹은 성령님”이었습니다. 어쩌면 집에 가만히 있었으면 마주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하나님의 현현’을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쳤기 때문에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친 자리에서 결국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게 하심으로, 그가 결코 도망칠 수 없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2. 무엇으로 들이치는가?
시편 139편이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시 139:7-10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낯으로부터 피할 수 없습니다.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고, 심지어 “스올에다 내 자리를 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거기 계십니다. 내가 혹여나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하여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하더라도” 거기에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고 붙드십니다.
“새벽 날개”라는 것은 아침에 해가 동편에서 떠오를 때의 빛살을 가리킵니다. “바다 끝”은 그 반대편으로 해가 질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지는 곳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은총이 가장 빛나는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손길에서 가장 먼 곳으로 여겨지는 데에까지” 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데가 아무데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도망치려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때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시점에도, 우리는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요나가 폭풍우치는 바다 위에서 만난 사실이고,
이것을 시로 묘사한 것이 139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바다 한복판에서, 피할 길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폭풍을 만났습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요나가 탄 배에 폭풍을 내리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렇게까지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궁금해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죠.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요나가 도망치도록 내버려두실 수는 없으셨습니까?
아니면 그렇게까지 요나에게 계속해서 나타나시는 데는 무언가 중요한 목적이 있으셨던 것입니까?
1.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 vs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치는 자 : 이스라엘의 현재 상황에 대한 모형
요나가 만난 풍랑에서, 이 풍랑 전체의 의미를 쥐고 흔드는 중요한 사실이 9절과 10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부분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요나는 배 밑층에서 잠을 자다가(5절), 선원들이 “제비를 뽑아 이 일이 누구 때문인지를 정하자”(7절) 했을 때 자신이 뽑혀버립니다(7절). 그래서 선원들이 당신이 누구냐고 묻자 9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요나는 자신을 누구라고 소개했는가 하면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소개하였습니다.
1)
그런데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히브리어로 본문을 보면 9절과 10절에서 이 “경외하다” 또는 “두려워하다”가 두 번 딱 붙어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우리말 어순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은데, 히브리어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다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서 요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주 중요한 단서입니다. 요나는 원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 배에 타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게 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0절의 정확한 번역은 “두려워하였고, 심히 두려워하였다”라고 두려워하다는 말이 두 번 나오면서 “심히”라는 말이 덧붙여 강조되고 있습니다. NASB는 이것을 “extremely frightene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두려워했다”, “너무나 놀라고 떨었다” 이런 식으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2)
하지만 보십시오. 이건 어떤 점에서는 마치 코메디같은 것인데, 요나는 지금 야웨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나는 야웨를 경외하는 자다”라고 말하고는, 덧붙여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문에서는 이것이 “왜냐하면”이라고 해서 뒤에 나오는데, 우리말로는 앞에 번역했으니 10절 앞부분을 보시면 됩니다.
나는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다
그런데 나는 지금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중이다.
언어도단입니다.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라면서요? 그런데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치고 있다?
이거야말로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3)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지금 이 풍랑을 만나고 있는 이유이지요!
그렇습니다! 왜 이들이 풍랑 속에 놓여져 있는가?
바로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가, 야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니 지금 풍랑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지요!
2. 그러므로 두 가지 주제
그러므로 여러분!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 이 사실이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뜨린 이유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대로 10절은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였다”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왜 두려워했습니까?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가, 야웨를 두려워하지 않자, 그들이 풍랑에 빠졌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즉, 놀랍고 기이하게도! 요나는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라고 말하면서도 야웨를 두려워하지 않고 야웨의 낯으로부터 도망쳤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 곧 처음부터 야웨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이들은, 이 이야기를 전해듣기만하고도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원래는 요나가 야웨를 두려워했어야 하는데! 정작 그는 야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망쳤고, 사실은 야웨를 두려워하지 않던 이방인 선원들이 그 사소한 복음을 전해듣고도 금새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이것이 보여주고 있는 바가 바로 둘째입니다.
역전이죠! 원래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그리고 요나가 가져야 하는 태도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배에서 일어난 사건은, 놀랍게도! 지금 요나서 전체에서 일어나게 될 일을 축소판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요나서의 주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았고
따라서 하나님은 이방 니느웨가 회개하는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회개시키기를 원하신다.
니느웨도 회개하면 용서해주신다는 메시지는
사실은 교회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들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그리고 요나는 야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선원들은 야웨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면 이 배의 사건은 지금 무엇을 겨냥하고 있습니까?
니느웨를 회개시키려는 하나님께서, 지금 온 힘을 다해 무엇을 하시려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이 이방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교회를 회개시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이죠.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완고한 교회, 완고한 이스라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완고한 교회를 향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원래 이렇게 했어야 해!
너희야말로 야웨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어야 해!
그것을 여기 이방인들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하나님의 뜻을 모른척하고 있는 교회에게, 복음의 작은 조각만을 듣고도 야웨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인들을 보여주심으로 인해서, 교회인 이들이 얼마나 완악하고 부끄러운 상태에 있는지를 드러내시고, 그리고......그들이 회개하여 돌이키게 되기를 하나님은 바라고 계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살피고 나면 우리는 강력하게 깨닫게 됩니다.
요나가 타고 있는 이 배야말로, 요나서 전체의 작은 모형 같은 것이라는 걸 말입니다.
회개하는 니느웨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
이라는 구도가 지금 이 배 안에 있습니다.
야웨를 두려워하는 이방인 선원들과
야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요나 말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 구도를 배 안에 만드심으로써, 아직 요나가 니느웨에 가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먼저! 교회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이렇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
심지어 나를 모르는 이방인들조차 이렇게 하는데,
너희가 이렇게 했어야 하지 않느냐!
적어도 요나서에서 요나는, 스스로 선지자로서 복음을 전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실은 ‘온몸으로 이스라엘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실은 이스라엘입니다.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치는 이스라엘, 야웨를 두려워한다고 말만 하고 야웨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 곧 여로보암 2세의 치하에서, 갖은 범죄 속에서도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입니다.
3. 플러스, 다시 교회를 부끄럽게 하는 점 : 모형으로서
그리고 이 본문에는 덧붙여진 주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또한 니느웨에서 펼쳐질 이야기의 작은 모형으로서, 이 또한 중요한 깨우침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1)
요나가 선원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선원들은 해결책을 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해지겠느냐?” 11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12절입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요나서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 배의 선원들이 어떻게 했으리라고 생각할까요? 여러분이 잠깐 뒤의 스토리를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 요나의 이야기에 대해 배를 탄 이방인들이 어떻게 처신했을지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선원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간단하게 하려면, 그냥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됩니다.
심지어 이 시대는 지금 우리처럼 인권에 대한 이해가 발달한 시대도 아닙니다. 그때는 미신이 만연한 시대였고, 각 나라들마다 온갖 종류의 신들을 섬기고, 각양각색의 제물들을 바치던 시대입니다. 신을 노엽게 하였기 때문에 그 원인이 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친다......는 이야기가, 오늘날처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되는 시대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단하게 하려면 그냥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됩니다. 심지어! 그 선원들이 억지로 이런 해석을 한 다음에 요나를 던지려는 것이 아니라, 요나 자신이! 스스로가!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주저할 것이 어디에 있나요? 그냥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됩니다.
하지만 이 선원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보십시오.
요나의 이 이야기를 듣고서도 말입니다.
13절을 보면, 이 선원들은 요나가 이 말을 하고 난 후에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려고” 합니다.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오케이, 그렇게 하도록 하지!” 하면서 요나를 던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상황을 없게 하려고 했어요. 문맥과 정황상 이 선원들이 절대로! 요나의 말을 믿지 않았을 리는 없습니다. 선원들은 요나의 말을 신봉했습니다. 그러니 이 폭풍이 요나 때문이며,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면 된다는 말, 선지자의 말을, 이 사람들은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해 그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13절과 14절을 통해서, 이 선원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일을 하지 않은 채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는지를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 요나를 던지지 않은 채로 배를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려고 했습니다.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이 폭풍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야 이것을 포기합니다. 즉 이들은 최선을 다해 요나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2)
자, 이 장면을 요나와, 혹은 요나로 대별되는 이스라엘 혹은 교회와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서 제일 마지막 절에 말씀하신 것을 읽어보겠습니다. 4장 10절과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말라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 말씀은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을 전한 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보려고 뒷동산에 앉아 있을 때, 따가운 햇빛을 가려주던 박넝쿨이 말라 죽은 후에 요나가 불평을 하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데 요나도 그러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4장 10절과 11절의 말씀의 의미는, “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데, 너는 왜 불쌍히 여기지 않느냐”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비교해 보십시오. 요나가 배를 탔을 때, 거기 있는 이방인들은 요나가 폭풍의 원흉임을 알고서도,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 했습니다. 겨우 한 사람이고, 심지어 그 한 사람 때문에 그 배 안에 타고 있는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데도 어떻게든 그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거기 니느웨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멸망을 당한다면 그 수십만명이 죽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는 어땠다는 것이지요?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니느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요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3)
그래서 이 이야기 또한 요나서 전체 이야기의 한 국면을 그대로 반영해 보여주는 작은 모형입니다. 말하자면 요나는 혹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향하여 놀랍도록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을 갖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러지 않았죠. 즉 그들은 야웨 하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그러니 이들은 정말로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들이다”라고 말만 하고, 사실은 ‘야웨의 얼굴로부터 도망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를 회유하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여러분!
도망치는 요나가 탔던 배 안에서 풍랑으로 인해 일어났던 이 사건이 보여주는 바는 명확합니다. 제가 설교의 서두에서 말씀드렸듯, 이 말씀 또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절대로 교회를 놓지 않으시겠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어떻게든 선지자를 회유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있지만!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은 “야웨를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야웨의 낯으로부터 도망치는 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선지자를 어떻게든 돌이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 야웨의 이름을 들은 자들이, 지나가던 선지자 한 사람의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내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였기 때문에 이 폭풍이 몰아친 것이다.” 라는 이야기 한 마디를 듣고도 회개하는 이방인들을 보여주심으로써, 결국은 이스라엘을, 교회를 회개시키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배 안이야말로, 곧 일어나게 될 니느웨에서의 일의 축소판이지요! 교회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교회를 회개시키시기 위하여, 강철같은 의지를 갖고 반드시! 니느웨를 회개시키실 것입니다. 왜요? 그 니느웨의 회개를 보고 교회가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 말입니다. 그 일의 작은 모형이 바로 이 배 안에서 폭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책망의 본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기 백성을 멸절시키는 데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책망하시는 것이지요.
어리석고, 둔하고, 어두운 우리가, 그 끝이 어딘지 생각하지도 않고 무턱대고 멸망을 향하여 갈 때, 우리를 돌이키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책망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 하나님의 본심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어떠한 어둠 속에 처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해 있다는 사실! 내가 잘못을 범하고 있을 때, 그 잘못을 때려서라도 하나님의 품 안에 계속해서 두시고자 하신다는 사실! 여러분,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나를 치시는 일을 통하여 끝끝내 회개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