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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공동체교회협의회(한공협) 원문보기 글쓴이: 김태현
1브루더호프 설립자 아놀드의 무덤 앞에서 (독일 자네즈).jpg |
필자가 아내와 함께 한 동안 머물러 살면서 경험하였던 10 년 전 - 그 때까지만 해도 잠시 다녀가는 방문자나 일정 기간 머무는 손님 중 한국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의 한 장면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그 아름다운 영상은, 어느 가을날 일과가 한창이던 오후 3시에, 문득 한 청년이 한가지 간단한 제안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가을 햇살이 이토록 좋은데 이렇게 일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요?”
이 말이 무슨 신호라도 된 듯, 모두 일손을 놓고 남녀노소할 것 없이 온갖 악기며 간식들을 챙겨 야트막한 뒷동산으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나와 아내는 잔디밭에 놓여있던 긴 벤취를 끌어안고 낑낑대며 올라갔다. 잠시 후 산 등성이에서 모닥불 장작을 그림처럼 쌓아놓은 주위로 가족단위로 둘러 앉았고, 그 언덕은 금방 장엄한 오케스트라의 연출장으로 변하였다. 이어지는 찬양 중에 그들의 얼굴 가득 베어 나오는 은은한 감격의 빛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6개월 가까이를 생활하다 보니, 이것이 연출된 일회적 ‘이벤트’가 아니라 이 모습 자체가 일상 그 자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땅 위에도 하나님 나라 건설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처음 해 본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상의 누림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부부가 함께 감탄해 마지 않았던 순간들이 몇 번인지 셀 수 조차 없다.
1브루더호프의 출발이 된 독일 자네즈의 집과 멀리 뒤편으로 보이는 산상수훈을 설교하였던 언덕.jpg |
1920년, 독일 할레 대학 출신의 유명한 강사요, 학생신앙운동가였던 에버하르트 아놀드(Eberhard Arnold) 박사에 의해 독일 남부 시골 마을, 자네즈(Sannerz)에 설립된 이 공동체는 자신의 모든 명예와 출세의 길을 버리고 산상수훈에 깊이 감동을 받은 일단의 무리와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후 나치의 박해와 2차 세계 대전의 혼란을 겪으면서 잠시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독일로부터 강제 추방되었으나 독일의 첩자라도 되는 듯 의심을 받았던 이 공동체를 어느 나라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이 때에 유일하게 문을 열어준 것은 남미의 파라과이였다. 이주 후 갖은 고생을 하였고 1950년대 후반부에 와서야 회복과 성장의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은 3,000 명에 가까운 회원과 미국과 유럽, 호주 등 에 수백명 단위의 공동체 9곳과 소공동체 수준의 분원 공동체 20 여 곳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편, 독일말로 ‘형제들의 거처’라는 뜻을 가진 ‘브루더호프’는 원래 재세례파의 한 분파인 후터라이트의 단위 공동체들을 총칭하는 이름이었다.
1브루더호프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 깜짝 체육대회.jpg |
1브루더호프 아이들의 노동력도 대단하다 (독일 자네즈).jpg 또는 1브루더호프 ‘공동체 삶의 역동성은 놀랍다’(연극).jpg |
공동체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해 보고자 방문하게 된 북미의 후터라이트 공동체를 방문한 아놀드는 깊은 감명을 받고 1년 가까이 그 곳의 하나님 나라의 삶에 집중하는 그들의 삶과 간명한 생활 모습을 발견하고 큰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체험은, 초대교회의 회복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영위해 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였다. 하여 아놀드 일가는 이를 전형(典型)으로 하여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성장 성숙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방문해 보면, 실제로 후터라이트의 공동생활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의상이며 찬양, 어린이 교육 체계, 시골에 들어가 전원 속에서 평화를 추구하며 보수적인 도덕성과 진보적인 사상의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멤버 중 북미 후터라이트에서 옮아온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
많은 매체를 통해 소개된 이 공동체에 대하여 굳이 여러 설명을 통해 사족을 달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들 스스로를 간단하게 소개한 두 글귀들로 읽는 이들의 이해를 다소나마 돕고자 한다.
“우리 공동체 생활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산상설교를 비롯해서 신약에 기록된 그분의 다른 가르침들, 특히 형제 사랑과 원수 사랑, 서로간의 섬김, 비폭력과 무장 거부, 성적 순결, 충실한 결혼 생활 등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사유 재산을 소유하는 대신에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한 것처럼 모든 것을 공유합니다. 각각의 지체는 자신의 달란트와 시간과 노력을 어디든지 이것들을 필요로 하는 곳에 사용합니다. 돈과 재산은 자발적으로 헌납하며, 모든 지체가 공유하게 됩니다. 점심(현재는 금식)과 저녁 식사는 함께하며, 교제, 찬양, 기도, 의사 결정을 위한 모임을 한 주에 몇 차례 저녁 시간에 가집니다.”
“우리의 생활은 일하는 소리만큼이나 노래 소리와 노는 소리로 가득한 즐거운 생활입니다. 우리는 Community Playthings(아이들을 위한 장난감과 기구 생산업체)와 Rifton Equipment for People with Disabilities(장애인 보조 기구업체)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여 공동체를 꾸려가고 있습니다. 전세 비행기 사업과 애완견 사육과 같은 다른 사업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노동은 투기나 모험이 아닙니다.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에서부터 작업장에서 제품을 조립하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이르기까지, 노동은 서로에 대한 사랑의 실제적인 표현입니다.”
최근 4-5년 사이, 이 공동체의 눈에 띄는 변화 두 가지는 ‘점심을 먹지 않는 공동체’로의 변화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 뜻하지 않은 - 외연의 확대가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첫 번째 변화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말씀에 대한 공동체적인 순종에서부터 왔다. 출발부터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살기를 다짐한 이 공동체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마4:4)이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제 3세계에 기근으로 죽어가는 이들과 하루 두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점심 시간을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바꾸기로 결의하고 그대로 시행하고 있다. 물론 노약자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간단한 식사는 제공된다.
이어진 변화는 공동체의 위기감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세속 문화를 접한 자녀의 교육 문제가 발단이 되어 수십 가족이 탈퇴하는 아픔을 겪은 후부터 브루더호프는 그들의 고유 명칭을 버리고 - 섹트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 지역명을 쓰기로 하고 대대적인 공동체 갱신에 초점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세계 곳곳에서 브루더호프 공동체 설립을 염원하는 소리들이 들려왔고 불과 몇 년 사이에 30 곳 가까운 소공동체들이 설립되고 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전혀 뜻하지 않은 성령의 사역이라는 고백이다.
짧은 내용을 통해 본 바, ‘아이들이 천국’ ‘가족의 천국’ ‘미래적 어린이 교육의 모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별명들을 가진 브루더호프의 진정한 명칭은 ‘초대교회를 살아가는 땅에 있는 하늘 나라!’라 표현해 보면 어떨까 한다.
2. Basisgemeinde Wulfshagenerhütten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
=마5-7장 (산상수훈,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눅4: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공동체의 긴 이름 ‘바시스게마인데 불프스하게네르휘텐’(Basisgemeinde Wulfshagenerhütten)는 독일어로 ‘불프스하게네르휘텐’이라는 마을에 있는 ‘기초 공동체’ 라는 뜻이다.
선박의 고장이며 운하의 도시로 잘 알려진 독일 북부 키일(Kiel)에서 지방철도로 수십 분 거리에 있는 게토르프(Gettorf)역. 이 역으로 마중 나온 설립자 베버(Weber) 목사의 장남, 클레멘스(Clemens)는 오랜 여행에 몸과 마음이 지친 한 동양인을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연식이 오래된 경차로 공동체로 이동하던 중 공동체의 간단한 이모조모를 소개한다. 들려 주는 입술이나 말소리, 말의 내용보다 백미러를 통해 언뜻언뜻 보여 지는 배려깊은 눈이 마음에 와 닿아 따뜻하게 느껴졌다. 공동체에 도착한 후 턱수염을 잘 기른 중년의 한 남자를 소개하며, ‘여기 머무는 동안 이 분과 이 가정의 도움을 받으라’ 한다. 유럽 공동체의 Host 제도를 이미 경험해 본 터라 소개받은 나의 식주인, Martin이 대인관계가 원만하며 공동체 살림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으리라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었다.
2바시스 게마인데- 200년이 넘은 주건물 (5채 중 하나).jpg |
이 공동체에는 아담한 것이, 괜한 친근감이 간다. 다녀 본 공동체 중 그 역사가 가장 짧고 공동체 시작의 출발 시기(1983년)와 현재 터의 규모(4-5천 평)도 한국의 여타 공동체와 엇비슷하다.
독일 북부의 작은 시골 마을에 위치한 바시스게마인데 공동체는 어른, 아이, 기혼, 미혼자 등 70명으로 구성된 기독교 공동체이다. 독일루터교회의 나태하고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에 염증을 느끼고 참된 복음의 삶을 희구하던 루터교 목사, 게르하르트 베버(Gerhard Weber 1937. 8. 13 - 1994. 5. 25)와 그를 따르던 교인들에 의해 독일 남부 슈튜트가르트에서 출발한 이 공동체는 1983년에 -오직 공동생활만을 위하여- 어린이를 위한 시설을 인수하여 남부에서 북부 끝으로 이주하였다.
현재는 본원이라 할 수 있는 게토르프(Gettorf)에서 함께 살고 있고, 1996년에 우크라이나에서 한 가정을 시작으로 작은 공동체가 이루어졌고, 1990년 이래로 (당시) 동베를린에 작은 공동체 하나가 시작되었다. 분원이라 할 수 있는 이 공동체들은 같은 정신의 기초 위에 세워 졌지만, 상당히 다른 과업과 일과를 가지고 있다. 또 밖으로 엘 살바도르에 있는 기초 공동체와 뮌헨의 기독교 공동체, 그리고 영미의 브루더호프 공동체 등 많은 기독교 공동체들과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2바시스 게마인데- 정오기도 준비.jpg |
초기 기독교의 본을 따르기 위해 공동체의 모든 멤버들은 모든 것 - 돈, 소유, 시간, 어린이와 교육 그리고 운영에 관한 책임 등 -들을 함께 나눈다.
사실, 이 공동체 시작의 중요한 계기는 가난한 자들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였다. 어느 날 알콜 중독자인 아비를 잃은 어미와 세 아이들이 그들의 모임으로 찾아들었고, 복음과 그 구체적인 삶에 민감하여 있던 멤버들은, 섬기고 더불어 사는 삶에로 그들 스스로를 초대하게 되었다. 이것이 출발점이 되어, 보다 사랑에 적극적이도록, 좀 더 복음에 민감하도록 멤버들을 밀어 붙였다. 이 후 공동체는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에 대한 소명을 재발견하고 초대교회의 공동체적인 믿음과 삶 속에서 그 해답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1983년. 급기야 실질적인 공동 생활을 위한 최종 결단을 내리게 되었고, 여러 다양한 층의 공동 생활 지원자들이 구체적인 행동에 들어갔다. 루터교인을 비롯한 개신교, 가톨릭, 침례교, 무신론자 등 25명(어른 17 + 어린이 8)의 멤버들이 키일 근처에 있는 어린들을 위한 기독교 시설로 쓰던 건물을 매입하여 이사하기에 이르렀다. 독일 남부 슈튜트가르트에서 최북단 키일까지, 수 천리 길을 아무 연고도 없는 곳으로 - 말 그대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에 입성한 아브라함처럼 - 떠난 것이었다. 그 먼 길을 떠난 것은 다 함께 살 수 있는 싼 땅을 구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찾아오는 손님들과, 그리고 미래를 위한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다섯 채의 큰 빌딩 중 공동체 중앙에 자리잡은 저택은 무려 200 여년이 지났지만 여러 차례의 리모델링으로 거의 신축 건물처럼 유지되고 있다. 이 건물의 1층에 있는 기도실은 모든 멤버가 정오가 되면 모여 찬양과 말씀과 중보기도의 시간을 갖는 구별된 장소이다.
그들은 자주 말한다. “무엇보다 매일 일과 중에 영적 모임과 기도, 그리고 말씀읽는 시간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의 믿음을 산다’는 것은 예배의 본질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활동들의 중심이다.”
2바시스 게마인데- 식사중 각 건축물 리모델링 계획을 의논하고 있는 모습.jpg |
그들의 삶의 단면들을 아래에 두서없이 간략히 소개한다.
하루 일과는,
6:30 아침식사 / 7:30-12:00 오전 작업 / 9:30-10:00 간식시간 / 12:00-12:30 기도 시간
12:30-13:00 점심식사 / 13:00-14:00 휴식 시간 / 14:00-17:00 오후 작업 / 17:00 작업 종료.
이후 식사 및 각종 모임 (월, 목요일은 공동 식사, 수요일은 가족 식사 중심 (독신은 독신끼리), 화, 토요일은 각 그룹별 식사 후 미팅)으로 진행된다.
공동체 멤버들은 그 삶이 매우 소박하고 검소하다. 그들의 가구들이나 옷차림은 유행과는 전혀 무관하지만 단정하다. 주방에는 50년이나 된 빵자르는 기계가 있고 창고에는 40 년된 드릴러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차는 두 대를 가지고 있는데 공장을 위한 큰 차 한 대와 각 가정이 돌아가며 바깥 나들이나 개인의 이동을 위한 것으로 한 대가 더 있다. 승용차 한 대로 20 여 가정이 움직여야 하므로 차량 예약은 늘 바쁘다.
주로 나무를 재료로 하는 생산품을 생산하다 보니 남은 나무 조각들이 늘 나온다. 그것을 그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동 제어로 그것을 땔감으로 만들고 태워 각 집의 보일러 등을 돌리는 에너지를 얻는 체계를 갖추어 겨울에도 석유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두 명의 작곡가가 있어서 그들의 찬양을 조율하고 모일 때 마다 찬양을 즐겨 한다. 정오의 기도에는 어지간해서 빠지는 일이 없고, 분원 공동체의 누군가가 생일, 출산 등의 축하할 일이 있을 때면, 형형색색의 카드를 만들어 마음을 표현하거나 다 함께 모여 전화로 안부를 물은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수화기를 통하여 축복과 축하의 노래를 아름다운 선율로 들려 주기도 한다. O.M 등의 선교회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구제와 선교의 사역들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상깊은 이들의 삶의 모습은 같은 멤버이든 방문자이든 고용된 일군에게든, 사람을 대하는 그들의 표정 속에는 늘 한결같이 따뜻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배여 있다는 것이다.
현재 신입회원이 되고자 신청한 손님(Guest)은 5-6명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루마니아와 이탈리아 등에서 온 이들도 있다.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2년 동안 멤버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처럼 탐방이나 기타 목적으로 다녀가는 손님(Visitor)도 늘 5-10명 선을 유지하고, 당일 방문 손님도 매일 줄을 이었다.
멤버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의 확증이 가장 중요하다. 멤버의 숫자나 희사하게 될 재산에 연연하지 않고 더불어 살고자 결심한 신청인의 중심이 유일한 입회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대는 진정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가?’ 이것이 서로 간에 확인될 때 까지 게스트는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공동체에 머무를 수 있다. 다만 함께 사는 동안 서로 나누며 섬기는 삶은 기본 생활 규범이다. 노동과 설거지, 청소 등은 (방문 손님들까지도) 함께 참여하여야 한다. 그러던 중 지원자가 자기 헌신의 준비가 온전히 되고, 기존 멤버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하면 입회식을 갖고 회원으로 받아 들이게 된다.
이들에게 있어 일은 자신과 이웃과 피조 세계와 하나님 나라를 가꾸어 가는 매우 의미있고 신성한 작업이다. 형제 자매들을 향한 헌신은 매일의 노동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표현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공동체 내에는 다양한 일거리들이 있다.
나무 장난감과 치료 기구와 유치원을 위한 보조 교통수단 기구의 생산, 나무 재품들의 디자인 작업, 건축 사무소, 생산품 유통, 이웃 주민과 함께 하는 유기농 농사, 생활필수품에 관한 일, 행정이나 부엌 일, 유치원 운영. 주방과 세탁실, 예술 활동과 그 밖의 다양한 일상의 일들이 있다.
공동체의 기간 산업이라 할 수 있는 목공 공장은 1층에서는 주로 자르기, 구멍뚫기, 붙이기, 다듬기 등의 작업을 하는 공간이며, 2층은 주로 조립과 포장을 위한 작업 공간과 디자인과 유통을 위한 공간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 공장에는 8명의 멤버들과 5-6명의 손님들, 6-7명의 고용된 일군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여기서 생산되는 상품들은 상당한 가격으로 현재 유럽 4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풍요 속에 빈곤이라 했던가! 그러나 이 공동체는 ‘풍요 속에 가난’을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지혜를 가졌다. 그래서 더욱 그 삶이 간명하고, 그 영이 부요하다.
공동체 내에서 저녁이면 방문하게 되었던 가정이나 모임마다 아픈 땅, 눌린 백성, 북한에 대한 질문을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어댄다. 어눌한 언어의 설명을 매우 신중한 태도로 듣는 그들의 눈빛을 통해 깊은 기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향하는 가난한 심령의 공동체. 이 공동체의 또 다른 이름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 나라’이다.
3. 라쉬 (또는 라르쉬 L'Arche, 방주) 공동체
‘연약한 이들 속에서 발견해내는 하나님 나라’
=마5:3-10 (팔복)
=요15:9,12-13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3라쉬- 영국의 첫 라쉬 공동체 주택.jpg |
이 공동체가 일반 기독인들에게 잘 알려지게 된 동기는 예수회 신부이자 하버드 신학대학의 영성 교수로 재임하였던 헨리 나웬의 삶과 죽음이다. 그는 라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Jean Vanier)를 통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러면 그들이 네 심령을 치유할 것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라쉬 공동체 행을 선택하게 된다. 모국 네덜란드에서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 마지막 10 여년을 프랑스와 캐나다의 공동체에서 자신을 ‘이끌어 주는’ 정신지체자들과 함께 살았다. 캐나다의 라쉬공동체 지부인 ‘새벽(Daybreak) 공동체’에 머무는 동안 그가 쓴, 365일 묵상집 ‘영혼의 양식’의 첫째 날의 내용은 “매일 매일에는 놀라움이 있습니다.(Each day holds a surprise)”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그 놀라움이란 바로 장애우들과 함께 공동체 안에 살면서 발견한 새로운 희열과 관계가 깊다.
라쉬 공동체의 시작은 장 바니에가 1964년 프랑스 트로즐리(Trosly)에서 정신지체 장애우 두 사람과 함께 살기로 작정하면서부터였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 철학 교수직을 그만 두며 선택한 길이었다.
라쉬 공동체는 정신 지체 장애우들에게 아늑한 가정, 가족의 개념과 분위기를 중심으로 교제를 통해 각자의 연약함 뒤에 담겨있는 존재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발견케 하고, 가장 작은 자에게서 발견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공유하고자 하는 공동체이다. 동시에 평신도가 중심이 된 초교파 국제 연합 성격의 공동체이다.
장 바니에의 고백대로 그는 ‘복음을 실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좀 더 가까이 따르기를 원하는 열망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라쉬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정신 지체 장애우들과 함께 공동 생활을 산다는 것은 ‘그들을 위해 행동하기’에 앞서 ‘그들과 함께 있기’를 선택한 것이다.
3라쉬- 온 가족이 함께 하는 식사 시간.jpg |
영국에는 7 곳 정도의 지역에 라쉬 공동체가 흩어져 있다. 이들은 서로 교류하며 인적 물적 자원들을 교환하며 서로 소통한다. 이 중 장 바니에의 누이에 의해 처음 설립된 영국 캔터베리의 라쉬 공동체를 방문하였다. 도시 내에 산재되어 있는 다섯 곳 모두와 그들의 작업장 및 전시관을 돌아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각각의 공동체들은 다섯 명의 정신지체 장애우와 다섯 명의 조력자로, 열 명의 멤버들이 마치 가족과 같이 하루 생활을 함께 하며 친밀감을 쌓아 가고 있었다.
2008년 4월의 어느 금요일, 끝없이 계속 박수를 치는 사내아이, 누군가와 눈만 마주치면 깔깔 웃는 친구, 조금만 불안을 느끼면 계속해서 엄마를 찾는 28살난 어른 아이, 마음에 들면 정원을 꽃을 사정없이 꺾어 그윽하게 웃으며 건네주는 다운 증후군 아가씨 등 정말 정신차릴 틈을 주지 않는 이들과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그들이 직접 만들 예쁜 꽃초를 가운데 두고 모여 앉았다. 쉽고 간단한 기도와 찬양과 말씀 시간으로 다과를 겸한 교제를 마치고 이어서 회의가 진행되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기다렸다는 듯이 코어 멤버들이 자신의 의사를 쏟아내기 시작하였다.
‘다음 주 월요일 프랑스에서 오실 세 분 손님들을 위해 쇼핑을 함께 합시다.’ ‘그 분들을 위해서는 oo 요리와 xx 음료를 내 놓는 것은 어떨까요?’ ‘들어 오는 입구에 계단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벌써 네 번이나 넘어졌어요.’ ‘다음 주 생일 파티는 깜짝 이벤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3라쉬- 코어 멤버들과 함께 한 바깥 나들이.jpg |
개성도 다양하고 강한 이들이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토해내는 이들의 요구를 전체 책임을 맡은 리더는 차근차근 메모하고 있었다. 늘 그들의 회의 시간에는 장애우들이 먼저 말한다. 도우미들의 역할이란 그저 듣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성실히 경청하는 것이다. 도우미라기 보다 ‘섬기미’다.
신중하게 들으며 메모해 가던 리더는 조금의 망설임이나 견주어 보는 태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작업 분배를 한다. 물론 코어 멤버도 포함된 작업 분배이다. 어느 하나 빠뜨리거나 소홀히 다루어지는 의견이 없다. 아마도 누구이든 현장에서 이 장면을 경험하게 되면 감탄이 절로 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이 공동체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볼 수 있는 ‘관계의 동등성과 자유로운 의사표현 및 존중’의 미덕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한 때 유럽 지역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John은 4년 마다 순회하는 지도자 규정에 의하여 지금은 이 자그마한 10명의 가족들을 돌보며 하우스 리더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가 느끼는 가장 어려움은 그들과의 대화였다. 특히 인내를 가지고 들어 주는 것.
어떻게 좌천처럼 여겨질 이 역할을 그렇게 즐거움으로 감당하느냐고 묻자, ‘조직도 중요하고 자리도 중요하지만, 이들을 돌보는 사명이 더욱 크다. 이들이 행복하면 나도 저절로 행복해 진다.’고 답변한다. 이어 그는 ‘무엇보다 라쉬의 역사는 어떤 사람들의 헌신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셨으면 불가능했던 사역의 연속’이라는 고백을 한다.
이 공동체의 구성은 보통 3-5명의 ‘장애우’(co-member)와 동수의 ‘조력자’(Assistant)가 짝을 이루어 편성되고, 이들은 함께 먹고 함께 일하며 가능하면 자주 대화하면서 늘 동행한다. 그 외에 식사, 미술, 손작업, 이사나 대표자로서 전문성을 나누어 줄 ‘봉사자’(Volunteer)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개인적 영적 성장의 도우미 역할을 하는 ‘친구’(Friend)와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공동체를 후원하고 격려하는 ‘후원자’(Donor) 등으로 구성된다.
3라쉬- 마음에만 들면 꽃을 꺾어다 주는 코어 멤버- '하늘 삶을 닮은 공동체에는 매일의 삶에 놀라움으로 가득합니다'.jpg |
이 공동체는 정신지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그들을 환영하는 장소를 만들고 그들을 존중하도록 초대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이 공동체 존재의 이유가 되는 코어 멤버들은 그림자같은 조력자의 도움과 교제의 친밀함을 일상 속에서 받으며 매일의 노동(초 만들기, 옷짜기, 미술, 엽서 만들기, 농사 ... 등 다양하며 그들이 일구어 놓은 밭은 매우 깔끔하다.)과 각종 교육과 의료 지원과 음식 제공을 받는다.
설립 초기만 해도 당장 먹을 양식이 없는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기를 견뎌내야만 했지만, 현재는 40여개 나라에 130 여개 공동체로 확산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설립 위원회가 발족되어 설립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
이 공동체는 가장 연약한 지체를 중심에 두는 지혜를 지녔다.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모든 생활 패턴을 그들 중심으로 진행한다. 중요한 책임의 자리에도 장애우들을 적소에 배치하여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 준다. 명실공히 장애우들이 ‘core-member'로서 대접받고 있는 이 따뜻한 세계 안에서 우리는 ‘연약한 이들 속에서 발견해내는 하나님 나라’를 엿볼 수 있다.
4.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
‘철저한 회개와 신부의 영성으로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
=마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요일1:7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 곳에 가면, 설립자 바실래아 슈링크(1904-2001년)의 표현대로, ‘땅 위에서 미리 하늘 나라를 맛보는’ 체험을 하게 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남쪽 30km, 기차로는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다름슈타트에 도착한다. 거기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예닐곱 정거장을 지나면 도로 가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3만 평 규모의 가나안(Canaan,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 Evangelical Sisterhood of Mary)을 발견할 수 있다.
1944년 9월 11일에 다름슈타트를 가격한 18분간의 엄청난 공습은 도시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당시 무기 생산과 관련한 공과대학, 미사일 등의 무기를 만드는 공장이 그 곳에 있었으므로 연합군은 주요 핵심 거점으로 삼아 집중포화를 퍼 부었던 것이다. 이 와중에 살아 남았을 뿐 아니라 자기 민족의 죄악을 자신의 죄로 여겨 회개로 나아온 두 여성이 있었다. 바실래아 슈링크(Basilea Schlink- Klara Schlink)와 마르티리아 마다우스(Martyria Madauss- Erika Madauss). 그들이 인도하던 성경공부반 안에서 자신과 이웃 관계와 민족의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다.
이후 성경공부반이 인도되던 다락방은, 그들의 신앙 생활의 핵심인 “회개와 용서, 종말론적 신앙, 십자가, 하나님의 어린 양, 그리스도 신부의 영성”의 효시의 현장이 되었다.
마더 바실래아 슈링크는 1947년 3월 30일 그녀 부모의 집 다락방에서 마더 마르티리아 마다우스와 함께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를 설립하였다. 기독교 최초의 여성수도 공동체였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공동체 삶의 출발은 ‘회개’였다. 세계 제 2차 대전에서 저지른 독일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시작된 이 모임은 “회개하면 천국이 가까워진다”는 메시지를 지금도 출판물, 찬양판, 가나안 메시지, 메스컴 등을 통해 세계 모든 곳에 전하고 있다.
4마리아자매회-공동체의 기적의 흔적이 담겨있는 말씀 기념비.jpg |
뿐만 아니라, 자매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늘 그리고 생활한다. 종말론적 신앙의 바탕이 오늘의 그들의 삶을 받치고 있는 것이다.
자매회의 터는 하나님의 간섭과 기적의 흔적으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의 집, 예수 일터의 집, 예수님의 길, 예수님의 부르심의 예배당, 예수님 기쁨의 집, 승리의 거리, 아버지 선하심의 샘, 지복의 산, 갈릴리 바다, 예수 고난의 정원, 예수 위로의 집, 예수 승리의 집 등의 각종 구조물과 그들의 정원에 새겨진 찬양판과 말씀 기념비 등은 자매회를 하나님 나라로 이끄시는 신비와 산 증거로 충만하다.
자매회의 노동은 정원과 과수원 관리, 유기농 농사, 청소, 출판사 운영, 라디오 방송국 운영, 주방, 게스트 하우스 운영, 세탁 등 생활과 관련된 일들로 가득하다. 정회원들은 하루 8시간, 헬퍼와 준회원은 6시간, 손님은 쉬도록 한다. 물론 자원하여 함께 일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프란치스코 형제회와 함께 일한다.
준회원 자매들은 자주 ‘(정회원)자매님들은 항상 우리는 되도록 일을 시키지 않고, 당신들은 쉴 틈없이 일을 해 대요.’라며 행복을 불평을 해맑은 웃음으로 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그들의 손으로 직접 일군 그 억척스런 열심이 어딜 가겠는가?
4마리아자매회의 갈릴리 바다와 헤럴드 성전 (매주일 성찬식이 진행되는 곳).jpg |
특별히 저녁식사 후 시간은 참 조용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저 쉬는 자유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과 교제의 시간이고 회개와 화해와 침묵의 시간이다. 자매들은 이 시간에 하루 중 말로나 행동으로 불편하거나 상처를 준 관계가 생각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화해의 편지’를 쓴다. 그리곤 그 상대의 방 문 밑으로 편지를 슬며시 밀어 넣어두게 되는데, 이는 하루가 다 가기 전에 이루어진다.
매달 한두 번 갖는 ‘빛 가운데서의 교제’는 주님 안에서의 친교와 회개와 용서의 백미이다. 일정 기간 동안의 삶을 서로 내어 놓고 그 가운데 끼어있는 상한 감정의 찌끼들을 씻어내는 시간이다. 함께 간단한 찬양과 말씀의 시간을 갖고 누구든지 자신의 고민과 아픔과 상처와 기쁨을 자유로이 표현하고 해당되는 이는 솔직히 수용하고 용서하고 사과하고 풀어내는 주님 안에서의 참된 코이노니아의 관계를 확인하는 장치이다.
그들은 약 1천장의 조그만 카드 중에서 매일 아침 말씀을 뽑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한다. 이 말씀은 자매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요, 내일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의 역할 든든히 감당해 왔다. 이는 ‘로순겐’(Losungen)이라 불리는 매일 성경 요절을 뽑는 헤른후트(Hernhut) 공동체의 전통과 닮은 점이 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떠한 빚도 지지 않겠다는 자매회는 믿음의 선교(faith mission) 방침을 따른다. 자매회는 보험도, 적금도, 방문자의 헌금을 강제하거나 후원 요청도 하지 않는다. 그저 믿음으로 그들의 필요와 재정을 채우시는 하나님께 내어 맡길 뿐이다. 그에 따른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다.
가나안을 돕는 우렁각시들이 꽤 많다. 가나안 근처에는 한 제과점이 있는데 그 곳 여주인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제과점의 남은 빵들을 모아 자매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래서 금요일 저녁은 늘 빵 파티가 열리곤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녀가 죽고 없는 지금도 -비록 신앙인은 아니지만 - 그녀의 아들이 계속 그 빵 파티를 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의 파티가 가능해 졌다 한다.
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과일, 채소, 음식재료 등을 운반해 오는 식료품 가게의 주인이나 토마토를 한 트럭씩 공급하는 이, 계란을 보내 오는 이 등등 꽤 많은 하나님의 까마귀들이 곳곳에 있다.
또 노동으로 섬기기기 위해 곳곳에서 와서 수시로 돕는 도우미(헬퍼)들이 있는데 이들은 정원. 게스트하우스, 접견 등을 헌신적으로 돕는다. 도우러 오는 이들이 워낙 많아진 시기부터는 이들만을 관리하는 담당 자매를 두었다.
한편, 그들의 손님 맞이는 각별하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정성스럽다.
우선 표정이 무척 밝다. 그것은 자매회의 긍정적이고 밝은 철학에 기인한다.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되 회개 후의 환희에 대한 강조 또한 잊지 않으며 종말론적 신앙의 긴박성을 늘 안고 살지만 어린 양의 신부로서의 설렘과 기쁨을 늘 가슴에 품고 살기에 자매들의 얼굴은 늘 승리자의 맑고 밝은 미소를 띠고 있다. 이는 한국 공동체, 또는 공동체를 추구하거나 준비하는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작은 듯 큰 포인트요, 놓쳐서는 안될 중요한 도전이라 할 것이다.
또, 공동체의 선이해를 위하여 손님 담당 수녀님(독일어가 불가할 경우에는 영어권 담당자)의 자세한 설명은 물론이고 손님 접견실에 마련된 각종 서적(주로 바실래아 슈링크의 저서)을 살펴보게 하고, 따로 마련된 방에서 자매회를 소개하는 동영상을 보여 주는 등 공동체를 샅샅이 살펴 볼 수 있도록 돕는다.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환영 카드와 몇 권의 경건서적을 마련해 놓은 게스트 하우스의 숙소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 왠만한 호텔 수준이다.
또한 떠나갈 때는 자매들이 현관까지 나아와 그들의 배웅 찬양으로 주님의 동행을 축원하고 사랑으로 떠나 보낸다. 마지막까지 천국 시민으로 살아갈 용기와 격려를 그득 담아 환송하는 것이다.
자매회는 독신여성 그룹인 ‘마리아 자매’, 나이든 과부 그룹인 ‘가시면류관 자매’, 외부 가정을 이루고 사는 ‘가시자매회’, 남성독신 형제 모임인 가나안 ‘프란시스코 형제회’ 등 세계 20여 개국에서 온 130 여명의 자매들로 구성되어 있다. 올해(2009년) 갓 입회한 자매를 포함하여 암브로시아(Ambrosia), 투사(Tusa) 등 3명의 한국인 자매가 있다.
입회에 있어 처음에 40세로 나이 제한을 하기도 했고 또 언제든 자매 회원의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도 공동체 안에서는 자연스럽다는 입회 과정을 세세히 살펴보면,
스스로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간증을 기록한 문서를 자매회에 제출하고 적격일 경우 자매회에서는 이 때에 기도 파트너를 정해 주는데 평생 멘토 역할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 5명 정도의 리더들이 확인 간증과 일정기간의 삶을 확인한 후 인원이 적정 수까지 이르면 헬퍼로서 3개월 정도를 공동체 내에서 봉사하게 한다. 이 시기에 다시 간증문을 기록하고 각자의 기도 파트너와 상의한 후 리더에게 전달하게 된다. 심사 과정을 거쳐 새로운 과정에 입문하는데, 이 기간이 옛적에는 6개월이었으나 현재는 9-10개월 정도로 길어졌다 한다. 이 무렵에, 처음에는 식사를 자매들과 구별된 장소에서 식사를 하도록 되어 있다. 제복(드레스)를 받고 ‘가족 수련과정’을 진입한 후 ‘엄마’ 자매를 맺으면 잠과 식사를 같이 하는 자격을 얻게 된다. 사실 이 무렵에도 저녁만 함께 하든지 또는 엄마 자매와 함께 둘만 같이 식사하든지 한다.
본격적인 멤버가 되어가는 시기에는 성경 상의 새 이름을 받는다. 이 기간 동안에는 새 엄마 또는 은사받은 자매와 성경공부를 하고 식사마다 다른 자매가 참여한다. 옷에 십자가를 수놓기 까지 2년 동안은 '길'(weg) 자매라 불리며, 수료 과정을 잘 마치게 되면 옷에 십자가를 수놓고 ‘십자가’(크로이츠) 자매라 불리운다. 그런 과정들을 6년을 거치고 나서 공동체 지도자들을 심사에 통과하게 되면 반지를 받고 정식 회원인 '마리아 자매'(Mary Schwester)가 된다. 물론 일상의 삶을 살펴보면 그들의 호칭의 부름말을 이토록 엄격하게 부르지는 않고 다만, ‘자매’라 부른다.
최근 기독교마리아자매회는 그들의 영적 두 어머니, 마르티리아 마다우스(1999년)와 바실래아 슈링크(2001년)의 연이은 소천(召天)으로 리더쉽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현재 카리스 자매 등의 5인 체제로 리더그룹 분할 구조의 운영을 훌륭하게 이끌어 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자매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유럽 공동체(독일의 OJC, 영국의 Jesus way, ... 등)가 많으며, 많은 나라에 지부가 늘어가고 있다. 한국 지부는 1981년 세바스티아나와 파쇼나타 등 2명의 독일 자매의 파견으로 설립되었다가 1989년 철수한 바 있다.
그 중 하나인 호주의 자매회는 특히 한국 유학생들이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최근 호주의 지부 자매회에 다녀온 자매의 말에 따르면, 호주의 자매회에서도 금요일 저녁 8시가 되면 어김없이 도착하는 빵이 있고 으레 빵파티가 벌어지는데 인근의 한 교회가 나누어 주는 것이라 한다. 아무려면 까마귀, 천사가 장소를 한정하랴. 은혜는 믿고 구하는 모든 이에게 있음에 분명하다.
또 ‘닥터 테오’라 불리는 말레이시아계 은퇴한 치과의사는 각종 생활용품을 차에 가득실어 와서 풀어놓고 가는 썩 괜찮은 취미생활에 푹 빠진 사람이다. 또 호주 자매회는 푸드뱅크의 덕을 많이 본다 한다. 호주 공동체에 생김새를 따라 호랑이(tiger)라 이름지은 고양이가 한 마리 있는데 자매들과 방문자들은 모두가 'healing cat'이라 부른다. 이유인즉슨, 그 곳 식구들이 외로움과 힘겨움에 지쳐 있을 때면 이 고양이가 나타나 때 와서 이리저리 문지르고 비비며 갖은 애교와 접촉으로 각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 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공동체의 영성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게도 동일한 영향을 주는가 보다.
자매회에 있어 오늘의 삶의 자리는 철저한 회개로의 부르심이며 주님 오실 그날을 예비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기다림이며, 땅에서 이루어 나가는 하늘 나라 삶의 현재성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의 별명은 ‘철저한 회개와 신부의 영성으로 이루어 가는 하나님 나라’이다.
묶어내는 말
국내에는 수많은 기독교 공동체 소개 책자들이 있다. 하여 이 글에는 될 수 있으면 책자들에 소개된 내용들을 피하여 소개하려 애썼다. 그러다 보니, 없는 필력에 내용이 뒤죽박죽 형편없다. 읽는 이의 넓은 이해를 부탁드린다.
사실, 이 글은 처음에 7 공동체를 소개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음이 바뀌었다. 과도히 늘어나는 지면 관계도 영향을 미쳤지만, 박물관처럼 나열하는 것보다 ‘직접 가 보라!’ 하고 싶었고 그러다 ‘직접 살아 보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세련된 강의나 글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저기 하늘 샐명, 하늘 삶에 대한 여기 땅의 삶의 반영’인 까닭이다.
아래에, 다녀온 공동체들의 몇몇 공통분모들을 찾아 간략히 서술하면서 하고 싶었던 말을 묶어 내고자 한다.
1. 기독교 공동체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지향.
비록 각 공동체의 역사적 배경이 서로 다르고, 대상과 성격이 다양할지라도 그 바라보는 바 지향은 같다. 땅 위에서 지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품고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이는 실재로 이끌어내는 삶을 산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앞장선 유럽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특별히 가난과 변두리를 향한다. 모두가 더불어 누려야 할 명단에서 제외된 이들을 돌아본다. 잃어가는 길을 다시 찾아가는 것. 갱신과 회복은 교회로서의 공동체의 사명이다. 공동체는 관심 밖의 영역, 변두리를 향한 삶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본다. 상처입고 후미진 곳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된 생명, 화해와 일치를 향한 몸부림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잉태된다.
2. 기독교 공동체의 노동 중시
공동체 안에서의 노동은 그 자체가 지체를 향한 섬김을 의미하며, 동시에 구제이며 친교이다. 때론 선교이며 예배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모든 공동체에서 노동에의 참여는 공동체와 방문자 피차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혹 국내외의 어느 공동체이든 방문하기를 원한다면, 그 공동체의 노동에 함께 참여해 볼 것을 권한다. 줌으로 받는 간단하면서도 신비한 이치를 넘치게 깨닫게 될 것이다. 필자의 경우, 공동체를 방문할 때 지도자 만나기, 어려움 극복과정 탐색, 사진 촬영 ...등과 더불어 반드시 참여하고자 정한 원칙이 있었는데 그것이 ‘노동 참여’였다. 덕분에 공동체 이해에 대해 - 뜻하지 않게 내외면으로 - 공급되는 무수한 소득이 이어졌다.
3. 기독교 공동체의 손님 대접
초대교회로부터 손님대접은 매우 중요하였다. 교부 시대의 여러 저작물 속에서도 손님 대접에 대한 중요성의 강조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전통을 이어받아 수도원들은 손님방을 반드시 두도록 규정에 명문화되어 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전통있는 공동체들에 가면, 밝은 미소의 손님담당자와 잘 정돈된 손님방들이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공동체 안에 아직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손님대접에는 교회의 본질적인 요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이를 잘 돌보는 것은 친교, 예배, 섬김, 교육,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매우 의미있는 사역이다. 이는 주님의 조건없는 사랑에 근거한 보다 급진적 사랑, 철저한 제자도에 근거한다.
4. 기독교 공동체의 ‘비전’과 ‘과정’의 조화
10 여년의 공동체탐색 과정 중 나름의 단순명료한 분류법이 생겼는데, 바로 ‘비전 중심의 공동체’와 ‘과정 중심의 공동체’라는 2분 분류법이다.
예컨대 비전 중심의 공동체에서는 선교, 사명, 일, 결과, 조직. 열정, ... 등이 강조되며, 과정 중심의 공동체에서는 친교, 사람, 삶, 흐름, 관계, 기다림 ... 등이 강조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의 대부분의 공동체는 전자의 성향을 드러내고 유럽의 공동체는 후자의 경향을 띤다는 사실이다. 그 땅의 영성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각 유형의 공동체의 단점으로는 전자가 사역 중심이 되어 그 비전과 일이 끝나는 곳에서 공동체의 이상도 끝이 나는 것이며, 후자는 공동체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역동성과 창발성이 말살되거나 과도하게 느려져서 화석화될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나쁘고 어느 쪽이 좋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공동체에는 어느 한편의 성향만을 고수하고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만 어느 한쪽에만 치우쳤을 때의 폐해를 지적할 따름이다. 균형과 조화는 건강한 지속을 허락한다.
여기에 소개한 공동체들은 각각의 단점들을 지혜롭게 극복하고 비전과 과정이 어떻게 조화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5. 기독교 공동체의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끌어 안는 ‘참여하는 영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럽의 공동체들, 곧 브루더호프, 떼제, 기독교마리아자매회, 라브리, 포꼴라레 등은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 2차 세계 대전이다. 이들 공동체들은 전쟁의 아픔과 분열의 상처 위에 화해와 일치, 평화의 소명을 감당하기로 결단하면서 그 출발이 이루어졌다. 아수라장의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시대와 상처입은 가슴들의 아픔을 눈물로 끌어안으신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였던 어느 신학자를 우리는 기억한다. 앞에서 우리는 그 희망을 삶으로 드러내는 ‘공동체를 통한 복음적 삶’이 시대적 아픔과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고 회복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외세강점과 동족상잔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이 땅.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분열의 아픔과 상처를 돌아보고 그 회복과 치유를 꿈꾸는 복음적 공동체의 출현은 언제쯤에나 가능할 것인가? 동-서, 남-북, 한-일, 북-일, 한-중, 중-일, 북-일 사이에서 끝없이 얽히고 섥혀 지속되는 갈등과 분열, 그리고 불안은 끊이지 않는다. 이를 끊어내고 막힌 담을 헐어내어 복음 안에서 화해와 일치, 그리고 평화를 일구어 내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복음적 삶이 온전히 담긴 공동체가 그 해답이라 여기며, ‘희망’(예수)을 사는 ‘희망’(기독공동체)에 참여하기를 희망해 본다.
(끝부분에) 그들은 오늘도 '와 보라!' 초청한다.jpg |
앞에서 살펴본 브루더호프의 에버하르트 아놀드, 기독교마리아 자매회의 바실래아 슐링크와 마르티리아 마다우스, 떼제 공동체의 로제 수사, 라브리의 프란시스 쉐퍼, 바시스게마인데의 게르하르트 등은 유럽의 기독교 공동체 1세대 주자였다. 모두가 그리워하고 흠모해 마지않는 장상들이었다. 그 그리움을 삶의 깊이로 이어가는 작업이 한창이다. 1세대를 뿌리 또는 기초, 2세대를 줄기 또는 기둥, 3세대를 열매 또는 지붕이라 보면, 지금 유럽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2-3세대를 향하여 훌륭하게 나아가고 있다.
이 땅의 기독교 공동체들은 약 1.5 세대를 지나가고 있다. 관계의 어려움과 그 삶을 향한 열망으로 저마다 아우성과 몸부림들이다. 시기에 합당한 통증과 과정을 피하려 하지 말고 견디며 살아질 일이다. 그저 우보천리(牛步千里)하는 뫔으로 느리더라도 묵묵히, 뚜.벅.뚜.벅. 그 분의 뜻을 따라 걸어갈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땅에는 삶으로 희망을 당겨 사는 새 길을 놓고 새 터를 닦아낸 분들이 많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의 본을 보인 많은 장상들이다. 한국 교회가 마땅히 감사를 표해야 할 고마운 분들이다. 이제 우리가 여기서 그 감사의 마음을 삶으로 살면 어떨까? 그 첫 마음들을 이어받아, “땅에 있는 하늘 나라”의 삶을 이 땅의 희망과 생명의 불씨로 이어가야 할 부르심이 이제 남은 자들, 우리에게 있지 않을까? 도전해 본다.
“주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