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죽음(孤竹吟). 노룡현(盧龍縣)에서 짓다. <목은집 목은시고 제4권 시(詩) >
고죽국의 임금을 아무도 아는 이가 없어 / 孤竹之君人不識
내 지금 노래 지으니 마음 몹시 슬퍼라 / 我今作歌心惻惻
저 나뭇가지 멀리 뻗고 저 흐름 맑았으니 / 彼柯斯遠彼流淸
나무와 물의 근원을 진정 헤아릴 만하네 / 木水本源端可測
자조가 가훈을 몸소 실천하지 않았다면 / 子朝家敎不躬行
자식이 어떻게 저 큰 명성을 세웠으리오 / 有子何能樹大名
형 원과 아우 치가 서로 각기 마음 다하여 / 兄元弟致各盡心
주 피해 문왕께 가니 천하가 태평했는데 / 避紂歸文天下淸
삼천의 용사 앞에 한 치의 혀를 가지고 / 三千虎賁一寸舌
주나라 누르고 은나라 지탱하려 했으니 / 欲柅周興柱殷側
빛나는 큰 의리가 일월과도 겨룰 만해라 / 炳然大義爭日月
흰 깃발 황금 도끼는 안색조차 없었는데 / 白旄黃鉞無顔色
그 고풍이 만고에 간악한 꾀를 소멸시켜 / 高風萬古消黠奸
노만도 제후국 위나라로 생을 마치었네 / 老瞞終身藩魏國
아득한 천지가 지금 그 몇천 년이런고 / 乾坤茫茫今幾周
하수는 주야로 흘러흘러 쉬지를 않는데 / 河水日夜流不休
그 충혼과 의기는 여전히 우뚝하여 / 忠魂義氣尙崢嶸
하수와 태산이 마르고 닳기에 이르리라 / 河可枯兮山可平
저문 날에 일엽편주로 하수를 건너와서 / 扁舟日暮渡河頭
남긴 자취 방문하니 이내 마음 상하누나 / 訪問遺蹤傷我情
등잔 앞에 앉아서 고죽음을 읊고 있노니 / 燈前坐詠孤竹吟
천리와 인심은 고금이 다 같은 것이로다 / 天理人心無古今
위의 시는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이 경사(원의 대도)에서 1356년 정월에 귀국하면서 노룡현을 지나다 쓴 시입니다. 이색은 원나라에 몇 번( 세 번? ) 왕래 하였는데 1355년에 원으로 가 그해 8월에 한림원(翰林院)에 등용되었고 다음해인 1356년 정월에 귀국 7월에 중산대부(中散大夫)에 승진되었습니다. (한국고전종합 목은 선생 연보(牧隱先生年譜) 참조)
원의 대도가 어디이든 최대로 잡아 1년이면 왕복할수 있는 거리입니다. 궁금한 것은 원의 대도가 어디인가도 중요하지만, 오늘은 위의 시에서 붉은색으로 쓰여진 4구의 내용중에 나오는 하(河)가 뜻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 하는점입니다.
~~~~전략~~~
하수는 주야로 흘러흘러 쉬지를 않는데 / 河水日夜流不休
그 충혼과 의기는 여전히 우뚝하여 / 忠魂義氣尙崢嶸
하수와 태산이 마르고 닳기에 이르리라 / 河可枯兮山可平
저문 날에 일엽편주로 하수를 건너와서 / 扁舟日暮渡河頭
~~~후략~~~
바로 이 부분인데,
위의 인용구절중 첫째구인 ‘하수는 주야로 흘러흘러 쉬지를 않는데 / 河水日夜流不休’ 의 ‘河水’는 어느 강일까요.... 보통의 경우 河하면 황하입니다만... 여기서도 황하인지...아니면 노룡현 앞을 흐르는 어느 강(요하?)인지 궁금합니다. 아마 황하겠죠...
셋째구절의 ‘하수와 태산이 마르고 닳기에 이르리라 / 河可枯兮山可平’ 에서의 河는 ‘황하’와 ‘태산’으로 많이 쓰는 표현이죠....(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에서와 같이 많이 쓰는 표현입니다.)
제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넷째구절인 ‘저문 날에 일엽편주로 하수를 건너와서 / 扁舟日暮渡河頭’ 인데.... 여기서의 ‘河’는 어느 강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요....? 이 부분에 대한 여러 의견을 듯고 싶습니다. 반도사관이냐아니면 대륙조선사관이냐에 따라 달리 해석될수도 있다 생각됩니다.
1 ; 반도사관이라면 현 압록강이 아니면 현 요하라 할 수 있을것이고
2 ;대륙사관이라면 압록이나 요하는 맞지만 대륙의 다른 어느곳에 있을 ‘河’라 할것입니다...
3 ; 어느 관점(반도사관과 대륙사관)이든 노룡현앞의 어느 ‘河’(그냥 보통의 작은 강..?)일 것이다..라고도 할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현 ‘황하’를 표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목은 이색은 황하를 건너 대도에 머물다 이곳 노룡현에 와 고죽군의 두 현인을 회고하며 남긴 시입니다...즉 황하(많은 연행록에는 압록으로 되어 있읍니다만 ..)를 건너면 황하 남부와는 달리 반 건조지대와 자주 발생하는 황사 먼지의 이질적 환경이 나타나 황하 남부와는 다른 이국적 경치가 나타납니다. 하수가 국경(중앙정부와 지방정부와의 경계) 역할을 하여 ‘저문 날에 일엽편주로 하수를 건너와서’ 는 그 당시의 ‘중국에 와서’ 정도로 이해 됩니다. 사실 위의 ‘河’ 모두는 황하라 생각됩니다. 만약 서로 다른 ‘河’라면 글을 쓴 당사자는 이해 할 수 있으나 독자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수도 있으니까요...
만약 목은 선생이 황하를 표현한 것이라면 대륙조선은 거의 증명된 것입니다. 목은은 황하를 몇 번이나 건너 원의 대도를 왕래 했으니 원과 고려는 황하를 사이에 둔 것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일치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것이 있는데 1356년 대도에서 귀국길에 제화문(齊化門 ; 명의 조양문朝陽門)을 나서면서부터 차례로 한수씩 읊고 갑니다. 그 제목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병신년 정월에 제화문(齊化門)을 나와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2, 계문(薊門)의 도중에서
3, 도중에 스스로 읊다.
4, 고죽음(孤竹吟). 노룡현(盧龍縣)에서 짓다.
5, 유관(楡關)에서 잠깐 쉬는데, 한송 선사(寒松禪師)가 술을 사 왔다.
6, 천민진(遷民鎭)에서
7, 행점(杏店)의 도중에 눈보라가 치다.(杏山堡)
8, 큰 바람 속에 횡천채(橫川寨)에 들러 단가(丹家)에서 묵었는데, 여기에는 본국(本國)의 횡천 현(橫川縣) 사람이 살고 있었다.
9, 십삼산(十三山)
10, 해주(海州)
11, 구거음(驅車吟)
12, 정자하(亭子河)에 들러 백리(白里)에서 잤는데, 다음 날 아침에 스님의 힐책을 받았다.
13, 용주산(龍州山)을 바라보다.
14, 왕경(王京)
15, 집에 돌아오다.
~~~~~~후략~~~~~
위의 제목에서 보듯이 지나온 지명들이 연행록의 일정과 똑같습니다. 청의 연경은 명의 북경이고 원의 대도이니 같은 길을 지났으니 연행로정과 같다 하겠으나 문제는 해주(海州)입니다.
제화문(齊化門)=명의 조양문朝陽門) ->계문(薊門 ; 계주)->노룡현(盧龍縣)->유관(楡關 ; 산해관 인근)->천민진(遷民鎭)..?->행점(杏店)=(杏山堡?)->십삼산(十三山)->그 다음이 해주가 나오는데 연행의 코스에는 없는곳입니다.->구거음(驅車吟 ?) ->정자하(亭子河?)->용주산(龍州山)->왕경(王京 ; 아마도 개성?)->집(고향집?)
같은 코스를 지났으니 같다고 할수있겠으나 십삼산 다음에 해주가 있고 그 아래에 용주산이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해주가 나올 자리는 아니지만 제가 임의로 추정한 코스에는 해주가 나와야 하고 목은시고에도 해주를 거치고(십삼산 ...해주... 용주산) 왕경으로 돌아 옵니다.
해주는 십삼산과 용주산(龍州山) 사이에 있고 용주(龍州)는 용만 즉 의주 인근입니다. 즉 해주는 ‘河水’ 넘어에 있고 ‘河’가 현 황하라면 산서 남부의 해주(解州)라 하는 현 운성시가 유력합니다.
용주(龍州) ; ‘평안북도 용천 지역의 옛 지명 ; 고려 초에 안흥군(安興郡)을 설치하였다. 1014년(현종 5) 용주방어사를 두었고, 그 뒤 용만부(龍灣府)로 고쳤다가 1311년(충선왕 3) 다시 용주로 바꾸어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민족문화대백과>’
해주는 황해도에 있어야 하고 황해도는 대륙 서부의 광대한 곳이니 현 산서남부에 해주가 있을수 없다라 한다면 그것은 반도사관의 그늘이 아닌가 합니다. 대륙조선의 지명이 곱게(?) 반도에 이식 되었을리 없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한 연구가 필요)
해 성 현(海 城 縣)...<문무님의 글 ; 해성 현(海城縣)과 해원 현(海原縣)에서 발췌>
《周秦屬朝鮮,漢屬玄菟郡,後改屬樂浪,東漢置都尉,以封沃沮,魏屬牟州,晉及隋屬高句驪,唐平高麗,屬蓋州,入渤海爲南海府,遼置海州南海軍,金改澄州,元屬遼陽路,明置海州衛,隷遼東都指揮使司,淸順治間置海城縣,屬遼陽府,尋改屬奉天府.淸置,詳海原縣條. :
해성 현 : 주(周)나라 및 진(秦)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속했다. 한(漢)나라 때는 현토(玄菟)군에 속했으며, 후에 고쳐 낙랑(樂浪)에 속했다. 동한(東漢)에서는 도위(都尉)를 두었으며, 이곳에 옥저(沃沮)를 봉하였다. 위(魏)나라 때는 모주에 속했으며, 진(晉)과 수(隋)나라 때는 고구려(高句驪)에 속하였으며, 당(唐)나라가 고구려(高句驪)를 평정하여, 개주(蓋州)에 속했다. 발해(渤海)시에는 남해부에 들어갔고, 요(遼)시에는 해주남해군을 주었으며, 금(金)나라 때는 징주(澄州)라 고쳤다. 원(元)나라 때는 요양 로에 속했고, 명(明)나라 때는 해주 위를 두고, 요동도지휘사사에 예속되었으며, 청(淸) 순치사이에 해성 현(海城縣)을 두었는데, 요양부에 속하였는데, 이를 고쳐 봉천부에 속하게 하였다. 해성 현(海城縣)은 청(淸)에서 두었는데, 상세한 것은 해원 현(海原縣)조를 보라.》하였다.
반도사관에 의하면 조선의 해주와 명(明)의 해주는 별개이다 라 할 것이나 제 판단에는 해주는 한곳이고 그곳은 낙랑 현토와 같이 이른바 만주에 있어야 합니다. 만약 대륙조선의 해주가 천산동쪽(신강성쯤)에 있고, 낙랑 현토와 같이 또다른 명이나 청의 해주가 천산 서쪽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결국 반도사관의 틀에 갇혀있는 꼴입니다.
조선사에 있어서 해주는 압록강 넘어 만주에 있어야 하고(현 동북삼성이 아님) 조선의 해주와 명 청의 해주는 둘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주제가 조금 빗나갔지만, 아뭏튼 위의 ‘저문 날에 일엽편주로 하수를 건너와서 / 扁舟日暮渡河頭’ 에서 ‘河’는 어느 강(江)인가가 궁금합니다.
첫댓글 이 글에서 말하는 "하(河)"는, <첫째 : 난하를 말함이요, 둘째 : 황하를 칭한다>고 봅니다. 고죽국과 난하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데, 난하 상류측에 고죽국이 있었기 때인데, 노룡과 난하는 사막지대의 오아시스와 같은 환경에 있었다고 봅니다. 노룡사막은 험난하기로 유명했다는 옛 말이 전하는 것을 말입니다. 일엽편주로 난하를 건넜다는 뜻이고, 또 하나의 "하"는 황하를 말함이며, 이는 언제나 흐르고 있는, 마르지 않고 흐르는 것을 비유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위의 시에서 말하는 것은 노룡과 고죽국이며, 또 난하입니다. 따라서 일엽편주로......한 것의 "하"는 난하를 뜻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난하를 미처 생각치 못했읍니다. 난하일 가능성이 제일 큽니다..
연행록에 쓰인 거리와 일정은 왜곡된 것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으며, 연행기록의 내용에도 일부는 왜곡된 것이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취해야 할 것은 지명에 대한 그 위치와 그곳의 지형지리 및 방향, 특이지형등을 관찰하여 실제 그러한 방향, 지형지리가 옳은 내용인가를 고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현 화산(태화산:섬서성 화현)으로부터 총령(곤륜=불주산=천주)까지는 약 8천리(또는 7천8백리)라고 산해경에서 말하고 있는데, 실제 거리 역시 같습니다. 이러한 예에서 보듯, 지명이 있는 곳의 지세와 환경등을 종합해보면, 그 지명의 본시 위치를 찾을 수 있고, 연행기록에서 말한 곳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연행사들은 분명 북경(연경)을 갔었고 그 연행로정을 그릴수 있어야 조선사의 진실이 밝혀지리라 봅니다. 아마도, 연행로정을 분명히 할수 없는 지명의 설정(가령 해주가 여기다. 또는 산해관이 어디다.)은 가설로 그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해성현은 <현토에 속했다>라는 말에서, 현토는 대륙의 왕조였다는 "한(漢)"과의 접경지역이었으며, "현토"는 고구려의 고유지명이며, 진서에서는 <천산과 황하 상류와 함께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로 미뤄보면, '현토"는 신강성과 하와 천산이 있는 곳에 있었다고 봅니다. 이때 그 북쪽에는 부여가 있어야 하겠지요. 이것은 한서와 후한서, 통전, 자치통감의 기록과도 매치되는 것으로 대륙조선의 근간이 되는 해설이라고 봅니다. 해주는 바로 황해도에 있었으며, 이곳은 신강성지방을 말하며 고려의 안서도호부를 말한다고 봅니다. 이곳의 조선의 최서쪽지방으로, 님의 말씀대로 한 지명을 여러개로 쪼갠 왜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황해도 해주와, 요동땅의 해주(해성현)는 서로 다른곳이란 말씀인지요...아니면 본래는 하나인데 조선의 해주와 이른바 중국의 해주로 지명이 쪼개진(왜곡)것이라는 것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