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강표성
1.
최고의 연주자다. 눈짓 하나로도 온 누리가 춤춘다. 들풀의 자장가부터 눈·비를 동원한 즉흥환상곡에 이르기까지 천하제일의 솜씨다. 하지만 리듬을 타지 않는 것들은 건들지 않는 그만의 법도가 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마음대로 날아다닌다. 굽이굽이 흰 에움길에 맑은 숨결을 불어 넣고선, 낯선 들판을 그림자도 없이 건너간다. 젖은 나무들과 어깨춤을 추다가 호수의 물그림자를 지워버리는 장난꾸러기다.
어제는 달빛을 업고 강물을 건너더니 오늘은 허공을 움켜쥐고 미친듯이 내달린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가로수를 쓰러트리고 다리를 무지르기도 한다. 한 손으로 바다를 일으켜 세우고 수가 틀리면 산자락을 훑어내니 하늘도 어둠 속으로 물러선다.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천하의 점령군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죽기 살기로 천산 절벽을 내달리다가, 때가 되면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가부좌 트는 걸 알기에 숨죽여 기다릴 일이다. 고요해질 때까지, 부드러운 날개옷으로 갈아입을 때까지. 태초부터 이어온 그만의 생존 방식이다. 때에 따라 스스로 바꿔가며 수만 년을 살아왔으니 늙어도 늙지 않는 비결이다.
다시 맑은 숨결, 누리가 생생해진다. 강물은 윤슬을 뿌리고 들판은 초록 양탄자를 펼친다. 작은 풀잎들도 나풀거리며 맑은 말씀을 받아 적는다. 물과 풀이 받아쓰는 그 전언은 동서고금의 명문이다. 신이 주신 위로의 말씀이다. 이를 온몸으로 읽기 위해 사람들은 산과 들로 길을 나선다.
멀고도 긴 흐름이다. 온갖 소리의 근원이 되고, 서로를 이어주는 공명이다. 시간과 시간을 밀어 올리고 계절과 계절을 끌어당긴다.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그 파장에 세상 만물이 제 자리를 지키고 구름과 바다가 제 갈 길을 오르내린다. 보이지 않으나 볼 수 있는 존재, 누구에게나 공평한 신의 숨결이다.
2.
길 끝에서 사막을 만났다. 옛 성채인 카스바에서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모래폭풍이 몰아쳤다. 조준된 총알처럼 날아들었다. 머리에 둘러쓴 히잡과 목까지 채운 바람막이 점퍼가 비명을 질렀다. 턱과 무릎을 맞대고 몸을 공처럼 말아보지만, 얼굴은 따갑고 입안이 서걱거렸다. 우두망찰, 길 잃은 짐승처럼 주저앉았다.
걷잡을 수 없는 바람 속에서 또 다른 그것이 생각났다. 곁에서 부는 것만 바람이 아니다. 내 안에서 나를 뒤흔드는 것도 있다. 지나가는 열풍인가 싶어 고요해지길 기다리지만, 물가의 수양버들처럼 흔들림이 멈추지 않는다.
산다는 건 바람과 마주하는 일이다. 생의 허기로 또는 열망으로 맹렬하게 몰아치는 그것이다. 단순히 휘날리는 유혹인지, 삶의 촉매제가 될지는 알 수 없다. 마냥 흔들리며 부딪히는 수밖에 없다. 생의 허기와 열기 사이를 맴도는 바람, 바람들.
그것은 동굴의 횃불처럼 타오른다.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강렬하게 살아 움직이는 떨림이다. 진실로 원하는 그 무엇, 오래전부터 내 영혼이 바라던 일들이 바람이 되어 나를 찾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지극한 열망이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일깨운다.
생애를 걸만한 쏠림과 집중이다. 이는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삶의 응집력이 되어 새로운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최고의 돌파력을 발휘하는 그것은 영혼의 불쏘시개가 되어 어두운 시간을 건너간다. 내 안의바람이 만들어 낸 바람직한 모습이다. 세상이 다양한 모습으로 빛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명의 바람이다. 쉼 없이 타오르는 열망, 바로 운명이 주는 힘이다. 내 안에도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스스로 성장시키고 고양할 그것을 만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는지도 모른다 싶으니 새삼 숙연해진다. 내안에 진짜 바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참 반갑다.
3.
얼마 전 해인사의 포쇄작업을 보았다. 장마철에 눅눅해진 책을 꺼내 볕을 쬐고 바람에 말리는 작업을 TV에서 소개했다. 습기로 인한 부식과 충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란다. 팔만대장경을 기록해 놓은 천여권 이상의 경책들이 세상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햇살 좋고 바람 좋은 가을날에 책을 고슬고슬하게 말려주는 걸 보니, 온갖 세파에 찌든 사람이야말로 이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가끔 바람을 찾아 나선다. 일상에 지쳐 까무룩 해진 나를 되살리기 위해서다. 바람 앞에 서면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일어서는 것 같다. 겸손하게 그 안으로 걸어가면 조금씩 가벼워지고 투명해진다. 전생에 바람의 일족이었는지도 모른다. 천변을 건너온 바람이 맵차다. 길 하나 사이로 깊고 묵직해지는 바람결에 나를 맡긴다. 물가의 나무처럼 그것을 온몸으로 읽는다. 바람이 내 안에도 길을 내기 시작한다.
2022년 겨울 『수필미학』
첫댓글 이렇게 대단한 글을 읽을 수 있음이 행복입니다.
마음에 푸근하고 한편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사람을 늘 격려로 이끌어주시네요.
감사드립니다^^*
잘 읽었습니다
카페에서 뵈니 참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