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노모와 처자식을 부양하고 있는 평범한 은행원입니다. 몇 년 전 군대 선배인 유 아무개씨가 찾아와 S시계 대리점을 개설하고자 하는데, 가까운 친척은 담보를 제공해서 보증을 설 수 없으니 제게 1년만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평소 유씨의 생활자세나 영업성과(S시계 영업과장) 등으로 보아 성실하고 유능한 사람으로 판단돼 소시민끼리 상호부조한다는 마음으로 보증을 서게 됐습니다.
대리점 개설 후 유씨는 우수한 판매실적을 올리며 S시계 본사로부터 수차례 수상을 하고 해외견학, 성공사례 발표 등 상당한 영업기반을 확보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1년 뒤 유씨에게 약속대로 보증해지를 요청했습니다.
그 즈음 유씨와 S시계측 사이에 체결된 대리점 계약서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불공정거래로 시정명령을 받아 새 계약서를 작성하게 됐습니다. 유씨는 더 이상 저에게 보증을 서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새로 보증인을 구하지도 못해 보증인 없는 대리점 계약서를 S시계 본사에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그동안 자신의 영업실적이 극히 양호해 보증인 없이 계약서를 제출했다고 말했습니다.
새 계약서가 작성된 후에도 유씨는 상당기간 영업활동을 계속했고, 저는 보증이 끝났다는 생각에 홀가분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93년 5월 유씨의 부도소식을 들었습니다. S시계는 저와 또 다른 보증인 1명을 상대로 물품대금 6억3천만원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냄과 동시에 급여를 가압류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새로운 계약서에 보증을 선 사실이 없으며, 유씨는 보증인이 없는 계약서를 S시계측에 제출했고, 그 이후에도 대리점 영업활동을 해온 사실을 들어 보증채무의 부당함을 주장했습니다.
저는 2심(항소심)에서 승소판결을 받았지만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지난 2년 동안 계속 급여의 절반을 가압류당해 생계유지가 곤란한 상태입니다. 또 금전적으로나 사생활이 모두 깨끗해야 하는 은행원의 특성상 급여에 가압류가 실행돼 직장내에서조차 인사상 불이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한순간 보증을 섰던 사실로 행복해야 할 가정에 웃음이 사라진 지 오랜 현실을, 저는 뼈저리게 회한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대법관님, 청하옵건대 본 송사로 인해 어두운 나날을 지내온 평범한 시민의 가련한 처지를 긍휼히 여겨 하루 빨리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복귀해 살아갈 수 있도록 본 송사를 조속히 종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덕규씨(45)가 재판을 기다리다 못해 대법관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은 97년 3월. 1년 전인 96년 4월 그는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연대보증기간이 자동연장된다는 약관은 보증인에게 불리한 불공정 약관이므로 무효』라는 승소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S시계측이 이 사건을 다시 대법원에 상고해 확정판결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보증소송, 상처뿐인 승리
2심에서 승소한 뒤 곧바로 월급 가압류 해제신청을 내려 했으나 『대법원 판결이 나올 때까지 3~4개월만 기다려 달라』는 판사의 한 마디에 주눅이 든 김씨는 신청을 취하하고 말았다.
그러나 몇 달만 참으면 끝날 줄 알았던 재판이 2년이 다 되도록 차일피일 연기됐다. 재판부는 그동안 우리사회에 관행처럼 굳어진 「연대보증 자동연장」 약관이 대법원에서 무효로 판정됐을 경우 생길 사회적 파장에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그동안 김씨는 월급의 반을 가압류당하고 매달 50만원으로 초·중·고교에 다니는 세 아이와 시골의 노부모를 부양해야 했다. 이번 사건이 터지기 전 주택자금으로 대출받은 1억원과 사채를 끌어다 쓴 소송비용은 이자까지 해서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98년 1월23일 드디어 재판이 열려, 김씨와 공동보증인 신 아무개씨는 원심대로 승소판결을 받았다. 소송이 시작된 지 5년 만이었다. 95년 5월부터 가압류된 월급 5천5백만원과 6천여만원의 소송비용도 되찾았다. 그리고 「연대보증 자동연장은 무효」라는 대법원 판례도 얻어냈다. 법에 대해 무지렁이였던 그가 대법원까지 가는 동안 보증 문제에 관한 한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그러나 얻은 것보다 잃은 게 훨씬 더 많았다. 88년 7월 유씨가 보증을 부탁하러 찾아온 이래 지난 10년 동안 김덕규씨는 하루도 마음 편히 잘 수 없었다. 부도 전에는 「혹시」라는 불안감 때문에, 부도 후에는 6억3천여만원의 물품대금을 갚으라는 S시계의 독촉과 계속되는 소송으로 시달렸다.
직장인 제일은행에서도 월급을 가압류당하는 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인사위원회에 불려다니며 해명을 해야 했고,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4차례나 근무지를 옮기는 등 인사상 불이익이 따랐다.
제일은행 고척동 지점에서 근무하던 그는, 사건이 터지자 96년 8월 광명지점으로 옮겼다가 6개월 만인 97년 2월 다시 인사발령을 받아 강서영업점으로 옮겼고, 며칠 후 목동출장소로 파견됐다가 4월에는 수원 중부영업점으로 발령받았다.
근무지를 옮길 때마다 보직을 받지 못해 몇 개월씩 대기발령상태가 계속됐다. 수원으로 발령받은 뒤 회사 인력개발부를 찾아가 『할 일을 달라』고 요청했더니 다시 안산지점 파견근무를 명령했다. 이곳에서 그가 맡은 일은 공단을 다니며 현금인출기를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회사가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수신실적이나 카드권유실적이 좋아 회사로부터 표창을 받은 것도 10여 차례나 됐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월급을 가압류당하고 소송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사이 회사는 그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취급했다. 견디다 못해 올해 1월19일 그는 희망퇴직을 하고 말았다. 3천만원을 더 받고 퇴직하는 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년 은행원 생활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10명중 1명만 보증 서준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보증을 서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친족 아니면 초·중·고·대학 동창 찾고 고향 선후배, 군대 선후배까지 들먹이며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가 보증에 빌미를 제공한다. 그래서 더욱 거절하기 어려운 게 보증청탁이다.
지난해 5월 처음으로 서울지법에서 파산신청이 받아들여지고 11월에는 채무면책까지 받아 주목을 받은 간호사 현 아무개씨. 그녀는 95년 친척의 빚 2억5천여만원에 대해 보증을 섰다 파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척은 다름아닌 현씨의 오빠.
『평소 오빠네가 괜찮게 살았고, 남편이 독일유학을 떠나 있는 동안 오빠 부부가 여러 모로 도움을 많이 줘서 병원으로 찾아와 보증을 청탁하는 데 거절하기가 어려웠다』는 게 현씨의 설명이다. 아무런 의심없이 오빠에게 건낸 도장과 인감증명은 빚독촉으로 돌아왔다.
오뉘간의 정 때문에 보증을 섰으나 오빠는 사업실패로 도피했고, 현씨는 사채업자로부터 채무 독촉을 받다가 어쩔 수 없이 13년 6개월간 간호사로 근무하던 병원을 퇴직해 퇴직금으로 사채업자에게 변제를 했다. 대학교수인 남편도 현씨와 함께 오빠의 보증을 서 월급의 반을 압류당하고, 현씨 가족은 아무 재산 없이 시댁에 얹혀사는 신세가 됐다.
평소 업무관계로 신세를 졌던 사람으로부터 대리점 계약 보증을 부탁받은 김덕규씨나, 우애있게 지내던 오빠로부터 빚보증을 부탁받은 현씨가 그것을 거절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관습상 불가능하다. 요즘 늘어나고 있다는 「처가파산」도 비슷한 이유다. 딸의 애원에 못 이겨 사위 사업에 퇴직금을 제공하고, 집은 담보로 잡히고 보증까지 서서 패가망신했다는 장인 이야기가 남의 일 같지 않다. 찜찜하지만 해줄 수밖에 없는 보증. 그래서 보증은 누구나 싫어한다.
지난해 한 기업체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빚 보증」에 대한 의식을 조사한 결과, 「보증을 서준다」고 답한 경우는 8.4%뿐, 「거절한다」 41.4%, 「생각해 본다」가 50.2%였다. 「생각해 본다」는 것은 보증 서줄 생각이 없다는 뜻. 10명에게 부탁하면 1명이 보증을 서줄까 말까다. 주변에서 보증 잘못 섰다가 고생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하지만 막상 내가 보증이 필요할 때 주변 사람들이 모두 「생각해 보겠다」며 슬슬 물러선다면 어떤 기분일까. 「정도 없고, 의리도 없는 야속한 사람」으로 몰아세우지는 않을까. 보증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이다.
『아무리 형제 자매간이라 해도 절대 보증은 서주지도 않고 부탁하지도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하는 사람들. 그러나 막상 보증인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취직이나 은행 대출은 물론, 자동차를 할부로 구입하려 해도 보증인이 필요하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벤처기업이라도 신용만으로는 아무 것도 안 된다. 신용보증기금 보증서를 받으려 해도 연대보증인을 세워야 하고, 보증보험에 가입할 때도 보증인이 필요하다. 대리점 계약을 할 때, 리스회사로부터 시설을 대여받을 때, 회사의 사원복지기금에서 주택자금을 대출받고자 할 때 번번이 보증인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사람의 보증청탁을 냉정히 거절하지 못한다. 보증의 덫으로 물고 물리는 사회, 그것이 대한민국이다.
식당취업에도 신원보증을
『일자리를 구해 주세요』
라디오 생방송 중 한 주부가 전화를 걸어 울먹이며 호소했다. 남편은 6개월째 실직한 상태고 적금 깨고 보험 해약해서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더 이상은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식당에라도 취직하지 그래요?』
방송 진행자의 무심한 한 마디에 전화를 건 여성은 또 한번 울먹였다.
『식당에 취직하려 해도 보증인이 필요해요. 우리 같은 실직자 가족에게 누가 보증을 서주나요?』
아무나 식당에 취직하는 게 아니다. 보증인도 필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보증금도 필요하다. 도봉구에서 3년째 중국집을 경영하고 있는 K씨는 『보통 생활정보지를 통해 사람을 구하는데 개업 초기에는 몰라서 당하기도 많이 당했다』고 말한다. 주방장이 생활비가 없다며 가불을 해달라고 해서 돈을 주었더니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거나, 배달원이 한나절 수금한 10만~20만원을 가지고 달아난 것도 수차례. 그 뒤로는 사람 믿는 것을 포기하고 종업원 채용시 주민등록등본, 사진, 주민등록증 사본 등 각종 서류를 꼼꼼히 챙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IMF가 닥친 이후 일하겠다는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적으니까 주인들이 더 까다롭게 구는 경향이 있어요. 돈을 만지는 배달원을 채용할 때는 확실한 보증인이 있어야 하고, 전세보증금 내듯 반달치 월급을 미리 깔아놓으라고 요구하기도 하죠. 그렇게 해도 일할 사람은 많아요』
취직 때 필요한 보증이 「신원보증」 곧 「재정보증」이다. 신원보증은 워낙 보편화돼서 보증보험 상품으로도 인기가 높다. 대한보증보험사의 신원보증상품 가입건수는 4백만건. 그러나 여전히 보증보험증권보다는 과거식 인보증을 선호하는 곳이 많다.
대한보증보험 홍보실의 허남헌 과장은 『국내법인이 수십만 개인데 신원보증보험을 이용하는 곳은 5만 군데 정도밖에 안 된다』며 『신원보증보험을 이용하지 않는 이유를 보면 보험의 효용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재정보증인 한 명 세우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채용할 수 있느냐는 인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업체에서 보증보험을 기피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가 보험 가입금 한도가 대개 2천만원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규정상 최고 1억원까지도 가능하지만 실제 1억원까지 보험가입을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요즘처럼 금융기관이나 기업체 내에서 횡령사고가 빈번하고 그 액수도 수십억원대를 오르내리는 상황에 웬만한 보증보험으로는 턱에도 안 찬다. 결국 회사는 보증보험증권 외에 재정보증인을 추가로 요구한다. 2천만원 넘어가는 손실액수에 대해서는 보증인이 책임지라는 뜻이다.
여기에 착안해 개발된 것이 「신원보증인 보험」. 재정보증을 섰다가 손해보는 사람에게 보상을 해주는 보험상품이다. 대한보증보험측은 지난해 이 상품을 시판하면서 『신원보증은 대출보증하고 또 달라서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기가 쉽지 않은데, 보증기간(대개 5년)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는 사람들을 위해 개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막상 판매율은 매우 저조했다. 자식의 신원보증을 서는 아버지, 조카의 신원보증을 서는 삼촌이 「만약의 사태」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상식 밖의 일이다. 결국 「만약의 사태」가 닥치면 책임은 모두 보증인이 질 수밖에 없다.
실업자 맞보증의 함정
보증 문제로 한 차례 홍역을 치른 것이 4월16일부터 시작된 실업자 대부사업이다. 정부는 3개월 이상 실직한 사람들에게 총 2조8백억원의 생계비 및 창업자금을 대출해주겠다는 내용의 실업자 대부사업을 발표했다. 8.5~9.5%라는 시중금리의 반도 안 되는 저리로 실업자 생계를 지원하겠다는 것은 대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대출자격과 조건. 실직 후 10개월 이내에 구직등록을 하고 3개월이 지난 부양가족이 있는 세대주에 한하며, 담보조건은 대출액이 1천만원 이하면 보증인 1명, 그 이상은 은행이 정한 부동산 담보가 필요했다. 보증인 자격도 까다로워서 5백만원 이하는 재산세 납부실적이 있거나 연간소득이 5백만원 이상인 자,5백만~1천만원은 재산세 2만5천원이상 또는 연소득 1천2백만원 이상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못박았다.
막상 실직자 대출이 시작된 4월16일, 실직자 1백30만명(당시 추정치) 가운데 서류를 접수한 사람은 전국적으로 4백40명에 불과했다. 그후 9일 동안 접수는 1천4백건이 넘었으나 실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사람은 28명뿐이었다. 대출요건을 충족시키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장 실직자들은 『까다로운 은행의 여신심사로 대출은 그림에 떡』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실직자에게 보증을 서주느냐』며 분통을 터뜨렸고, 언론도 일제히 정부의 「전시행정」과 은행의 「몸 사리기」를 문제삼았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정부는 보증인 대신 보증보험증서로 대치하는 문제를 검토했다. 그러나 보증보험사는 기존 소액대출보증보험(가계자금 3천만원 이내) 기준으로 실업자 대출의 보험요율을 정할 경우 5백만원 대출에 보험료가 50만~70만원에 이른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다. 한마디로 보증을 하기에는 사고 위험이 너무 높은 대출이라는 것이다.
결국 실업대출이 시작된 지 한달이 지나도록 대출실적이 지지부진하자 정부는 부랴부랴 대출서류를 간소화하고 보증인 요건도 대폭 완화했다. 보증인을 구하지 못하는 실직자는 다른 실업자를 보증인으로 세워 1천만원까지 생활안정자금과 주택자금을 빌릴 수 있도록 하는, 소위 맞보증 제도까지 허용했다. 이런 완화조치 덕분에 4월 중 1일 평균 1억7천만원에 불과했던 대부금이 6월 들어 8억6천만원으로 대폭 증가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은행대출창구에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기존 은행 여신심사라면 탄탄한 보증인과 담보물을 제시해도 대출자격이 될까 말까 한 실업자들에게 맞보증을 허용하며 대출을 해주도록 한 것은, 정부가 대출금 회수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대출업무를 맡고 있는 한 은행원은 『실업자 맞보증 제도는 당장 실업자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결국 신용불량거래자만 양산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금까지 실업대출이 실시된 내용을 보면 생계비나 주택자금이 대부분이고, 생업자금은 1%대에 불과하다. 즉 실업자들은 5백만~1천만원씩 대부받은 돈으로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할 뿐 생업을 위한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맞보증의 위험성은 더 커진다. 어차피 갚기 힘든 돈에 연대보증을 한 실업자들끼리 공동 파산할 위험성이 크다. 그동안 신용사회로 가는 걸림돌로 지적돼온 인보증의 폐해를 정부가 앞장서 조장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효력이 의심되는 실업자간 맞보증이라도 보증은 보증, 이것이 있어야 대출이 된다.
사라진 신용대출
실업자 대출뿐만 아니라 요즘 은행 창구마다 중소기업대출과 가계대출이 안 돼 아우성이다. 지난 연말부터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자본비율에 맞추기 위해 신규대출은 사실상 중단하고 대출금 회수에 열을 올린 데다, 코앞에 닥친 금융 구조조정을 의식해 여신건전성 확보를 최대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아무리 중소기업자금 지원책을 발표하고, 금융감독위원회가 직접 일선 은행을 돌며 중소기업 대출실적을 점검하겠다고 협박해도 씨도 안 먹힌다. 심지어 은행이 중소기업에 대출했다 부실화된 부분은 면책하겠다고 회유해도 은행들의 몸 사리기는 여전하다.
감봉이나 실직, 부동산 폭락으로 가계소득이 20%씩 줄어들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오르는 상황에 부족한 생활자금을 대출받으려는 개인들 역시, 높은 금리는 그렇다 쳐도 까다로운 대출조건 때문에 엄두도 내지 못한다. 무담보나 무보증 신용대출은 사라진 지 오래. 부동산 담보 없이 보증만으로 대출해주는 것이 신용대출로 통한다.
『신용대출은커녕 부동산 담보로도 대출을 안 해준다』
『은행은 보증서를 받아 오라고 하고 보증회사에서는 연대보증인을 구해오라고 한다. 1명도 아니고 4명씩 요구한다. 누가 보증을 서주겠는가』
『신용보증서도 소용없다. 1억원짜리 적금 들어주고 2억원을 대출받았다』
『세상에! 5백만원 대출받는 데도 집을 담보로 잡혀야 하나』
『은행 대출이 만기돼 연장하려고 했더니 담보로 잡힌 부동산값이 떨어져 추가담보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대출금을 일시에 상환하라는데 돈은 어디서 구하나』
『은행에서 보증보험증서는 받지도 않는다. 보증인만 데려오라고 하는데…』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거부당하고 돌아서는 사람들의 입에서 불만이 쏟아진다. 하지만 방법이 없다. 사돈의 팔촌이라도 보증인으로 끌어들이는 수밖에. 대한민국에서 보증의 고리로부터 자유로운 성인은 몇이나 될까.
보증과 소비자 파산
▲ 97년 2월 동진기계대표인 신 아무개씨와 그의 처, 초등학교 4학년인 딸 등 일가족 3명이 집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신씨는 맞보증을 섰던 친구의 회사가 부도가 나 사채업자들로부터 심한 빚독촉을 받던 중 견디다 못해 가족과 동반자살했다.
▲ 97년 11월 30대 치과의사인 김모씨가 3억여원의 부채를 청산할 능력이 없다며 파산신청을 했다. 김씨는 병원개업 당시 빌린 1억2천만원을 갚지 못한 상태에서 사업을 하다 부도난 친척의 보증채무까지 겹쳐 총 3억1천만원의 빚이 있는 상태.
▲ 98년 1월 현직 부장검사를 포함, 5명의 검사가 경제사정을 이유로 사표를 제출했다. 형의 사업이 부도가 나 보증채무를 지게 됐거나, 처가의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담보로 잡힌 전재산을 날려 더 이상 월급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워졌기 때문.
▲ 98년 3월 외과 전문의 김모씨는 친구의 사업자금 8억원의 대출보증을 섰다가 그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보증채무를 안게 됐고, 병원 개업 당시 진 3천만원의 빚을 포함, 총 9억3천만원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며 소비자 파산을 신청했다.
▲ 98년 4월 사립고 교장으로 퇴임한 은 아무개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조 아무개씨가 4개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 데 보증을 섰다. 그러나 이 회사의 부도로 6억6천2백만원의 빚을 떠안았고, 집을 팔아 3억2천5백만원을 갚았으나 나머지 3억여원은 갚을 능력이 없다며 파산 신청.
보증피해가 줄을 이으면서 견디다 못한 보증인들이 파산을 신청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보증 피해에는 남녀, 직업의 구별이 없다. 오히려 금융기관에서 보증인으로 신분이 확실한 공무원, 교사, 의사, 법조인들을 선호해 이들 가운데 보증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소비자 파산의 원인을 보면 본인의 사업실패가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빚보증도 파산의 주요 원인이다. 특히 남편 빚보증을 선 아내, 자식 빚보증을 선 아버지 등 가족간 빚보증은 온 집안이 풍비박산나는 지름길. 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말라는 말이 실감나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예고없이 찾아온 빚 독촉
어느날 장 아무개씨는 보증보험회사로부터 어 아무개씨가 할부로 구입한 덤프트럭 2대의 할부금이 연체됐으므로 연대보증인으로서 보험금액 7천6백만원을 보상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덤프트럭도 금시초문이고, 보증보험의 연대보증을 한 적도 없는 장씨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보험설계사 김씨에게 은행 대출을 부탁하면서 맡긴 자신의 인감증명서와 인감도장이 사건의 발단임을 알게 됐다.
보험설계사 김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화물운송업자 어씨가 『덤프트럭을 할부로 구입하려고 하니 연대보증인 1명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자, 마침 갖고 있던 장씨의 인감증명을 허락도 없이 멋대로 이용한 것이었다. 보증보험사 역시 보증인에 대한 확인절차를 생략한 채 인감증명서만 믿고 장씨를 연대보증인으로 한 할부판매보증보험 증서를 발부했고, 어씨가 제때 할부금을 내지 못하자 문제가 터졌다.
어씨를 대신해 자동차 할부금을 갚은 보증보험사는 곧 연대보증인 장씨에게 구상권을 행사했지만, 장씨는 끝까지 연대보증 사실을 부인했다. 올해 3월 대법원까지 올라간 이 사건은 다행히 장씨측의 승소로 끝나 억울한 보증채무를 떠맡지 않게 됐지만, 아무 생각 없이 타인에게 건낸 인감증명과 도장이 어떻게 이용될 수 있는지 교훈을 남겨주었다.
장씨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보증인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출보증과 또 달라서 대부분 별 생각 없이 찍어준 할부판매 보증이 큰 부담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특히 트럭과 같이 고가의 영업용 장비를 할부로 구입할 때 연대보증을 선 사람들은, 요즘처럼 경기가 침체돼 주채무자가 할부금을 제대로 갚지 못하면 나머지 할부금과 연체 이자까지 고스란히 물어주는 낭패를 겪는다. 병원 파산으로 리스비용을 갚지 못하는 의사들도 늘어나 자연히 리스시설 보증보험사고도 늘고 있다.
최근 개인사업자들의 부도와 파산이 급증하면서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채권자의 빚독촉을 피해 주민등록을 옮긴 후 잠적해 버리면, 무단전출이나 세대주 신고로 주민등록이 말소처리된다.
이렇게 주채무자의 주거불명으로 채권회수가 불가능해지면 채권자들은 당연히 보증인에게 상환을 채근한다. 『한푼 써보지도 못한 돈을 갚아야 하다니』 보증인은 억울하다고 호소해도 법적으로 아무런 보호를 받을 수 없다. 특히 보증계약의 대부분이 연대보증이어서 『주채무자에게 먼저 청구하라』고 말하는 최고·검색의 항변권이 없다. 공동보증인이 있어도 채권자가 요구하면 고스란히 혼자 떠맡을 수밖에 없다.
엉뚱한 피해들
보증 섰다 패가망신하는 경우까지는 아니더라도 보증의 피해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데서 발생한다. 요즘 은행 전산망(은행연합회 신용정보망)에서는 각 은행뿐만 아니라 보험회사 신용금고 등 전 금융기관에서 2천만원 이상 대출한 사람에 대해 특별관리를 한다. A은행에서 2천만원 빌렸으니까, 다음에는 B은행에 가서 빌리면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어림도 없다. 전산망에 조회를 하면 대출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보증도 마찬가지. 은행 입장에서 보면 대출받은 사람과 보증인은 똑같은 채무자일 뿐이다. 그래서 이곳저곳 인심 좋게 보증을 섰던 사람은 은행에 그 사실이 기록돼 정작 자신이 돈을 필요로 할 때 대출을 받기 어렵다. 보증기록 때문에 5백만원짜리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려 해도 별도의 보증인을 세우거나 기존 예금을 담보로 잡혀야 한다.
더 억울한 것은 남의 부도로 재산을 가압류당하고 직장에서도 인사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다. 「월급 가압류자, 정리해고 1순위」라는 말은 공공연한 사실. 이 문제로 회사 인사위원회에 몇 번 불려다니면 결국은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다. 한 기업의 인사담당자는 『본인(보증인)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가압류 상태가 지속되고 경제적으로 곤란해지면 「횡령」 등의 유혹에 빠질 위험이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퇴사를 권한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 5월 고객돈 3억원을 빼돌려 달아난 어느 지방은행 지점장은 친구 보증을 섰다가 빚더미에 앉게 되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확인됐다. 보증 빚으로 인한 재산 가압류는 특히 회사의 경리담당자나 금융기관 종사자들에게는 치명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한번 신용불량거래자로 찍히면 새로 취직하는 것도 어렵다. 이미 상당수의 기업들이 신용평가회사를 통해 사원들의 신용상태까지 조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심각한 피해는 보증채무도 상속된다는 사실이다. 가장이 보증채무를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는 경우도 있지만 슬프게도 남은 가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사망한 친정어머니의 빚 3억7백만원을 상속받은 딸 이 아무개씨가 뒤늦게 상속포기 신청을 했으나 포기신청 기간(사망 후 3개월 이내)을 넘겨 서울가정법원으로부터 기각된 사례가 있다. 이씨의 어머니는 10년 전 D회사가 3억원의 은행대출을 받을 때 연대보증을 했고 이 사실을 딸에게 알리지 않은 채 사망했다. 전 재산인 집을 날리고도 빚을 다 갚지 못하는 딸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법적으로는 분명히 갚아야 할 채무다.
보증기관도 괴롭다
인보증으로 인한 개인의 연쇄적 도산을 막고, 담보물이 없는 중소기업들의 자금대출을 돕는다는 취지로 설립된 보증기금과 보증보험. 그러나 이들 보증을 해주는 기관에서 또다시 연대보증인과 담보를 요구해 비난을 받고 있다.
『보증인을 구할 수 없어 보증보험을 찾았는데 또 보증인을 데려오라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이런 비난에도 불구하고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대한보증보험·한국보증보험 등 채무보증 기관들이 「보증을 위한 보증」을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최근 들어 부실채권이 엄청나게 늘어나 이 기관들의 존립 자체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1~3월까지 신용보증기금·기술보증기금 양대 보증기금들이 보증을 섰다가 회수하지 못한 액수만 해도 1조4천5백46억원.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8배나 많다. 보증사고 발생률도 14%대에 이르러, 보증을 받은 1백개 기업 가운데 14개 기업이 부도 등을 이유로 제때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올 하반기에는 기금의 재원이 고갈되고 신규보증 자체가 어려워질 것이라는 암담한 전망이 나온다. 정부는 보증 수수료를 대폭 올려 기업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겠다고 발표했으나 기금의 재원 자체가 고갈되는 상황에서 수수료 몇 푼 더 받아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민간 보증보험회사의 사정은 더욱 나쁘다. 대한보증보험, 한국보증보험의 미회수 채권은 지난해 말 3조7천억원이 넘었고, 누적적자 또한 1조2천억원을 넘었다. 회생 가능성이 불투명한 가운데, 두 회사는 금융권의 1차 구조조정 대상으로 꼽힌다. 더욱이 보험증권을 예금자보호법에 의한 원리금 지급보장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는 정부 발표가 있은 후 보증보험의 신용은 더욱 추락했다.
『보증보험에 문제가 생기면 그야말로 신용공황이 옵니다. 현재 우리 회사의 소액대출 보험가입자가 1백50만명인데 이들에게 남아 있는 보증잔액이 7조원 정도 됩니다. 만약 보증보험회사가 무너지면 이것을 일시에 상환해야 합니다. 지금도 보험사고가 엄청나서 소액대출보증보험의 손해율은 5백%가 넘고 있습니다. 1백원 받아서 5백원씩 갚아주고 있는 셈이죠. 1백50만명 가운데 30~40%가 문제가 생긴다 해도 몇조 원의 자금이 필요합니다. 대리점 계약을 할 때도 담보 아니면 보증서를 받았는데 보증보험이 무너지면 기존 보증서를 모두 부동산 담보로 대치해야 합니다』
대한보증보험 영업지원부의 신보선 과장은 사업자나 개인의 파산, 보증보험의 신용추락 그리고 이어지는 신용공황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현재 은행들은 보증보험증서를 담보로 한 대출은 전면 중단한 상태. 신규대출만 중지한 것이 아니라 만기연장이 안 되는 것은 물론, 이미 발생한 대출금에 대해서도 조기 회수할 방침이다. 신 과장은 보증보험의 신뢰에 흠집이 생기면 최대의 피해자는 증서를 담보로 대출받은 고객들이라고 말한다.
『보험증서를 이용한 고객들은 주로 직장인이나 개인사업자들인데 사실 당연히 대출이 연장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가 갑자기 만기연장을 안 해준다고 하니까 문제가 되고 있어요. 은행은 빨리 갚으라고 독촉하지만 월급쟁이들이 갑자기 1천만~2천만원이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은행은 곧바로 보증보험에 청구를 하고 보증보험은 또 가입자를 채근하게 되죠』
만약 이대로 보증보험증서가 완전히 효력을 잃게 되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예상된다. 보증보험사를 이용해 대출을 받은 1백50만명 이상의 고객이 사실상 무보증상태가 된다. 은행들은 이들에게 새로운 담보물을 제시하거나 대출금을 일시에 상환할 것을 요구한다. 상환할 능력이 없는 상당수 고객이 신용불량거래자로 찍혀 모든 금융거래에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잇따라 이들의 보험증서 발급이나 은행 대출 때 연대보증란에 서명한 보증 피해자들이 속출한다. 사실상 신용공황 상태에 이른다.
범죄를 유발하는 보증
요즘 신문지상에 자주 소개되는 것이 「보증피해 줄이는 법」이다. 『보증은 가급적 피하고 보증보험으로 유도한다』 『보증금액과 보증기간, 보증책임의 한계를 확실히 해둔다』 『보증서류를 작성할 때 공란을 남기지 말라』 등등 갖가지 조언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효력을 상실한 내용이 대부분. 보증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보증 공화국에서 보증을 해주지 말라는 조언이 그렇고, 보증보험이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인보증 대신 보증보험으로 유도한다」는 조언이 그렇다. 보증을 서기 전에 포괄적근보증인지 반드시 확인하라고 하지만, 채권자인 금융기관이 포괄적근보증(연대보증)을 요구하는데 어떻게 한정보증만 하겠다고 우길 수 있겠는가.
채무보증으로 인해 급여 가압류를 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각종 보증피해사례가 잇따르자 아예 빚보증용 재직증명서를 발급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공공기관이나 기업체들도 많다.
전체 공무원 중 반 이상이 채무보증을 한 태백시의 경우 이미 지난해 5월부터 「재직증명서 발급시 배우자 사전결제」 조항을 만들어 공무원들의 빚보증 피해를 막고 있다. 전남 도청에서도 공무원이 보증을 할 때는 담당 실·국장의 승인을 받도록 했고, 이를 어길 경우 인사 불이익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전북도내 각급 행정기관은 아예 대출보증용 재직증명서 발급을 중지했고, 올해 들어 전국의 검찰은 채무보증용 재직증명서를 뗄 경우 소속 기관장의 결재를 받도록 해 사실상 채무보증을 중단시켰다. 서울시와 경찰청도 올해 2월부터 보증용 재직증명서 발급을 금지했다. 일반기업체 가운데에는 금융기관이 가장 먼저 직원들의 빚보증을 금지했고, 대기업들도 점차 보증 요건을 강화하면서 사실상 보증용 재직증명서를 발급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직장에서 보증용 재직증명서를 발급해주지 않으니까 『훨씬 마음 편하게 빚보증을 거절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조차 임시방편일 뿐이다. 내가 보증이 필요할 때는 또 누군가를 「볼모」로 삼아야 한다.
보증이 꼭 필요한 사람들조차 보증인 구하기가 하늘에 별따기가 되자 이 틈새를 이용한 범죄도 극성을 부리고 있다. 지난 4월24일 서울경찰청에 은행대출 사기단 8명이 붙잡혔다. 이들은 생활정보지에 「대출 보증인 알선」 광고를 낸 뒤 이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위 「바지 보증인」을 내세워 대출을 받게 하고 대출금의 25~45%를 가로챘다. 「바지 보증인」은 1개의 부동산을 담보로 20여 차례 중복대출을 해줘 그 중 상당액수가 부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전문 보증사기단도 생겼다. 4월28일 서울지검 동부지청에 붙잡힌 이 보증사기단은 실직자·노숙자로부터 30만~1백30만원에 주민등록증을 구입한 후 이를 위조해 직장인들에게 대출보증을 서준 뒤 수수료를 챙기는 수법을 썼다. 위조된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보험증권을 발급받고, 그것으로 다시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경우도 있다. 안전한 채권확보를 위한 보증제도가 오히려 부실대출을 양산하는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는 셈이다.
준비없는 신용사회
금융계 관계자들은 무조건 보증을 회피할 것이 아니라, 보증제도 자체를 대체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제도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자금은 기본적으로 항상 수요가 많고 공급이 달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은행의 여신담당자는 그 많은 수요 가운데 안전성 위주로 공급하려다 보니 담보를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담보 위주의 대출을 하면 은행창구에서 일하기가 오히려 쉬웠습니다. 담보가 있으면 대출하고 없으면 안 해주면 되니까요. 그러니까 여신담당자들에게 특별히 전문성이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담보가치는 계속 올라가서 부동산만 잡아두면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여신업무는 눈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부동산이 담보로서 의미를 잃으면서 비로소 신용대출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입니다』
은행 여신담당자들의 모임인 신용분석사회의 조희호 회장은 지금과 같은 상호불신의 시대에 더욱 신용사회로 가는 토대를 닦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동산이든 사람이든 담보가 필요없는 진정한 의미의 신용대출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정확한 신용분석과 평가가 선행돼야 한다.
『우리 사회에 구조조정이 갑작스레 이루어지면서, 금융기관도 담보를 지양하고 신용대출로 가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만, 문제는 우리가 기업이나 개인에 대해 정확한 신용평가모델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기업의 재무제표나 각종 회계처리가 투명하지 않은 상황에 정확지 않은 자료로 기업의 현재와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금융기관은 기업을 불신하고, 기업은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금융기관을 원망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겁니다. 퇴출기업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데, 그것도 정부가 정책적으로 발표할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금융기관이 거래기업의 상황을 살피고 부실이 염려되면 자금지원을 동결하고 기존 여신을 회수해 자연스럽게 그 기업이 문을 닫도록 해야 합니다.
신용대출이 일반화된 외국이라고 해서 특별한 여신심사기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원칙이죠. 여신 담당자의 판단으로 안 된다고 한 것을 상부의 지시로 되게 만드는 「변칙」이 우리 금융기관의 부실을 가져왔고 신용 아닌 담보 중심의 대출관행을 만들었습니다』
불행히도 현재로서는 온 국민이 얽혀 있는 보증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전체 신용거래자 약 2천만명 가운데 신용불량거래자가 11%인 2백15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2월 말 기준으로 7대 시중은행의 가계대출 연체액은 1조5천5백억원. 이대로 간다면 이들의 대출에 관여한 선의의 보증인들에게 엄청난 피해가 돌아가고 결국 연쇄적인 가계파산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보증을 설 때는 내가 갚을 것을 각오하고 도장을 찍어라』가 가장 현실적인 충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물고 물린 보증의 고리를 단절시키는 열쇠는 대단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원칙」에 있다. 하나은행의 서연종 차장(가계금융실장)은 『대출심사는 은행원의 직업윤리 문제이고, 대출금의 상환은 국민의 도덕성과 관계된다』며 원칙에 충실한 대출만이 부실을 막고 신용거래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기업이나 개인에 대해 아무리 계량화된 신용정보가 있다 해도 결과적으로 부실대출이 되느냐 아니냐는 채무자의 상환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경험으로 보아 돈을 떼먹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준 대출은 아무리 확실한 담보가 있어도 부실채권이 되고, 꼭 갚겠다는 의지가 있는 채무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끝까지 갚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담보나 보증이 전혀 필요없죠.
채무자의 상환의지를 판단해 대출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은행원의 역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출담당자는 집요하게 채무자의 상태를 확인해야 합니다. 대출하는 돈은 은행돈이 아니라 고객의 돈이기 때문에 쉽게 내줘서는 안 됩니다. 과거에는 대기업에 다닌다고 하면 그 사실만으로도 대출자격을 얻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채무자가 매달 급여는 정상적으로 받고 있는지, 다른 금융기관에서 대출받은 것은 없는지, 회사에서 근무는 잘 하고 있는지 등등 채무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종합적인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것이 은행원의 직업윤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