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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재사랑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호산아 오상수
* [새재사랑산악회 제175차산행] 신시도 <월영산-대각산> 시산제
2017년 3월 19일 (일요일)
* [산으로 가는 길]☞ 서울 군자역(07:40)→ 고속도로[경부선·천안-논산선·공주-서천선·서해안선]→ 동군산I.C→ 21번도로(전주-군산)→ 비응항→ 새만금방조제(77번 도로)→ 신지도 주차장(11:00)
* <산행들머리> 새만금방조제공원 주차장→ 월영봉→ 몽돌해수욕장→ 대각산→ 안골저수지→ 방죽→ 월영재→ (199봉)→ 원점(주차장) ♣ [2017년] 정유년 <시산제(始山祭)> 봉행
* [서울로 오는 길] <신시도>(오후 4:00)→ 동군산→ 고속도로[서해안선·서천선(동서천-청양I.C)] 청양I.C→ 39번도로[정산→ 신풍→ 유구→ 송악→ 아산]→ 43번 도로[음봉→ 평택대교(안성천-아산만)→ 17번 고속도로[오성I.C→ (어연→ 항남 경유)→ 서오산J.C→ 400번 고속도로(광명-동탄)→ 동탄I.C→ 경부고속도로→ 귀경(오후 8:00)
* [프롤로그] — 대한민국의 진정한 봄을 기다리며 …
☆… 이제 완연한 봄이다. 지난겨울은 참으로 참담하고 혼란스러웠다. 세상은 온통 좌우(左右)로 분열되어 격렬한 시위로 영일(寧日)이 없었다. 이렇게 혼란하고 경색된 탄핵의 정국 속에서 천하의 봄은 어김없이 오고 있었다. 지난 3월 10일 오전 11시, 현직 대통령이 탄핵 심판을 받아 파면되었다. 사상 초유의 일이다. …증오의 굿판을 벌이던 촛불은 환호의 축제를 벌이고, 맞불로 뜨거웠던 깃발은 그저 망연자실하고 있다. 애증(愛憎)이 교차하는 환절기의 바람이 흉흉하기 짝이 없다. 역사의 질곡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은 서로 적대하고 있는 모양새다. 참 큰일이다. 지금 선장이 없는 ‘대한민국호’가 망망대해에서 심한 풍랑을 맞고 있다.
생각해 보라. 막막한 바다 한 가운데 외로운 배 한 척,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한 삼각파도가 몰려오고 있다. 핵(核)무기를 개발하고 미사일을 쏘아대는 반인간적인 북(北)의 도발은 말할 것도 없고, 유엔이 결의한 ‘대북 제재’는 하지 않으면서 한반도의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중국이 유치하고 무차별적인 압박을 가해오고 있다. 그리고 엄연한 역사적 사실(事實)을 교묘하게 왜곡한 교과서를 만들어 각급 학교에 배포한 일본이 또한 우리의 목의 죈다. 혼란한 정국 속에서 중심 없이 비틀거리는 나라를 가운데 두고 북(北)과 중국과 일본이 가차 없이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거기에다 안보(安保)의 우방이라는 미국도 자국의 이익을 내세우며 이런저런 통상압력을 가해오고 있는데, 미국의 금리 인상, 시한폭탄이 된 우리의 가계부채, 가공할 실업률(失業率)의 증가 등 온갖 난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몰려오는 기세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금 대한민국은 오로지 대선(大選) 판이다. 각 당에서 경선에 들어간 각양각색의 후보들이 서로 물고 뜯으며. 한편으로는 국민들을 현혹하는 감언이설로 장밋빛 공약을 마구 쏟아내고 있다. 엄청난 국가위기에 대한 정책보다는 대중영합주의(포퓰리즘)로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를 빙자한 이 포퓰리즘이 민생 경제와 국가 안보를 해결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포장된 포퓰리즘이 바로 민주주의를 망친다. 그것은 역사의 반역(叛逆)이다. 나라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국민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거기, 편 가름 속에 들어가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이 시점에서도 어떤 후보자가 끊임없이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가, 누가 대중에 영합하는 발언을 일삼고 있는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시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이 한마음이 되도록 하는 것이 모든 정치의 목표가치가 되어야 한다. 후보자가 진정 위기의 국가를 보위하고 전체 국민을 통합하기 위한 인품과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의 현실과 국민적 열망을 100% 채우지는 못하더라도 거기에 가장 근접된 경륜을 가진 사람을 찾기 위해서 후보자들을 철저하게 검증하고 분석하여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 [오늘의 산행지 ; 새만금방조제] — 신시도의 월영봉과 대각산
☆… 오늘은 서해에 위치한 고군산군도의 신시도(新侍島)에 솟은 ‘월영봉’과 ‘대각산’을 산행하고 난 후, <2017년 정유년 시산제>를 올리는 날이다.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는 전라북도 군산과 김제의 변산반도 사이의 바다에 있는 야미도, 신시도, 선유도, 무녀도, 관리도를 비롯하여 횡경도, 방축도 명도, 말도의 크고 작은 섬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신시도>는 고군산군도의 섬 중 가장 면적이 넓다. 신시도에는 ‘월영봉’(198m)과 ‘대각산’(197m)이 우뚝 솟아 있다.
이제 <신시도>는 지금은 군산의 비응항에서 김제의 변산반도까지 이어진 새만금방조제 도로로 인하여, 육지와 연결되어 있어, 섬 아닌 섬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의 신시도를 이야기하자면 <새만금방조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새만금 방조제로 인하여 육지와 연결되어서 고군산군도 국제해양관광지 조성사업 추진의 시발점이며, 선유팔경 등 서해의 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대각산 전망대가 있다. 그리고 월영봉 아래에는 광대한 새만금간척지와 방조제, 기념공원, 그리고 방조제의 가장 중요한 시설물인 새만금호의 배수관문이 있는 곳으로 너른 주차장이 구비되어 있다. 요즘은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 [<새만금방조제>에 대하여] — 길이 33.9km, 세계 최장의 방조제(防潮堤)
새만금 개발사업은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갯벌을 개발하여 최대한의 용지를 확보하고, 종합 농수산업 시범단지를 조성하며, 항만과 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여 장차 새만금 국제무역항의 건설 기반을 구축하는 등의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1년부터 담수호, 양·배수장, 방조제, 용배수로, 배수갑로 등의 수용시설물을 건설했고, 약 19년 8개월만인 2010년 4월 27일 <새만금방조제>가 완공되었다. 공사 완공 이후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의 굴곡진 100㎞의 해안선이 비응도~고군산군도~변산반도 사이를 연결하는 33㎞의 직선 방조제로 바뀌게 되어 그 방조제 안쪽으로 새로이 4만 100ha의 용지가 생김으로써 그만큼 국토가 확장되었다. 이 면적은 전주시 면적의 두 배, 여의도의 약 140배에 이른다.
새만금방조제 공사하기 전의 <고군산군도> [항공사진]
새만금방조제 공사 후 [항공사진]
새만금간척사업의 1단계 사업으로 건설된 방조제로, 1991년 11월 16일 착공한 후 19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2010년 4월 27일 준공하였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환경오염 문제가 제기되어 새만금간척사업에 대한 찬반 논란이 빚기도 했다. 길이 33.9km, 평균 바닥 폭 290m(최대 535m), 평균 높이 36m(최대 54m)로, 세계 최장 방조제로 알려진 네덜란드의 주다치방조제(32.5km)보다 1.4km 더 길다. 방조제 건설로 인하여 전라북도 군산시·김제시·부안군 공유수면의 401㎢(토지 283㎢, 담수호 118㎢)가 육지로 바뀌었는데 이는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에 이르는 면적이다. 간척지 조성으로 인하여 한국 국토 면적은 10만 140㎢에서 10만 541㎢로 0.4% 늘었다. 행정구역상 간척지 면적은 군산시 71.1%, 부안군 15.7%, 김제시 13.2%를 차지한다.
‘새만금(새萬金)'이란 명칭은 김제·만경(金堤·萬頃) 방조제를 더 크게, 더 새롭게 확장한다는 뜻에서 예부터 김제(金堤)·만경(萬頃)의 두 평야를 ‘금만평야(金萬平野)'로 일컬어 왔던 ‘금만'이라는 말을 ‘만금'으로 바꾸고 새롭다는 뜻의 ‘새'를 덧붙여 만든 신조어로, 오래 전부터 옥토로 유명한 만경·김제평야와 같은 옥토를 새로이 일구어 내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87년 11월 2일 당시 정인용 부총리 주재로 관계장관회의에서 황인성 농림수산부 장관이 처음으로 서해안 간척사업을<새만금간척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사용되었다.
* [산(山)으로 가는 길] — 정겨운 산우들, 함께 하는 마음
☆… 오전 7시 40분, 우리의 분홍버스(기사 권용길 님)는 서울 (지하철 5·7호선) 군자역을 출발했다. 오늘은 전라북도 서해안 <새만금방조제> 건설로 육지와 연결된 <신시도>의 <월영봉>과 <대각산>을 산행지로 잡았다. 그리고 산행 후, 우리 <새재사랑산악회> “정유년 시산제(始山祭)”를 그곳에서 봉행하는 날이다. 많은 대원들이 참석했다. 지누 남정균 회장, 하회탈 김준섭· 꽃구름 한영옥 부회장, 호산아 고문·두꺼비 장병국 고문, 김의락 자문위원을 비롯하여 지평 민창우 기획, 열통 박은배 총무, 베토벤 유형상 부대장을 비롯하여, 산머루 남위숙 님, 향이 허향순 님, 감사 오수정 님, 그리고 우정의 노익장 강재훈·안상규·전진국·송기정 님, 그리고 과묵한 신사 민백기 님, 발랄한 조인규 님과 미남 고종길 님, 전상기·김행국 님, 그리고 김재철 님 내외분, 박동수 님 내외분, 꽃구름의 이달호 님, 늘 명랑쾌활한 이명자·나천옥 님, 신비풍의 이상재 님과 지기 이성종 님, 하회탈의 친구들 김숙이·정석희·현정 님 그리고 사모바위 남극봉 님, 남정백 님 등이 동행하게 되었다. 오늘 처음 참석하는 분들도 있고 성함이 확인하지 못한 몇 분의 대원도 계신다.
정안알밤휴게소 (천안-논산간 고속도로)
새만금방조제 77번도로
따뜻한 봄날이다. 오늘은 영상 10도가 넘었으니 완연한 봄이다. 이미 남도의 구례 산동마을에 산수유가 만개하고 하동-광양의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다는 화신을 올라왔다. 서울을 출발한 우리의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남(南)으로 달린다. 그리고 ‘천안-논산’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달리다가 ‘정안알밤휴게소’에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공주-서천’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서해안고속도로에 진입했다. 서해안고속도로 동군산I.C에서 21번 국도(전주-군산)에 내려 만경평야를 가로질러 서해바다를 향하여 달렸다. 오전 10시 55분, 마침내 서해 비응항에서부터 <새만금방조제> 위의 77번 도로에 진입했다. 비응항은 원래 비응도의 한 포구인데, 새만금방조제 공사를 하면서 비응도와 군산 사이의 바다를 매립하여 거대한 간척지가 조성되었다. 비응도 포구가 지금은 육지의 비응항으로 이름을 지니고 있다. 그 거대한 간척지가 지금 <군산새만금산업단지>이다. 바다 위에 ㅡ자로 뻗은 방조제 길을 질주하여 야미도를 경과하여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신시도> 새만금기념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 [산행의 들머리] — 신시도(新侍島) 월영재에 오르다
☆… 오전 11시 17분, 모든 대원들이 행장을 수습하고 난 후, 기념 촬영을 한 후 산행에 돌입했다. 산행의 들머리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첫 번째 갈림길인 월영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월영재는 옛날 신시도가 섬이었을 때, 지금의 방조제가 있는 지점인 섬의 동쪽의 포구에서 안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북쪽의 월영봉과 남쪽의 199봉 사이의 안부(鞍部)이다. 월영재로 올라가는 길은 산간도로의 폭을 지니고 있으며 비교적 완만하게 경사진 오름길이었다.
☆… 오전 11시 28분, 월영재에 도착했다. 몸을 풀듯이 0.56km를 올라온 것이다. 포근한 봄날, 산행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따뜻하게 입은 옷이 무겁고 온몸엔 땀이 나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행장을 가볍게 하고 오른쪽의 월영봉을 치고 오르기 시작했다. 비교적 가파른 산길은 각진 바위들로 이루어진 산록의 길이었다. 서울 북한산의 화강암과는 그 암질과 형태가 전혀 다른 바윗돌이다. 수직으로 짝짝 갈라진 형태가 주상절리를 이루는 그 암석이었다. 남쪽의 변산반도 채석강에서 본 그런 바위였다. 산길은 가팔랐고 등에는 3월의 따가운 햇살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고도를 높여갈수록 시야가 열린다. 동쪽으로는 새만금방조제 기념공원을 중심으로 담수호와 간척지 그리고 배수갑문의 시설이 시야에 들어오고, 서쪽으로는 선유도를 비롯한 고군산군도의 섬과 해안선의 방죽과 간척지 등이 고즈넉한 풍경을 보여주었다. 오늘은 미세먼지가 약간 드리워져 있어 시계(視界)가 그렇게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바다와 섬 그리고 개발된 산업현장을 조망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월영봉
월영재 이정표
* [유서 깊은 월영산(月影山) 정상] — 고운 최치원 선생을 생각한다
☆… 오전 11시 38분, 오늘 산행의 첫 번빼 포인트인 월영산(月影山)에 도착했다. 올라오는 길도 길지 않고 산의 높이도 해발 198m밖에 되지 않지만 올라오는 길은 매우 가팔랐다. 월영봉 정상에는 장방형의 큼직한 이정표가 선명하고 그 옆에 월영대와 신라 시대의 대학자 최치원에 관한 해설판이 아주 서 있었다. 신시도(新侍島) 월영산 정상의 월영대(月影臺)는 최치원 선생이 단을 쌓고 글을 읽어 그 소리가 중국까지 들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유적이다. 여기서 글을 읽고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중국에까지 들렸다고 하니, 선생의 학문과 고매한 정신이 중국 대륙을 진동시켰음을 은유(隱喩)한다. 월영대 외에도 신시도는 최치원과 관련된 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최치원이 이곳에서 깊이 은둔했다는 심리(深里). 최치원이 글을 읽으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는 신치(新峙), 최치원이 크게 깨달았다는 대각산(大覺山) 등이 그것이다. 대각산은 오늘 신시도 산행의 두 번째 포인트이다.
<동쪽> 새만금방조제 기념탑(공원) / 방조제 배수관문 / 주차장 전경 (월영봉 오르는 길에서의 조망)
<서쪽> 신시도 해안선과 고군산군도의 풍경 (선유도로 가는 연육교도 보인다)
*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문명을 떨친 대학자 …
최치원(崔致遠, AD.857~?)은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정치가이며 대학자이다. 자가 고운(孤雲)이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당나라에서 진사시에 급제하였고, AD. 881년 <토황소격문>을 지어 황소의 난을 평정하여 그 문명을 당나라 전역에 떨쳤다. 또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개인문집인『계원필경』을 남겼다.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34세에 태산군(정읍 태인) 태수로 임명되었고, 38세에「시무십여조」를 올려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42세에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중국 강소성 양주시에는 <최치원기념관>이 건립되어 있으며, 한중문황교류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최치원은 유교(儒敎)∙불교(佛敎)∙도교(道敎)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를 지녔던 학자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다. 하지만 신라의 높은 신분제의 벽에 가로막혀, 자신의 뜻을 현실정치에 펼치지 못하고 깊은 좌절을 안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가 이룩한 학문과 문장의 경지는 높았으나, 난세를 산 그의 삶은 그가 이룩한 높은 경지만큼 불행했다.
월영대에서 잠시 동안 고운 최치원 선생을 생각했다. 어디 최치원뿐인가. 문장이나 학문, 그리고 현실정치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도, 시절을 잘못 만나면 그냥 초야의 묻히거나 불우한 생애를 마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 무인정권시대의 이규보(李奎報)나 정몽주(鄭夢周), 조선시대의 세조(수양대군) 때의 김시습(金時習)이나 중종 때의 조광조(趙光祖) 선생 등이 다 그러하다. 역사는 감정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이라는 것. 인간의 욕망(慾望)이, 순리보다는 비리와 불행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실을 보아도 그 불우함이 여실하다. 제대로 된 사람보다 사리사욕에 혈안이 된 정치인들이 득세하여 횡행하는 것을 보면, 역사의 질곡(桎梏)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 [암릉 위의 조망] — 월영봉에서 몽돌해수욕장으로 가는 길
☆… 월영대에서 서쪽으로 능선 길을 따라 산행을 계속했다. 신시도의 두 번째의 산행포인트인 대각산(大覺山)으로 가는 길목이다. 산길은 아기자기한 암릉 길과 토산의 평지를 이루기도 하며 아래로 쏟아진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시야가 확 열리는 암릉 위에 섰다. 신시도의 해안선과 포구, 그리고 건너편 대각산이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조망처이다. 신시도의 안골과 무녀도 등 고군산군도의 섬들이 그림처럼 시야에 다가오는 지점이다. 시계가 아주 깨끗하지는 않으나 섬과 산과 바다의 해안선이 아름다운 풍경이다. 따사로운 햇살이 이마에 내리고 간간히 부드러운 바람결이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평화로운 마음을 느끼게 한다. 다행히 산길에는 사람들이 적어서 조용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동행하는 대원들이 그 풍경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았다. 산뜻하고 멋지다.
월영산 하산 능선 길에서 바라본 대각산(우리가 올라가야 할 암릉과 정상의 전망대), 오른쪽 들어온 해안이 몽돌해수욕장
신시도는 새만금방조제 건설로 육지의 일부가 되었고 고군산군도의 모든 섬들이 새로운 도로와 연육교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지금은 배가 아닌 자동차로 바닷가의 포구나나 해수욕장 등으로 나아간다. 대각산으로 가는 산길은 큰 길을 건너야 한다. 산행의 편의를 위하여 잘 생긴 육교를 시설해 놓았다. 신시도의 월영산과 대각산 사이를 가로질러 선유도로 가는 4차선 도로를 건너가야 한다. 도로를 건너서 작은 언덕산을 넘어가면 작은 해수욕장이 나타나는데 거기가 몽돌해수욕장이다. 육교의 건너편 언덕산은 사실 월영산의 자락인데 그 가운데를 절개하여 선유도로 가는 도로를 만든 것이다. 육교를 지나고 언덕산을 넘어가니, 산자락 안쪽으로 들어온 해안선이 작고 아담한 해수욕장을 이루고 있었다. 사실은 지형적으로 보아 월영산과 대각산 사이의 위치한 미니해수욕장이다.
대각산과 그 아래 몽돌해수욕장 원경
월영산 자락을 절개하여 만든 도로 (육교를 건너 언덕산을 넘으면 몽돌해수욕장)
* [신시도 몽돌해수욕장] — 푸른 바다, 갯바위,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
☆… ‘아! 바다다!’ 속으로 탄성을 지르며 바닷가로 내려갔다. 절벽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풍경과 푸른 바다의 광활함이 더운 가슴을 시원하게 씻어준다. 바닷가의 바위에서 앞서 간 대원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다. 아득하고 푸른 바다, 검은 갯바위,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 그 위에 가슴을 열고 포즈를 잡는 대원들, 원색의 등산복이 꽃처럼 피어난다. 모여서 찍고, 혼자서 찍고 그리고 바다를 돌아보면서 마음을 열고 있다. 환호하는 친구도 있고 잠시나마 조용히 바다를 바라보는 벗들도 있다. 작은 해수욕장의 해안은 몽돌밭이었다. 처음에는 각진 돌이었을 터인데 수많은 세월 속에서 바닷물에 깎이고 씻기어서 지금은 저렇게 동글동글 매끄러운 표면을 지닌 몽돌이 되었다. 사람의 각박한 마음도 오랜 시간 수양을 하면 누구에게나 원만한 인품의 몽돌이 될 것이다. 오늘은 산을 넘고 바다를 안고 산들산들 바람을 즐기는 따뜻한 봄 산행이다.
육교를 건너 언덕산에서 뒤돌아본 월영봉과 199봉의 산체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