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복 1000원 하는 소록도행 , 우리를 싫고 온 총각이 " 아저씨 돌아 오세요" 소리 지르니까 거짓말 처럼 떠나던 배가 뱃머리를 되돌려 돌아 간다. 한 5분 굼벵이 엉덩이 돌리듯 돌아가던 배가 우리를 태우고 금새 소록도에 내려 놓는다. 쟝르크의 창작동화 "바구니 속의 왕국" 처럼 딸 오레리아를 보호 하기 위해 성 주위에 울타리를 쳐 초록 섬을 만들어 밖 과 차단 생활을 헤치고 나오는 동화가 생각난다. 초록 소록도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오랫동안 갇혀 있던 왕국의 문을 헤집고 들어가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 요술나라 처럼 그 속이 궁금한 섬, 잠은 더더욱 자고 올 숙박도 없고 또 남지도 못하는 섬, 우리는 데리려 나온 소록교당 교무님의 봉고에 몸을 싫고 미지의 섬 을 찾아가듯 차창 밖의 풍경에 온 신경을 세운다. 차창 밖의 비는 소록도까지 끈질기게 따라 와 뿌려댄다. 어두워 질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소록도를 한 바퀴 돌면서 관광을 하기로 했다. 가는 곳마다 금지구역 팻말이 가로 막은 길을 소록교당 표를 붙인 봉고는 서슴없이 통과 한다. 오랫동안 외지인의 손을 타지 않아 무성한 숲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눈길 스쳐가는 바깥 풍경은 가히 머무는 곳마다 하나의 멋진 자연 그대로의 작품이다. 인공 과 자연의 조화가 이리 확연히 다름을 몸소 체험하며 이곳이 장차 문이 열린다면 대단한 관광 자연이다하는 생각이 멈춘다. 나병 환자들의 조막손으로 일본인들의 온갖 박해를 받으며 꾸며 놓은 소록도의 중앙공원은 실로 장관이였다. 나무 하나 하나 기기묘묘 하지 않은 곳 없고 귀한 품종 아닌것이 없는 일본식으로 잘 꾸며져 아직도 일분의 잔재를 이곳에서는 확연히 느깔수 있었다. 3천명 가까이 됐던 나병 환자들은 이제는 줄어들어 600명 정도 남아 있다한다. 젊은 환자가 없어 모두 나이 드신분들이 많아 농사지을 힘이 없으셔서 그 기름진 옥토를 일구지 못하고 군데 군데 잡풀로 쌓여 있는 농토가 꽤 많았다. 사는것도 많이들 풍요로워져서 의식주는 잘 해결이 되는듯 봉고 차 밖으로 지자가는 환자중 일부 여성은 굉장히 깨끗한 차림이였다. 멀리 바닷가 조그마한 부두는 나병 환자들이 실려와서 내리던 부두라 했다. 그 옆으로 소나무가 욱어진 숲이 있었다. 그 숲에서 식구들 면회를 했는데 손도 잡아 보지 못하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얼굴만 서로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다가 갔다는 이야기다.가슴을 에이는듯 듣는 나도 슬픔을 억제 할 수가 없었다. 그 많고 많은 시간이 흘러 가 버린 지금 그 소식을 듣는 나는 얼마나 가슴이 저미는지 한동안 바다에서 눈길을 뗄 수가 없었다. 구라탑 천사가 나병을 창으로 찔러 무찌르는 탑을 바라 보며 그 공원 주변에 세워진 탑하며, 돌에 새겨진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가 새겨진 애환이 서린 넓적 바위가 보리피리 시를 등에 짊어지고 비를 맡고 잇는 모습이 엎어져 통곡하는 모습으로 보여 한 동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한하운의 시중에서도 「보리피리」는 일반에 가장 널리 알려진 시편이다. 이 시가 다른 뛰어난 시편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간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노래 때문이었다. 1957년 작곡가 조념씨(74)가 당시 서울방송라디오(현재KBS)의 청탁으로 「금주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에 이 곡을 발표,대단한 호응을 일으켰다 한다. 당시만 해도 서정적인 토속정서가 깃든 시편을 가곡으로 만든 예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 유명한 시가 되였다 한다.
『보리피리 불며 /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 필ㄹ니리. // 보리피리 불며 / 꽃 청산 / 어린 때 그리워 피ㄹ니리. // 보리피리 불며 / 인환의 거리 / 인간사 그리워 / 피ㄹ니리. // 보리피리 불며 / 방랑의 기산하 /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니리』(「보리피리」 전문)
일제시대 악독한 일인 병원장이 자신의 치적을 과시하기 위해 환자들의 피땀 얼룩진 노동력으로 만들어놓은 소록도의 중앙공원은 각종 열대 수종과 화려한 조경으로 찾는 이들을 놀라게 만든다. 기념탑 아래로 한하운의 「보리피리」가 넓고 평평한 돌에 새겨져 있다. 한참 그 시비를 들여다보는 나그네의 귀에 문득 흥타령 한가락이 들려온다. 웃고살아도 괴로운/세상,울기까지야 왜 허리/인생은 고해라더니 설움 없는 이 뉘 있으리… 놀라서 돌아보니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하얀 팻말 하나를 지나쳐서 공원 남단의 꽃그늘 속으로 느리게 사라진다. 인간사의 거리를 갈라놓는 하얀 팻말 위의 투박한 경고문 한 구절. 『이곳은 우리 병원 환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오니 병원장의 허가 없이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 나병 환자들의 애환이야 어찌 글로 표현 할 수가 있었겠는가. 한 이 서린 영혼이 지금도 구천을 헤메이는듯 구진 구진 비내리는 소록도 바다가의 소라빛 파도는 지금도 폭폭하여 자꾸 벽파를 일으키며 툭툭 흰거품만 쏟아낸다. 나무 한그루 한그루 애환 섞이지 않은 나무가 없는듯 하다. 그 속에서 같이한 인간은 처절한 외로움 과 천대 와 멸시를 새기며 빤히 보이는 하늘과 말이 없는 바다에 폭폭한 마음을 쏟아내며 살았을 것이다. 어디에도 쏟을 수 없는 정을 나무에, 딛고 사는 땅에 쏟아내며 같이 했을 소록도 섬 어쩌면 슬픈 섬이기 전에 원한의 덩어리로 뭉쳐진 섬이다. 환자의 80%가 기독교 신앙인이고 여의도의 1.5 배인 사슴섬 죽고 나면 시신은 안 걷어 가서 100% 화장장을 치른다 한다. 이러한 섬에 몇 안되는 교도를 안고 불교도 들어 가지 못하는 곳에 원불교의 "원망 생활을 감사 생활로 돌리자" 는 커다란 현수막의 펄럭임은 정말 가슴 뭉클한다. 그 슬픈 섬을 지키며 숱하게 떠나간 영혼의 천도를 위해 매일 목탁을 두드리는 소록도 교당의 교무님 참으로 휼륭하고 휼륭한 스승님이시다. 새벽 산책을 하며 올라간 법당 새벽 마당 잔디 잡풀을 뽑고 계시는 선생님의 모습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이 고적하고 텅빈 법당을 오롯히 지키시며 곱게 가꾸시는 선생님의 손길이 참으로 아름답다. 법당 그늘진 구석에 방목한 사슴이 미쳐 뜯어 먹지 못한 들꽃 몇그루가 청아한 아침에 피여있다. 사진기에 그 귀한 음지에 꽃을 영상으로 남긴다. 열마디의 법문 보다 그 모습에서 나는 내가 남은 생을 살고 가야 할 모습을 보는듯 숙연하지며 두손 모아 깊은 합장을하며 고개를 숙인다. 인간사 無無易 無無요, 非非易 非非라, 이 거칠고 욕심에 찬 세상 속에 이런 낙원이 존재 해 있더란 말인가.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접어둔 손수건을 꺼내 이런 귀한 순간에 인간 만이 흘릴 수 있는 보석 같은 눈물 그 눈물을 새벽에 훔쳐낸다. 헌집을 한채 사서 1억을 드려서 리모델링 한 법당 교육관 숙소는 잘 지여저 있어서 특히 여름에는 소록도 백사장이 옆에 붙어 있어서 이곳을 찾는 우리 법우들에게 안식처가 될듯한 휼륭한 장소였다. 고흥교당 식당 주모님이 싸주신 음식으로 저녁을 진수성찬으로 먹고 일어난 새벽까지 우리들의 배는 꺼지지 않아 새벽 배를 타고 고흥으로 나가서 조식을 해결 하기로 했다. 선생님의 손길을 잡고 언제 또 오겠느냐며기념 사진 한장 남기자고 새벽부터 김치를 연발하며 사진 한방 찍고 우리는 태워다 주시 겠다는 교무님의 뜻을물리치고 교당 길을 돌고 돌아 상쾌한 아침 소록의 공기를 품에 안으며 부둣가 까지 조깅으로 다른 여행 스케쥴을 위해 발길을 옮겼다. 슬픈섬, 사슴섬이여 다음에는 환한 얼굴로 다시 만나자 안녕~~~소록도여~~~~ |
첫댓글 하하하하하하하! 소록도 교당에서 하룻밤 자고
소록도 마을을 돌아보던 그때가 생각납니다.
이제는 다시 갈 수 없겠지요? 하하하하하하하!
그때가 좋았써요, 지나간 것은 모두 그리운것이야~~ㅎㅎㅎ
귀한 걸음 하셨네요.
흥미없는 여행기만 올려서요, 읽어주셔서 감사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