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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첫눈과 함께 왔다
그날 눈이 왔었다. 갑오년 마지막 날 올겨울의 첫눈이 왔다. 그는 패딩을 걸치고 반려견‘베베’에게도 빨간 패딩을 입혀 갑오년 마지막 날, 마지막 등산을 위해 집을 나섰다. 아파트 후문에서 공원까지는 숲길이다. 감추는 것 없이 홀딱 벗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던 나무들이 나뭇가지 마다 눈을 이고 아기의 젖니가 돋듯 하나같이 뿔 고운 순록의 눈꽃을 피우고 있었다. 밤새 바람이 잔잔했고 눈에 수분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오솔길의 비쩍 말라 비스듬히 누워있던 풀들도 하얀 눈 속에 묻혀 쑥대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그에게 눈은 기쁨과 슬픔의 추억이 나란히 섞여 있었다. 올해의 첫눈은 어느 쪽일까? 그는 생각했다. ‘오늘’은 두 개의 시간을 이어주는 환승역이라고. 지금껏 타고 온 기차에서 내려 새해 새날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는 후미진 간이역 같다고. 그의 중얼거림에‘베베’란 놈이 고개를 외틀고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런 베베에게 그는 분명하게 말해 주었다.
“오늘 틀림없이 토토가 올 거야.”
실은 그 자신에게 이르는 말이었다. 그날 밤 옷을 버리고 떠난 그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달력의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꾹꾹 누르며 서성거렸다. 어느 산촌의 한적한 간이역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양궁장 가까이 오자 베베가 콩콩 짖으며 제 먼저 달려나갔다. 먼빛에 보아도 흰색 ‘토토’가 반가운 몸짓을 하고 있었다. 둘은 어느새 친해졌는지 눈 덮인 양궁장사무실 마당을 돌아치며 어질러놓았다. 그녀가 눈밭에서 박꽃같이 환하게 웃으며 초례청신부처럼 곱게 인사를 했다. 빨간 패딩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모습이 순백의 눈과 어울려 눈부셨다. 그러나 그는 대범한 척 잘 지냈느냐고 물었고 그럼요, 하고 그녀는 손차양을 해 마주 오는 아침 햇살을 가리며 답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우리 와룡산에 갈래요?”그녀는 콧잔등에 주름을 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갑오년 마지막 날이잖아요.”
그럽시다. 그는 이미 작정한 사람처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장섰다.―와룡산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 된 곳이다. 그 애들이 살아 있다면 지금쯤 30대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상리공원에서 와룡산에 오르려면 한 개의 굴다리와 두 개의 터널을 지나 경신고를 끼고 올라야 한다. 마지막 터널을 지나는데 벽면에 분무기식 검은 페인트로 난잡하고 큼직하게 쓰여 진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꼴려!!’
“베베, 토토! 빨리 따라오지 못해?”
그는 흥분을 도발하는 수많은 냄새들을 탐색하고 자신의 존재를 심기위해 오줌을 찍찍 깔기느라 정신이 없는 애먼 애완견들에게 벼락 같이 고함을 내질렀다. 제발 그녀의 눈길이 벽면으로 가지 못하게 설레발을 떨었다. 그녀도 토토에게 타박을 주느라 낙서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듯 했다.
시간을 도둑질 당한 느낌이지만, 연어처럼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에게도‘고딩’시절이 있었다. 길을 가다보면 어처구니없게도 놈이 독립운동이라도 하려는 듯 바짓가랑이 속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른다. 딱히 여자 때문이 아니다. 욕망이 애당초에 있어서도 아니다. 예쁜 여자가 시야에 든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런데도 놈은 시도 때도 없이 버럭버럭 성을 내며 용을 써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철부지 떼쓰는 것은 저리 가라다. 사타구니에 요란하게 천막 치듯 부풀어 올라, 사람이 많은 길거리에서 그럴 양이면 남의 눈에 못할 짓이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낭패가 한 두 번인가? 친구말대로 터놓은 바지주머니로 손을 찔러 넣어 놈을 징벌하는 수밖에. 꼬집거나, 가운데 손가락으로 퉁겨 꿀밤을 먹인다. 그런다고 고분고분 말을 들을 놈이면 일어서지도 않았겠지? 놈이 성을 낼 참이면 차돌이 되어 망치로 두드려도 끄떡없을 정도로 강건하고 굳건하다. 어림도 없다.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실성한 놈처럼 길가에 서서 영남산이나 하늘을 바라보며 놈이 제발 진정하도록 살살 토닥거려 잠을 재우는 수밖에 없었다. 자장가까지 불러주며. 그때의 자장가는 달콤하다기보다 험악하다.
“너 정말 죽고 싶어 @#$%&? 까불면 &%$#@ 한다!”
하늘의 뭉게구름이 너울너울 흘러가며 ‘이도 오래가지 않으리라’ 그에게 말했건만 그때는 귀가 먹어 듣지 못했다.
터널을 벗어나 경신고의 철망을 끼고 산을 올랐다. 철망이 끝나는 곳에 탱자나무로 된 울타리가 나오고 울타리는 주위의 나무들과 어울려 눈꽃터널을 만들었다. 눈꽃터널을 벗어나자 조그만 공터(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어 난리굿을 하거나 훔친 소도 잡아먹기 딱 알맞은 곳이다)가 나왔다. 그는 3년 전 공터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나자 새삼 등줄기가 섬뜩해졌다. 과거가 짐승처럼 다가왔다.
“3년 전에 있었던 일인데….”
그는 남의 이야기하듯 했다. 그 해 가을 어느 날, 산을 오르는데 공터에서 다급한 여자애의 비명소리가 들렸고 머슴애들의 윽박지르는 소리도 섞여왔다. 그가 급히 공터에 도착했을 때, 한참 젊은 놈팡이 다섯 놈이 여리고 여린 여학생의 옷을 벗기고 있었다. 여학생은 상체를 벗긴 채 두 팔로 가슴을 부여안고 발발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런 호랑말코 같은 놈들! 그가 호통을 치자 놈들은 다친다면서 아제는 가던 길 가라며 도리어 눈을 부라렸다. 호랑이가 늙으면 까마귀가 올라탄다, 더니 놈들이 그를 뒷방 늙은이 취급을 하였다. 그가 여학생을 감싸자 놈들이 몽두리를 들고 다구리를 놓을 자세였다. 형세가 엄했으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그의 가슴에서 핏덩이가 들소처럼 날뛰고 분노가 꼬챙이처럼 곤두섰다. 싸움은 학창시절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는 놀이였고 일종의 치유였다. 싸움판에 나설 때 언제나 묘한 떨림이 그를 흥분의 도가니에 빠트렸다. 주먹을 꽉 움켜쥐자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다섯 놈이었지만 엄마 치마폭에 놀던 놈들이라 그의 상대가 돼진 못했다. 그들이 휘두른 몽둥이에 팔뚝에 큰 상처가 났지만. 싸움판의 끝은 언제나 한 쪽이 꼬리를 흔들며 따라오거나, 꼬리가 빠지게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다. 놈들은 뿔뿔이 도망 쳤고 어느 틈에 여학생도 간 곳 없었다. 그는 그날 베베의 전공도 대단했다고 말을 맺었다.
“베베가 겁도 없이 몽두리를 든 놈들에게 용수철처럼 튕겨 오르더라고요.”
“아저씬 지금도 청년인 걸요?”
그녀가 말했고, 그가 비아냥거렸다.
“하매 눈이 가면 걱정인 걸.”
“아니에요. 누군가 사람의 신체기능은 50년을 주름 잡는데요. 20대 노인과 70대 청년이 실제로 있잖아요? 정신세계는 나이에 관계없이 무한대고요.”
그들이 올라가는 계곡은 하얀 카펫을 깔아놓은 듯 장쾌한 눈길이었다. 누구의 발자국도 닿지 않은 순백의 신천지였으나 두 인간과 두 짐승이 올라가며 내는 ‘뽀득뽀득’ 순결한 소리자리는 모스부호처럼 금방 어지러워졌다. 산의 8부 능선에 수령이 꾀 되어 보임직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모두가 시간을 두려워하지만 느티나무는 의연히 시간을 받아들이며 주위를 평정하고 있었다.―그가 울적할 때마다 올라 와 쉬는 곳이기도 하다. 그는 혼자일 때 혼자만이 찾아가는 술집이 있듯이 자주 가는 곳이면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 둔다. 인간이기에. 아무한데도 알리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은 마음을 편안하게 위로해준다.
그가 느티나무 아래 눈밭에 패딩을 벗어 깔았다. 그녀는 그를 한참 올려다보다 패딩에 엉덩이를 붙였다. 눈 덮인 대구 시내가 하얗게 내려다보이고 저 멀리 앞산 그리메는 허연 눈을 뒤집어쓴 한 폭의 그림이나 다름없었다. 눈이 스펀지처럼 소리를 모두 흡수해 버렸는지 산은 고적했다. 영화나 소설보다 더 잔혹하고 다채로웠던 갑오년의 아픔과 슬픔, 분노와 상처를 신은 눈으로 덮으며 고 장영희 교수 입을 통해 그에게 말해주는 듯 했다.
“견딜 수 없는 슬픔, 고통, 기쁨, 영광과 오욕의 순간도 어차피 지나가기 마련”이라고.
“양광모 시인의 무료라는 시 알아요?”
그녀가 물었다.
“그 시의 작가가 양광몬 가?”
그는 대충 생각났다. 양광모 시인은 '무료'라는 시(詩)에서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도, 아침 일출과 저녁노을도, 어머니 사랑과 아이들 웃음도 모두 무료라고, 무료의 은혜를, 무료로 가르쳐 주었다. 그나저나 눈이 내려서가 아니고 세상은 참 아름다웠다. 참 좋다. 그는 탄식했다. 하늘과 눈 덮인 나무와 계곡도, 새들의 지저귐도 모두 무료여서 보기 좋고 듣기 좋았다. 역시 산다는 것은 황홀하고 낭만이었다. 어쨌든 이런 날은 죽음마저 낭만으로 느껴졌다. 베베와 토토도 눈밭이 좋은지 제 세상을 만난 듯 깡충거리며 뛰놀았다.
“개들은 눈이 좋아서가 아니고 발이 시려서 폴짝폴짝 뛰는 거래요.”그녀는 그의 기분에 초를 치며 산 아래를 손가락질했다. “조기 산 중턱에 내 친구가 묻혀 있었어요.” 그녀는 한참 있다 어눌하게 말을 이었다. “개구리 소년….”
“아, 그래?”
그는 놀라면서도 머리로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23년 전이니 그녀 나이가 짐작한대로 30대 초반이 틀림없으렷다.
“꼬꼬마 시절부터 내 정체성은 머슴애 쪽이 더 가까웠죠.” 그녀가 말꼭지를 뗐다. “머슴애들과 어울리는 것이 훨씬 편했으니까요. 이유야 있었지만…. 우리 집은 사글세였는데 교문 가까운 길목에 있어 아이들이 모여드는 깔때기였어요. 남자애들이 우리 집에 모였다가 같이 학교에 가고는 했지요. 그 중에 유난히 눈이 커 외로워 보이는 그 아이도 섞여 있었어요. 그 애 아버지는 노동일을 하다 다쳐 방구들을 지고 살았어요. 그날도 도롱뇽 알이 아버지에게 좋다고 나더러 가자고 했어요.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 날이 마침 돌아가신 엄마 기일이라 빠졌지요. 엄마가 절 지켜주셨어요. 그 아이와는 같은 교회에 다녀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밤 새벽송으로 캐럴을 부르던 기억이 또렷해요. 그 애의 넘어가는 웃음소리와 기침소리가 지금도 또렷하고요. 내 머리에 화석처럼 남아 있어요.”
둘이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다 그녀가 애절한 보이스로 80년대 유행했던 발라드 곡인 정수라의 ‘아버지의 의자’를 흥얼거렸다. 허스키라 듣기 좋았다.
그 옛날 아버지가 앉아있던 의자에
이렇게 석고처럼 앉아 있으니
즐거웠던 지난날 모든 추억이
내 가슴 깊이 밀려들어요
…
노래를 다 끝맺지 않고 그녀가 말했다.
“여기 이 자리는, 아빠 생전에 어린 나를 데리고 산에 오르다 여기서 꼭 쉬었어요. 앉으시면 어떨 적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셨어요.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한 후 그 버릇은 더 심해졌고요. 그럼 나는 여기저기 쏘다니며 철마다 달리 피는 꽃들에게 하소연 했죠. 아빠를 그만 일어나게 해달라고.”
힐끗 돌아 본 그녀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모른 척 먼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베베의 방정에 까마귀가 화들짝 날았다. 그 바람에 나뭇가지가 몸을 부르르 떨며 상고대를 털어내자 눈꽃이 하늘에서 춤을 추었다.
“우리 그만 내려가요. 죄송해요. 대신 저녁에 술은 제가 살게요. 시간 나세요?”
선약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지요, 뭐.”
“죽전 네거리 왜식집 ‘시마’ 아세요?”
“몇 번 들른 기억이 나요.”
“청주로 해요, 우리.” 그녀는 눈이 깊어지더니 덧붙였다. “눈 온 날은 아무래도 오토소가 어울릴 것 같아요. 좋죠?”
“내사 뭐, 주류불문이니까.”
술 마실 줄 아는 여자였다.
“시간은 6시. 6시는 5시나 7시하고는 달라요. 3시, 9시, 12시처럼 시간의 환승역 같으니까요.”
그녀는 언제 눈물을 보였느냐는 듯 금방 재잘거리며 눈을 뭉쳐 그의 가슴팍에 던지고는 베베, 토토와 어울려 눈밭을 뛰어 내려갔다.
첫댓글 비록 나이는 70대이지만 그는 불의를 보고는 그냥 있지 못하고 용감했다.
못본채 외면할 수도 있는 일이였지만.
치욕적인 봉변을 모면한 그녀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다.
반려견을 동반한 두사람의 좋은 만남이 멋진 그림으로 그려지네.
무무의 대단한 기억력!!!..... 앞 글을 매끄럽게 이어 계속 되는 글들의 빈틈 없는 연속...
fact와unfact를 넘나드며 표현되는 콕콕 찌른 어휘의 표현에 감탄 연발 일세...ㅡ義 峰ㅡ
자네 주변에 항상 여인들이 맴돌고 있는데, 어부인께서 대단하신 분이시네. 부럽네...
너무 들이대고 보지 말게나. '내'가 아니고 '그'니까
허긴 '그'가 나일 수 있고 너일 수 있고 우리 모두일 수 있긴 하지만.......
하늘이,, 갑오년 마지막날에 눈 많이 내려주어 분위기까지 어우러지게 베풀어 주었으니
예삿일로는 넘길 수 없는 또 하나의 추억수첩에 한 묷을....!!
상상만으로도 멋찌다~요..ㅎ
잘 읽고 갑니다. 아름다운 그림이군요.
기러기 울어예던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우리들 가슴을 돌아 르던 강물이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