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원DB > 면암집 > 면암선생문집 제 20권 > 기
최익현 : 한라산 유람기
고종 10년(1873) 겨울에 나는 조정에 죄를 지어 탐라(耽羅)로 귀양을 갔다. 하루는 섬사람들과 산수(山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가 말하기를,
“한라산의 명승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읍지(邑誌)를 보거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구경한 이가 아주 적으니, 갈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가?”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이 산은 4백 리에 뻗쳐 있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서 5월에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정상(頂上)에 있는 백록담(白鹿潭)은 여러 선녀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으로 아무리 맑은 날이라 할지라도 항시 흰 구름이 서려 있습니다. 이곳이 바로 세상에서 영주산(瀛洲山)이라 일컫는 곳으로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에 들어가니 어찌 범상한 사람들이 용이하게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이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놀랐다.
그후 을해년(1875, 고종12) 봄에 나라의 특별한 은전(恩典)을 입어 귀양살이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이윽고 한라산을 탐방할 계획을 정하고, 사인(士人) 이기남(李琦男)에게 앞장서서 길을 인도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일행은 어른이 10여 명에 종 5, 6인이 따랐으며, 출발 시기는 3월 27일이었다.
일행이 남문(南門)을 출발하여 10리쯤 가니 길가에 개울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들이 모여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이다. 드디어 언덕 위에 말을 세우고 벼랑을 의지하여 수십 보를 내려가니, 양쪽 가에 푸른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가운데에 큰 돌이 문 모양으로 걸쳐 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수십 인을 수용할 만하며, 높이도 두 길은 되어 보였다. 그 양쪽 암벽에는 ‘방선문(訪仙門)ㆍ등영구(登瀛丘)’란 6자가 새겨져 있고 또 옛사람들의 제품(題品)들이 있었는데 바로 한라산 10경(景)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문의 안팎과 위아래에는 맑은 모래와 흰 돌들이 잘 연마되어 그 윤기가 사람의 눈을 부시게 하였고, 수단화(水團花)ㆍ철쭉꽃이 열을 지어 좌우로 심어져 있는데 바야흐로 꽃봉오리가 탐스럽게 피어나고 있으니, 역시 비할 데 없는 기이한 풍경이었다. 한참 동안 풍경에 취해 두리번거리며 조금도 돌아갈 뜻이 없었다.
다시 언덕으로 올라와 동쪽으로 10리쯤 가니 죽성(竹城)이라는 마을이 나왔는데 꽤 즐비한 인가가 대나무에 둘러싸여 있었다. 큰 집 한 채를 얻어 숙소를 정하니 날이 저물었다. 하늘이 캄캄하고 바람이 고요한데 비가 올 기미가 있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일어나 종자에게 날씨를 살펴보라고 했더니, 어제 초저녁보다 오히려 심한 편이라는 대답이었다. 그리고 바로 돌아갔다가 후일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는 자가 열에 칠팔은 되었다.
나는 억지로 한 잔의 홍조(紅潮 술인 듯함)를 마시고는 드디어 여러 사람의 의사를 어기고 말을 채찍질하여 앞으로 나아가니, 돌길이 꽤 험하고도 좁았다. 5리쯤 가니 큰 언덕이 있었는데 이름이 중산(中山)으로, 대개 관원들이 산을 오를 적에 말에서 내려 가마를 갈아타는 곳이었다.
여기에 이르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걷히고 햇빛이 새어 나와 바다의 경치와 산 모양이 차례로 드러나기에 말을 이성(二成)을 시켜 돌려보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짚신에 지팡이를 짚고서 올라가는데, 주인 윤규환(尹奎煥)은 다리가 아파서 돌아가기를 청했고 나머지는 모두 일렬로 내 뒤를 따랐다. 한줄기 작은 길이 나무꾼과 사냥꾼들의 내왕으로 조금의 형태는 있었지만, 갈수록 험준하고 좁아서 더욱 위태로웠다. 구불구불 돌아서 20리쯤 가니 짙은 안개가 모두 걷히고 날씨가 활짝 개었다. 그러자 일행 중에 당초에 가지 말자고 하던 자들이 날씨가 좋다고 하므로 나는,
“이 산을 중도에서 가고 가지 않는 것이 모두 이들의 농간에서 나왔으니 어찌 조용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기서 조금 앞으로 나아가니 계곡의 물이 바위 밑에서 쏟아져 나와 굽이굽이 아래로 흘러갔다. 평평한 돌 위에 잠시 앉아 갈증을 푼 뒤에 계곡의 물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돌비탈길을 몇 계단 넘고 또 돌아서 남쪽으로 가니, 고목을 덮은 푸른 등(藤)나무 덩굴과 어지럽게 우거진 숲이 하늘을 가리고 길을 막아서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이런 데를 10여 리쯤 가다가 우연히 가느다란 갈대가 숲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아름다운 기운이 사람을 엄습해 왔으며 또 앞도 확 트여서 바라볼 만하였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여 1리쯤 가니 우뚝 솟은 석벽이 대(臺)처럼 서 있는데, 뾰족하게 솟은 것이 수천 길은 되어 보였다. 이는 삼한(三韓) 시대의 봉수(烽燧) 터라고 이르지만 근거될 만한 것이 없고 또 날이 저물까 염려되어 가 보지 못하였다.
또 몇 보를 나아가서 가느다란 계곡의 물줄기를 하나 발견했다. 위에서 흘러내린 물의 흔적을 따라 위로 올라가니 얼음과 눈이 특출나게 빛나고 여러 잡목들이 위와 옆으로 뒤덮여 있어 머리를 숙이고 기어가느라고 몸의 위험이나 지대가 높은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이렇게 모두 6, 7리를 나아갔다.
여기에 이르니 비로소 상봉(上峯)이 보이는데 흙과 돌이 서로 섞이고 평평하거나 비탈지지도 않으며 원만하고 풍후한 봉우리가 가까이 이마 위에 있었다. 봉우리에 초목이 나지 않았고 오직 푸른 이끼와 담쟁이 넝쿨만이 돌의 표면을 덮고 있어서 앉아 휴식을 취할 만하였다. 높고 밝은 전망이 확 넓게 트여서 해와 달을 옆에 끼고 비바람을 어거할 만할 뿐 아니라, 의연히 진세의 세상을 잊고 홍진에서 벗어난 뜻을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 후 검은 안개가 컴컴하게 몰려오더니 서쪽에서 동쪽으로 산등성이를 휘감았다. 나는 괴이하게 여겼지만, 이곳에까지 와서 한라산의 진면목을 보지 못한다면 이는 바로 구인(九仞)의 공이 한 삼태기에서 무너지는 꼴이 되므로, 섬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을 굳게 먹고 곧장 수백 보를 전진해 가서 북쪽 가의 오목한 곳에 당도하여 상봉(上峯)을 바라보았다. 여기에 이르러서 갑자기 중앙이 움푹 팬 구덩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백록담(白鹿潭)이었다. 주위가 1리를 넘고 수면이 담담한데 반은 물이고 반은 얼음이었다. 그리고 홍수나 가뭄에도 물이 줄거나 불지 않는데, 얕은 곳은 무릎이, 깊은 곳은 허리에 찼으며 맑고 깨끗하여 조금의 먼지 기운도 없으니 은연히 신선이 사는 듯하였다. 사방을 둘러싼 산각(山角)들도 높고 낮음이 모두 균등하였으니 참으로 천부(天府)의 성곽이었다.
석벽에 매달려 내려가서 백록담을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털썩 주저앉아 잠깐 휴식을 취했다. 일행은 모두 지쳐서 남은 힘이 없었지만 서쪽을 향해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절정이었으므로 조심스럽게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나 따라오는 자는 겨우 3인뿐이었다. 이 봉우리는 평평하게 퍼지고 넓어서 그리 까마득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위로는 별자리를 핍박하고 아래로는 세상을 굽어보며, 좌로는 부상(扶桑)을 돌아보고 우로는 서양을 접했으며, 남으로는 소주(蘇州)ㆍ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옹기종기 널려 있는 섬들이 큰 것은 구름만 하고 작은 것은 달걀만 하는 등 놀랍고 괴이한 것들이 천태만상이었다.
- 중략-
------------------------------------------------------------------------------------------------------
남으로는 소주(蘇州)ㆍ항주(杭州)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내륙(內陸)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조 혹은 왜놈들이 문집까지 조작한 증거겠지요... 그들의 치밀한 역사 조작에 치가 떨릴정도입니다. 이글은 남으로는 바다를 가리키고 북으로는 반도를 끌어강기고 있다가 맞습니다.
첫댓글 치밀하게도 조작했군요...
대륙조선의 존재추측이되죠
그리고 옹기종기 널려있는 섬들이라.... 확실히 주목해야할 자료로군요.
허구 반도설이 조작이 된 것이조 지금의 한라산의 배경과는 사뭇 다르조 대조선의 대륙을 기준잡아 해석하면 조작이 아니고 허구 반도설을 기준잡아보면 이해가 안 되니 반대로 조작으로 보이는 것이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