碧巖錄 제21칙 "智門蓮花荷葉 - 지문화상과 연꽃"
[第021則]蓮花荷葉
〈垂示〉垂示云。建法幢立宗旨。錦上鋪花。脫籠頭卸角馱。太平時節或若辨得格外句。擧一明三。其或未然。依舊伏聽處分。
〈수시〉수시에 이르길 법당(法幢)을 세우고 종지(宗旨)를 일으키니 비단 위에 꽃을 더함이요, 속박을 벗고 짐을 내려놓으니 태평시절이로다. 혹 틀 밖의 구절〔格外句〕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하나만을 말하여도 나머지 셋을 알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여전히 엎드려 판결 처분을 받도록 하라.
☞법당을 세우고 종지를 세운다는 것은 법의 인가를 받아서 요연히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무애자재한 경지에서 종지인 법석을 열어 많은 중생들의 눈을 열어주는 것은, 자신과 인연 있는 모든 분들은 홍복이고 법이 면면히 이어 인간 본연의 길을 이을 수 있어 금상첨화라 할 것이다. 사람에 있어 아름다운 것은 인간성을 회복하여 모두가 선으로 돌아가 삼악이 없는 세상이 가장 부처의 세상이고 인간세의 이상적이 세상인 것이다.
탐진치 삼독이란 속박에서 벗어난다면 이는 태평시절인 것이니, 그 시작은 자신의 면목인 안목을 여는데 그 시작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있다면 본칙의 뜻을 궁구하여 옛 사람의 길을 밟아야 할 것이다.
(본칙)
어떤 스님이 지문(智門 : 설두스님의 스승)스님에게 물었다.
“연꽃이 물에서 나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연꽃이니라.”
“물 위에 나온 뒤에는 어떠합니까?”
“연잎마저 나왔군!”
☞연꽃이 상징하는 것은 꽃과 열매가 동시에 열려 깨달음과 함께 중생제도의 의미를 겸하고 있다. 이에 ‘연꽃이 물에 나오지 않을 때’라는 것은 깨닫기 전의 깨달음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다. 즉 묻는 스님의 의도는 두 가지가 있어서 처음은 자신의 안목을 가지고 점검을 하기 위함으로 깨닫고 보니 깨닫기 전과 다름없는 안목이 열려 지문선사를 떠보기 위함인 것이고, 다음은 자신의 안목이 열리지 않아서 본래의 성품인 깨달음에 대하여 알고자 함이다.
이에 선사는 ‘연꽃이니라’라고 답한 것은 참으로 교묘하다고 할 것이다. 즉 다시 연꽃이라 말한 것은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우리에 본래 성품은 공하여 변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있으며, 부처나 중생이 모두 하나의 성품 가운데 있음을 들어 보인 것이다.
이에 다시 수좌가 ‘물위에 나온 뒤에는 어떠합니까’의 물음은 안목이 열려 본분 종사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묻는 것으로 자신은 깨달았으니 점검하여 주십시오 하는 뜻도 내포되어 있고 깨달음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에 선사께서 ‘연잎마저 나왔다’한 것이 깨달음이란 언어도단이며, 불립문자 이심전심의 도리로서 여기에 일체의 부처, 조사, 중생, 깨달음이라는 뜻과 용어가 붙을 수 없는데 나온 뒤를 묻는다고 함은 깨달은 종사에 있어서는 군더더기이기에 연꽃은 차제하고라도 불필요한 연잎마저도 생겨났다고 한 것이다.
(평창)
만일 지문스님이 기연에 따라 사람을 제접하느라고 그랬다면 그래도 조금은 괜찮지만, 뭇 지견을 끊어버린 경지와는 천리만리 동떨어진 일이다. 말해보라, 이 연꽃이 물에서 나왔을 때와 나오지 않았을 때가 같은가 다른가를. 만일 이렇게 알아차린다면 그대에게 깨달은 곳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이를 같다고 말한다면 불성(佛性)을 애매하게 하고 진여(眞如)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며, 이를 다르다고 말한다면 마음과 경계〔心境〕를 잊지 못하는 것이다. 알음알이로 치달리는 길 위에 떨어진다면 언제 쉴〔休歇〕 기약이 있겠는가? 말해보라, 옛사람의 뜻은 어떠했는가를.
☞여기에서 원오선사는 지견을 끊어버린 경지에서 다시 같고 다름을 논하는 것은 참된 도리를 보지 못한 것이라고 한 것이다. 진여 불성에는 그 자리가 일체가 다 공하여 무엇을 세울 수 없으므로 같다고 말하는 것은 잃지 않고, 자신의 열린 안목으로 쉬어 감을 말함이고, 다르다고 한다면 이는 깨달음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여서 알음알이로 영원한 쉼의 경지는 보지 못한다고 한 것이다.
그들은 실로 이러쿵저러쿵하는 일들이 없었다. 그래서 투자(投子)스님은 “그대들은 이름〔名〕, 말〔言〕, 법수〔數〕, 글귀〔句〕에 집착하지 말라. 모든 일을 깨친다면 자연히 집착하지 않게 되어 곧 수행상의 잡다한 단계와 순서가 없어진다. 그대가 모든 법을 주무를지언정 모든 법이 그대를 간섭하지 못할 것이다. 본래 얻고 잃음과 꿈과 허깨비 같은 많은 명목(名目)들이 없어, 그 명자(名字)를 억지로 세울 수 없는데, 많은 사람을 속일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묻기에 말이 생기는 것이니 그대들이 묻지 않는다면 그대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일이란 모두 그대들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전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옛사람(백장스님)은 “불성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면 상황 속에서 일어났던 인연을 살펴보도록 하라”고 하였다. 왜 듣지도 못하였는가? 운문스님은 거량하기를 “어떤 스님이 영운(靈雲)스님에게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시지 않았을 때는 어떠하냐’고 묻자, 영운스님은 불자(拂子)를 곧추세웠다. 그 스님이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뒤에는 어떠하냐’고 하자, 영운스님은 또다시 불자를 곧추세웠다”라고 하였다.
☞ 부처가 세상에 나오기 전과 나온 후에 대하여 영운스님은 불자를 세웠다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부처가 나오기 이전에도 보고 듣고 하는 다만 이것뿐이며, 부처가 나운 뒤에도 다만 이것을 가리킴에 지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첫댓글 如如한 것은 眞諦요 다름은 俗諦다. 진제와 속제에 모두 다 이른 선지식은 말을 씀에 걸림이 없어 진제의 살림을 속제의 말로 하여도 진리를 그대로 드러낸다. 그래서 圓融無二相이다. 드러난 것과 드러나지 않은 것을 雙遮雙照함에 조금도 걸림과 막힘이 없다. 그래서 다른 질문에 같이 불자를 든 것이리라.
「불자를 곧추세웠다」라는 말씀을 헤아리기 어려웠는데 장로님이 설명해주셔서 이해되었습니다, 평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