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성직자부
로마, 2022년 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기념일
친애하는 주교님, 사제, 신학생 여러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지난 10월 24일 로마에서 공부하는 신학생들과 사제들을 만나 10가지 질문에 답하시면서 다음의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셨습니다. 곧 영적 지도, 디지털 세계와의 관계 및 소셜 미디어 사용, 성소 식별, 복음화를 위해 “안락함”에서 벗어나는 것의 중요성, 사제의 형제애, 신학생 양성의 가장 중요한 측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당일 오전에 두 나라의 대통령을 접견하시는 등 매우 바쁜 일정을 보내셨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 이상 우리와 함께 하셨고, 사제의 삶과 양성에 관해 진심 어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참석한 사제와 신학생들은 교황님의 말씀에 친밀감과 중요함을 느꼈으며 참석자들 중 몇몇이 표현한 것처럼 “아버지와 자녀들의 만남”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번 만남의 빛과 은총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상에서 많은 사제와 신학생들이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과 불확실성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는 여러분의 삶과 교구에 유용한 자극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교황님의 답변을 번역하여 이 서한과 함께 보내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여러분과 함께 하는 시노드 여정 안에서, 우리는 이 기회를 통해 여러분에게서 성숙해 가는 삶과 사제 양성의 체험 (“좋은 관행”) 그리고 여러분의 염려 및 필요 사항 등을 주저하지 말고 보내주시도록 초대합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성직자를 위한 봉사를 의탁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일치하며 형제애로 안부를 전합니다.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 장관
안드레스 가브리엘 페라다 모레이라 대주교 차관
프란치스코 교황의, 로마에서 공부하는 신학생, 사제들과 만남 연설
(바오로 6세 홀, 2022년 10월 24일 월요일)
존경하는 추기경님, 주교님, 사제 여러분!
우선 시작이 늦어진 것에 대해 사과 드립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오늘 두 나라의 대통령 방문이 있어서 바쁜 일정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지연되었습니다. 지금 시간은 허기를 느껴서 기다리기 쉽지 않은 시간입니다… 우선 시작합시다.
제가 이곳에 들어설 때 여러분들에게서 성직에 대한 좋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제들과 함께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질문 1
교황님, 젊은 사제들의 영적 지도에 대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사제는 평신도, 수도자, 아직 양성 중인 이들을 위한 영적 안내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사제들이 다른 사제의 영적 지도를 구하는 것은 어렵게 느껴집니다. 사제들, 특별히 젊은 사제들에게 그들의 양성을 위해 어떻게 영적 도움을 구할 수 있는지 조언해 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답변
먼저 많은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만남을 준비하면서 205개의 질문을 주었습니다! 질문이 매우 많아서, 시간이 가능하다면 10개의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도미니크 신부님 감사합니다. 영적 지도의 문제는, 오늘날 지시적이지 않은 표현, 즉 영적 "동행"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제가 선호하는 표현입니다. 영적 지도, 영적 동행이 의무일까요? 아닙니다. 반드시 받아야 하는 의무사항은 아니지만, 여러분이 걸을 때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면 넘어지고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나의 지난 삶을 잘 아는 이로부터 영적 동행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가 꼭 고해 사제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와 고해 사제의 역할이 다르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지은 죄를 성찰하고 용서받기 위해 고해 사제를 찾습니다. 여러분은 영적 움직임, 기쁨, 분노 등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하기 위해 영성 지도자를 찾습니다. 그런데 영성 지도자 없이 오직 고해 사제만을 만난다면 영적 성장은 없을 것이며, 이는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반면 오직 영성 지도자, 영적 동반자만을 만나고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입니다. 두 역할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예수회 영성에서 이냐시오 성인은 고해 사제와 영성 지도자를 구별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로는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두 가지 일이며, 같은 사람이 할 수 있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일입니다.
두 번째, ‘영성 지도’는 성직자의 은사가 아니라 세례의 은사입니다. 영성 지도를 하는 사제는 자신이 사제이기 때문이 아니라,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영성 지도의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교구청의 몇몇 분,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 몇몇 분은,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훌륭한 수녀님의 영성 지도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수녀님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입니다. 수녀님에게 지도를 받으세요. 문제없습니다. 영적으로 지혜로운 수녀님은 영성 지도를 할 수 있습니다. 일부 가톨릭 단체에 현명한 남성이나 여성 평신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것이 성직자의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직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성직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영적 지도자가 되려면 기름 부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러분의 질문에 대해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항상 영적 동행이 필요합니다.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동행을 받지 않은 사람은 영혼 안에 ‘곰팡이’가 생기고, 이 곰팡이가 그 사람을 괴롭히게 됩니다. 질병, 음란한 생각, 많은 나쁜 것들을 가져옵니다. 영적 동행을 받아야 합니다. 명확히 해야 합니다. 영적인 감정들에 대해서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유혹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은총과 유혹을 구별하지 못하는 신학생을 본적이 있습니다. 나를 동행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매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 달에 한 번이나, 두 달에 한 번씩 영성 지도자에게 의논할 문제가 있을 때 찾아가십시오. 이것은 분명합니다.
영성 지도자를 어떻게 찾느냐고요? 여러분을 매료시키는 언변이나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사람이 있다면 조심하십시오. 영성 지도자를 찾되 고해 사제와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해 사제와 영성 지도자는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합니다. 영성 지도는 신자의 은사입니다. 사제나 주교, 여성이나 남성 평신도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신뢰와 영적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를 찾으십시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조화는 큰 도움이 됩니다.
제가 질문에 잘 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여러분 중 누구도 영성 지도나 영적 동행 없이는 잘 성장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모두 명확한가요? 좋습니다. 계속합시다.
질문 2
교황님, 사목 안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세계와 과학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가 될 수 있을까요? 사목 활동에서 대화를 촉진할 책임이 있는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조언을 해 주실 수 있나요? 물론 이 두 영역 사이의 대립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답변
우선 과학의 역할을 부정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울러 연구를 계속 진행 중인 과학의 역할도 중요합니다. 매우 중요하고 말고요. 그리고 연구를 하는 사람들, 곧 사무연구원이 아니더라도 연구를 하는 대학생들을 떠올리며, 학생들의 고민에 우리 모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먼저,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문제의 경로를 따라간다면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이건 왜 그럴까? 이를 여러 번 묻게 되죠. 그런 질문을 받을 때 교회와 우리의 믿음에 반대하는 모든 어려움에 답하기 위해 예전에 쓰여진 책에서 사용하던 방식으로 답변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무의미한 답변이고 순전히 이론적인 답변으로 해당 전문 분야를 공부하는 대학생과 같은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합당하고 정당한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넓은 시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잘 모르지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신앙의 고백은 이것이고, 이 시점에 지평이 있습니다".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인도하십시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가서 이 사람 또는 이 사제를 찾으세요. 이 분야의 전문가이고 설명을 해줄 수 있습니다." 절대 문을 닫지 마세요. 절대 닫지 마세요. 그들이 여러분이 느끼는 도덕성과 일치하지 않는 문제로 당신에게 올지라도 대답할 수 있으면 대답하십시오. 대답할 수 없으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다음과 같이 말하십시오. "이것에 대해서 이 사람과 혹은 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항상 열려 있고, 열려 있어야 합니다. 방어적인 태도는 대화를 단절하고 문을 닫습니다. 열려 있는 사람은 이렇게 답합니다. "예, 흥미롭네요...".
우리는 대부분의 것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대답할 수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의구심을 가질 때, 저는 여러분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대학 수업에서 갖게 된 의문이나 전문 영역에 관한 의문을 물어볼 때 가능하면 다른 의문으로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 의문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그 학생도 같은 주의를 기울이며 여러분을 대할 것입니다. 그렇게 학생이 그것에 대해 너무 확신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당신은 나에게 이것에 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이 대답은 어떻습니까?" 이 방법은 예수님께서 자주 하셨고 복음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함정이 있는 질문에 예수님은 또 다른 질문으로 대답하시고, 대화 상대를 지적인 길의 한가운데에 남겨 두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과학적 측면이나 믿음에 어긋나는 측면에 대해 또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측면에 대해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도록 이끄십시오. 대부분의 경우 답변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제가 여러분에게 드리는 조언의 일부입니다. "의미 없이" 대답하지 마십시오. 마치 나에게 질문하는 여러분에게 대답한다는 식으로 대답하지 마십시오. 만일 질문에 타협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자 회당장은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었다고 분개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요? 토요일에 소를 데려가 물을 마시게 하지 않습니까?" (루카 13,15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질문 자체의 모순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거나 알지 못하는 어려운 과학적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것에 관해서는 이 과학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한다"고 답하십시오. 겸손해야 합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에 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수호하는 접근방식은 더 이상 효과가 없습니다. 시대착오적인 방식입니다. 신앙이 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은총이 있다는 것은 길을 걷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여러분이 여정 중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한때 호교론이 유행했고 교리에 대한 공격에 맞서 방어하기 위한 질문이 있는 책도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방어를 위한 방법론이 있었습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들로 이뤄진 책이었죠. 좋은 답변도 있고, 그렇지 않은 답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화하는 데 있어 적합하지 않은 접근법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봤지? 내가 대답했으니 내가 이긴 거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요, 그러한 방식은 좋지 않습니다. 항상 과학과의 대화를 열어 두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을 당신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과학자들에게 가십시오.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가십시오.” 종교와 과학의 대립구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대립구도는 나쁜 영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 진보를 위한 참된 영이 아닙니다. 인류의 진보는 과학을 발전시키고 신앙을 지킬 것입니다.
질문 3
프란치스코 교황님, 로마에서 학업을 하고 있는 이 시기에 사제 직무에 합당하게 “양의 냄새”를 잃지 않고 사제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감사합니다.
답변
학업이나 교구청 업무나 혹은 다른 업무에 종사하더라도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을 사제로서 만나지 않는 것은 영적인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장관들에게 토요일과 주일에 본당 또는 어느 곳에서든 이 직무를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조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고 있지 않다면 조심하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들과 꾸준히 만나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름 부음 받은 하느님 백성이고, 양들이기 때문입니다. 질문한 대로 양 냄새를 잃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에게서 멀어진다면 그는 사상가, 훌륭한 신학자, 훌륭한 철학자, 교구의 모든 일에 능통한 팔방미인이 될 수 있을지언정 양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역량은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분의 영혼은 양 냄새를 맡더라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여러분 각자가 최소한 매주 사목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본당, 공동생활가정이나 요양원에서 사목 경험을 쌓으며 하느님 백성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제 말을 잘 들으십시오. 저는 장관들에게 사목 활동을 하지 않는 사제가 있는지 확인하라고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그 사제를 벌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제에게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사제는 큰 힘, 곧 사제 생활의 큰 힘을 잃고 있습니다.
저는 "네 가지 친밀함의 원칙"에 대해 사제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첫 번째, 하느님과의 친밀함입니다. “당신은 기도 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주교와의 친밀함입니다. “당신은 주교와 얼마나 친밀합니까? 당신은 주교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주교와 멀어질수록 좋다’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교와 친밀하고 주교에게 의논하러 가나요?” 세 번째, 사제들 사이의 친밀함입니다. 진정한 형제애적 친밀함의 부족이 신학생이나 사제들 사이에 발견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네, 모두 서로에게 밝은 미소를 짓지만 곧 자신의 소그룹끼리 모여 서로의 허물을 벗깁니다. 이것은 친밀함이 아니라 형제애의 부족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하느님 백성과의 친밀함입니다. 하느님 백성과의 친밀함이 없으면 여러분은 좋은 사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친밀함은 매주 직무와 함께 유지되고 행사돼야 합니다.
질문 4
안녕하세요, 교황님. 사제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표징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표징은 우리 사제들의 부족함 때문에 자주 훼손됩니다. 교황님, 우리의 결점에 대한 자비의 체험과 미덕을 실천하며 거룩함에 이르려는 노력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을 수 있습니까? 오늘날의 신학생뿐만 아니라 미래의 신학생들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신학생 양성에 있어 가장 강조하고 고려해야 할 사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답변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당신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신을 비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균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인생은 균형적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균형적이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나는 완벽하게 균형 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균형은 서커스에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지속적인 불균형입니다. 왜냐하면 인생은 여정을 진행하며 발견하는 것이고, 어려움을 마주하는 것이며, 당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좋은 것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항상 여러분을 불균형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균형이 필요한 연습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양쪽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이 부분이 편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삶에서 균형은 죄에 대한 용서와 자비의 체험과도 균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고, 우리가 매주 또는 격주로 - 저는 격주로 합니다 - 고해 사제에게 가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다는 사실에 감사드립니다. 이것은 당신을 겸손으로 이끌기 때문에 중요한 불균형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계속해서 걷고 넘어지고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금씩 걸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엔 정해진 시간표도 없습니다. 물론 당신은 차에 두는 네비게이션을 둘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 기도의 조언이나 당신이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불균형입니다. 사실, 나는 그 반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매일의 불균형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가라고 말입니다. 불균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 불균형 안에서 식별하십시오. "균형 잡힌" 사람은 마음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식별할 수 없습니다. 불균형에는 죄에 빠진 후 다시 일어나 선을 행하려는 열망으로 여러분을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불균형 속에서 사는 법을 아는 것이 하느님께서 다스리고 계시는 다른 균형, 곧 역동적인 균형으로 이어지게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아갑니다. 이것은 균형과 불균형에 관한 것입니다.
다음은 신학생의 양성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성직자부 장관] 추기경님이 신학생에 대해 나보다 더 잘 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양성에 관한 전문가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신학교에는 신학생들이 "공동체"를 이루는 특정 인원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부터 살펴봅시다. 그럼 어떤 이들은 "아니요, 우리는 교구에 다섯 명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것입니다. 이는 신학교가 아니라 본당 단체입니다. 신학교에는 25-30명이라는 적당한 인원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200명이 있는 경우 소규모 사람들이나 소공동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큰 신학교에는 300명이 있는데 이렇게 많은 신학생이 있는 신학교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습니다. 이는 다른 시대의 표현입니다. 작은 공동체, 즉 큰 공동체에서 나눠진 작은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신학생들의 양성과 관련하여 신학생들은 좋은 영적 양성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신학교에 다니며 철학과 신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렇다면 영성은요? 무엇보다도 첫째는, 좋은 영적 양성을 받는 것입니다. 신학생 입문 기간에도 동일합니다. 오늘날 신학생 입문 과정의 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학생에게 영적 식별, 영적 양성, 학문, 영성 교육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둘째, 지적 양성 과정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요. 그들이 추론하는 방법을 알고 기본적인 신학을 알고 있다는 것으로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본 신학 과정에 4년이 걸립니다. 훌륭한 영적 양성과 함께 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때로는 작은 공동체들을 하나로 합치는 과정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공동체에는 적합한 교수와 양성자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영성적이고 지성적 양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공동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공동체 생활에서 그들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서로 비난하거나 사제들 사이에서 당파를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신학교에서 배웁니다. 그리고 사도적 삶을 살게 됩니다.
각 신학교에는 사도 생활의 고유한 실습이 있습니다. 보통 주말에는 본당에 갑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생활은 당신이 말한 “양 냄새” 나는 역량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현실에 맞춰 적응하는 능력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신경질적인 본당 사제가 있는 그리고 문제가 있는 본당으로 가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를 처리하는 방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가는 본당 사람들은 때때로 당신의 양성자들보다 당신을 더 잘 알기도 합니다. 제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제가 예수회에서 활동할 때, 누군가를 수도회로 입회시키기 위해서 공동체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정보는 교수들로부터 나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좋은 내용이었지만 정말 좋은 정보들은 보좌 신부님들이나 본당의 여성들로부터 받았습니다. 흥미로웠습니다. 그들은 좋은 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가지 기억이 떠오르네요. 부제 서품을 받아야 하는 착하고 총명한 한 청년을 기억합니다. 한번은 본당에서 온 한 여성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조금 기다리라고 하고 싶네요. 훌륭하고, 모든 자질을 갖췄는데 뭔가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요." 이렇게만 말했죠. 보좌 신부도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1년만 기다리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이들은 아무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말한 대로 기다렸고 4개월 후 그 청년에게 한 가지 문제가 닥쳐 자신의 의지로 신학교를 떠났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여러분을 잘 알아봅니다. 따라서 신학교에서의 양성은 다음의 네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영적 양성은 많은 주의를 요구하며, 신중한 영적 지도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 매뉴얼만이 아닌 신중한 지성적 양성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신학생들 사이의 공동체 생활 양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양성이 있어야 합니다.
질문 5
교황님, 오늘날의 사제와 신학생들은 디지털 세계와 소셜 미디어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잊거나 혹은 너무 노출되고 오만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쁨을 나누는 기회로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까요? 감사합니다.
답변
제 생각에는 이것들은 과학의 진보이기 때문에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우리 삶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러한 것들을 늦게 알게 되어 전혀 사용하지 않습니다. 아시나요? 제가 30년 전에 주교가 되었을 때, 신발처럼 큰 휴대폰 하나를 받았습니다. 그 크기를 다들 아시죠? 저는 "아니요, 이것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지만 결국 "전화 한 통화를 하겠다고 했죠.” 저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걸어 인사를 한 다음 다시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으로 선물해달라"고 했습니다. 그 휴대폰을 사용할 수 없었어요. 제 마음이 내키지 않았거나 무관심한 이유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제가 독일에 있을 때 할인상품으로 59마르크를 주고 산, 올리베티(Olivetti) 타자기뿐이었습니다. 이 타자기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부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기들은 나의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소통하기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기기 사용의 위험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곳 저 곳의 소식을 하루 종일 보는 것, 모든 것을 손에서 할 수 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계속 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자신에게 관심 있는 음악을 들으며 일하지 않거나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잘 사용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당신이 잘 알고 있는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바로 디지털 음란물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서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일을 한 번이라도 경험했다면 손을 들어보라"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각자는 디지털 세계에서 음란물에 대한 경험이 있거나 유혹을 받은 적이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그것은 너무 많은 사람들, 너무 많은 남녀 평신도들 그리고 사제와 수녀들에게 노출된 악덕입니다. 악마는 거기에서 들어옵니다. 저는 이미 학대 사례를 볼 수 있는 아동 학대와 같은 범죄 음란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성적 도착입니다. 그러나 다소 “보통의” 음란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것에 주의하십시오. 날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순결한 마음은 이런 음란물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오늘의 주제입니다. 이것을 휴대폰에서 삭제할 수 있다면 삭제하여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삭제할 수 없다면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방어하십시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약화시킵니다. 영혼을 약화시킵니다. 악마는 거기에서 들어와 사제의 마음을 약화시킵니다. 음란물에 대한 세부 사항을 이야기해 미안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는 일이며 사제와 신학생, 수녀, 봉헌생활회원들의 영혼을 실제로 건드리는 현실에 있는 일입니다. 이해하셨나요? 이것이 중요합니다.
질문 6
프란치스코 교황님, 최근 몇 년 동안 로마에서 제 동료와 함께 근처 본당에서 견진성사를 받은 젊은이들을 주시해왔습니다. 우리 둘 다 다른 나라에서 왔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저의 다른 동료 신부에 대해 언급하며 "다른 신부님이 신부님보다 이탈리아어를 더 잘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반대로 신부님은 손과 몸짓을 사용해서 이야기해요.” 이 청년의 관찰을 통해 저는 복음화에서 말을 잘하는 것이 손과 몸짓으로 연설을 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은 몸짓만큼 중요하며 아마도 이탈리아인에게는 말에 수반되는 몸짓일 것입니다. 사제 양성 과정 중에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말과 단어를 잘 사용하는 방법과 일관된 철학적 담화를 만드는 법,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 교회에서 좋은 설교를 하는 방법을 많이 가르쳐줍니다. 그러나 교황님께서는 몸짓, 행동, 구체적인 온유함의 중요성과 행동이 얼마나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교황님께서 고통받는 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봅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저는 교황님께서 병자에게 입맞춤하시는 모습을 보며 저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또한 교황님께서 가난한 이들에게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보며 저 또한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몸짓은 하루아침에 배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몸짓의 언어를 배우지 않으면 결코 모범을 보이는 사목자가 되지 못할 것임을 압니다. 이러한 자비의 몸짓을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어떤 마음 가짐으로 우리가 신학교에 갈 수 있을까요? 이 매우 중요한 언어를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답변
고맙습니다. 제가 몸짓을 배운 곳은... 글쎄요, 몸짓은 인생이 당신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배운 한 가지는 아픈 사람을 방문할 때 너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바라보고, 몇 마디 말하고 그대로 있으십시오. 제가 21살 때 폐의 일부를 제거한 수술에서 제 모든 친구와 이모들 그리고 모두가 저에게 와서 이야기했습니다. "괜찮아. 넌 곧 회복될 것이고, 이야기도 잘 할 것이고, 곧 뛰어 놀 수도 있을 거야..." 그들의 말들은 좋았는데 곧 질렸습니다. 어느 날 첫영성체를 위해 나를 준비시켜 준 수녀님, 좋은 할머니인 돌로레스 수녀님이 오셨습니다. 돌로레스 수녀님은 제 손을 잡고 제 눈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너는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 거야." 수녀님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점이 저를 위로했습니다. 아픈 이에게 갈 때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동기들을 채우지 마세요. 친밀함의 몸짓은 말보다 존재로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제가 당신에게 보여준 몸짓에 대해 말하자면, 몸짓은 배울 수 있습니다. 곧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가서 배운 온유함의 몸짓입니다. 첫날에는 거리를 두고 멀리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두 번 세 번 가면 노인들을 반갑게 안을 것입니다. 표현하도록 두십시오. 표현이 전부가 되도록 하십시오. 강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은 제가 조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잘 지내고 있니?" 전화를 걸었던 당시는 일요일이었고, 가끔 일요일에 저의 여동생에게 전화를 하곤 합니다. 제가 조카에게 잘 지내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조카는 "좋아요. 그런데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특이한 본당의 미사에 갔기 때문에 조금 지루했어요. 40분 동안의 아름다운 철학적 설명을 들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없었거든요!" 여러분이 행동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여러분의 생각도 굳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은 강론할 때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추상적인 말만 하게 될 것이고, 누군가는 성당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사람의 성숙함을 나타내는 세 가지 언어가 있습니다. 곧 머리의 언어, 마음의 언어, 손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세 가지 언어로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즉, 내가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느끼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균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것들 사이의 균형입니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농담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는 생각과 마음과 손으로 하는 몸짓으로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픈 아이들을 볼 때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것처럼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 봅니다. 아픈 아이들을 안아줍니다... 누군가는 당신을 소아성애자라고 비난할 수 있지만, 아닙니다. 이는 그러한 비난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마치 사랑을 필요로 하는 노인들처럼 말입니다... 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양로원에 자주 갔었고, 가끔 미사를 집전했던 기억이 납니다. 노인들은 똑똑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신에게 가장 까다로운 질문을 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미사 때 저는 "여러분 가운데 누가 성체를 모시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걸을 수 없고, 늙었으며, 지팡이를 짚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성체를 모시고 싶은 분은 손을 들라"고 말했습니다. 모두가 손을 들었습니다. 저는 한 여성에게 성체를 주었고 그녀는 제 손을 잡았습니다. "고마워요, 신부님, 저는 유다인이에요." "하지만 당신에게 준 사람도 유다인이었습니다." 노인들은 관심을 원하고, 그들은 당신이 그들의 말을 듣기를 원하며, 당신이 그들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랑.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방식에 빠지게 되는데 하느님의 방식은 바로 친밀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신명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신명, 4,7). 친밀함은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가까이로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항상 용서하시며 온유함과 연민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십니다. 좋은 사제는 가까이 다가가고, 함께 아파하며, 온유합니다. 노인보다 아름다운 소녀를 가까이 하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온유함은 자라며 반대되는 사람에게 더 잘 표현됩니다. 아이들, 특히 당신을 부르는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과 함께하며 배우게 될 것입니다...
한때 제 철학 교수였던 피오리토 신부님은 훌륭한 영성 지도 신부님이었습니다. 피정에 관한 많은 책을 출판했고 이탈리아어로도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어느 날 피오리토 신부님은 행동과 기초 철학에 대해 강연하던 중 영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피오리토 신부님의 질문 중 하나를 신학생과 신학자 여러분 모두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아이들과 놀아 줍니까? 아이들과 놀아주는 방법을 아나요? 피오리토 신부님은 언제나 부모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버님 또는 어머님, 퇴근하고 아이들과 놀아주시나요?" 온유함은 어린이와 노인을 통해 함께 배웁니다. 노인들이 우리를 방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노인들을 멀리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온유함의 근원 중 하나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의 방식은 항상 친밀함, 함께 아파하는 마음, 온유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자애로움과 온유한 사랑으로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간다면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랑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선을 행하다가 어리석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요. 제가 말하는 것은 온유한 사랑입니다.
질문 7
교황님, 안녕하세요. 저는 보편 교회의 두 가지 중요한 사건부터 시작하여 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선교와 복음화에 봉사한 복음화부서의 400주년과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 친교, 참여, 사명”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시노드입니다. 어떻게 우리 젊은 신학생들이 다른 젊은이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우리의 "안락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날의 세상에서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도전은 무엇입니까? 감사합니다.
답변
이에 대한 방법은 없습니다. 당신은 매우 관료적인 단어인 "안락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군요. 즉 바쁜 사제를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제들이 각자의 평온함을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저는 이 시간에만 일 할 수 있습니다... 한 번은 이웃의 좋은 본당 신부가 저에게 창문이 있는 곳에 벽을 짓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들의 필요한 일들, 기도, 미사 등을 요청하려고 시도 때도 없이 창문을 두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정말로 문을 만들었냐고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그럴 수 없었어요. 신부님. 사람들이 없으면 저는 신부가 아닌걸요." 아름다운 대답입니다. 아름다워요! 안락함과 관련하여 인상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안락함을 추구하는 사제, 프랑스의 “monsieur l’abbé”와 같은 인물입니다. 교구청에서 일하는 여러분은 조심하십시오. 공무원 같은 사제는 사제직을 사무직과 혼동하며 살기도 합니다. 정해진 시간에 담당한 업무만 처리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는 점차 과민하고 신경질적인 노총각이 되게 합니다. 조심하십시오. 이렇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각자의 안락함을 찾지 마십시오. 사제직은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봉사입니다. 이 봉사의 최고봉은 바로 성찬례입니다. 이 봉사는 또한 공동체에 대한 봉사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주교님과 이야기해 보세요. 가정의 좋은 가장이 될 수 있습니다. 사제직을 업무를 처리하는 직무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것이 안락함입니다.
이 안락함을 동반하는 또 다른 것이 있습니다. 높은 직책에 오르려고만 하는 차원인 출세주의 사제 입니다. 저는 이들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구청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발생합니다... 당신이 무엇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할 때, 출세주의자들이 모입니다. 제발 그만하십시오! 그런 이들은 결국 봉사자가 아니라 배신자가 됩니다. 자기 자신의 안위를 구하고 타인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다른 많은 이탈리아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 가족 구성원을 먹여 살린 것처럼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저의 할머니는 평범한 “교리 교육”과 같은 간단한 가르침을 주기를 좋아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저희에게 ‘인생은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 벽돌을 장만하고, 땅을 사고, 집을 짓는 발전을 이루거나 사회적 지위 혹은 가정을 꾸리는 발전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발전을 ‘높이 오르려고만 하는 출세주의’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왜냐하면 출세주의자들은 올라가고,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정상에 올랐을 때 자기 자신을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 자신들이 이렇고 저렇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들이 하는 유일한 일은 우스꽝스러운 행동입니다. 이러한 것이 저의 삶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주교를 위한 정보를 받을 때, 만일 여러분이 주교부에 근무하고 있다면 현재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동료들에 대한 정보를 즉시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출세를 지향하고 새로운 자리를 원하고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안락함, 경력, 출세를 추구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제가 젊었을 때 이탈리아에서는 모르겠지만 스페인에서 이 사제는 경력을 위한 사제가 되었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의사로서의 경력, 변호사로서의 경력처럼 말이죠 ... 오늘날 이러한 말은 감사하게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출세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그런 동료가 있다면, 출세주의자가 되는 것을 멈추도록 도와주십시오. 왜냐하면 결국 그는 최악의 모습을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세주의자는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친교, 참여, 사명. 그렇습니다. 친교가 있으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참여하면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사명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생각합니다. 항상 봉사하고 섬기십시오. 심지어 전례도 봉사입니다. 자신의 위로가 아닌 남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이 말 말고는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쾌락과 안락을 추구하는 위험과 출세주의자의 위험을 분명히 이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 주위에는 출세주의자들이 많습니다. 정말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 이런 유혹이 있다면 멈추고, 멈추도록 조언을 구하십시오.
질문 8
교황님, 안녕하세요. 이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학생의 성소 여정은 항상 자신의 성소를 식별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과 다른 이들의 경험으로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때로 혹은 종종 우리는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사제 성소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두려움과 직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행복하지 않다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또는 주로 하느님의 사랑이 아니라 사제직을 특징짓는 덜 중요한 다른 세부 사항 등에 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내면과 그의 여정을 특징짓는 환경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느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생이 식별 과정에서 따라야 할 올바른 경로는 무엇일까요? 더 일반적으로 올바른 식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교황님.
답변
고맙습니다. 올바른 식별은, 무엇보다도 제가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균형의 상태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은 저울이 하는 것입니다. 식별은 항상 "불균형"합니다. 식별해야 하는 상황은 항상 ‘불균형’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러한 상황에는 이러한 감정이 들고 저러한 상황에는 다른 감정들이 들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식별은 이 불균형에서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구하는 것이지 균형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균형은 같은 수준이 아닌 더 높은 수준에서 해소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은총이며, 영적 체험의 은총입니다. 불균형의 상태로 주님 앞에 가십시오. 원한다면 형제의 도움을 받으세요. 기도와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는 노력으로 불균형의 상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차원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항상 여러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불균형의 모순 - 수학적 모순이 아니라 인간적 모순 - 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합니다. 불균형은 어느 하나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모든 부분이 새로운 상황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불균형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영적 동행의 은사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학생이 식별 과정에서 따라야 할 올바른 경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식별에 대해 제가 말한 것 중에 있습니다. 사제, 친구, 수녀, 평신도 등 누구든지 여러분과 동행하는 이들과의 기도와 대화 안에 있습니다. 기도와 대화입니다.
“더 일반적으로, 올바른 식별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나요?” 올바른 식별은 균형이라는 결과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올바른 식별을 나중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결정은 "균형"이 아니라 조화로워야 합니다. 균형과 조화는 다른 것입니다. 균형은 수학적이고 물리적인 것입니다. 조화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균형은 당사자를 비교하고 타협점을 찾는 것입니다. 식별에서 조화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분은 오직 성령뿐입니다. 하나의 은사입니다. 바실리오 성인께서는 성령에 대해 ‘성령 자신이 조화이시다(ipse harmonia est)'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성령은 조화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내면에서 성령과 함께 식별하고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그리스도인의 식별을 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불균형은 기도 안으로 들어가고, 새로운 조화의 상황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길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서 여러분은 또 다른 부조화에 빠질 수 있으며, 성령께서 당신을 더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일도, 지성적인 일도, 감정적인 일도 아닙니다. 조화로운 성령의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성령의 조화를 이해하는 이 은총에 도달합니다. 제가 답변을 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잘 이해했나요? 식별을 저울처럼 균형 잡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기도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내면의 감정을 성령께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바른 식별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영적 위안입니다. 성령께서는 조화롭게 하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반대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위안을 받는 상태가 아니라 황량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성령의 감정, 위안과 쓸쓸함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은 나에게 유익하고, 이것은 나를 행복하게 하며, 이것은 나의 평화를 빼앗아 갑니다... 주님께서 내 마음에 하시는 일과 악마가 하는 일을 구별해야 합니다. 악마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위험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도자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방법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교황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을 향해 말했다] 열 번째 질문을 받고 싶습니다. 질문하실 신부님이 우크라이나인이고 그의 조국이 고통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 9
프란치스코 교황님, 저는 우크라이나 사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현대 세계에서 얼마나 많은 전쟁과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지, 특별히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상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교황님께 여쭤보고 싶습니다. 전쟁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가톨릭 교회가 해야 할 역할은 무엇이며, 그 지역에서 사제들의 임무는 무엇입니까? 감사합니다.
답변
고맙습니다. 가톨릭 교회, 곧 거룩한 어머니 교회는 어머니이며, 모든 민족의 어머니이십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녀들이 다투면 고통을 받습니다. 전쟁은 자녀들의 파괴이기 때문에 교회는 전쟁 앞에서 고통스러워야 합니다. 가정의 작은 전쟁 곧 아이들이 어울리지 않거나 다투거나 서로 말을 하지 않을 때 어머니가 고통을 받는 것처럼, 여러분 나라에서 이와 같은 전쟁에 직면해 있는 어머니 교회도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고통을 겪고,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전쟁으로 끔찍한 일을 겪은 사람들을, 집을 잃거나 부상당한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교회는 어머니이고 그 역할은 무엇보다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머니이고 어머니와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또한 평화의 창조적인 어머니입니다. 교회는 특정 순간에 평화를 이루려고 노력합니다. 이 경우 쉽지 않지만 교회는 마음을 열고 있습니다. 이 일에서 편을 가르지 마십시오. 각자 자신의 조국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우리는 각자 조국을 수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너머로, 더 보편적인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어머니 교회는 모든 이, 모든 희생자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내 조국을 파괴하고, 내 가족을 죽이려고 침략하는 이들의 죄를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왜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냐고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 모두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침략자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들도 여러분과 같은 희생자들입니다. 여러분이 그들의 영혼에 새겨진 상처를 볼 수 없겠지만,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려 주시어 평화가 오길 기도하고 또 기도하십시오. 이것은 중요합니다.
질문 10
안녕하세요, 교황님. 감사합니다. 교황님께서는 「사제 양성의 기본 지침」(Ratio fundamentalis Institutionis sacerdotalis)에서 지속적인 양성이 발전되는 첫 번째 부분이 사제의 형제애임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사실, 사제와 주교가 서로를 지지하고 기쁨을 나누며 다른 이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일치된 모습을 보일 때, 사제직의 양성과 친교를 나누는 데 이바지할 것입니다. 교황님의 사목자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현 시대의 도전에 직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더 많은 형제적 관계를 사제직 안에서 이루기 위해서 어떤 조언을 해 주실 수 있나요? 감사합니다. 교황님.
답변
너무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친밀함과 대화, 거리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주교들에게 말합니다. 사제는 여러분의 첫 번째 이웃이니 사제들과 가까이 지내라고 말입니다. 저는 또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한 사제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황님, 제가 주교님과 이야기 하려고 주교관에 전화하면 주교님의 비서는 이번 달은 주교님의 일정이 꽉 차 있으니 다음달에 만남이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주교가 사제들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친밀함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새로 임명된 나폴리 대주교는 무엇을 했는지 아시나요? 나폴리 대주교는 모든 사제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었습니다. 나폴리에는 천 명이 넘는 사제들이 있죠. 저는 나폴리 대주교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이 주교님을 괴롭히나요?" 나폴리 대주교는 이렇게 답했죠. "아니요, 하지만 필요할 때 직접 저에게 전화를 겁니다." 이러한 친밀함은 주교와 사제 사이에서 유효하며 사제와 다른 사제 사이에서도 유효합니다. 여기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조국에는 남을 험담하는 성직자 무리가 있었습니다. 좌익에 속한 그룹, 우익에 속한 그룹, 이곳 저곳에 속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독입니다. 이는 독이며 사제단을 죽이는 벌레입니다. 사제들 사이의 일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면전에 직접 말할 자신이 없다면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형제 사제를 비난하면서 당신의 명예를 실추하지 마십시오. 이는 인간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가서 있는 그대로 말합니다. 자애와 사랑으로 말입니다. 다른 당사자가 조금 폭력적이라 직접 말할 수 없다면 주교에게 가서 말하십시오. 주교는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마십시오. 사제단을 해롭게 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이러한 친밀함이 필요합니다. 주교 역시 서로를 지지하십시오. 때때로 주교가 다소 "광분"한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주교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교를 대하는 방법에 대해 할머니가 전해준 이야기를 들려주며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살던 할아버지는 많이 늙었고 먹다가 침을 흘려 주위를 더럽히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가정의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일부터 할아버지는 부엌에서 식사하실 거야. 멋진 탁자를 만들어 놓았으니 할아버지가 거기 가서 드실 거란다. 우린 이제 다른 사람을 초대해도 된단다. 할아버지는 옆에 따로 식사할 테니까 말이야" 며칠이 지나고 아버지가 회사에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자 6살 난 아들이 못과 나무로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뭐하는 거니?"라고 묻자 아들은 "탁자를 만들고 있어요. 아빠!" 아버지가 "왜 만드니?"라고 묻자 아들은 "아빠가 늙었을 때 아빠를 위해서 만들고 있어요!". 이렇게 한 곳으로 노인들을 둡니다. 제발 주교들을 아버지처럼 알아가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에게 결점을 말할 기회가 있으면 아버지에게 말하듯이 그에게 말하십시오. 그는 적도 아니고 회사의 사장도 아니며 아버지 입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를 도우시는 성모님께 기도합시다.
[내용출처 - https://cbck.or.kr/Notice/20221188?gb=K1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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