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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지금여기-가톨릭인터넷언론 원문보기 글쓴이: 이규원.
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사이다, 그리고 베트남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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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8.4. 이규원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 |
비에 젖은 날들을 보내다, 땡볕에 머리가 아찔해지는 시간을 지나 이제 여름이 서서히 가고 있다. 보통 8월 15일이 지나면 바닷물에 몸을 담그기가 꺼려지니 무더위로 인해 길다 싶은 여름도 사실은 짧은 한 순간이다. 그러나 유년시절에 만나는 한여름은 길고 무더웠다. 지금이야 마트에만 나가면 여러 음료수가 즐비해서 아이들은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여름을 보내지만, 1970년대 초에 유년시절을 보낸 나는 여름동안 딱 한 번 어머니가 사주시는 사이다 한 병을 기대하고 추억하며 여름을 보내야 했다. ‘곱뿌’라 불리던 사이다 잔에 (칠성)사이다를 따르면 거품이 뽀그르르 올라와 몇 방울이 얼굴에 튀는 것까지 포함해서 사이다를 좋아했다. 그러나 농촌 살림에 사이다를 사먹기는 어려워, 어느 땐가부터 나는 나만의 제조비법을 터득해 한여름을 톡 쏘는 시원한 사이다를 마시며 보냈다. 나만의 사이다 제조비법 4,5학년쯤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월남전이 막바지로 끝나가던 무렵이었을 것이다. 길가에 얼굴을 맞댄 우리집 앞을 지나시던 담임선생님과 다른 반 선생님을 만나 인사를 드렸더니, 덥다며 시원한 물을 한 잔 달라고 하셨다. 나는 혼자 사이다를 만들어 마시던 참이어서 사이다를 만들어 드릴 테니 들어오시라며 선생님들을 초대했다. 우리반 반장 웅태가 선생님 자전거 뒤에 타고 가던 길이어서 귀가 쫑긋해진 웅태까지 들어와 세 명의 손님을 맞은 셈이었다. 나는 뜰 옆에 위치한 펌프물을 한참 퍼올려 지하수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물을 받아다 부엌에서 사이다를 제조해서 곱뿌에 담아 세 사람에게 내놓았다. 선생님은 한 모금 마시더니 제법 시원하고 달콤한 게 사이다 비슷하다며 제조비법을 물으셨다. 비법은 간단했다. 시원한 지하수에 요즘의 설탕가루에 해당하는 당원을 넣고 식용소다를 집어넣어 한 번 흔들어 주면 되는 것이었다. 사이다를 마시며 선생님은 웅태의 큰형님이 월남전에서 돌아온 걸 축하하러 웅태네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웅태의 큰형님은 선생님과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두 선생님이 주고받는 월남전 얘기 속에서, 웅태의 큰형님은 월남에서 아무 부상 없이 부산항에 도착했는데 국내의 어딘가에서 행진 도중 그만 탱크의 캐터필더에 발이 깔려 부상을 입었다며 안타까워하셨다. 선생님들 입에서 호지명(胡志明)과 닉슨 그리고 반전 운동가들의 이름이 나왔고 나와 웅태는 다시 펌프물을 받아다 사이다를 제조해서 선생님도 드리고 우리도 마셨다.
베롱하이의 눍은 노을 베트남 신부 얼마 전, 우리 동네 구역장님의 남동생이 베트남 여자분과 결혼을 했다. 남자는 46살이고 신부감은 21살이었다. 호리호리한 아가씨는 말도 낯설고 음식도 낯설어서인지 별로 먹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데 명민해 보이는 얼굴에 가끔씩 웃는 모습이 좋아보였다. 이미 베트남에서 결혼식을 올린 터라 그저 동네사람들과 음식을 먹으며 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늦장가를 든 신랑은 누가 봐도 신부를 아끼는 마음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아내의 역할을 하는 듯 남편의 소지품을 알아서 넘겨주는 모습이 어여쁘고 한편으로는 서글펐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누구도 그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하객들 모두 아직은 어린 21살에 먼 타국으로 온 아가씨의 삶이 평온하기를 기도하며 쌀전병에 야채를 싸먹는 월남식 요리를 먹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도 낯모르는 서울의 어느 집에서 일을 도와주며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같은 나라 안이건만 해가 질 무렵이면 엄마 생각에 눈물이 핑 돌며 서글펐던 기억이 많았다. 엄마 나이 또래의 아줌마들을 보면 반가웠고 버스를 타면 길이 끝나는 곳까지 가고 싶었다. 종점 어딘가에 엄마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시골에서 먹어보지 못한 좋은 음식도 맛이 없었고 오로지 내 마음을 안아줄 엄마품이 그리웠었다. 베트남 신부를 맞은 남편은 아내를 맞아 벙긋벙긋 웃었다. 나이가 많아 공감대가 부족하겠지만 두 사람이 행복하길 빌었다. 뒤늦게 합류한 시누이가 돼지고기를 삶고 김치를 만들어 와, 우리는 또 한 차례 포식을 했다. 결국 너무 많이 먹어 우리는 마트에 가서 사이다를 사다 마시며 소화를 재촉하는 촌극을 벌였다. 꼬 끝을 찡그리며 사이다를 마시는 베트남 신부를 보며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 1890~ 1969)의 역경에 찬 삶이 떠올랐다. 그의 영혼이 바람결을 타고 여행하다 지금 대한민국의 나이든 남자들이 그의 조국의 어린 아가씨들을 데려와 아내로 삼는 현실을 보면 그의 싸움이 아직 미완성이며 끝나지 않았음에 슬퍼할까...?
베트남의 혁명가, 호치민 호치민의 미완성 혁명 호(胡)아저씨, 호 할아버지로 불리는 인기를 누렸던 인도차이나 반도의 혁명지도자 호치민은 여러 실책이 있었지만 일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청렴하고 푸근한 인상의 혁명가로 통했다. 호치민은 1924년 12월 리 투이라는 가명으로 공산주의의 요새인 중국 광저우(廣州)에서 <베트남 혁명청년협회>를 결성하고 활동하기도 했는데,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 보면 우리의 독립운동가(공산주의 진영 혹은 무정부주의 측)들도 많은 수가 광저우에 머물며 광저우 꼬뮌에 참여하여 중국이 공산화되면, 그 도움을 받아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중국의 공산화운동을 도왔던 기록을 볼 수 있다. 호치민과 우리의 선조들은 동병상린의 아픔을 공유하며 목숨을 걸고 공동의 적-제국주의를 향해 싸웠던 것이다.
1940년대, 제국주의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던 베트남에 일본군이 들어와 잠시 프랑스군이 물러나는가 싶더니 곧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면서 일본이 항복하는 바람에, 프랑스는 다시 식민지배자의 입지를 더욱 굳히는 형국을 취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과 프랑스 간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의 뒷마무리로 1954년 '제네바 협정'에 의해, 북쪽은 맑스-레닌주의에 입각한 베트남 민주공화국(북베트남)이 세워졌고, 남쪽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을 수립하였다. 이 국면도 우리나라가 분단된 이유와 닮아 있다. 그 후,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인도차이나 반도가 모두 도미노 이론에 의해 공산화된다는 미국군부와 정치인들의 논리에 따라 미국은 남베트남을 지원하며 북베트남과 전쟁에 돌입하는데, 우리의 군인과 기술자들이 파견되어 싸운 전쟁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육이오 전쟁이 겹쳐지며 같은 틀 안에서 해석이 가능한 공통분모이다. 21살 어린 올캐를 얻은 우리 동네 구역장님은 작고 가무잡잡한 아가씨가 늦둥이 딸 같다며 남동생을 향해, 좀 나이든 여자를 데려오지 그랬냐며 눈을 흘겼다. 어미젖을 먹다 낯모르는 집으로 팔려온 강아지처럼 보였는지 남동생 등을 치며 종종 업어주라고 당부했다.
쌀국수를 먹고 있는 베트남 아이들(사진출처-kr.blog.yahoo.com/janekimjh/ 고난에 찬, 그리고 업보가 없을 베트남 무더운 나라, 십자성이 우리의 북두칠성처럼 빛나는 곳, 지구를 반이나 돌아 시집 온 어린 신부와 함께 마시는 사이다는, 유년시절 나만의 제조비법으로 만들어 선생님과 친구와 나누어 마시던 때처럼 톡 쏘며 달콤했고 친구의 큰 형님이 캐터필더에 부상당한 기억을 불러왔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다 보면 현지인들의 남루함에 그들로부터 받는 서비스까지 불편해진다고 하는데, 그럴 일만도 아닌 것 같다. 남들에게 해를 끼치기보다 수탈당하고 상처를 입으며 견뎌온 그들의 역사를 보면 지금 그들이 가난한 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지금의 허름한 현상 너머, 그들의 앞날에는 인과응보의 철칙 속에서 받아야할 험난한 업보는 없을 것 같아 그들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오랜 시간 동안 고통과 인내로 이루어내는 그들의 살림이야말로 진정한 그들만의 몫으로 내려준 하늘의 만나일 것이다. 누군가 그들을 향해 원망을 품지 않고 있다는 것은 빚이 없는 살림처럼 건실해 보인다. 역사 속에서 동병상련의 고난을 겪은 두 민족이 신랑 신부로 만나 이루어가는 결혼생활 가운데 그동안 여러 부작용이 일어나 험악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영리해 보이는 신부의 눈동자와 신랑의 함박웃음은 톡 쏘는 사이다의 상큼함을 품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를 보며 죄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탈당하며 살아온 역사의 계곡에서 피어난 두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다.
이규원/ 사라, 드라마/소설 작가, 어린이 책읽기 교실 <글방집>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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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8.4. 이규원 http://cafe.daum.net/cchereandnow 가톨릭인터넷언론 지금여기
첫댓글 친구가 그리운 날에 님의 글 읽고 힘을 받고 갑니다... 아직 남아있구나.. 순수함.. 향수.. 가슴으로 쓰는 언어...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