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6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홍지훈 목사
누가복음 6:27-31
서로에게 자비로운
마태복음 5-7장을 예수님의 산상설교라고 부르는 반면에, 비슷한 내용이 담긴 누가복음 6장은 산에서 기도를 마치고 평지로 내려와서 하신 설교이기에 평지설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평지설교의 내용이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내용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래서 마태에 나오는 내용이 8복이라면, 누가에서는 4복 4화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의 설교 중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내용이 들어있는데, 양자를 비교해보면 내용으로는 매우 비슷하지만, 어록을 인용하는 순서도 다르고 강조하는 점도 차이가 느껴집니다. 오늘은 누가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매년 명절이 지나고 나면 등장하는 뉴스 중에 가족모임을 즐겁게 하다가 다툼이 일어나서, 그만 죽거나 다치는 사건이 있습니다. 실제로 뉴스에 나올 만큼 커지지 않아서 그렇지, 오랜 만에 만난 가족이 서로 의견이 달라 심하게 다투고 아예 의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람은 서로 의견이 다른 것이 매우 정상적인 데, 모르는 남보다 오히려 가까운 가족이 내 생각에 반대하면, 이해는커녕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귀를 열고 경청해야하고, 마음을 좀 더 열고 이해해야하고, 의견을 말할 때에도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한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정반대로 해도 된다고 착각합니다. 가까울수록 서로 상처주기가 쉬워진다는 것을 안다면, 명절에 오랜만에 만나서 다투다가 불행한 일을 당하거나 만들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6장 27절에는 오히려 이렇게 가르칩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미워하거나, 저주하거나,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축복도 해주고, 기도도 해주라고 가르칩니다. 마태에서도 마찬가지로 왼 뺨을 치는 사람에게 다른 쪽 뺨도 돌려대어 한 대 더 맞아주라고 하고, 옷을 빼앗아 가면 속옷도 기꺼이 벗어주고, 달라면 달라는 대로 내어주고 그것을 도로 찾으려고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누가복음이나 마태는 여기에 덧붙이기를, 이렇게 하라는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는 본래 서로 사랑하던 사람, 즉 아주 가까운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사랑의 대상을 넓히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이렇게만 하면, 가족끼리 만나서는 더 더욱 싸울 일도 없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보복하지 말라는 교훈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교훈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누가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그 핵심 구절이 바로 6장 31절입니다.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입니다.
황금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고대부터 이런 비슷한 명령들이 여럿의 현인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것으로 “너는 네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도 있습니다. 성경의 황금률에 비하면 약간 소극적이긴 하지만, 매우 유용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도 있지요. 자기는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해야 한다고 말로만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고대교회의 교부문서 중에 <열두 사도의 교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자기가 가르치는 내용대로 자기는 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선지자>로 여기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중에, “누가 내 뺨을 치면 다른 뺨도 돌려대고, 누가 내 겉옷을 빼앗으면 속옷도 지키려고 하지 말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에는 한 가지가 더 추가되지요. “누가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같이 가주라.”고 말입니다. 참 해석하기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아니, 해석하기 참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문제이고 어려움을 만듭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은 “문자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는 당신께서 가르친 그대로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내용은 실천되지 않습니다. 만일 실천되었다면, 로마제국은 주변나라를 정복해서 땅을 넓혀서는 안 되었고, 투르크 족이 쳐들어 와도 당하기만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2000년 기독교 신자들의 역사는 정 반대입니다. 방어가 아니라, 식민지 정복전쟁을 하면서, 오히려 먼저 뺨을 치고, 먼저 옷을 빼앗고, 그들에게 노역을 강요했던 역사를 남겼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매우 어렵습니다. 기독교 정신은 평화를 외치는데, 기독교인과 기독교 나라는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전쟁을 준비해야하고, 당했을 때에는 반드시 보복을 해야 더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이 이 본문을 놓고 열심히 연구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어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문자 그대로”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역설적인 저항”이라고 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당하면서 더 당하는 것은 일종의 저항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해석도 일리가 있습니다. “저항의식”없이는 공의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맥락에서 이런 가르침을 남겼는지 학자들은 아직도 머리를 싸매고 탐구하지만, 이렇게 복잡해진 현대의 국제관계와 인간관계, 그리고 경제관계 속에서, “다른 뺨조차도 때리도록 돌려대라.”는 가르침의 의미가 오늘날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추석 연휴 기간에 좋은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제가 본 영화는 <자산어보>(玆山魚譜)라는 영화입니다. 올 3월에 개봉한 영화인데, 무척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로 영화관에 안 가다 보니 볼 수 없었고, 영화도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코로나 탓도 있고, 영화가 흑백영화인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나 배우는 매우 훌륭한 분들입니다.
아시는 대로 <자산어보>는 정약전 선생이 1814년에 흑산도 유배시절에 완성한 책입니다. 玆山이란 흑산도를 의미하고, 魚譜는 해양생물도감을 뜻합니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에 막내 동생 정약용 선생은 강진으로 귀양을 가고, 바로 아래 동생 정약종 선생은 처형당하고, 맏형인 자신은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된 정약전 선생이 거기서 만난 청년의 도움을 받아서 만든 귀한 책입니다.
이 3형제는 천주교인이었는데, 정조가 죽고 나서 겨우 11살이던 어린 순조가 등극하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때에 정치적 이유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3 형제는 각각 58년생, 60년생, 62년생입니다. 1700년대이니까 오늘 베이비부머 세대와 비교하면, 꼭 200년 전 사람입니다.
영화에 나오는 정말 좋은 어록들이 많은데, 그중에 자기를 도와주는 청년에게 정약전이 말합니다. “누가 왼 뺨을 때리면 오른 뺨도 내어주라”고 말입니다. 그 말의 뜻이 궁금한 청년이 묻습니다. 그러니까 정약전 선생이 한 호흡도 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용서하라는 뜻이다.”
저는 단 한 번도 그런 뜻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내용을 아는 사람에게도, 반대로 성경의 내용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그 뜻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의 의미에 대한 제 속생각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런데 “용서하라!”는 정약전의 한 마디가 제 가슴을 울렸습니다.
교우 여러분,
“용서”(容恕)라는 말은 얼굴 용(容)자와 용서할 恕(헤아려 동정할 서)를 쓰는 한자어 이고, 그 의미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약전 선생이 그 성경구절을 “용서”라고 푼 것은, 성리학 공부가 제대로 된 양반의 입장에서, 지금 자기가 당하고 있는 현실에 직면하여 내 놓은 해석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평생 어부로 살아온 흑산도 상민에게는 너무나 “사치스런” 해석일지 모릅니다. 그런데 정약전 선생은 복음서의 산상설교와 평지설교가 담고 있는 전체 메시지를 “용서”라는 단어로 함축한 것입니다.
성서의 문자를 다 풀어내려는 사람들은 문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밝히는데 집착한 나머지, 그 속에 담긴 큰 뜻을 실천하지 못하고 삽니다. 반대로 성서의 문자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문자대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서 오늘의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어려운 성경구절을 “용서하고 살라”는 가르침으로 풀어내니 참 놀라웠습니다.
영화 <자산어보>를 보는 내내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사서삼경을 통달하고 과거시험에 급제한 관리들이 그 공부한 내용대로 살지 않고, 오히려 배운 내용으로 자신의 탐욕을 감추며 백성을 착취하며 사는 모습이었습니다.
양반 신분을 산 부친의 서자인 덕에 과거시험을 볼 자격을 갖춘 그 어부청년은 시험에 급제해서 관원이 되지만, 거기서 자기의 배움과 전혀 다른 현실을 체험하고 절망하며 말합니다. “배운 대로 살지 못하면, 생긴 대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다시 흑산도 어부로 돌아갑니다. 그 사이에 스승인 정약전 선생은 귀양살다가 <자산어보>를 남기고 58세의 나이로 죽어 신안의 우이도에 묻혔고, 그 청년은 돌아와 어부로 살다 대둔도에 묻혔습니다.
누가복음 본문을 몇 절 더 내려가 읽어보면 36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6장 36절) 여기에 나오는 자비는 원문으로 보면 “동정심을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용서와 자비는 그 의미상 사촌간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는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니,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자비를 베풀고 용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한두 번 자비와 용서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항거할 수 없는 힘으로부터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여,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생기더라도, 자비의 마음으로 조금씩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용서를 하는 것은, 힘이 있는 자가 힘이 없는 자에게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힘으로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힘도 없는 나에게 먼저 용서해달라고 하기란 정말로 드문 일입니다. 잘못한 자가 먼저 용서를 빌어야 용서해 줄 마음이 드는 것이 마땅한 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뺨을 치는 자에게 다른 뺨도 돌려대라.”는 성서의 말씀을 “용서하라”대신 “약자의 입장이던 강자의 입장이던 자비롭게 살라!”라는 듯으로 해석하고 실천하고 싶습니다.
나의 억울함을 누르고 상대방을 무조건 용서하여야 한다는 강박적 명령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나는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며, 나의 마음속의 분노를 지워나가는 마음을 가져보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로우시니, 나도 자비롭게 살겠다는 마음이고, 또 내가 먼저 남에게 자비를 베푸니, 그 사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소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황금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길입니다.
평화목 교우 여러분,
우리가 평화를 바란다면, 먼저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하고, 언젠가는 용서하여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는 성경에서 말한 대로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이고, 우리가 베푼 자비로운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평화목 교우님들의 삶이 한결같은 자비와 평화 속에 거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