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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카자흐스탄 문화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코피녀
알마티의 사계 그리고 에피소드
민 병 훈[1]
봄 그리고 친구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 했던 추위를 이곳에서 경험한다. 영하 20~30도를 넘나들며 옴 몸을 움츠리게 만들던 그 겨울이 지나고 이제는 봄이 찾아온다. 겨우내 제설작업으로 도로 가에 수북하게 쌓인 시커먼 얼음덩이들이 녹으며 알마티의 봄은 시작된다. 현지인들은 겨울이 6개월 여름이 6개월 이라며 봄과 가을이 알마티에는 없다고 말하지만 꽃피는 춘삼월의 알마티는 노랗게 민들레꽃으로 물들이며 시작된다. 하얀 목련과 코끝을 자극하는 라일락, 그리고 간혹 보이는 벚꽃나무도 봄을 알리는 전령들이다. 지난 겨울 이골나게 내렸던 하얀 눈들이 가로수의 꽃가루로 바뀌어 시내를 온통 하얗게 뒤덮는다. 이때쯤 우리 교민들과 까레이스키라 불리는 고려인들은 산으로 들로 나물도 뜯으러 다니고 쌉싸래한 민들레 잎으로 쌈밥을 먹으며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되찾는다.
몇 년 전 봄에 이곳 알마티에서 만난 친구가 있다. 나이도 동갑이고 고등학교 시절 서울의 같은 학군에서 공부한 우리들만의 역사가 있기에 유난히 정이 가는 친구인데 이 친구가 어지간히 술을 사랑한 관계로 한국에서 음주운전 3진 아웃으로 운전면허를 취소당하였다. 면허증이 없는 관계로 여러모로 불편함을 느끼고 있을 때 사업차 알게 된 현지 파트너에게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당신은 나의 특별한 친구니까 돈과 필요한 서류를 준다면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줄 수 있다고 온갖 생색을 다 내면서 말했다. 친구는 얼마의 달러와 필요한 서류 등을 챙겨 주었고 일주일이 지난 뒤에 운전면허증이 친구의 손에 들어왔다. 사진도 실물보다 잘나왔고 깔끔하다 못해 빤짝빤짝 거리는 면허증을 보며 친구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했고 고마운 마음에 현지 파트너에게 거하게 술도 한잔 대접했다.
그렇게 받은 빛나는 면허증을 소중히 간직하고 운전하며 며칠이나 지났을까,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경찰서에 잡혀왔는데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참고로 친구는 러시아어와 까작어 회화가 무지하게 불편한 수준이다. 경찰을 바꾸라 하여 통화를 해보니 면허증이 문제가 있으니 변호사를 선임하라는 것이다. 오리지널이 아닌 위조된 면허증을 가지고 운전 하였기에 구속에 강제추방 까지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떡하든 구속에 강제추방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먼저 경찰서에 찾아가 친구를 만나서 안정을 시키고 면허증을 만들어준 현지 사업파트너를 만났다.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니 정식으로 면허증을 만들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위조 브로커에게 부탁하여 가짜로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인맥이 좋고 힘이 좋아서 친구에게 특별히 선물한다고 하였고 거하게 술까지 얻어먹었던 사람의 입에서 아무 부담도 없이 “아 그거 위조 브로커에게 돈 주고 만들어온 거야“ 라고 말하는데 듣고 있던 나로서는 황당하기가 그지없었다. 본인은 가짜 면허증이라 차후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전에 아무런 얘기도 없이 전달해 준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다. 당신의 파트너가 구속당할 수 있고 강제추방도 가능하다고 하는데 해결 방법은 있겠냐고 물어보니 현지파트너가 웃는다. 또다시 자기의 인맥과 힘을 얘기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게 나를 안심 시킨다. ”여기는 알마티다, 알마티에서 친구가 구속당하고 강제추방 당하는 것은 나의 치욕이다” 라며 입술을 깨물고 눈에 힘을 얼마나 주던지 눈알이 빠질 듯 비장한 표정까지 지어가며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친구는 경찰서에서 풀려 나왔다. 변호사는 선임 하지 않았지만 구속도 강제추방도 당하지 않았다. 다만 속전속결로 경찰서에서 나오게 하느라 적지 않은 달러가 통장의 잔고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는 알마티에서는 경찰서에서도 법원에서도 연줄이 중요하다. 든든한 연줄이 있다면 걱정할 것이 없다. 다만 적지 않은 비용은 감당하여야 한다. 어찌되었든 친구는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풀려 나왔다.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현지파트너는 다시 한 번 면허증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만들어 왔는가 보다. 몇 년이 지나도록 문제없이 운전하고 다니고 있다. 친구야 지난날의 아픔은 잊고 다시는 경찰서에 갈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던 천산도 아래쪽부터 서서히 녹아 사라지고 온도계의 수은이 올라가듯이 연둣빛 새싹이 조금씩 그 높이를 더해간다. 무겁고 거북스러웠던 겨울 옷을 옷장에 정리하며 알마티의 봄을 맞이하지만 간혹 오월에도 예고 없이 내리는 하얀 눈은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여름 그리고 아이굴
영하의 날씨에서 영상 20도로 바뀌는데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면 충분하기에 알마티의 여름은 빨리 찾아온다. 신체리듬이 따라가기도 버거운 시간이다. 낮과 밤의 기온 차가 극심하기에 연중 감기환자가 제일 많이 생기는 때이기도 하다. 이곳의 감기는 여간 해서 낫지 않기에 한번 걸리면 열흘에서 스무 날은 콧물 찔찔 흘리며 고생해야 한다. 따스하게 느껴지던 햇살이 어느덧 따갑게 다가오고 그늘 막을 찾아서 발길이 옮겨질 즈음에 진정한 알마티의 여름은 시작된다.
시장에는 무등산 수박만큼이나 큰 수박이 등장하고 참외의 맛을 간직한 럭비공 모양의 딩야와 복숭아 등 여러 과일이 있다. 그래도 여름의 과일은 이곳 에서도 수박인 듯하다. 한국의 10분의 1정도의 가격으로 당도 최고의 수박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알마티의 행복이다. 습도가 적은 반면에 햇살은 강렬하기에 당도 높은 과일을 먹을 수 있지만 사람의 피부 관리에는 상당히 치명적이다. 현지인들의 얼굴이 나이에 비교하여 10년쯤 늙어 보이는 것 또한 이러한 연유인 듯싶다.
알마티에서 사업하는 관계로 현지인을 고용하여 직원으로 쓰고 있는데 지난여름에 “마랄” 이라는 이름의 직원으로부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7월의 중순 어느 날 마랄이 잔뜩 흥분하여 상기된 얼굴로 출근 하였는데, 그 이유가 가관이었다. 침켄트에사는 이모가 어린 딸을 팔아먹었다는 것이다.
엄마가 딸을 팔아먹다니 그게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말이냐고 되물어 보았더니 장황하게 설명을 한다. 다 듣고 나니 그 엄마 어린 딸을 팔아도 제대로 팔아먹은 것 같다. 조선시대에나 있을법한 이야기가 21세기에 카작스탄의 지방 소도시에서 버젓이 행하여진 것이다.
그 아이는 방학 때 두어 번 우리 마트에도 놀러 와서 나도 알고 있는 아이였다. 나의 기억으로 나이는 방년 16세로 또래의 나이에 비하여 성숙하였다. 환한 미소와 훤칠한 키의 아이굴 이라는 소녀였다. 지난해 여름 방학 때 처음 만났는데 삼 년 뒤에 학교 졸업하고 알마티에 와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그 또래의 소녀들이 가지고 있는 풋풋함이 아직 눈에 남아 있는데 그 아이가 팔려갔다는 것이다. 그것도 미성년자인 아이굴을 칠십을 바라보는 늙은이에게.
아이굴이 열세 살 때였으니 삼사 년 전의 이야기이다. 침켄트에서도 떨어진 조그만 아울(시골마을)에 늙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근동에서 제법 살만한 지역의 유지로 어린 아이굴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아이굴은 아린 나이 임에도 이미 숙성해 보였다. 그는 아이굴의 부모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아내로 들이겠다고 요청했다. 아이굴의 부모 역시 싫지 않은 조건이었지만 몸값을 올리기 위해 여러가지 핑계를 대어 시간을 미루었다.
아이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 학교에서 더 공부하여야 한다.
아이굴의 최초 몸값은 오십 마리의 양에서 출발하였다. 어리던 아이굴이 한해 두해 지나며 제법 처녀티가 나면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변해갔고 몸값은 그사이 많이 올라서 이백 마리의 양과 이십 마리의 소로 대폭 늘어났다.
더 이상 욕심을 부릴 수 없다고 판단한 아이굴의 부모는 아무런 미련 없이 아이를 팔아 버렸다. 부모의 동의서를 첨부하여 혼인신고를 마침으로 합법적으로 사고 합법적으로 팔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아이굴은 70을 바라보는 호호백발 할아버지의 세번째 첩이 되었다.
이야기를 들었던 그날은 유별나게 많은 비가 내렸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여 주몽의 송일국을 좋아하고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를 사랑했던 소녀, 금잔디가 되어서 구준표와 사랑을 하고 싶다던 소녀, 열여섯의 가슴에 가득히 쌓아둔 꿈들을 모두 버리고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아이굴의 얼굴에도 가슴에도 많은 비가 내렸으리라,
어린 아이굴의 슬픈 마음을 알기나 하는 듯이 지난 여름은 참으로 많은 비가 내렸다. 비 개인 알마티는 잠깐 이나마 선명하다. 알마티의 하늘에 걸리는 무지개가 몇 번 찾아오고 한여름의 해는 점점 길어져 밤 10시가 되어야 어둠이 찾아오지만 이것을 정점으로 점차 낮이 짧아짐을 느낀다. 이렇게 여름은 따가운 햇살을 수없이 뿌리며 지나가고 있다.
가을 그리고 보쌈
기세 등등하던 따가운 햇살이 천산자락에서 아침과 저녁으로 뿌려주는 차고 서늘한 기운에 주눅들 무렵, 진한 녹색의 가로수 잎이 갈색으로 탈색을 하며 짧은 가을의 시작을 알린다. 낮에는 따가운 햇살을 피해 다니고 밤에는 이른 추위에 소름 돋친 팔뚝을 바라보며 짧아진 해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영상 15~20도와 영하 3~5도를 오고 가는 일교차, 낮에는 반팔 티셔츠를 밤에는 오리털파카를 입어야 하는 이곳만의 풍경이 이제는 익숙해져 있다. 어느덧 낙엽은 수북이 쌓여가고 점차 길어지는 밤 시간은 하얀 서리를 만든다. 그렇게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겨울이 가까이 다가옴을 알려준다. 한국에 있을 당시 유난히 친구가 많았던 나는 친구와의 만남이 잦았고 만나면 당연 하다시피 술자리로 연결되었다. 일주일에 삼사 일은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으니 아내의 스트레스는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이곳에서도 가끔은 한국에서 먹던 안주가 생각나서 나름대로 온갖 기교를 부려서 만들어 먹는다. 좋아하는 족발요리는 그 맛을 낼 자신이 없기에 진작 포기하였고 꿩 대신 닭이다 하여 만들어 먹는 것이 보쌈이다. 적당히 된장 풀고 마늘에 생강에 양파 정도만 어우러져도 제법 그럴듯한 맛을 낼 수 있다.
냉장고에 보드카 한 병 있는 날이면 보쌈이 먹고 싶어 입에 침이 고인다. 그 맛있는 보쌈에 보드카 한잔 곁들이며 카작의 보쌈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 한다.
카작의 보쌈은 결코 돼지고기가 필요하지 않다. 든든한 배포와 믿을만한 친구 또는 형제 등 삼인일조의 충성스런 조직만 결성되면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맥이 끊어진 그 전설 속의 여자보쌈이 카작에서는 지금도 성행한다. 얼마 전 이곳의 신문과 텔레비전에서 경찰의 총수가 직접 출연하여 여자보쌈을 하면 엄벌에 처하겠노라고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서슬이 퍼렇게 국민에게 발표한 것만 보아도 문제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인지 대변하여준다.
이곳의 결혼식 문화는 한국보다 성대하다. 지금은 많이 간소화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현지인의 결혼식에 초대 받으면 그 지루한 일정을 소화하기 힘들다. 낮 시간에 시작한 결혼식이 끝나는 시간은 다음날 아침이다. 하객 모두가 일일이 축하의 인사말을 전하여주고 인사말이 끝날 때마다 건배를 하여야 하며 다음은 춤을 추고 또 다른 하객이 축하의 인사말을 전하고 술 마시고 춤추고 밤새 반복되는 축하인사, 건배, 춤, 정신이 몽롱하여도 즐겁게 마시고 춤추고 놀아야 한다. 그것이 이곳의 예의인 것이다.
결혼식을 하려면 그렇듯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그 때문에 모아둔 돈이 없는 남자들은 편법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보쌈이다.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카작의 전통적 관습, 조상님의 얼을 되살려 여자보쌈을 하는 방법이 있다.
내게는 두 아이의 아버지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보쌈결혼의 경험자가 있다. 그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보쌈의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평소에 눈 여겨 두었던 처자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기회가 포착되었을 때 삼인일조가 한 몸이 되어 신속정확하게 목표물을 보쌈하여 모처에 격리시킨다. 남자는 삼 일 밤낮을 함께 지내고 집으로 돌려 보낸다. 대개 여자는 보쌈 당하고 첫날과 둘째 날은 울지만 삼 일째 되는 날은 체념하고 남자를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 다음 여자의 집으로 찾아가 인사를 올리고 얼마간의 혼인지참금을 신부집에 전달하면서 결혼을 허락 받는다. 그 친구의 경우는 인사치레로 이십 마리의 양을 선물하였다 한다. 아직도 카자흐스탄에서는 납치와 감금이라는 불법행위에 대하여 여자들마저도 경찰에 고소 고발을 하지 않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얼마 전 임신으로 인하여 일을 그만둔 직원이 있다. 부모님과 삼남이녀가 한 가족인데 알고 보니 카작 전통의 얼을 이어받은 보쌈가족 이었다. 그 가족이 그려낸 보쌈의 정석을 알아본다. 아버지는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열일곱 살이던 어머니를 일하는 감자밭에서 말에 태우고 도주하여 고생 끝에 삼남이녀의 훌륭한 가족을 만들어 가장이 되었다,
아버지의 총명함을 쏙 빼 닮은 큰 아들은 스무 살 되던 해에 옥수수 밭에서 일하던 열여덟의 처자를 말에 태워서 보쌈 해왔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공장에 돈 벌러 나갔던 큰 딸이 열아홉 살에 보쌈 당했다. 그러나 삼 년이 지난 뒤 둘째 아들이 친구의 생일파티에 놀러 갔다가 보쌈에 성공하였다. 방향이 같은 여자 친구와 같이 택시를 잡았는데 천우신조로 고향친구가 운전하는 택시가 잡힌 덕분에 기대하지 않았던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셋째 아들은 친구의 결혼식에 갔다가 신부의 친구를 보쌈 하였다. 그 때, 둘째 형과 막내 여동생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올 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스물두 살의 막내딸마저 알마티에서 고향으로 가는 도중에 중학교 동창에게 보쌈을 당하였다.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지금은 배가 남산만하다고 한다.
겨울 그리고 허풍의 달인
도로에 쌓였던 낙엽이 사라지고 그 위를 하얀 눈이 뒤덮으면 기나긴 알마티의 겨울이 시작된다. 어여쁜 처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굽이 높은 부츠로 갈아 신고 눈 덮인 거리를 묘기 부리듯 잘도 걸어 다닌다. 습도가 없는 도시이기에 눈이 내려도 뭉쳐지지 않는다. 높은 건물의 처마 끝에 매달린 커다란 고드름이 흉기로 돌변하여 예고 없이 떨어져 길을 걷던 행인의 무고한 생명이 해마다 몇 명씩 유명을 달리하고 쌓인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가로수가 뿌리째 뽑혀 주차된 자동차와 행인을 위협하니 길을 걷는 것도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후 다섯 시면 밤은 커다란 무게로 도시를 짓누르고 인적 없는 휘휘한 거리에는 눈마저 소리 없이 밤을 새워 내린다.
나는 사십 년만의 강추위가 찾아왔던 2007 년 겨울을 잊을 수 없다. 장갑을 두 개 끼고 다녔으며 잠깐 벗으면 이내 손이 곱아서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의 태어나 처음 경험한 강한 추위였다.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때리는 따끔한 추위와는 전혀 다르게 뼈 속에서 한기가 싸하게 밖으로 나오는 생소한 느낌의 추위였다. 북쪽 지방에서는 소변을 보면 소변줄기가 돌에 맞고 튕겨져 나와 바로 얼어버린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들리던 무렵에 구리광산 사업차 한국에서 두 명의 손님이 알마티를 방문하였다.
대학시절까지 투기종목선수로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입상까지 하였던 건장하고 다부진 삼십대의 젊은 친구들 이었다. 그들의 출장 목적지는 알마티에서 족히 이천오백 킬로미터는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기차 타고 삼일을 달려야 도착하는 파블로르다 라는 러시아와 인접한 국경도시였다. 초행길이라 여러 가지로 도움을 부탁한다는 지인의 청도 있고 하여 그들의 여정에 동행하려 하였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만두고 이곳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구를 통역 겸 가이드로 동행하게 하였다. 출발하기 전날 그곳은 상당히 추운 곳이니 단단히 준비하여 대비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기차역에서 본 그들은 달랑 핸드백 크기의 손가방 하나씩 들고 있었다.
“아니 그곳은 추운 곳인데 어찌 그런 차림으로 간대요?”
“걱정 마요. 이 파카는 히말라야 등반할 때 입는 겁니다. 에스키모 얼음판에 갖다 놓아도 걱정이 없어요.”
오리털 파카를 두드리며 자랑을 한다. 나는 에스키모에 가본적도 없고 히말라야에 가본적도 없으니 그런가 보다 했지만 그래도 같이 동행하는 통역에게 잘 모시고 다녀오라고 당부를 하였다. 그들이 떠난 뒤 왠지 복장이 걱정이 되었지만 파블로르다는 휴대폰이 불통인 지역이라 통화도 못하고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열흘 예정으로 출발했던 그들이 칠일인가 팔일인가 만에 빨리 일정을 마감하고 돌아왔다. 갈 때의 때깔나고 훤한 풍채는 다 어디다 버렸는지 패잔병처럼 꼬질꼬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저녁에 보드카 한잔 마시며 풀어놓은 그 동안의 무용담이 대단했다. 눈썹에 매달린 고드름이 어떻다는 둥, 물이 없어서 마당에 쌓인 눈으로 샤워를 하였다는 둥, 소변이 그대로 선채로 얼어 버렸다는 둥, 춥기는 무지하게 추운데 그 정도의 추위는 별것도 아니었기에 그 추위를 즐기다가 왔다는 허풍이 심한 멘트를 밤새 늘어놓았다. 꾸준히 운동을 한 친구들이라 일반인과 다르기는 다르다며 나는 그들의 체면을 살려주었고 예정보다 이르게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친구들은 한국으로 떠났다.
그들이 떠난 후 한국에서 지인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이 친구들 한국에서 또 얼마나 심하게 허풍을 떨었는지 그 지독하고 혹독한 추위에서 살아서 돌아올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진심어린 인사를 한다.
진정 그랬을까? 며칠 후 이 친구들을 가이드한 통역의 말로 가늠할 수밖에 없다. 현지에 도착한 첫날이다. 현지인인 통역도 춥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날씨였다. 그들은 준비해간 옷으로 완전무장하여 잠자리에 들었는데 추웠던지 뒤척거리며 통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통역 친구는 모르는 척 하다가 잠깐 옅은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어디선가 숨죽여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흐느끼더니 조금 있으니 두 사람이 다 훌쩍거리며 엉엉 울고 있었다. 그래도 모른 척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빨을 달그락 달그락 부딪치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달그락거리는 목소리로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추워서 잠이 오지 않지요. 덜덜”
“네 숨쉬기 힘들 정도로 춥습니다! 덜덜”
“우리 둘이서 껴안고 자면은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요? 덜덜”
“좋은 생각인 거 같습니다! 덜덜”
그리고는 기골이 장대한 두 사람은 다정한 연인처럼 꼭 껴안고 잤다. 그날 이후로 밤마다 연인이 되었다는 웃지 못 할 서글픈 전설을 들려주었다.
물이 차갑다며 씻기는커녕 세수도 제대로 안 해서 손등이 쩍쩍 갈라졌으며 음식은 입에 맞질 않아서 굶다가 알마티로 돌아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던가? 지독한 추위를 즐기고 왔다는 허풍의 달인들 지금도 어디에선가 내가 옛날에 말이야 하면서 누군가에게 눈썹에 매달린 고드름과 쌓인 눈으로 샤워를 한 일, 소변이 선채로 얼어 버렸다는 그 날의 사연을 말해주고 있을 것 같다.
현지의 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모두 모자를 쓰고 다닌다. 모자를 쓰지 않으면 머리에 물이 차올라 죽는다고 생각한다.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여벌의 방한복을 필히 챙겨서 간다. 여행 중 통화가 안 되는 지역에서 차량이 고장이라도 난다면 정말 큰일이다. 그래서 나는 겨울에 장거리 여정을 떠나지 않는다. 알마티의 겨울은 바람이 불지 않는다. 눈이 내리면 소복이 쌓이는 모습이 노련한 감독의 영상처럼 아름답다. 나무의 잔가지에 내린 눈은 며칠이 지나도록 그대로 남아있다. 알마티의 겨울은 춥지만 추위를 잊게 할 만큼의 아름다움도 함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